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남부 귀족 회의 3
* * *
“진정한 남부의 맹수는 뮐러 영주, 그대이군.”
그리누치 후작은 눈을 감았다.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행동하는 것뿐입니다.”
고귀한 귀족이라는 탈을 쓴 야만의 세계.
얕보이면 안 된다.
약한 것조차 명분이 되는 세계다.
무엇보다 데리고 있는 평민의 수, 신앙, 충성. 그에 의해 힘의 강약이 바뀌는 세계다. 그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극적이진 않다고 해도 그것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영원불변의 힘이 된다.
대표적인 것이 프란츠고, 바흐니아이며 브리네어다.
“남부는 물론 수도. 아니, 이 나라 전체가 휘말리게 될 걸세.”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저는 멈추지 않습니다.”
이미 이 회의를 시작으로 말려들기 시작했다.
다른 귀족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토트 백작은 멈추지 않겠지. 그를 시작으로 영지 내 붉은 피를 찾기 위해 움직일 귀족들이 많아지겠지.
“죄 없는 평민들이 많이 휘말리겠지.”
“저의 백성이 아닙니다.”
단호하게 말했다.
애초에 그 죄 없는 평민들을 지키는 것이 귀족의 의무이며….
“자신의 죄 없는 평민들을 토벌하는 귀족. 의무를 다하지 못한 귀족을 귀족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후우.”
내 말에 그리누치 후작이 한숨을 쉬었다.
“황금사자의…… 프란츠의 아들답군. 그게 자네의 목적인가?”
“그것도 있지만, 애초에 원래 그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나도 아버지처럼 전쟁에 미친 놈…… 말이 좀 심하네. 어쨌든 전쟁광도 아니고.
“그럼 대체…….”
“저도 아직 생각중이니 자세한 건 다음에 말씀드리죠.”
웃으면서 말하자 그리누치 후작도 더 이상 말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건지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바꿨다.
후작 역시 수도의 귀족이지만 어디까지나 중계인의 역할을 철저하게 하는 것 같다.
후작이 이곳까지 온 진짜 이유.
“수도, 궁정에서는 그대를 이용하려고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대에게 작위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 나오고 있었지.”
“작위라.”
알리나 어스레인처럼 기사 작위가 아니라 진짜 작위인가.
후작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프란츠나 보랭도 그 일에 협력적이지. 이번은 꽤 수월하게 진행됐네. ……칙서다.”
덜컥!
그 말에 의자에 일어나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위대한 브리네어. 영원하고 불멸할 위대한 승자가 알리니. 승리와 영광의 황금 사자. 그 두 번째 자식이며 푸른 방패로 이 땅을 수호한 철벽의 땅을 지배하는 푸른 피, 레오릭 프란츠는 받들어라.”
“받들겠습니다.”
품에서 꺼낸 상자에서 서신을 꺼낸다.
그 서신도 범상치 않다. 마정석의 가루로 만들어진 서신에는 그분의 마력이 깃들어있다.
브람스의 왕.
브리네어 일족의 지배자.
철벽의 왕족. 완고한 난쟁이. 꿇지 않는 브리네어.
“바스티앙 브리네어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백작의 위를 하사한다.”
쿵!
서신에 깃든 마력이 흔들리며 강철의 망치가 땅에 떨어졌다.
그 망치 위로 손바닥을 펼쳐 상처를 낸다.
나의 마력이 깃든 피가 주르륵 흐르며 망치 위로 떨어졌다.
우웅!
강철의 망치는 크게 한 번 진동하니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에 감돌던 브리네어의 마력이 다시 망치로 모여들며 서신을 펼치고 있던 그리누치 후작의 앞으로 날아간다.
우우우웅!
기묘한 소리와 함께 펼쳐진 서신 위로 이동한 강철의 망치는 서서히 그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 시작한다.
