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009. 지예원(3)
* * *
그날 오후.
“으, 으음.”
옅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이던 지예원의 뺨에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기분 좋지만, 어딘가 낯선 감촉.
무심코 뺨을 비빈 그녀가 살며시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의 절반에 흰색 베갯잇이 새하얀 설원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생활감 넘치는 방의 모습.
그녀의 눈이 살며시 감겼다가, 이내 맹렬한 기세로 뜨여졌다.
벌떡.
지예원이 몸을 일으켰다. 몸을 따스하게 덮고 있던 솜이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옅은 한기가 옷자락 사이로 스며든다.
“깨어나셨군요.”
등 뒤에서 들린 낯선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낮에 만났던 경비대 대원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막 깨어난 탓에 멍한 머리로 그녀가 물었다.
“……여긴 어디야?”
주위를 둘러본다. 대학생들이 자주 이용하는 자그마한 원룸. 벽면의 행거에 남성복이 잔뜩 걸려있는 걸 보면 아마 방 주인의 성별은 남성이리라.
‘……왜 내가 정신을 잃었던 거지?’
허나 이곳에 오기까지의 기억이 그녀에겐 없었다.
미간을 짚은 채 그녀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갔다.
여명단. 추격자. 도망. 모텔. 룸서비스. 경비대. 그리고 테이저 건.
차츰 돌아오는 기억과 함께 그녀의 정신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어?”
그 순간 하반신에서 느껴진 위화감.
“뭐야……?”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묘한 개방감에 그녀가 허벅지를 살살 비볐다. 허나 응당 느껴져야만 할 섬유의 감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그녀가 허리를 틀며 이불을 살짝 치우자.
“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새하얀 엉덩이가 눈에 들어온 순간, 그녀의 머릿속도 덩달아 새하얘졌다.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길 5초가량.
무심결에 쓰다듬은 허벅지는 방금 씻고 나온 것처럼 뽀송뽀송했다. 살짝 냄새를 맡아보니 은은한 바디워시 향이 느껴졌다.
“……어?”
작게 벌어진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내 지예원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그 앞에 있던 안수호는 차마 눈을 마주칠 면목도 없는지 시선을 옆으로 피한 채였다.
“야.”
“…….”
“야. 대답해.”
“……예.”
“왜 내가 아래에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거야?”
그 질문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안수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 태도가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응? 대답하라니까……?”
안수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밝힐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예원 씨께서 그, 저희 대원이 쏜 테이저 건에 맞은 것까지는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 있어. 그 금발머리 꼬맹이가 갑자기 쐈잖아. 분명 투항하겠다고 했는데도.”
“……그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는 그 금발머리가 해야지. 그 사람은 어디 갔는데?”
“여기 오기 전에 갈라졌습니다.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려고요.”
“옷? 설마 내가 입을 거?”
“예. 원래 입고 계시던 옷은 그, 지금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안수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해명은 자신이 아니라 가해자인 채소연이 해야 하는데.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간답시고 나몰라라 떠나 1시간째 돌아오지 않는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돌아오면 한 대 쥐어박는다. 무조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리며 그가 이어서 말했다.
“예원 씨가 그, 테이저 건에 맞으셨잖습니까. 그때 그…….”
“그때 뭐?”
“그, 실금하셨습니다.”
“어?”
그 말에 지예원의 얼굴에서 표정이란 게 사라졌다.
“시, 실금?”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테이저는 전기 충격으로 중추신경계를 일시적으로 교란하고 근육을 수축시킵니다. 이에 따라 전류가 멎었을 때 순간적인 근육이완 및 신경계 교란으로 인해 실금하는 행위는 지극히 정상적인.”
“……그만. 굳이 설명하지 마. 안 해줘도 돼.”
“예.”
지예원의 얼굴은 어느새 제철 사과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부끄러움에 허벅지를 배배 꼬며 그녀가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렸다.
중추신경계가 어쩌니 자연스러운 반응이니 다 상관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스물셋이나 되어서 남들 앞에서 소변을 지려버렸다는 부끄러움뿐이었다.
