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금수저 이야기-137화 (137/143)

〈 137화 〉 아슬란 영지전 ­ 2

* * *

허전해진 한쪽 팔의 소매가 바람에 펄럭인다.

평소에 가끔가다가 없던 팔로 물건을 짚으려고 하는, 어색함이 느껴질 때가 있지만, 펄럭이는 이 소리도 계속 듣다 보니 나쁘지 않다.

에이번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저 멀리 보이는 넓은 땅을 바라보면서 한 손으로 들고 있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흠.”

명분.

프란츠 가문에서 중요시하는 것.

한때 전쟁에 미쳤던 조부. 그리고 에이번의 아버지는 명분이라는 이름의 굴레를 일부러 뒤집어썼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피에 스며든 전쟁의 광기를 잠재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이번의 아버지는 이대로라면 짐승처럼 미친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약간 격이 떨어진다 해도 온화한 혈통의 귀족의 여인과 결혼했고, 그 판단은 유효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능력은 있으나 후계자 분쟁을 피했고, 아버지는 물론 장남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 제대로 된 후계자 교육을 시작할 때까지 외부 활동은 물론 대부분의 시기를 내성에서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에이번의 고민을 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이단 프란츠.

아직 가주 자리를 계승하진 않았지만, 이젠 가주 대리로서 영지의 일을 도맡기 시작한 자신의 장남.

“프란츠와 보랭의 협잡으로 인해 얻은 뮐러의 통치를 맡길 정도로 두 가문의 신임을 받는 것을 보아서는 온화한 자로 판단한다.”

아이단의 손에 들린 것은 에이번의 아내가 수도에 머무르면서 수도의 귀족들, 사교계에서 퍼져있던 레오릭의 평가였다.

“그러므로 레오릭 프란츠에게 작위와 새로운 성, 그리고 적당한 포상을 주는 것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남부 지방의 세력을 견제하는 조정자로서 역할을 맡기기엔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다.”

“……훗.”

에이번은 아이단의 말에 웃음을 흘렸다.

그 소리를 한 귀족은 물론 궁의 문관들은 이제 상사에게 엄청 깨지겠군.

“참고로 아직 미혼으로 프란츠 혈통답지 않게 여인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다. 이것은 추후 확인을 통해 필히 확인할 것. 이용할 수 있다면 미인계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다. …………왜 위의 글보다 이게 더 믿기 어렵다는 듯이 적혀 있는지.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아이단은 쓴웃음을 지었다.

뭐, 사실 프란츠의 혈통의 특성은 멸망해가는 가문의 흐름과 비슷하다. 그들은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프란츠 가문의 손이 끊길 수도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난리가 났겠군요.”

“그렇지.”

아이단의 말 대로.

이제 세상의 혼란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겠지.

그 생각을 하니 에이번의 남은 손가락이 살짝 떨었다.

“훗.”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바라봤다.

만약 자신의 나이가 조금이라도 더 젊었다면. 그 생각이 떠오르자 에이번은 피식 웃음을 짓고 주먹을 쥐었다.

역시 혈통은 어디 가지 않는다.

품위라는 이름으로, 귀족의 의무라는 이름의 탈을 썼지만, 프란츠는 대대로 짐승이었다.

그건 자신의 두 번째 아들, 레오릭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일을 벌여놓고, 싸움이 싫기는 무슨.”

“아하하하하! 그래도 딱히 틀린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에이번의 말에 아이단도 웃었다.

“정말로 싫긴 하겠죠. 하지만 그건 싸움이, 전쟁을 싫어한다는 말이 아니죠.”

“그래. 정확히는 귀찮은 거겠지.”

강하기에 할 수 있는 강자의 사고방식.

레오릭의 안에는 천칭이 있다. 그리고 그 천칭의 균형이 한쪽으로 너무 길어진다면 지금처럼 움직인다.

천칭이 기울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 아들은 명예, 부, 권력에 대해 욕심이 없다고는 하나 싫어하지도 않을 거다.

하지만 그보다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여자. 혹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

레오는 독점욕이 상당하다. 프란츠 가주라는 자리를 양보한 건 애초에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붉은 피, 퍼플이라고 했나.”

난리를 피울 거라고 예상한 것과는 다르게 지금은 상당히 조용하다. 아마 남부 지방에서 일어난 붉은 피의 탐색이 활발해졌기 때문이겠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건 레오릭의 행동. 설마 아예 대놓고 그 소문을 퍼트린 것은 예상하지 못한 거겠지.

레오릭은 딱히 손해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막말로 그는 자기 자신 혼자가 남더라도 0으로부터 다시 모든 것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럴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까 휘말리게 한 거지.

남부를.

브람스 왕국 전체를.

“이런. 그레이스가 안다면 충격받겠죠? 숨겨야 하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미리 대비시켜서 알려주는 것이 낫겠지. 그리고 애초에 전쟁에 패한다고 해도 그 녀석 혼자 몸을 빼는 건 쉽겠지.”

그런 행동을 하냐는 건 두 번째 문제지만.