서신으로 완전히 들어간 망치. 주변에 깃든 브리네어의 마력도 서서히 사라지면서 조용해진 방 안에서 마지막까지 서신을 바라보던 그리누치 후작은 고개를 끄떡였다.
“……됐네.”
“감사합니다.”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한 표정의 후작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제 그가 서신을 다시 왕에게 건네주는 것으로 서임은 끝난다.
“어스레인 공작 각하께서도 알려주셨겠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은 일시적인 작위 수여. 새로운 성을 얻기 위해서라도 수도로 와야 할 거세.”
“네. 그러도록 하죠.”
원래라면 더 일찍 가야 했고, 백작 작위 수여도 직접 왕에게 받을 예정이었다.
성인식과 붉은 피 때문에 연기되었고, 불안한 정세에 일단 작위만 수여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솔직히 지금도 그리 땡기진 않지만.
새로운 이름도, 작위도. 나 스스로 칭하면 이미 주변에서 받아질 것이다. 그저 굳이 수도, 특히 왕족과 관계를 악화시킬 이유가 없으니까 이렇게 하는 것뿐.
영지를 얻은 나의 마력은 이제 백작이라는 작위를 칭해도 문제없을 정도로 강해지고 있다.
그런 나를 보며 그리누치 후작은 안타까운 듯이 입을 열었다.
“부디 큰 혼란이 없길 바라네.”
걱정스러운 말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후작님.
날 보며 그렇게 말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주사위는 굴러 갔으니까요.
* * *
그리누치 후작이 떠나고.
알리나 어스레인이 나타났다.
“작위를 받았지?”
“백작입니다.”
“훗.”
사적인 자리라 곧바로 말을 놓는 그녀는 맞은편에 앉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누님이시다. 그리누치 후작에게 준 것과 마찬가지로 차를 준비했다.
“술이 좋다만.”
그렇게 말하면서 새빨간 입술을 핥는 모습은 매혹적인 모습이다. 하는 말은 대낮부터 술 마시려고 하는 인간이지만.
“참아주시길 바랍니다.”
“뭐, 그렇게 말한다면야.”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고개를 끄떡인다.
입에 맞나보군.
“그래서 지금은 아직 레오릭 프란츠 백작인가?”
“그렇게 됐습니다.”
“하하. 새로운 혈통의 탄생이군. 몇 년 만이지? 기나긴 시간 새로운 귀족의 탄생에는 언제나 혼란이 함께해왔지.”
혼란이라고 해봤자, 결국 전쟁에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폐하께서 새로운 성을 하사해주시겠군.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 폐하께 미리 말해놓겠네.”
“음, 괜찮습니다. 딱히 생각하고 있는 건 없습니다.”
헬리오스나, 아폴론…… 막 이런 단어가 머릿속을 스치지만, 굳이? 만약 내가 아닌 다른 현대인이 있다면 좀 쪽팔리잖아.
“그러나 이제 백작이라면……, 나와 별 차이가 없군. 사적인 자리에선 말을 놓지 그래? 그대와 나의 사이가 아닌가.”
네? 무슨 사이인데요.
내 시선에도 알리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받고 있다.
뭐, 그런 곳에 예민한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까 상관은 없나.
실질적으로 그녀는 나처럼 독자적으로 자신의 마력을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스레인 가문과 흡사하지만, 가문에서 벗어나 홀로 행동하고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녀의 명예 훈장이나 기사 작위는 말 그대로 당장 백작이라는 지위를 얻어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마력의 힘을 생각하면 후작을 노릴 수 있지 않을까.
그녀가 영토를 가진다면 진작 위를 노릴 수 있겠지.
“그럼 사적인 자리에선 조금 편하게 대하겠습니다.”
“그래.”
내 말에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짓고 있다.
그건 그거고 하나둘씩 떠나는 귀족들 사이에서 그녀는 아직 여기에 머무르고 있다.
“계속 머무르신다면 내성에 괜찮은 곳을 마련해두겠습니다.”
