〈 23화 〉 022. 두 개의 기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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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식별코드 : HBER0305A(통칭 : 천지 던전)
던전 유형 : 침식형
등급 : A
발생 위치 : 대한민국 함경북도 무산군 백두산 천지 일대(중심 좌표 : 42°00'31.3"N 128°03'36.8"E)
발생 시점 : 1991년 7월 12일 07시 19분경(UTC + 9)
공략 시도 횟수 : 7회
공략 여부 : X
설명 : 식별코드 HBER0305A. 통칭 ‘천지 던전’은 1991년 7월 12일 오전 7시경 함경북도 백두산 천지 일대에 발생한 침식형 던전이다. 규모와 형태는 직경 3km의 동서로 찌그러진 타원형이며, 게이트의 위치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조사 결과 천지 던전은 다른 침식형 던전과 달리 내부에 괴수가 단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게이트 너머 주인 괴수의 존재 여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천지 던전의 가장 큰 특징은 던전 전체에 몰아치는 적란운을 동반한 강력한 눈보라로, 이 눈보라의 최대 풍속은 초속 85m/s에 달한다. 내부 평균 기온은 영하 25도이며, 이에 따라 던전 내부의 호수는 전부 얼어붙은 상태다.
또한 이 눈보라는 강력한 전자기 펄스를 동반하며, 이로 인해 던전 내부에서는 EMP 차폐 처리를 하지 않은 전자기기의 사용이 제한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천지 던전 내부에 대한 조사는 지극히 어렵다.
한편 던전 내부에 존재하는 눈은 알 수 없는 기전에 의하여 초인의 신체에 악영향을 미치며, 그로 인한 증상으로는 발열, 발한, 가벼운 두통 등으로 시작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구토, 근육 경련, 평형감각 이상, 극심한 통증, 출혈, 급성 장기 부전 등으로 점차 심해진다. 이러한 증상은 강력한 초인일수록 더욱 심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천지 던전은 공략이 거의 불가능하리라 여겨진다. 단 던전 내부에 괴수가 존재하지 않고, 상기한 눈보라가 던전 외부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30년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도 천지 던전에 의한 피해는 경미한 수준이다.
이에 따라 천지 던전의 등급 하향에 대한 논의가 수차례 오갔으나, 협회는 천지 던전의 공략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며, 던전 내부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미지수라는 점을 들어 던전 등급을 A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천지 던전은 현재까지 총 7차례에 거친 공략 시도가 있었으며 이는 전부 실패했다. 그간 공략을 시도한 길드(및 개인)는 다음과 같다.
1. 별의 바다(1991.07.15 / 당시 A급 길드 / 공격대 인원 23명)
2. 너도밤나무(1991.07.16 / 당시 A급 길드 / 공격대 인원 25명)
3. 풍림화산(1991.08.21 / 당시 S급 길드 / 공격대 인원 49명)
4. 로열 나이츠(1998.05.08 / 당시 S급 길드 / 공격대 인원 5명)
5. 겨울 동맹(2016.05.06 / 당시 S급 길드 / 공격대 인원 11명)
6. 흑룡회(2018.04.28 / 당시 A급 길드 / 공격대 인원 17명)
7. 설아현(2018.05.01 / 흑룡회 길드마스터)
이하는 그간 이루어진 천지 던전 공략 시도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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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략 기록 : HBER0305S/Ⅰ ]
[ 공략 기록 : HBER0305S/Ⅱ ]
[ 공략 기록 : HBER0305S/Ⅲ ]
[ 공략 기록 : HBER0305S/Ⅳ ]
[ 공략 기록 : HBER0305S/Ⅴ ]
[ 공략 기록 : HBER0305S/Ⅵ ]
[ 공략 기록 : HBER0305S/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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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 : 천지 던전에 거주하는 기인에 대한 소문에 대하여. ]
2018년 5월. 당시 국내 7위 길드였던 ‘흑룡회’의 길드마스터 설아현이 홀로 천지 던전 공략을 시도한 뒤 ‘천지 던전에는 뛰어난 실력과 지식을 겸비한 기인이 살고 있으며, 그 기인의 가르침 덕에 자신은 그간 넘지 못했던 벽을 넘어서 보다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설아현은 자신이 모종의 방법으로 천지 던전의 눈보라를 극복하고 던전의 중심에 도달했다고 주장했으나, 그 방법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였다. 이후 성유진, 진소월 헌터가 비슷한 주장을 하였으나, 이에 대해서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한편 몇몇 초인이 설아현의 주장을 믿고 천지 던전으로 향했다 부상을 입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여, 천지 던전 일대는 2019년 6월 17일부로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해당 던전에 합법적으로 출입하기 위해서는 헌터 협회 혹은 관련 상위 기관의 사무관급 이상 공무원의 승인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어기고 출입한 사실이 적발될 시에는 관련 법률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음을 밝힌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 데이터베이스 내 ‘문서 : HBER0305A’ 中 발췌
***
세계관에서 북한은 80년대 초반 냉전 후기 시기에 대한민국에 병합되었다. 덕분에 귀찮게 중국을 경유할 필요 없이 간편하게 백두산으로 향할 수 있었다.