‘아니, 너무 괘념치 말자.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잖아.’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털어냈다.
자신은 지금 한창 여명단에게 쫓기고 있는 몸. 그깟 실금 한두 번 따위 그녀가 당면한 현 상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다잡으며 그녀가 크게 심호흡했다.
‘근데 잠깐.’
그때 불현듯 떠오른 의문.
“저기 있잖아.”
“예?”
이 작은 원룸에 있는 건 자신을 제외하곤 눈앞의 남자뿐. 같이 있던 금발머리 여자애는 이곳에 오기 전에 갈라졌다고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연스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내 옷은 누가 벗겼어? 그리고 누가 날 씻겨준 거야……?”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안수호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지만, 그 표정만으로 이미 충분히 의미가 전달되었다.
“아.”
지예원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물들었다.
***
“나 왔어!”
문이 열리고 채소연이 들어온 순간,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딱콩!
“악!”
깔끔하게 들어간 꿀밤. 불시의 기습에 채소연이 정수리를 부여잡은 채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뭐야! 왜 때려!”
“날벌레가 날아다녀서 잡으려던 차에 갑자기 들어오셔 가지고.”
“그게 말이 돼?! 누가 벌레를 주먹으로 잡는다고!”
“그보다 먼저 저분께 사과부터 하시죠.”
“사과?”
내가 지예원을 가리키자 채소연이 앗, 하고 탄성을 흘렸다.
지예원은 일단 급한 대로 내 바지를 입은 채였다. 허나 바짓단은 질질 끌리고 허리는 계속 흘러내리는 것이 도저히 입고 돌아다닐 상태는 아니었다.
“그, 미안.”
“옷이나 내놔.”
지예원은 사과고 뭐고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 채소연의 손에 들린 종이백을 그녀가 거칠게 낚아챘다.
“미안해. 우리끼리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나 봐. 나는 안수호 쟤가 네 주의를 끌려고 회유하는 척 연기하는 줄로만 알았거든? 근데 설마 그게 진심으로 투항을 요구하는 거였을 줄은.”
“이제 나가.”
“응?”
“나가라고. 갈아입을 거니까.”
“나는 괜찮지 않아? 같은 여자인데.”
“나가라니까?”
지예원의 축객령에 채소연이 구시렁거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나야 진즉에 나간 상태였고.
삐걱거리는 철문이 닫히자마자 채소연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참나. 범죄자 주제에 지가 상전인 줄 아네.”
“이 집 방음 안 됩니다. 다 들릴 거예요.”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뭐, 다소 까칠한 것도 이해해야죠. 낮에 일은 소연 씨가 잘못했지 않습니까.”
낮의 일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지예원은 갓 깨어나서 비몽사몽했을 때를 제외하곤 줄곧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이따금 한숨을 내쉬거나 몸을 옴짝달싹 못하는 것이 어딘가 불안한 듯 했다.
그야, 여명단에 쫓기고 있는 입장이니 불안할 만도 하겠지.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초면에 반말 찍찍 뱉는 것도 그렇고 태도가 너무 안하무인이잖아! 안 그래?”
“……그러는 소연 씨도 초면에 저한테 반말하지 않았습니까.”
불만을 토해내는 채소연에게 너 역시 그러지 않았냐 묻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엉? 나?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니 직장 선배인데 너한테 존대를 왜 해?”
“그거야 같은 부서 이야기고 저희는 아예 다른 부서잖습니까. 보통은 그런 상황에 상호존대가 원칙 아닙니까?”
“뭘 그렇게 쩨쩨하게 따져? 어차피 동갑인데 반말 좀 쓸 수도 있는 거지.”
“그래?"
너 말 한 번 잘했다.
"그럼 나도 반말 쓸게 소연아.”
“엥?”
마침 잘 됐다는 듯 내가 말하자 채소연이 미간이 찡그려졌다. 마치 무슨 개소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존댓말 쓰기 귀찮았는데 잘 됐네. 앞으로 계속 말 깐다?”
“그게 왜 그렇게 돼? 경비대 들어오길 내가 훨씬 먼저 들어왔는데 어디 까마득한 후배가.”
