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 퍼플
* * *
심야.
라슨 영지의 소도시.
이미 늦은 밤 도시는 마치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듯 빛 하나 없이 조용한 어둠을 맞이했다.
삭, 사삭!
그런 어둠 속 골목길을 조용히 걷는 자가 있다.
검은 로브로 몸을 감싸 주변의 시선을 피하는 자.
사람이 없지만, 만약 하나의 경우를 대비하여 이 시간에도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사전에 알려진 암호를 토대로 움직인다.
검은 로브의 사내는 곧바로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고 품속에서 암호가 적힌 종이를 꺼내고 입에 물었다.
그 상태로 마지막으로 주변을 살핀 후 문을 두 번, 세 번으로 나눠 두드렸다.
“…….”
끼익
어둠 속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안쪽에서도 불빛 하나 켜지지 않은 건물. 선뜻 발을 딛기 힘든 장소에도 불구하고 검은 사내의 로브가 한 발자국 안으로 들어갔다.
스릉!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옆에서 검날이 튀어나왔다.
목 아래까지 파고든 칼날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느껴질 만큼 번뜩인 채로 살에 닿을 정도로 파고들었다.
“…….”
검은 로브의 사내는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저 조용히, 가만히 손을 올린 채로 기다렸다.
칼날을 든 자는 어둠 속에서 기다리며, 어느새 나타난 또 다른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에 문 암호를 가져갔다.
“……이 시간에 오니 깜짝 놀랐잖아. 어서 들어와. 다들 도착했어.”
“거, 미안하네. 낮에 깜박 잠이 들어 일어나니 이 시간이지 않았나.”
마치 누가 듣는 것처럼.
그들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오랜 시간 만난 친구처럼 대화한다.
어느새 치워진 칼날을 품에 넣은 한 사람.
달빛으로 서서히 어둠 속에 모습이 비친다.
그 사내는 마지막으로 주변을 훑어보며 순식간에 그 몸을 감췄다.
* * *
끼이이익!
덜컹!
그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제 사람이 사는 건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왁자지껄한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오! 자네 왔군!”
“오랜만이네. 잘 지냈나?”
“그렇지! 너도 한잔하지?”
“하하하! 잠깐 안쪽에서 볼일 좀 보고 그러겠네.”
그들 모두가 조직원이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술을 마시고 곡을 연주하고 밥을 먹는다.
그러는 그들과 적당히 대화를 나누고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간다.
보다 안쪽,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간다.
여러 가지가 보관된 지하의 창고. 그 구석에 있는 철로 된 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저 왔습니다.”
“…….”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안쪽에 있는 작은 방이 보였다.
아니, 그것은 방인가?
사방이 철로 된 벽들이 둘러싼 방.
벽만이 아니다. 바닥도, 천장도 전부 철로 되어 있다.
그 모두가 마정석으로 만들어진, 보안을 위해 철저하게 가려진 방.
실제로 눈앞을 봐야 하지만 알 수 있는, 마력으로 탐지되지 않는 비밀의 방.
그 안까지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검은 로브의 사내는 한숨을 쉬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비밀리에 모이는 건 너무 힘들군.”
“어쩔 수 없지.”
사내의 한숨에 호응하는 듯이,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이 피식 웃으며 끄떡였다.
최근 붉은 피에 대한 탐색이 심해졌다.
라슨 영지는 그나마 나은 상태지만, 다른 지부는 박살 난 곳도 많다.
그렇게 박살 나, 도망친 붉은 피가 다시 모이기도 쉽지 않다.
점조직의 특성상, 중요 간부만이 제대로 알 뿐. 아니 그 간부마저도 자세히 모르는 경우가 많아 그렇게 퍼진 조직원들이 다음에 다시 모일 장소를 몰라 그대로 일반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붉은 피다.
역시 귀족을 이길 수 없다.
그런 좌절과 패배감을 느끼면서.
그중에 한 줌.
계속된 패배와 도망. 쌓여가는 감정들.
그걸 반복하면서 분노가 차곡차곡 쌓이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독기에 가득 찬 자들만이 극소수의 간부가 된다.
좁은 방에 있는 5명의 사람.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 화포를 풀었다.
“거기는 어때?”
“말도 마. 인맥이 다 끊겼어.”
“진짜 눈치 하난 빠른 놈들이라니까.”
붉은 피라고 대놓고 알리진 않는다.
상인이라는 족속들이 다 그러니까.
하지만 남몰래 퍼진 조직의 힘을 이용해 지원하고, 어느 정도 대가를 받는다. 상대가 수상해도 몰랐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런 식으로 서로 이득을 보는 관계.
물론 적어도 거래 상대에 대해 파악하고 나서 연결하지만.
“들었나? 토트 영지에 관한 이야기.”
“아, 들었어. 전부 죽었다지? 소문대로 잔인하기 짝이 없군….”
“하아아.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다 뮐러 영주 때문이 아닌가?”
그 말에 사내가 입을 닫았다.
뮐러 영주.
레오릭 프란츠.