기차와 버스를 경유하여 백두산 기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난생 처음으로 와본 백두산의 절경을 감상하며 나는 백두산 정상 부근까지 향하는 케이블카에 올랐다.
천지 일대에 A급 던전이 생겼음에도 백두산은 여전히 관광 명소였다. 아니, 오히려 던전 덕분에 더욱 관광이 성행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움푹 파인 화구를 따라 사시사철 휘몰아치는 희뿌연 눈보라는 관광객들에게 있어 훌륭한 볼거리였다. 또한 던전 범위 바깥에는 일절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안전 문제도 검증이 끝난 셈이고.
다 떠나서 초인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있어선 던전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구미가 당기겠지.
“오오.”
그리고 이내 정상에 올라선 나는 그런 관광객들의 심정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노을빛 하늘 아래 웅장하게 펼쳐진 백두산의 봉우리들. 그 아래로 이어지는 화구와 호수 전체를 아우르듯 덮은 채 소용돌이치고 있는 회색 구름떼.
귓가에 들리는 강렬한 바람 소리와 이따금 하늘로 솟구치는 푸른 번개에도 불구하고, 던전 바깥의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사진 두 장을 합성한 것 같은 그 비현실적인 풍경에, 나는 다른 관광객들과 마찬가지로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정신 차리자. 지금 여기 관광하러 온 게 아니잖아.’
주위 관광객들의 시선을 피하며 나는 천지로 내려갈만한 지점을 물색했다.
‘이쯤이면 되겠군.’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도 완만하고 던전 경계까지의 거리도 가까운 지점. 근처 바위 그늘에 적당히 몸을 숨긴 나는 구름 너머로 저물어가는 해가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명이 도래하고 주홍빛이던 하늘이 짙은 남색으로 물들었다.
‘슬슬 출발하자.’
아직 남아있는 몇몇 관광객의 눈을 주의하며 나는 비탈길을 따라 화구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천지 던전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곤 하나 경비가 삼엄하진 않았다.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형식적으로 둘러진 철조망뿐. 그마저도 높이가 2미터밖에 안 되어 초인이라면 손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휘오오오오오.
던전 경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차 강해지는 바람 소리.
이윽고 경계에 다다른 내 앞에 거대한 구름의 벽이 나타났다. 엄청난 속도로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듯 내 바로 앞에서 칼같이 잘려 있었다.
시험 삼아 손가락 끝만 살짝 집어넣어보자, 날카로운 칼바람이 살갗을 훑고 지나갔다.
‘바람도 바람이지만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저 눈보라다.’
알 수 없는 원리로 초인의 신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눈보라. 허나 원작을 읽은 나는 그 현상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 눈보라는 그저 평범한 눈보라에 지나지 않는다. 초인의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눈보라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고농도의 마력 폭풍이다.
초인은 누구나 체내에 마력을 품고 있다. 때문에 초인의 컨디션은 대기 중의 마력 농도에 영향을 받는다. 마력 농도가 짙을수록 초인의 신체 능력은 향상되고 초능력의 효율 역시 증가한다.
다만, 고농도의 산소가 인간에게 독으로 작용하듯, 고농도의 마력 역시 초인에겐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날 것 그대로 고농도로 농축된 마력은 초인이 체내에 품고 있는 마력과 반발을 일으킨다. 그러한 반발은 적게는 가벼운 현기증이나 구역질로 시작해, 심해질 경우 신체기능의 비가역적 손상에까지 이른다.
당연히 이러한 반발은 체내 마력 보유량이 많은, 즉 강한 초인일수록 더욱 심해진다. 반면 나처럼 약한 초인의 경우 상대적으로 그러한 반발에서 자유롭다.
‘물론 그것만으로 저 안에서 버틸 수는 없겠지만.’
아무리 상대적으로 증세가 덜하다 한들, 중심으로 갈수록 짙어져가는 마력 농도에 결국 내 몸으로도 버티지 못하는 지점이 오리라.
허나 내겐 이를 극복할 방법이 존재했다.
‘……간다.’
슈오오오오.
탈리스만을 발동하자 주위의 마력이 오른팔을 타고 체내로 빨려 들어왔다.
‘집중.’
정신을 집중한 채 흡수 속도를 조절했다. 급하게 대량의 마력을 흡수했다간 저번처럼 반동이 찾아올 뿐이다.
지난 며칠간의 연습을 통해 찾아낸, 내 신체가 견딜 수 있는 아슬아슬한 흡수 속도.