“훨씬은 무슨. 민채령 팀장님께 물어보니 끽해야 6개월이더만. 그리고 뭘 그리 쩨쩨하게 따져? 동갑끼리 반말 좀 쓸 수도 있는 거지.”
“야, 그래도 선배에 대한 예우가.”
“정 선배 대접을 받고 싶으면 좀 선배다운 모습을 보이던가. 나 감시하다 들킨 거야 그렇다 쳐도 오늘 낮에 그 일은 진짜. 와…….”
“이이익!”
채소연이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고 애먼 발만 동동 굴렀다. 그 꼴을 보니 막힌 체증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참피같은 년.'
지난 며칠간 봐온 모습에 더해 오늘 낮의 테이저 건까지.
어설픈 일처리에 민폐란 민폐는 다 끼치는 그 모습에. 내 안에서의 채소연의 이미지는 진즉에 나락으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이런 정박아가 어떻게 특수대책과의, 그것도 민채령 직속 팀원으로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민채령이 거둬갔다는 건 뭐든 간에 하나 잘하는 게 있다는 소리인데.’
일단 정보 분야는 아니다. 그간의 감시 활동을 보면 첩보나 미행, 잠입 등도 논외.
골목에서 날 제압했을 때나 낮의 움직임을 보면 전투 특화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쩌면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래. 네가 지금 아니면 언제 나한테 말을 놓겠어. 특책과로 넘어오면 니 짬에 감히 나랑 눈도 못 마주칠 텐데. 내가 봐줬다 진짜.”
“그래그래. 그럼 말 놓은 김에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네 초능력이 뭔지 궁금해서.”
초능력.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설정.
초인의 강함은 곧 초능력의 강함이라 불리는 이 세상에서, 만일 채소연에게 특출난 강점이 있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그녀의 초능력에서부터 기인할 것이다.
'뭐가 됐든 적어도 내 능력보단 낫겠지.'
내가 가진, 그러니까 '캐릭터 안수호'에게 주어진 초능력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직접적인 전투력과는 전혀 관계 없는, 기껏해야 적의 발을 묶거나 눈속임에나 쓰일법한 비루한 초능력.
그에 반해 채소연은 특책과, 그것도 민채령의 직속 팀원이니 꽤 쓸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리라.
그런 생각에 그녀에게 질문하자 채소연이 토라진 얼굴로 툭 뱉었다.
“……그건 못 알려줘. 대외비야.”
“같은 경비대인데 대외비가 어디 있어.”
“같은 경비대지만 부서가 다르잖아. 정 듣고 싶으면 특책과로 오든가.”
정말로 대외비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삐진 건지.
더 이상 할 말 따위 없다는 듯 채소연이 고개를 홱 돌렸다. 아마 더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겠지.
벌컥!
그때 닫혀있던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예원 씨? 다 갈아입으셨습니까?”
내 물음에 열린 문 사이로 고개만 내민 지예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채소연에게로 향했다.
“야. 금발 꼬맹이.”
“뭐?”
채소연이 눈을 부라리며 지예원을 올려다봤다.
“금발 꼬맹이? 왜 멀쩡한 이름 놔두고 그딴 식으로 불러?”
“됐고. 가져온 옷들 꼬라지가 하나같이 왜 저래?”
“내 옷들이 뭐가 어때서.”
그 말에 지예원이 격분하며 외쳤다.
“사이즈가 안 맞잖아. 사이즈가!”
“사이즈?”
그 말에 채소연의 시선이 지예원의 하반신으로 향했다. 내 쪽에선 현관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아.”
무슨 광경을 본 건진 모르겠으나 이내 그녀의 얼굴에 아차 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거 말고 다른 옷들도 다 안 맞아?”
“그래. 이거 다 네 옷이지?”
“응. 내 옷인데……?”
지예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됐다.
채소연의 키는 140대 중반. 반면 지예원은 180 살짝 안 되는 내 턱을 살짝 넘기니 한 165 정도 되리라.
