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11화 (11/266)

〈 11화 〉 010. 지예원(4)

* * *

겨울의 끝자락.

전날 내린 눈이 반쯤 녹아 흙과 섞여 진창이 된 일요일 밤. 여느 때와 같이 로드 워크에 나선 태현은 영랑호 둘레길을 따라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호수 주변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속초에 그린하우스가 들어서면서 대대적으로 개수 공사를 한 영랑호 일대는 어지간한 자연공원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연인들에겐 낭만적인 데이트 코스요. 주변 대학생들은 밤이면 밤마다 돗자리를 깔고 풍경을 벗 삼아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가 달리고 있는 둘레길도 평소라면 산책이나 조깅하러 나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을 터였다.

허나 그날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이라곤 그 혼자뿐.

그렇게 희미한 가로등 빛만이 간간이 이어진 길을 따라 얼마나 외롭게 달렸을까.

저 멀리서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수상한 그림자에 태현은 달리던 속도를 점차 죽여 나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림자는 보다 선명하게 바뀌어갔다.

그 정체는 그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

허나 온몸이 진흙으로 더럽혀져 있었으며, 피부는 군데군데 시뻘건 자상으로 가득했다. 다리라도 다쳤는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다리를 절며 비틀거렸다.

그러면서도 필사적으로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 무언가 중요한 사정이 있으리란 걸 태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태현의 물음에도 여성은 대답조차 않은 채 제 갈 길을 갈뿐이었다. 그 뒤를 태현이 바짝 따라붙었다.

‘몸 상태가 안 좋아보이시는데, 구급차라도 불러드릴까요?’

‘어딜 그렇게 서두르시는지……. 혹시 급한 볼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뭐든 말씀만 하시죠.’

이상하리만치 과한 친절. 그것이 태현의 천성이었다. 곤란한 사람을 보면 외면하지 못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 그것이 류태현이라는 남자였다.

‘상처가 심하신 것 같은데 뭔가 사건에 휘말리신 건가요? 그럼 일단 경찰에­.’

‘경찰은 안 돼.’

그 말에 처음으로 여성이 태현을 돌아봤다. 퀭한 시선이 태현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었다.

‘……뭐든지 도와준다 그랬지? 그럼 부탁 하나만 하자.’

여성이 품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귀금속점에서 반지 등을 담을 때 쓰는 고급스러운 케이스였다.

‘별일 아니야. 이 물건을 잠시 맡아줬으면 해. 바로 내일 찾으러 올 테니까.’

‘이걸 맡아달라고요?’

케이스를 받아든 태현이 무심코 케이스를 열려던 찰나.

‘열지 마.’

단호한 한 마디와 함께 여성이 태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꽉 쥔 손아귀에서 여성이 느끼는 절박함이 절절히 묻어나왔다.

‘절대로 안에 든 내용물이 뭔지 알려고 하지 마.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너는 그냥 물건을 제대로 간수하고 있다가 내일 나한테 다시 넘기기만 하면 돼.’

‘그동안 그 케이스는 누구한테도 보여주지 말고, 절대 다른 누군가에게 넘기지도 마. 주머니에 들어갈 크기니까 되도록이면 늘 몸에 지니고 다니고.’

‘내일 이 시간. 이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만약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물건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버려. 산 속에 묻어도 좋고. 여기 호수에다 던져도 좋고. 어디든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그리고 누군가 오늘 일에 대해 묻거든 절대로 대답하지 마.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래.’

‘네가 먼저 도와준다고 한 거야. 그러니 염치 불구하고 부탁할게.’

‘그렇지만 미안. 진짜 미안해.’

‘그럼 내일 보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여성이 발걸음을 돌렸다. 태현이 무어라 말해도 들은 채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다리를 절뚝거리며.

멀어져가는 여성을 바라보며 태현이 생각했다.

필시 저 여성은 곤란한 일에 휘말린 게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다고.

그러나 여성은 이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듯 태현을 내버려둔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손에 반쯤 억지로 쥐어준 반지 케이스만을 남기고.

태현은 생각했다. 내일 저 여성을 다시 만나면 그때 물어보자. 제대로 사정을 듣고,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와주자고.

그렇게 다짐했으나.

다음날 여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 313화 : 어느 겨울의 끝자락 中 발췌­

***

===

[ 퀘스트 정보가 갱신됩니다. ]

[ 사건의 진행이 본래 전개에서 크게 벗어났습니다! 불확정요소로 인해 사건 발생까지의 남은 시간이 변동됩니다! ]

[ 사건 발생까지 남은 시간 : ??시간 ??분 ??초. ]

===

그 메시지를 본 순간 나는 미친 듯이 원룸으로 뛰어갔다.

“지예원!”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접이식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채소연과 지예원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 위에 있는 태블릿에는 화상통화라도 하는지 민채령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뭐야, 왜 그리 급하게 뛰어왔어?”

