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021. 두 개의 기연(3)
* * *
던전을 뒤로하고 안전가옥으로 돌아가는 길.
빠르게 흘러가는 버스 밖 풍경은 어느새 주홍빛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창틀에 걸쳐 턱을 괸 손목에는 조금 전 던전에서 얻은 ‘샛별의 숨소리’가 채워져 있었다.
현대적 감각과 동떨어진 판타지풍 디자인이었으나, 주변 사람들은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헌터가 집채만 한 대검도 대놓고 들고 다니는 세상인데 이깟 팔찌가 대수겠는가.
그리고 팔찌에 관심이 가지 않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멍하니 바깥 풍경만 바라보는 내 머릿속은 조금 전 던전에서 있었던 일로 가득했다.
‘……지금 생각하니 나도 참 겁이 없었네.’
쾌락천마의 부하인 천사와의 만남.
당시엔 분노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을 못 했지만, 뒤늦게 생각해보니 참 위험한 상황이지 않았는가.
수많은 가정이 뇌리를 스친다.
만약 그 천사가 내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면.
만약 그 천사가 내게 위해를 끼칠 수 있었다면.
만약 그 천사가 물리적 위해는 아니더라도 모종의 페널티를 부과하려 했다면.
설령 그게 다 아니더라도, 다른 천사나 쾌락천마가 나와 천사의 만남을 알아차렸다면.
떠오르는 가정들 중 단 하나라도 성립되었다면, 아마 지금과 같이 멀쩡히 귀갓길에 오르진 못했으리라.
운이 좋았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기분이 묘했다. 쾌락천마 놈 때문에 이 세상에 빙의하고 나서 줄곧 불행하기만 했는데, 공교롭게도 놈의 부하를 만난 그 순간만 운이 좋았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결과적으로 잘 풀렸으니 됐지만…….’
샛별의 숨소리는 손에 넣었다. 하지만 내일과 모레 회수할 예정이었던 기연은 어떻게 되었을지, 그게 관건이었다.
오늘 일을 생각하면 이미 쾌락천마가 수를 써놨을 지도 모른다. 무릇 빙의물에서 원작자의 개입은 최소화되어야 하는 법. 허나 놈이라면 그런 불문율 따위 가뿐히 무시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결국 내일이 되어봐야 알겠지.’
버스에서 내린 나는 곧 안전가옥 앞에 도착했다. 번거로운 보안 절차를 마치고 현관에 들어서자, 기대하고 있었다는 듯 채소연이 뛰쳐나왔다.
“야! 안수호!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전투로부터 며칠이 지나, 채소연은 본래 체형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래도 여전히 작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동네 초등학생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너가 바깥에 쏘다니니까 너 대신 내가 하루 종일 여기 붙어 있었다고! 얼마나 지루했는지 알아?!”
“불평은. 일 안 하고 편히 쉴 수 있으니까 오히려 좋지 않냐?”
“뭐래! 어차피 난 평소에도 출근해서 일 하나도 안 하거든!”
자랑이다, 아주.
“저녁은 어떻게 했어? 알아서 챙겨 먹었지?”
“어? 응. 냉장고에 있던 걸로 적당히 만들어 먹었는데.”
“예원 씨도?”
“응. 걔도 먹긴 먹었어.”
그렇게 대답한 채소연이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였다. 꼭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뭔데 그래?”
“그, 지예원 쟤 상태가 조금 이상해.”
“상태? 어디 상처라도 덧났어?”
채소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몸 상태 말고. 정신적으로 좀 이상하다고. 분명 상처는 다 나았을 텐데 힘이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움직임도 흐느적거리고 표정도 어둡더라고.”
“그러니까, 좀 우울해 보인다고?”
“응. 맞아. 딱 우울증 환자 같은 느낌이었어.”
그 말에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가 우울한 모습을 보이는 건 아마 김민아 때문이겠지.
그날 전투에서 도끼를 든 암살자가 했던 말, 그리고 지하에 가둔 저격수를 심문해서 얻어낸 정보로 미루어봤을 때, 현재 김민아의 안위는 빈말로도 좋다 할 수 없었다.
나와 민채령은 김민아가 죽었을 것이라 예측했다. 설령 살아있더라도 고문과 약물의 후유증으로 거진 폐인이나 다름없는 상태겠지.
그리고 그 사실은 지예원도 알고 있을 터.