“됐어. 지금 있는 곳도 나쁘지 않아. 그리고…… 편하게 하래도?”
그녀의 말에 난처하게 웃었다.
“내가 불편한가?”
조금 상처 받은?
어두워진 안색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닌데…….
“저보다 연장자이시니까요.”
연상에게 말 놓는 건 좀.
평민도 아니고. 같은 귀족인데.
“…………….”
“자, 잠깐 알리나님! 마력, 마력을 좀! 진정하세요! 악! 집 무너집니다!”
* * *
진심으로 화난 듯 한 알리나 어스레인을 진정시키고 결국, 사적인 자리에서 말을 놓는 거로 합의했다.
그레이스 누나 말고 다른 누나가 생길 줄이야. 일단 제일 큰 누난가?
……이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정보겠지.
“레오릭님?”
“아. 왔군. 그래서 어떻게 됐지?”
성인식이 끝나고, 회의가 시작되기 전 은밀하게 파견한 지크가 돌아왔다.
지크만이 아니다.
세린, 포티아, 리앤, 유미. 그뿐만이 아니라 트리아나에 말해 믿을 수 있는 평민과 이자벨 밑에서 일했던 모험가들까지.
제일 중요한 건 입단속과 실력. 그걸 철저하게 테스트해서 뽑은 집단을 파견했다.
목적지는 다양하다.
쿨레토 자작의 영지. 라슨 남작의 영지. 그 외에도 가까운 편에 속하는 영지에 아주 자연스럽게 파견한다.
기사들은 주로 은밀 행동을 하고 마력이 없는 자는 정식적으로 도시로 들어가 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아슬란 영지와 라슨 영지에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래?”
예상대로.
수상한 자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확실하다고 할 수는…….”
“알고 있어. 어디까지나 중요한 건 그 단서니까.”
놈들의 특성상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리는 순간 곧바로 그 지부를 버릴 놈들이다.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다, 진짜.
“보고해. 정확히 어디가, 제일 수상하지?”
노릴 수 있는 곳은 아직 한 번에 한 곳.
병사의 질은 모를까, 양을 강제로 늘릴 수는 없다.
그러니 시비를 걸어야 할 곳을 말해라.
“……꿀꺽.”
내 시선에 약간 굳은 얼굴을 한 채로 지크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걸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네, 네 이놈! 레오릭 프란츠!”
아슬란 영지의 주인이자 오랜 시간 그 땅을 지배해온 아슬란 남작은 그야말로 흉악한 귀신의 얼굴을 한 채로 책상을 강하게 내려찍었다.
콰직!
푸른 마력에 깃든 주먹이 내려찍자, 그걸 견디지 못한 책상이 굉음을 내며 무너진다.
“이, 이놈이! 감히! 새파란 애송이가! 애송이가 감히!”
“여, 영주님!”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집무실에 모여 있던 가신들은 아슬란 남작이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서신을 바라봤다.
[……이며 이번 백작으로 임명된 레오릭 프란츠 백작께서 말씀하시길 이번 뮐러의 충실한 가신이 된 로베르트 게오르크가 눈물을 흘리며 읍소하여 백작님에게 아뢰길 이전 게오르크 가문의 땅이었던 아슬란 영지 내에 있는 게오르크 분지가 사실 아슬란 가문의 비열한 수술로 인한 불명예스러운 수작으로 아슬란 영지에 편입되었다여 하였소. 이 사실을 아뢰자 백작께서 가신을 딱하게 여기셔 게오르크 분지를 정당한 명분 아래 다시 회수되기를 바라니 아슬란 남작은 이것을 필히 귀를 기울……]
“이노오오오오옴! 레오릭 프란츠으으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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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위.
남부 지방의 자세한 지도 위에 손수 조각한 체스 말을 올려놓았다.
아슬란 영지 위에 있는 폰을 손가락으로 넘어트리며 나는 웃었다.
툭!
“명분은 만들면 그만이지.”
자.
전쟁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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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