태양의 마력을 깨닫고 비정상적으로 강해지는 남자.
아무리 백작의 혈통이라고 해도 그 성장 속도는 이상하다.
그를 떠올리며 붉은 피들은 얼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지?”
“일단 당분간 조용해야지. 이미 다른 지부에도 알렸어. 의심되지 않게 수상한 행동은 멈추라고.”
주위의 사람들 말을 조용히 들었다.
뮐러 영주. 그 때문인가?
물론 그가 일으킨 남부 회의로 인해 현재 붉은 피들은 많은 피를 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뮐러의 작전은 실패했고, 간부도 붙잡혔다. 지부는 모두 폐쇄했고, 파우더의 존재까지 알려졌다.”
“세븐…….”
밀실 안의 구석에 있던 남자.
세븐이라고 불린 남자는 조용히 말했다.
“인제 와서 조용히 숨어 지내라고? 그럴 수 있겠나? 동지들이여.”
“……그렇지만.”
다른 간부들도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현재 퍼플 파벌의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제야말로 일어서야 할 때라는 투를 비롯한 과격파.
시기상조라며 조금 더 연구해야 한다는 원을 비롯한 온건파.
현재 이 소도시에 모인 나머지 간부들은 중립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검은 로브의 사내, 파이브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 사태로 많은 조직원을 잃었어. 적어도 당분간 사태를 진정시킬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온건파에 소속된 파이브의 말에 중립의 간부들도 고개를 끄떡였다. 사실상 온건파에 가까운 그들의 태도에 세븐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대로면 언제까지고 우리는 푸른 피 아래에 굴복된 채로 살아야 한다. 정말로 그걸 원하는 건가?”
“하지만 세븐. 라슨 남작도 당분간 우리를 지원할 수 없다. 실제로 남작 곁에 있는 투의 연락도 있지 않았나?”
과격파의 톱이라고 할 수 있는 투가 그리 연락했다는 건 당분간 숨으라는 말과 같다.
그 말에 세븐은 히죽 웃었다.
그 눈동자에 가득 찬 광기.
그것에 파이브의 몸이 떨려왔다.
“……너 설마?!”
“계획은 이미 시작했다네! 동포들이여!”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파이브가 책상을 내려치며 몸을 일으켰다.
푸른 마력의 그의 몸에서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슨 짓이라니. 말했지 않았나. 계획을 시작했다고.”
계획?
“파우더 말인가?!”
몬스터 파우더.
퍼플이 독자적으로 연구한 인공적인 마력 가루.
그 효과는 몬스터를 유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아직…!”
“원하는 효과를 구현했네. 실패작이라고 할 수 없지. 사소한 부작용은 눈 감을 수도 있지 않나?”
“그게 사소할 리가 없지 않나! 땅이 죽어버릴 걸세!”
가루가 뿌려진 일대.
뿌려진 땅에 존재하는 마력을 특수한 파동으로 바꿔 주위에 뿌린다. 그리고 그걸 감지한 몬스터들은 근원지를 찾기 위해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하는 가루.
그리고 그 부작용은 땅에 존재하는 마력을 이용하는 것에 있었다.
“가루가 뿌려진 땅은 죽어버리게 된다! 그럼 식물은커녕 동물조차 살 수 없는 땅이 돼버려! 그것을 이 남부에 뿌린다고?”
“훗. 아주 작은 땅에만 쓰면 됩니다. 그런 땅이 있잖습니까.”
“뭐? 설마……?”
퍼플은 현재 라슨 남작과 유착한 상태다.
서로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상태.
“라슨 남작이 원하더군요. 뮐러 영주를 없애고 싶다고.”
“……몬스터 파우더는 아직 개량할 점이 많아.”
오히려 몬스터를 유인해서 이성을 잃게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불완전한 점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효력도, 범위도. 지속 시간조차 모든 게 불완전하다.
“아무리 라슨 남작이 원한다고 해도……. 애초에 그 남작이 원하는 것은 뮐러의 풍요로운 땅이 아니었나?”
“말했잖습니까. 남아있는 땅이 있다고.”
“……대산맥에 가까운 그 땅들 말인가.”
대산맥의 영향이 짙은 땅. 풍요로운 대지긴 하나 농사를 하기에도 축산업을 하기에도 힘든 땅.
“계획을 시작했다는 말은 벌써 시작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지금쯤 제 부하들이 출발했을 겁니다.”
세븐은 웃음을 지었다.
대산맥에서 끌어들이는 몬스터는 평범한 대지의 몬스터와 비교되지 않는 강함을 보인다.
그런 그들이 날뛰는 순간, 전쟁 중인 뮐러 영주는 후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레오릭 프란츠. 그가 날뛰는 몬스터들을 내버려 둔다는 선택을 하면 라슨 남작은 그 틈을 노리지 않겠지.
“나인을 죽인 원한은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큭.”
파이브와 세븐.
그들이 서로 노려보고 있는 순간.
“움직인다.”
트리아나 뮐러는 병사를 이끌며 놈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