지예원은 김민아에 대해 거의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때문에 둘 사이가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함께 조직을 배신할 생각을 한 걸 보면 꽤 각별한 사이일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야 당연히 걱정되겠지. 실제로 전투가 있던 날 지예원은 김민아를 거론하는 적의 도발에 이성을 잃고 달려들지 않았던가.
“난 아직 걔랑 어색해서 직접 물어보긴 좀 그렇더라고. 넌 그래도 좀 친하잖아? 한 번 상태 좀 봐줄 수 있어?”
“너 치고는 되게 정상적인 의견이네. 그래. 한 번 올라가볼게.”
“부탁 좀 할…. 응? 나 치고는?”
뒤늦게 얼굴을 붉히는 채소연을 뒤로하고 나는 지예원이 쉬고 있는 침실로 향했다.
똑똑.
“예원 씨? 안수호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문 너머에서 들려온 허락에 나는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직후,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날 반겼다.
“아하하하하하핳!”
“어?”
웃음소리의 주인은 지예원이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채 TV로 예능프로를 보고 있었다. 이름 모를 연예인이 멘트를 날리자 지예원의 입에서 다시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하하하핫! 아, 진짜 골 때리네. 어, 왔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지예원의 표정에선 일말의 우울함도 엿보이지 않았다. 숫제 눈물까지 글썽이며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채소연에게서 들은 것과 180도 달랐다.
“오늘 특책과 시험인가 대비해서 던전에 갔다며? 괴수 좀 죽인다고 하루아침에 강해지진 않겠지만, 하여튼 수고했어.”
“예. 에, 감사합니다.”
“근데 그 팔찌는 뭐야? 못 보던 건데? 잠깐, 그거 아티팩트인가? 설마 오늘 던전에서 발견한 거야?”
내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지예원이 과장된 표정으로 제 입을 막았다.
“오오. 아티팩트라는 게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닌데. 운이 좋았네?”
“예. 운이 좋았죠.”
“하긴. 탈리스만 확률도 뚫어버리는 놈인데 운이 나쁠 리가 없지. 디자인도 괜찮네. 효과는 뭐야?”
무심코 효과를 읊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던전에서 발견되는 아티팩트는 마찬가지로 던전에서만 발견되는 ‘감정서’를 사용해야 그 효과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갓 발견한 아티팩트의 효과를 내가 알고 있는 건 이상해 보일 터.
“아직 모릅니다. 내일 근처 협회 지부로 가서 감정을 받아봐야 알겠죠.”
“그래? 난 벌써 손에 차고 있길래 이미 받은 줄 알았지.”
“들고 다니기 번거로워서요.”
“좀 구경해도 돼?”
나는 흔쾌히 지예원에게 샛별의 숨소리를 건넸다. 탈리스만과 달리 대부분의 아티팩트는 이처럼 착용과 양도가 자유로웠다.
시험 삼아 제 팔목에 샛별의 숨소리를 찬 지예원이 오오, 하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뭔가 기운이 막 샘솟는 거 같네. 근력 증가 같은 효과라도 붙어 있나? 심플하지만 그거만큼 쓸만한 기능이 또 없지. 꽤 괜찮은 아티팩트 같은데?”
묘하게 텐션이 높은 그녀를 내가 지긋이 바라보고 있자 지예원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뭘 그런 눈으로 봐? 괜찮아. 절대로 안 뺏어갈 거니까. 탈리스만도 달라고 안 했는데 설마 내가 이걸 탐내기라도 하겠어?”
“탈리스만은 어차피 못 가져가지 않습니까.”
“아닌데? 널 죽이거나 손가락 째로 자르면 뺏을 수 있는 거 몰라?”
“그래서 절 죽일 겁니까?”
“아하핫! 설마.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어떻게 그러겠어? 손가락 자르는 걸로 봐줄게. 손가락도 살살 자르면 안 아파.”
지예원이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렸다. 제 볼 옆에 가져다 댄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입으로 싹둑, 싹둑, 경쾌한 의성어를 뱉었다.
꼭 애교라도 부리는 듯한 그 모습이 우스워 피식 웃자, 그녀가 만족했다는 듯 주먹을 쥐며 배시시 웃었다.
“몸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멀쩡해. 너무 멀쩡해서 아주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야. 내일부터는 가볍게 근처 뛰면서 조깅이라도 하려고.”