신장 차이만 약 20cm에 체구도 지예원이 채소연보다 훨씬 컸다. 당연히 채소연의 옷이 맞을 리가 없었다.
“하나도 안 맞아? 진짜 하나도?”
“일단 안으로 들어와 봐.”
지예원이 채소연을 끌고 들어가고, 안에서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옷 좋아할지 몰라서 한 열 벌은 들고 왔는데 그게 다 안 맞는다고?
흐릿하게 들려오는 채소연의 목소리. 싸구려 원룸이라 그런지 방음이 잘 안 되는지 두 사람의 대화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열 벌이고 백 벌이고 그쪽 사이즈에 맞춘 옷이 나한테 맞을 리가 없잖아.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전부 안 맞을 줄은 몰랐지! 긴 바지들은 그렇다 쳐도 이건? 핫팬츠면 길이는 상관없지 않아?
그건 골반이 안 맞아. 엉덩이까진 들어가는데 지퍼가 안 잠겨.
그럼 치마는? 이 플리츠 스커트는 맞을 것 같은데?
바지랑 똑같지. 골반이 안 맞는데 어떻게 입으라고.
아니, 치마는 굳이 골반에 맞출 필요 없잖아. 이렇게 윗단을 허리까지 올려서……. 아.
이러면 길이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잖아. 무슨 몸 파는 여자도 아니고 어떻게 이러고 다녀? 아니, 왜 이딴 옷만 들고 온 거야? 집에 그 흔한 추리닝 하나 없었어?
하나 있긴 한데 핑크색이라 싫어할까봐…….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안쪽 상황에 나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우우우.”
폐 깊숙이 연기를 들이마시자 머릿속이 시원하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씨발.”
맑아진 정신으로 지금 상황을 곱씹자, 뒤늦게 현타가 밀려왔다.
‘무슨 캐빨 원툴 라이트노벨도 아니고.’
이쪽은 당장 이번 퀘스트의 성패에 목숨이 달려있건만, 한시가 바쁜 이 순간에 저 둘은 라이트노벨 속 히로인들 마냥 절찬리에 옷 갈아입기 이벤트 중이었다.
‘그깟 옷이 도대체 뭐가 중요하다고. 대충 몸에 걸칠 수만 있으면 되는걸.’
그네들의 태도가 불만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지예원도 아마 제 나름 조직의 추격자에 대한 경각심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당장 오늘 낮에만 해도 다짜고짜 이쪽을 공격하지 않았는가.
‘여명단을 상대로 혼자 도망치고 있었으니 신경이 잔뜩 곤두섰었겠지.’
그런 와중에 경비대라는 기대하지 않던 조력자가 등장했으니. 안도감에 긴장이 다소 풀릴 수도 있는 법이겠지.
나는 퀘스트 탭을 열어 타이머를 활성화했다.
[ 사건 발생까지 남은 시간 : 1일 4시간 11분 6초. ]
남은 시간은 약 28시간.
결코 여유롭다곤 할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지예원의 신병을 확보한 덕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암살자로부터 지예원을 어떻게 보호할지가 관건이었으나, 그 건에 대해선 민채령이 맡겨달라고 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슬슬 그쪽에서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벌컥!
“안수호.”
채소연이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끝났어?”
“아니, 부탁 하나만 하자. 저 앞 편의점에 가서 검은색 스타킹 하나만 사다 줄래? XL사이즈로.”
채소연이 카드를 건네며 그렇게 말했다. 자연스레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니, 스타킹은 또 왜.”
“그나마 맞는 게 치마밖에 없는데 기장이 짧아도 너무 짧아서. 맨다리에 입으니 좀 보기가 그러네?”
“그냥 대충 입으라고 그러면 안 돼?”
“안 돼. 본인 말로는 몸 파는 여자도 그렇게는 안 입을 거라던데.”
그 말에 머릿속으로 대충 그림을 그려보았다. 원래 채소연의 골반부터 무릎까지 오는 기장이라고 치고, 그걸 키가 20cm는 큰 지예원이 허리까지 끌어올렸으면…….
“……확실히 보기 좀 그렇긴 하겠네.”
