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남부 귀족 회의 1
* * *
창문 너머로 태양 빛이 느껴졌다.
이런 몸이 되고 나서 태양 빛을 느끼는 것에 더욱 민감해졌다고 해야 하나.
좀 더 친숙해진 느낌이 든다.
그래서 요즘 늦잠도 안 하고, 아침마다 상쾌하게 눈을 뜨는 편이다.
“으응…….”
일어났지만, 눈을 뜨기 싫어 멍하니 딴 생각하다, 내 품에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이 드는 그것을 꽉 껴안았다.
“레오님…….”
부드럽고 뭉클한 감촉. 따뜻한 체온.
전신에서 느껴지는 이리나의 감촉에 입가가 움직인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잘 잤어?”
“네…….”
아직도 잠기운이 있는지, 멍한 목소리의 이리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체내 시간을 봐서는 아침 회의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
조금 더 이렇게 있자…….
* * *
“오늘 이렇게 자리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연회장.
성인식으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나는 동안 곧바로 사람들을 투입하여 전부 다 치운 후 회의실을 만들었다.
그 상석. 대표 자격으로 앉아 회의실로 둔갑한 내부를 둘러 봤다.
수많은 귀족이 자리에 앉고 있다.
이리나가 데리고 온 자들은 자격이 부족하다.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은 남부의 귀족일 것. 그리고 수도를 비롯한 각 지방의 대표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작위가 높은 자들만이 가능했다.
예를 들면 수도의 귀족으로 많은 사람의 중개역으로서 오래 활동해 그만한 인맥과 명성을 쌓은 그리누치 후작.
“수도에서도 뮐러에서 발견된 그 약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소.”
조용한 회의실에 노년의 신사. 그 말이 어울리는 그리누치 후작의 목소리가 퍼졌다.
그 말대로 붉은 피가 만들어낸 약에 관한 흥미가 단순히 남부의 일이 아닌, 나라의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 말을 들으며 피식 웃는 것은 토트 백작.
남부 최남단에 위치해 급격하게 그 세를 늘리고 있는 남부의 맹수라고 불리는 남자의 존재감에 불편한 얼굴을 하는 남부의 귀족들이 있다.
그 정도로 급격한 세력의 확장. 계속해서 이어지는 전쟁. 지금 그의 위치는 아슬아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의 세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뜻하겠지.
“흠. 실제 흥미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것이 얼마나 뛰어난 성능을 가지는가에 따라 전장의 판도가 바뀔 테니.”
“굳이 전쟁의 이야기가 아니라도 그 약이 가진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을 수 있겠소?”
동부에서 온 중년의 남자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막말로, 그 힘의 부작용만 어떻게 한다면 극단적인 이야기로 모든 평민이 마력을 가질 수 있지. 그 힘은 그만큼 위험하단 소리가 아니겠소?”
킬리아스 후작. 동부의 철혈 귀족.
극단적으로 강압적인 정치. 동부의 모든 귀족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자. 단, 본인은 동부의 지배라는 위치가 마음에 드는지 수도, 왕족에는 꽤 많은 뇌물을 바치며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하는 말만 들으면 극단적인 마력 우월주의자답군.
“그 또한 좋지 않겠나, 킬리아스 후작. 마력을 가진 자가 많아진다면 쓸 말이 늘어나는 일이 아니겠나?”
북부 대공. 카인 노던 크로체스 대공.
짙은 회색의 머리카락과 은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
북부에 있는 크로니스라는 왕국의 왕족이었던 자. 브람스 왕국과 전쟁으로 대공이 되어 왕국의 일원이 됐다.
그 넓은 북부의 절반은 그의 땅이다.
와. 그 유명한 북부 대공이 직접 행차하시다니. 그만큼 이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그래도 직접 오는 것은…. 물론 그의 나이는 젊은 편이라 그의 자식은 아직 꼬마라는 소문은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믿을 수 있는 가신을 보내는 것도 있는데….
다행인 건 성인식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행사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한 그는 집 한 채를 빌린 후 그대로 칩거. 회의가 시작된 오늘에서야 등장했다. 사실 그 정도의 남자가 참가하는 건 우리 쪽에서도 부담스럽고.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말하지만, 어쨌든 이 자리까지 행차하는 걸 보면 그건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런 크로체스 대공의 말에 킬리아스 후작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흥. 밑에 놈들이 마력을 얻어 봤자 쓸 곳이 뻔하지 않겠소? 괜한 분란을 일으키는 것뿐이오.”
“……후후.”
“뭐가 우습소?”
“아니. 반란이 일어난다면 그러한 통치를 했다는 소리가 아니겠나?”
“뭐요?! 북부 대공이면 다요?!”
후작과 대공. 그들의 가벼운 신경전.
그런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마지막 거물, 알리나 어스레인은 전과 비슷한 정장을 입은 채 자리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던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논점이 흐려지고 있지 않습니까?”
“크흠.”
그녀의 말에 후작은 이를 살짝 갈더니 고개를 돌렸다.
알리나 어스레인은 전체를 한 번 훑어본 후 나를 바라봤다.
“약품도 중요하나, 문제가 되는 건 그 붉은 피, 퍼플이라는 놈들 아니겠습니까?”
“흥. 그래 봤자 결국은 붉은 피. 지식도 지혜도 없는 반푼이가 무얼 하겠습니까.”