“바깥으로 나가는 건 안 됩니다.”
“아하핫. 나도 알고 있어. 그냥 해본 소리야.”
“혹시 뭐 필요한 건 없습니까?”
“딱히? 하루 종일 침실에만 박혀있어서 지루한 거 빼곤 다 괜찮아서. 아, 그래. 소설책이라도 몇 권 가져다줄래? TV나 스마트폰만 하는 것도 슬슬 질려서.”
“그 정도라면 가능하죠. 바로 내일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말을 마친 지예원이 빤히 날 올려다보았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내 물음에 지예원이 살짝 시선을 피했다. 이내 날 바라본 그녀의 입가에 멋쩍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 미소에, 그제야 그녀가 본론을 꺼내려고 한다는 걸 직감했다.
“그, 너무 이 안에만 있어서 답답해서 그런데. 난 언제쯤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그건…….”
지예원은 이 안전가옥에 오고 난 뒤 단 한 발자국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야 답답할 수밖에 없겠지.
허나 그녀의 질문은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지예원의 거취를 정하는 건 내가 아닌 민채령이었으니까.
“당분간은 계속 안전가옥 안에서만 생활해주시기 바랍니다. 바깥은 아직 위험합니다. 여명단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당신을 찾고 있을 테니까요.”
“그건 알아. 그래도 잠깐 숨 돌리러 나가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아마 안 될 겁니다.”
“내가 도망칠 것 같아서 그래? 나 절대로 안 도망쳐. 게다가 너희가 이렇게, 손에다 발신기까지 달아놨잖아. 도망쳐봤자 잡힐 게 뻔한데 내가 왜 도망치겠어?”
지예원이 제 손목에 채워진 손목시계를 들이밀며 말했다. 그 말처럼 그 시계에는 그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발신기가 내장되어 있었다.
‘발신기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녀는 모르지만 손목시계 하부에는 전기 충격용 전극이 내장되어 있었다. 그녀가 단 한 발자국이라도 이 안전가옥에서 나가는 순간, 민채령에게 경고 알람이 감과 동시에 강력한 전기 충격이 그녀를 기절시킬 것이다.
지예원은 말이 보호지 사실상 감금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민채령의 처사는 이토록 철저하고 가혹했다.
“별 의미 없어. 그냥 정말 바람 좀 쐬고 싶다는 거야. 정 안 되면 저기 안뜰까지만이라도 어떻게 안 될까?”
지예원이 정말 별 거 아니라는 듯 물었다. 허나 그 눈동자에는 필사적인 열망이 담겨 있었다.
허나 그녀도 내가 허락하지 않으리란 걸, 그 이전에 내게 결정권이 없다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헌데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필사적으로 만드는가.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김민아 때문에 그러십니까?”
정적.
내 질문에 허를 찔린 듯 지예원이 입을 다물었다. 좀 전까지의 밝은 모습이 마치 거짓이었다는 듯,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둡게 물들어갔다.
아니, 실제로 거짓이 맞았다. 조금 전까지 그녀는 억지로 밝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면은 방금 내 질문에 의해 벗겨졌다.
앞서 말했듯, 지예원은 김민아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대충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허나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것이겠지.
그 심정이 이해는 갔다. 이해는 갔으나, 그렇다고 그녀를 내보낼 순 없었다.
아카데미 재학생이자, 주요 등장인물인 그녀의 목숨은 곧 나의 목숨. 그녀가 죽었다간 나 역시 죽게 되니까.
‘어떻게든 설득해서 단념시키는 수밖에.’
고작 말 몇 마디로 그녀가 설득되지 않으리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민아가 걱정되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예원 씨.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아직 바깥은 위험합니다. 당분간은 이곳에 있는 게 안전할 거예요.”
“나도 알아. 하지만.”
“애초에 김민아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설령 외출이 허락된다 쳐도 어떻게 김민아를 찾을 생각입니까? 위치를 아는 여명단 거점을 하나씩 파헤치기라도 할 겁니까?”
“지하에 갇혀있는 저격수를 심문하면 되잖아.”
“이미 놈도 모른다는 걸로 결론난 거 알지 않습니까. 거짓을 간파하는 초능력자를 대동해서 심문했습니다. 놈은 김민아의 위치나 현재 상태에 대해 확실하게 모릅니다.”
“그건 그렇지만…….”