“혹시 보고 싶어?”
“보고 싶긴 개뿔.”
“뭐? 개뿔? 야, 아무리 말 깠어도 선배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길길이 날뛰는 채소연을 뒤로 한 채 나는 재빨리 건물을 나섰다.
그렇게 지예원의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한 스타킹을 사러가던 중.
우우우웅.
갑작스런 진동에 스마트폰을 꺼내들자 ‘발신번호 표시제한’이라는 문구와 함께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오고 있었다.
'누구지?'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나한테 전화할 사람은 손에 꼽고, 그중에서도 제 번호를 숨길 사람은 한 명밖에 없으니.
통화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나는 그 이름을 불렀다.
"민채령 팀장님?"
그 이름을 부르자 전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나야. 어떻게 바로 알아봤네?
“저한테 번호 숨기면서까지 연락할 사람이 팀장님밖에 없어서요. 무슨 일로 전화 주신 겁니까?”
경과 보고지. 일단 그쪽부터. 지예원은 어떻게 됐어?
“지예원은 확보 완료했습니다. 팀장님께선 어떻게 되셨습니까?”
지예원을 숨길 장소 말하는 거지? 이쪽도 해결됐어. 그린하우스 근처에 한성그룹 회장 소유의 안전가옥이 한 채 있는데, 방금 막 사용 허가를 받아낸 참이야. 경비대 시설을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래선 다른 대원들이 알아차릴 테니까.
지예원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적을 수록 좋다. 그래서 그녀는 굳이 경비대가 아닌 외부인 소유의 시설을 빌린 것이리라.
한성그룹은 대한민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대기업. 그 기업 회장 소유의 안전가옥이라면 보안도 믿을만 하겠지.
나는 월요일 아침 일찍 귀국할 예정이야. 그날은 하루 종일 비번이니까 곧바로 그쪽으로 갈게. 그동안은 소연이랑 너랑 둘이서 잘 좀 지키고 있어. 지예원은 좀 협력적이니?
“다행히 협력적입니다. 하마터면 그 협력도 물 건너갈 뻔했지만요.”
그게 무슨 말이야?
민채령에게 지금까지의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채소연이 수갑을 꺼내들며 모텔에 들어가는 부분까지는 그냥저냥 듣는 듯 했으나, 그 뒤에 그녀가 벌인 트롤링에 대해 전해 듣고부터는 거의 말이 끝날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하하하! 그래서 지금 편의점 가는 중이야? 스타킹 사러?
“예. 꼭 필요하다는데 어쩝니까."
이상한 오해 사지 않게 조심해.
“오해는 무슨. 기껏해야 누나나 여동생 심부름이라 생각하겠죠. 혹시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슬슬 편의점 다 와 가는데.”
아니야 됐어. 너랑 연락 됐으니 이제 소연이한테 연락해야지. 그럼 수고하렴.
전화를 끊고 편의점에 들어간 나는 곧바로 스타킹 진열대로 향했다.
‘XL사이즈랬나.’
스타킹에도 사이즈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잘 늘어나는 재질이니 아무거나 입어도 되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닌가보다.
“4,000원입니다.”
민채령의 걱정과 달리 점원은 내게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무료한 업무에 지친 편의점 알바는 손님이 사가는 물품에 구태여 관심을 갖지 않는 법이니까.
성공적으로 스타킹을 구입한 나는 곧바로 원룸으로 향했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지.’
갑자기 회의감이 밀려왔다. 당장 목숨이 걸린 판국에 한가롭게 편의점에서 스타킹이나 사고 있다니. 참 아이러니했다.
이까짓 스타킹 하나가 뭐가 중요하다고.
제아무리 쾌락천마가 싸이코라 한들, 설마 고작 스타킹 하나가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겠.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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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퀘스트 정보가 갱신됩니다. ]
[ 사건의 진행이 본래 전개에서 크게 벗어났습니다! 불확정요소로 인해 사건 발생까지 남은 시간이 변동됩니다! ]
[ 사건 발생까지 남은 시간 : ??시간 ??분 ??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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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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