채소연의 질문을 무시한 채 나는 빠르게 지금 상황을 정리했다.

‘불확정요소로 인한 사건 변경.’

‘불확정요소가 뭐지? 진짜 스타킹이 원인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차분히 생각해보자.’

‘이번 사건이 원작과 달라진 점. 일단 지예원. 아직까지 모텔에 있거나 혹은 다른 곳에 있을 지예원이 이곳에,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점. 분명 그게 원인이다.’

‘타이머가 물음표로 채워진 건 무슨 의미지? 사건 발생 시점이 랜덤이라는 건가? 아니면, 지금부터 내가 할 행동에 의해 발생 시점이 결정되는 건가?’

‘퀘스트 창에 표시된 사건 발생 지점 위치는 아직 변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적어도 이곳에서 습격당할 일은 없다.’

‘하지만 그것도 확실한 게 아니야. 시간이 변했듯 장소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거니까. 일단 지예원을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는 게 급선무다.’

생각을 마쳤다. 어안이 벙벙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내가 다급히 외쳤다.

“팀장님께서 안전가옥을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이동하죠.”

“안 그래도 지금 그 이야기 중인데.”

“이야기할 게 뭐가 있습니까? 한시가 급합니다. 얼른 이동하자고요.”

“그러고 싶은데 그 전에 할 일이 있다네.”

채소연이 흘긋 지예원을 바라봤다.

“할 일이라는 게 뭡니까?”

“안전가옥으로 가기 전에 회수해야 할 물건이 있어.”

회수해야 할 물건이라.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명단으로부터 뭘 훔쳤다고 그랬었죠. 설마 그겁니까?”

“맞아.”

“중요한 물건입니까?”

“……중요해. 그것도 엄청.”

어디 설명이라도 해보라는 듯 턱짓하자 지예원이 이어서 말했다.

“전부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간단하게만 말할게.”

지예원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대충 이랬다.

범죄 조직인 여명단이 무언가 끔찍한 계획을 세웠고, 그녀와 그녀의 동료 김민아는 그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여명단을 배신했다. 그녀가 말하길, 여명단원인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 미친 짓이라 그랬다나.

하여튼. 지예원이 소란을 피워 주의를 끈 사이에 김민아가 계획의 핵심이 되는 ‘물건’을 조직으로부터 훔쳐냈다.

김민아는 물건을 지닌 채 국외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조직의 추격이 예상보다 빨라 해외도피는 불발. 점차 거리를 좁혀오는 조직의 마수에, 김민아 설령 자신이 잡히더라도 물건만은 빼앗기지 않게끔 어느 장소에 그 물건을 숨겼다고 한다.

“어제 새벽에 연락이 왔어. 물건은 들키지 않게 잘 숨겼다고. 그런데…….”

그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는다.

불안한 표정으로 지예원이 그렇게 말했다. 별다른 이유로 연락이 안 될 리가 없다. 아마 지금쯤 김민아는 조직에게 잡혔거나 혹은 죽었을 거라고. 지예원은 그렇게 짐작하는 듯 했다.

만약 김민아가 여명단에 잡혔다면, 아무리 물건을 잘 숨겼다 한들 안심할 수 없었다.

모진 고문에 그녀가 숨긴 장소를 불어버릴 수도 있는 거고, 설령 그녀가 입을 다물더라도 이 세상에는 강제로 진실을 들어낼 수 있는 초능력들이 버젓이 존재했으니까.

“이야기는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숨긴 장소를 말해주세요. 예원 씨는 안전가옥으로 향하시고, 그 사이에 저나 채소연이 물건을 회수하겠습니다.”

“……그럴 순 없어. 물건을 회수하려면 내가 직접 가야 해.”

그녀가 소매를 걷자 팔 안쪽에 자그마한 열쇠 모양의 문신이 드러났다.

“내 동료의 초능력은 ‘공간수납’. 공간을 찢어 만들어낸 아공간에 자유자재로 물건을 보관하거나 꺼낼 수 있는 능력이야.”

쉽게 말해 게임의 인벤토리 비슷한 거라고 그녀가 덧붙였다.

“기본적으로 아공간에 간섭할 수 있는 건 사용자 본인밖에 없어. 하지만 사용자가 미리 ‘열쇠’를 준 사람에 한해 물건을 대신 꺼낼 수 있지.”

“그 문신이 열쇠라는 겁니까?”

“맞아. 보다시피 내 몸과 일체화된 거라서. 물건을 회수하려면 내가 가는 수밖에 없어.”

“열쇠를 주는 것에는 제한이 없습니까?”

“없어. 그러니까 서둘러야 한다는 거야.”

김민아가 여명단에게 잡혔다면 억지로 능력을 사용하게 해 열쇠를 받아낼 수도 있는 거니까.

“……물건을 숨긴 장소는 어디입니까?”