꽈악, 지예원이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민아는 나보다 여명단 내에서 지위가 높았어. 당연히 나보다 아는 정보도 많을 거야. 분명 너희 여명단의 정보가 필요하다며! 민아는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까 죽기 전에, 죽기 전에 얼른 찾아야 해.”
그 말을 듣고 있자니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계속해서 공회전하는 이야기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지예원의 말마따나 김민아는 그녀 보다 지위도 높았고, 알고 있는 정보도 더욱 많을 것이다.
허나 그것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김민아를 찾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리턴에 비해 리스크가 너무 컸다.
지예원의 경우엔 조직의 암살자로부터 그녀를 지키기만 하면 됐다. 허나 김민아를 확보하려면 그녀가 잡혀있을 아지트에 직접 쳐들어가 그녀를 빼내야만 한다. 심지어 우리는 김민아가 어디에 잡혀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김민아를 구해야한다고 주장해봤자, 그게 불가능하리란 건 지예원도 분명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날 설득하려는 그녀의 모습에 두통이 밀려왔다.
가뜩이나 특책과 시험도 모자라 천사니 뭐니 하는 문제로 머리가 복잡한데 왜 지예원까지 나한테 이러는지.
“하아.”
한숨과 함께 불쾌한 감정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이쪽을 보고 있던 지예원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미안. 너한테 따질 문제가 아닌데.”
뒤늦게 표정을 가다듬고 지예원을 바라봤다. 그녀는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뇨. 예원 씨가 미안해할 건 없습니다. 그저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일 뿐이잖아요. 여명단 놈들이 좀 잠잠해지면, 팀장님께서 아마 이야기를 꺼내실 겁니다.”
민채령도 김민아에 대해선 관심이 꽤 있는 눈치였다고.
그렇게 덧붙이자 지예원이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민채령이 김민아에게 관심이 있다 한들, 그녀가 김민아를 구하러 움직일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까웠으니까. 엉겁결에 내가 덧붙인 말은 결국 지금 이 순간 그녀의 기분을 달래기 위한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 고마워.”
힘없이 떨어지는 감사인사에 결국 나는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대충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침실을 나섰다. 더 있어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침실을 나서기 직전 돌아본 지예원의 얼굴은, 채소연의 말처럼 어둡기 그지없었다.
'시발.'
튀어나오려던 욕지거리를 억지로 삼켰다. 아직 원작 스토리는 시작도 안 했는데 왜 이리 신경쓸 게 많은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침실을 나서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채소연이 내게 다가왔다. 그 얼굴에 조마조마한 감정이 떠올랐다.
“어때? 상태는 좀 괜찮아?”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빈말로도 괜찮다고 할 상태가 아니었다. 조만간 억지로 탈출하려 할지도 모른다고 말하자 채소연이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팀장님께 말씀드려서 감시를 더 붙여달라고 해야 하나…….”
“그건 어려울 거야. 팀장님께선 지예원에 대해 아는 사람을 최대한 적게 유지하고 싶어 하시니까.”
지예원이 여명단 단원인 것도 문제지만, 그녀를 구해내는 과정에서 민채령이 감수한 이런저런 범법 행위도 문제였다.
당장 나만 해도 지예원을 구해내는 과정에서 건물 하나를 무너뜨리고 사람 한 명을 죽였다. 아무리 민채령이 다방면에 연줄이 있어 사건을 덮을 수 있다 해도 이 일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아지는 걸 반길 리가 없다.
“그럼 당분간은 너랑 나 둘뿐이라는 거네. 야, 너 내일은 어디 안 가지?”
“미안. 내일하고 모레 1박2일 동안 다시 자리를 비울 거야.”
“또? 아니, 그보다 1박2일? 무슨 던전에서 캠핑이라도 하려고 그래?”
“던전은 아니야. 아니, 던전이라면 던전인가.”
“던전이면 던전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뭐야 그게? 도대체 어딜 가길래 그러는 거야?”
“백두산.”
내 대답에 채소연이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
백두산. 대한민국의 3대 마경 중 하나.
게이트에 의한 환경 변화로 인해 사시사철 강력한 마력 폭풍이 몰아쳐, 일반인은 물론이고 초인조차 결코 오를 수 없게 된 한반도의 꼭대기.
“……백두산? 너 미쳤어?”
내가 이 다음에 회수해야 할. 아니, ‘만나야’ 하는 기연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