그 속도에 맞춰 천천히 주위의 마력을 흡수하며, 동시에 초능력을 발동했다.
투화악!
오른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전신을 감싼 채 회전하기 시작했다.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이 연기의 벽이 저 눈보라로부터 날 지켜줄 것이다.
허나 연기로 눈보라를 막는다 해도 마력 폭풍은 막을 수 없다.
‘집중해라.’
이에 나는 초능력에 할애되는 마력을 더욱 늘렸다. 연기의 벽이 점차 두꺼워지는 한편, 흡수 속도 보다 더 빠르게 소모되는 마력에 체내 마력 보유량이 점점 내려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체내에 품고 있던 마력이 완전히 바닥난 순간, 손에서 뿜어지던 연기의 기세가 크게 누그러졌다.
‘지금이다!’
그 순간 나는 초능력으로 인한 마력 소모량과 탈리스만에 의한 마력 흡수량을 동일하게 조절했다.
오른손을 통해 흡수된 마력이 곧바로 오른손을 통해 빠져나간다. 본래 마력이 고여 있어야 할 심장은 텅텅 빈 채, 나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초능력을 유지했다.
마력 폭풍이 체내의 마력과 반발을 일으킨다면, 체내에 단 한 톨의 마력도 남기지 않으면 그만.
전신에 휘몰아치는 검은 연기를 두른 채, 나는 있는 힘껏 눈보라 안으로 뛰어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
들어선 순간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폭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크으윽!”
세찬 강풍에 흩어지려는 연기를 가까스로 그러모은다. 깎여나가는 연기의 벽을 새로운 연기로 보충했지만, 그럼에도 연기의 벽은 눈에 보이는 속도로 얇아져갔다. 나는 재빨리 던전 중심부를 향해 달렸다.
긴장감 때문에 살을 에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손아귀에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마력 흡수량과 소모량을 동일하게 맞춘 채 초능력을 조절하는 것. 지금 내가 벌이고 있는 짓은 조금만 삐끗해도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외줄타기와 같은 기예였다.
요 며칠간의 연습에서 내가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시간은 기껏해야 2분 남짓.
반면 목표로 한 던전 중심부까지의 거리는 약 1.5km. 시간에 맞추기 위해선 시속 45km의 속도로 달려야 했다.
내 비루한 신체능력으론 불가능한 수치. 하물며 지금처럼 고도의 집중을 유지한 채로는 더더욱 어렵겠지.
파앙!
허나 다음 순간, 왼손에 찬 샛별의 숨소리가 붉은 빛을 발했다.
===
[ ‘샛별의 숨소리’를 발동합니다(1/3). ]
[ 신체의 움직임이 3분간 2배의 속도로 가속됩니다. ]
===
협곡을 가르는 질풍처럼 내 몸이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눈보라가 더욱 거세졌다. 그에 따라 연기의 벽이 더욱 빠른 속도로 소모되었다.
‘마력 흡수량을 올릴까? 아니, 그랬다간 반동 때문에 집중이 깨질 거야. 위험하다 싶으면 차라리 샛별의 숨소리를 한 번 더 발동하는 게 낫겠지.’
남은 거리를 가늠하며 계속해서 발을 놀렸다. 시야를 가리는 시커먼 연기 때문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으나, 어차피 주변은 얼어붙은 호수니 이렇다 할 장애물이 있을 리 만무했다.
허나,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오판이었다.
“엇?!”
풍덩!
단단히 얼어있어야 할 지면이 쑥 꺼짐과 동시에 몸이 호수에 빠졌다. 차디 찬 냉수에 온몸이 흠뻑 젖었다.
동시에 그간 유지하고 있던 초능력이 살짝 풀렸다.
‘이런!’
초능력 발동이 멈추자 탈리스만에 의해 심장에 마력이 차올랐다. 그렇게 인식한 순간 갑작스레 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크윽?!”
가까스로 얼음 위로 올라선 나는 다시금 초능력을 발동했다.
허나 외부에서 짓쳐드는 마력과 내부에서 날뛰는 마력이 서로 반발을 일으키며 초능력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았다. 당연히 조금 전과 같은 섬세한 컨트롤은 무리였다.
“커흡?!”
둔탁한 복통. 그리고 이어지는 토혈.
초능력이 완전히 멈추자 주변을 감싸던 연기의 벽이 허물어지고, 살을 에는 듯한 눈보라가 내 몸을 강타했다.
‘중심까지 얼마나 남았지?’
흐릿한 시야로 전방을 바라봤다. 얼추 1분 넘게 달렸으니 남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으리라.
‘이제 와서 다시 집중해서 좀 전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고민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나는 재빨리 샛별의 숨소리의 남은 횟수를 모조리 소모했다.