그간의 이야기로 미루어보건대 대충 짚이는 장소가 있었다.

“여기야.”

지예원이 지도 어플을 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역시.’

표시된 장소는 영랑동에 위치한 한 폐건물.

퀘스트 창에 표시된 사건 발생 예상 지점이었다.

‘이제야 알겠어. 그렇게 된 거군.’

왜 퀘스트 타이머가 물음표로 바뀌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본래 스토리대로라면 지예원은 내일 자정 즈음에 이 장소를 방문했을 것이다. 그때가 본래 퀘스트 타이머에 표시되었던 시각이었으니까.

허나 우리와 접촉함으로써 그 미래는 바뀌었다. 그렇기에 타이머가 물음표로 바뀐 것이다. 지예원 혼자 있을 때와 달리 언제 폐건물로 향하느냐엔 나나 채소연의 의사도 반영될 테니까.

‘그렇다면 늦는 것보단 빨리 가는 게 낫다. 아직 여명단에서 지예원을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민채령 팀장님.”

내 부름에 그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민채령이 대답했다.

­왜?

“저는 곧바로 폐건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원 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시간을 지체해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여명단의 계획이 뭔지는 몰라도, 그게 사회에 해악을 끼칠 거라는 건 분명하니까.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할까요?”

채소연의 물음에 민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쪼록 조심하라는 민채령의 당부를 마지막으로 우리 세 사람은 곧바로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낮에 받은 코트와 장비를 걸치고 점검하고 있자 지예원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스타킹.”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신발장 옆에 던져둔 편의점 봉투를 가져와 그녀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이제 뒤 돌아있어. 밖으로 나가라고 까지는 안 할 테니까.”

그 말에 자연스레 시선이 그녀의 하반신으로 향했다. 그제야 나는 채소연이 말한 ‘몸 파는 여자들도 이렇게는 안 입을 패션’의 정체를 목도할 수 있었다.

지예원은 흰색으로 포인트가 들어간 남색 테니스 스커트 차림이었다.

채소연의 말마따나 기장이 어찌나 짧은지, 밖으로 빼어 입은 셔츠자락 밑으로 노출된 치마 길이는 반 뼘이 채 되지 않았다.

‘확실히.’

위에서 내려다보는 앵글에선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만 거리가 멀어져도 허벅지는 물론이고 엉덩이 아래쪽까지 보일 아슬아슬한 길이였다.

‘아차.’

무심코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 고개를 들자 곧바로 지예원과 눈이 마주쳤다.

“…….”

라이트노벨 속 히로인처럼 ‘꺄악! 변태! 뭘 보는 거야! 저질! 짐승! 책임져!’ 하는 반응은 없었다.

지예원은 그저 길가에 널브러진 쓰레기봉투를 보는 눈으로, 적당량의 경멸을 그 두 눈에 담아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그러고 보니 회수할 물건이 뭡니까?”

얼떨결에 꺼낸 말. 그 말에 지예원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맞아! 나도 궁금했었어! 그게 계획의 핵심이라며! 도대체 물건이 뭐길래 그래?”

채소연의 질문에 지예원은 일순 고민하는 듯 했으나, 이내 결심한 듯 작게 말했다.

“……탈리스만.”

“탈리스만?”

채소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탈리스만이 무엇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던전에서 발견되는 아티팩트 중 하나야.”

아티팩트. 던전 안에서만 발견되는 특별한 효능을 지닌 물품.

그중에서도 탈리스만은 등급이 높은 던전에서도 극히 드물게 발견되며, 그 효능은 착용자로 하여금 새로운 초능력을 각성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지예원이 설명해주자 채소연이 눈에 띄게 놀라워했다.

“새로운 초능력을 각성? 그거 완전 사기 아이템 아니야?”

사기 아이템. 정확한 표현이었다.

한 사람이 기본적으로 한 개의 초능력만을 각성하는 이 세상에서 탈리스만의 가치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초능력의 강함이 곧 초인의 강함인 세상에, 유일하게 강함을 돈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뭐, 탈리스만의 가치를 정하는 건 결국 그 안에 든 능력이 무엇이냐에 달렸지만.”

“그래? 그럼 지금 찾으러 가는 거에는 무슨 능력이 들어있는데?”

“초능력을 무한히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초능력.”

어?

지예원의 대답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뭐? 무슨 능력이라고?

“와. 진짜 사기네 그거.”

“맞아. 위력이 강한 대신 지속력이 나쁜 초능력도 이 탈리스만이 있으면 페널티가 없어지는 셈이지. 당장 로열나이츠 길드마스터만 해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방금 지예원이 한 말을 곱씹었다.

초능력을 무한히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초능력.

들어본 적 있는 능력이었다. 익숙한 능력이었다. 익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야, 그 능력은 원작의 주인공 ‘류태현’이 작품 시작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이었으니까.

‘근데 그게 왜 여기서 나와?’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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