아. 두꺼비처럼 생긴 귀족.
저놈도 있었구나.
다만 볼트론 백작이 말하자 분위기가 식어버렸다.
모두 짜게 식은 듯한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뭐, 뭐요? 틀린 말 했소?”
당황한 볼트론 백작이 말하자 그리누치 후작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둘을 보던 알리나 어스레인은 피식 웃더니 이야기를 진행했다.
“퍼플이라는 붉은 피가 영지에 숨어 인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소문은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표면에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죠.”
그 말을 이어서 그리누치 후작이 한숨을 쉬었다.
“실제 이전 전쟁에서 왕국의 혼란을 틈탄 그들은 수많은 테러와 혁명의 이름으로 온갖 만행을 저질렀소. 그중 하나가 바로 인체 실험이었고.”
“그 결과가 있었습니까?”
내 말에 알리나가 말했다. 공적인 자리라서 그런가, 그녀는 말을 높이고 있었다.
“확실히는 알 수 없습니다. 전쟁 당시 그들의 전력은 소수의 마력 보유자들뿐이었으니까요. 결과가 나오기 전에 조직이 망했는지, 애초에 실험 자체가 잘못됐는지.”
전쟁으로 인해 남은 흔적도 없었다.
극단적인 귀족은 그들이 있다는 소문이 나온 마을 자체를 파괴한 적도 있다고 한다.
남은 자료가 없겠지.
“그러나 그 흔적이 최근 발생하고 있습니다. 뮐러 영주.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좋습니다.”
알리나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떡였다.
내 목적이기도 하니 알려주지 않을 일이 없다.
영지 내에 붉은 피가 있다는 불명예? 명예가 밥 먹여주나?
거기에 트리아나에 미안하지만, 실질 그 불명예는 뮐러 가문이 받는 일이기도 하다.
“시작은 불쾌한 마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불쾌한 마력?”
“네. 아직 경험이 없는 상태라 확실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죽음이나 그와 비슷한 분류의 마력이라고 하기엔 그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불쾌한 마력이었습니다.”
“흐음.”
내 말에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탐탁지 않는 표정을 짓는 볼트론 백작도 이번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무리 멍청해도 이걸 방해하지는 않겠지.
“이 마력에 대해선 차후에 보여드리기로 하고, 사건의 개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사건을 설명한다.
“흠. 과연…….”
조용해진 회의실에 알리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지막에 사로잡았던 그자는 어떻게 됐지?”
“살아있습니다.”
“호오.”
내 말에 크로체스 대공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물론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겠군.”
“하하하.”
크로체스 대공의 말에 웃었다.
당연하게도.
온갖 고문을 당한 놈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말 그대로 살아만 있는 상태.
“뭐, 죽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더 뽑을 정보가 있을까 싶지만, 혹시 모르는 경우니. 그러다가 가끔 정신 차리기도 한다는 말에 적당히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게 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눈살을 찌푸리는 남부 귀족들이 있지만, 토트 백작이나 크로체스 대공은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다.
“그래야지. 감히 남의 땅을 망친 놈을 고이 보낼 수는 없으니까. 마음에 들어.”
“감사합니다. 크로체스 대공 각하.”
“그래 정보는 뽑았소?”
토트 백작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뽑을 만큼 뽑았습니다. 클로에.”
“네.”
내 뒤 구석에 대기하고 있던 클로에가 종이 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그 뒤를 이어서 몇 명이 줄줄이 나타나 종이를 귀족들에게 넘겨준다.
“흐음.”
그 문서에 적힌 내용을 보고 그다지 밝은 표정을 짓는 자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그다지 유용한 정보는 없다.
“정말로 이것뿐인가?”
토트 백작은 문서를 책상 위에 던진 후 나를 바라봤다.
그 말에 어깨를 으쓱한다.
“그들은 간부들조차도 서로 연락하지 않습니다. 오직 정해진 날짜만, 중계인 이라는 존재를 통해 보고를 받고, 임무를 수행한다. 제가 그를 사로잡은 이후로는 당연하겠지만 기존의 연락 체계는 전부 쓸모없어졌죠.”
“하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건 아니군.”
크로체스 대공의 나지막이 말한 후. 한 귀족이 강하게 책상을 쳤다.
쾅!
“가, 감히 나의 명예를 더럽히는 건가!”
“더럽히다뇨.”
화를 내는 남자. 라슨 남작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나를 노려다 봤다.
“그럼 어찌 이런 망언을 적는가!”
“사실일 뿐입니다.”
그 남자, 퍼플의 나인이라고 밝힌 자는 라슨 남작의 영지, 라슨 도시에서 왔다는 것뿐.
“뭐, 진정하게 라슨 남작. 붉은 피는 남부 지방 전체에 퍼졌다는 건 기정사실. 어쩌면 내 땅에도 있을 수 있다. 이제부터는 그렇게 생각해야 해.”
“그, 그러나! ……크흠. 알겠습니다.”
라슨 남작은 토트 백작의 말에 눈을 찌푸리고 나를 한 번 노려보더니 자리에 앉았다.
뭐, 그가 관련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인이 그곳에서 왔다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수상한 것이 하나 더 있다만, 그건 여기서 대놓고 말할 수 없으니…….
다음에 이야기하고.
“그럼 이젠 실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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