===
[ ‘샛별의 숨소리’를 발동합니다(2/3). 신체의 움직임이 3분간 2배의 속도로 가속됩니다. ]
[ ‘샛별의 숨소리’를 발동합니다(3/3). 신체의 움직임이 3분간 2배의 속도로 가속됩니다. ]
[ ‘샛별의 숨소리’의 모든 사용 횟수를 소모하였습니다. 금일 자정이 지날 때까지 발동 효과의 사용이 제한됩니다. ]
===
발동 효과의 3중첩. 앞으로 약 2분간 내 움직임은 평상시의 8배 속도로 가속된다.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자세를 낮추고 있는 힘껏 지면을 박찼다.
파앙!!!
새된 파공성과 함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옆에서 불어오는 폭풍과 더불어 강력한 맞바람이 얼굴을 강타했다.
“크윽!”
이대론 시간에 맞출 수 없다는 생각에 탈리스만과 초능력을 동시에 발동했다.
세밀한 조절 따위는 없었다. 두꺼운 연기가 몸을 감싼 다음 순간 극심한 격통이 엄습했다.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근육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지면을 밟은 충격이 다리를 타고 전해져 올라 내장을 뒤흔든다.
발열. 발한. 두통. 구역질. 구토. 근육 경련. 평형감각 이상. 극심한 통증. 그리고 출혈.
이곳에 오기 전 읽었던 천지 던전 설명에 열거되어있던 증상이 단번에 내 몸을 유린했다. 그나마 체내 마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임에도 이 정도. 강한 초인이었다면 마력 폭풍에 노출된 순간 장기부전을 일으키며 쓰러졌으리라.
허나 나 역시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던전의 중심에 도착하는 게 먼저일지, 아니면 끝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게 먼저일지.
일생일대의 치킨 레이스. 목숨을 건 도박 앞에서 나는 그저 있는 힘껏 지면을 박찰 뿐이었다.
“으아아아아아!”
악에 받쳐 있는 힘껏 고함을 내지른 그 순간.
팟!
마침내 눈보라가 멎고 탁 트인 밤하늘이 날 반겨주었다.
우당탕탕!
달리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꼴사납게 지면을 굴렀다. 가까스로 자세를 다잡은 나는 반쯤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커헉!”
살아남았다. 어떻게든 중심에 도착했다.
입 안에 고인 핏물을 삼키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의 눈보라가 거짓말이라는 듯, 내 주변은 완벽한 무풍지대였다. 마치 태풍의 눈 안에 들어온 것처럼 높게 치솟은 구름의 벽이 주위를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지면은 얼음이 아닌 딱딱한 흙바닥이었다. 이내 시선을 위로 올리자 저 멀리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게이트와, 그 옆에 자리한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허억! 후우. 후우…….”
원작에서 묘사된 것과 동일한 광경. 졸음처럼 밀려오는 탈력감을 이겨내며 나는 천천히 오두막을 향해 걸어갔다.
원작 설정과 달라진 게 없다면, 저 오두막 안에 그 ‘기인’이 기거하고 있을 터.
허나 오두막으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불안감이 앞섰다. 당장 어제 회수한 샛별의 숨소리만 해도 천사가 나 몰래 빼돌리려 했는데, 눈앞의 오두막 안에 과연 여전히 기인이 살고 있을까.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애써 외면하며, 마침내 오두막 앞에 도달한 나는 힘겹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허나 대답은 없었다. 나는 조금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대답은 없었다. 외면했던 불안감이 다시금 뇌리를 잠식했다.
쿵 쿵 쿵!
이내 거의 때리듯 힘차게 문을 두드려봤지만, 반응은 여전히 묵묵부답.
조심스레 문을 열자 사람의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내부가 날 반겨주었다.
“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든다.
눈앞에 마주한 차가운 현실에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시발.”
끓어오르는 분노와 차게 식는 허탈함에 얼굴 표정이 오묘하게 일그러진다.
아무리 기연이라곤 해도 물건이 아닌 인물이니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설마 여기에까지 손을 댔을 줄은.
빌어먹을 쾌락천마놈.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이곳까지 온 것이 다 헛수고였다는 생각에 깊은 한숨이 올라왔다. 급격히 몰려오는 착잡한 기분에, 나는 오두막 벽에 등을 기댄 채 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허나 그 순간.
“미안하네만 여긴 금연일세.”
문득 옆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장작을 한아름 짊어진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전신을 덮은 상처투성이 갑옷. 허리에 패용한 두 자루의 롱소드. 길게 늘어뜰인 수염과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세 줄의 흉터까지.
원작 묘사를 그대로 빼다박은 노인의 모습에 나는 감격에 젖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내 꼴을 본 노인이 이내 인자하게 웃었다.
“날씨가 쌀쌀하니 일단 안으로 들어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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