“흠. 그럼 조금 더 몸이 안정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알려야겠군요.”

“그래. 주변인들의 입단속만 확실하게 하면 문제는 없겠지.”

에이번은 그렇게 말하면서 책상 위에 있는 다른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레오의 편지입니까?”

“음.”

레오가 보낸 편지는 이번 일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과 앞으로 행동에 대해서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이미 답장은 보냈습니다. 저희로서도 나쁘지 않죠.”

“그래.”

“오히려 너무 많이 뜯어먹는 거 아닙니까? 그 녀석, 이제 돈 남아있으려나?”

아이단 자신도 뮐러의 내정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시간이 흘렀다지만 대충 예상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흥. 이 정도의 대가는 받아야 나나 보랭이 나선다. 오히려 부족해.”

“그건 뭐……. 그래도 자식이잖습니까?”

“이제는 같은 백작이다. 귀족으로서 동등한 관계다. 오히려 편지의 내용에서 정에 호소하는 글을 썼다면 거절했을 거다.”

“아버지답네요.”

거기에 승리만 한다면 당분간 돈 걱정할 필요도 없을 거다.

“어쨌든 약속대로 순찰을 늘리도록 하겠다. 그 계획은 네가 알아서 하도록.”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떡인 아이단이 곧바로 자리에 일어섰다.

그걸 지켜보면서 에이번은 다시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 * *

­콰직!

주먹에 힘을 주자 과일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둥근 것이 터졌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붉은 피와 뇌수를 바라보며 토트 백작은 손에 묻은 것을 닦아냈다.

“더럽군.”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토트 백작은 고개를 돌렸다.

바람과 함께 타오르는 재의 냄새와 피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걸로 끝인가?”

으음.

분명…….

토트 백작은 혀를 찼다.

“기껏 먹은 마을인데 이렇게 없애다니. 손해야, 손해.”

성인식과 곧바로 열렸던 남부 귀족 회의에 참석한다고 전쟁을 멈춘 탓에 기껏해야 마을 몇 개만 얻었다.

회의가 끝나고 곧바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었지만…….

“영주님.”

­철컥!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가 토트 백작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버려진 시체가 그대로 짓눌려졌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예상대로 붉은 피가 있었습니다만, 그럴싸한 연구 자료는 없었습니다.”

“후.”

토트 백작은 기사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회의 이후 생각보다 붉은 피의 기술이 발달한 것을 알아차린 그는 곧바로 침략 사업을 멈췄다.

침략도 침략이지만, 우선 영지를 한 번 청소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솔직히 반 정도 기대하고 있긴 했다. 연구 자료를.

“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긴 했지.”

“……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기사의 눈이 뒤를 돌아봤다.

도시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인구가 있던 마을이었다.

그 마을은 이제 흔적도 없이 불태워지고 있었다.

토트 백작의 시선이 먼지와 연기, 불이 솟구치는 마을을 바라봤다.

“뭐, 맘대로 해.”

아직도 비명을 지르는 죄 없는 평민들을 학살하는 병사와 기사들을 보며 무덤덤하게 보던 토트 백작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돌아가십니까?”

“그래. 앞으로의 일정을 다시 짜야겠어.”

토트 백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머릿속에 이전에 만났던 뮐러 영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습게 볼 생각은 없었지만, 예상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범상치 않은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뮐러 영주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들었다. 성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겠군.”

“으음. 뮐러 영주가…….”

토트 백작 측근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토트 영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침략전을 펼치는 이유는 토트 백작 본인의 성격도 있지만, 나름대로 계산된 부분도 있었다.

애초에 최남단에 있는 이 땅엔 중앙 권력의 힘이 적은 것은 당연했다. 실질적으로 거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취급받는 건 토트 백작 가문뿐만이 아니며 이 근처 다른 가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뮐러 영지의 위치에는 아직 수도의 영향이 있을 것인데.

“자세한 건 들어가서 다시 이야기해야겠지만, 그래도 즐거워지겠군.”

토트 백작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평화에 찌든 수도의 귀족도 이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고, 지루한 남부도 재미있어지겠지.

“남은 놈들은 적당히 놀게 하고 뒷정리만 제대로 해. 그리고 곧바로 성으로 돌아와라. 우리도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다.”

“알겠습니다.”

붉은 피 청소는 적당히 끝냈다. 의심 가는 마을을 통째로 없애는 방식을 선택한 토트 백작은 등 뒤에서 들리는 비명과 피냄새를 뒤로 하고 토트 백작은 몸을 일으켰다.

강대한 마력이 그의 몸에 깃든다.

순수한 푸른색의 마력. 그 힘이 그의 굳건한 신체에 뭉치고 축적된다.

“먼저 가마.”

­쿠우우우웅!

그가 대지를 박차자, 그 곁에 서 있던 기사가 휘청거린다.

강하게 찍은 땅은 거대한 구멍이 파일 정도로 강한 충격을 주면서 동시에 그 반동을 이용해 하늘을 가르며 높게 치솟는 그는 마치 미사일처럼 도시를 향해 쏘아 날아갔다.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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