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찬란한 성인식 2
* * *
많은 귀족이 도착하고, 이제 슬슬 시작해야 하는 때가 됐다.
늦은 귀족이야 뭐, 어쩔 수 없지.
또각, 또각.
하녀들과 시녀들이 막 달리는 복도를 조심스럽게 걷는다. 귀족인 내가 피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앞은 성인식의 주인공, 이리나 보랭이 준비하는 대기실. 그 준비를 위해 일하고 있는 애들을 방해할 수는 없지.
더군다나 원래라면 성인식이 끝날 때까지 여기는 남자가 접근할 수 없다. 그래서 온갖 짐을 들고 돌아다니는 애들도 전부 여자들이고, 경비를 서고 있는 애들도 여기사들이다. 지금도 원래라면 막아야 하는 애들이 내 얼굴을 보더니 그냥 내버려 두고.
“이 이상은 접근할 수…… 레, 레오릭님!”
“어.”
여기서 날 막을 줄이야. 누가 막았나 했더니 시녀로 보이는 애다. 나름 마력도 꽤 있고.
어디서 많이 봤는데.
확실히…….
“아, 이리나의 시녀군.”
“엘레노아입니다.”
이름을 말하며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너무 저자세 아니야?
“됐어. 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이리나는?”
“안에서 준비 중입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음. 부탁하지.”
내 말에 곧바로 허리를 숙이고 문 안으로 들어간다.
잠깐 기다렸다가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바로 보일 줄 알았는데, 큰 병풍이 있다.
“안돼요? 성인식의 레이디는 진정한 무대에서 봐야죠.”
“하하. 그런가?”
병풍 너머에 이리나의 짓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꾸미고 있는 도중의 모습은 보여주기 싫은 듯했다.
한창 바쁜 시간이긴 하다. 지금도 시녀와 하녀들이 계속해서 움직이며 화장품을 비롯해 보석함이나 액세서리, 옷들을 들고 다니고 있다.
“바쁜 와중에 미안하네.”
“아니요? 괜찮아요. 어차피 컨셉은 다 정했으니까, 마지막 확인하는 중이었어요.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음. 별거 아니고.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진행하기로 했으니까. 미리 준비하라고.”
“아, 네. 그거 말이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
워낙 평소 연회 같은데 자주 참석하고 스스로 주최하는 모임도 많으니까…. 괜찮은가 싶어서 왔지만, 괜찮은 듯하네.
“그럼 먼저 갈게.”
“네. ……고마워요, 레오님.”
내 배려를 눈치챘는지, 고맙다는 인사에 머리를 긁적였다.
부끄럽네.
문을 닫고 연회장으로 향하기로 했다.
* * *
후우우.
이리나는 심호흡했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응. 괜찮아.”
엘레노아의 걱정 어린 시선에 이리나는 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괜찮아졌다.
역시 레오님.
날 위해서 굳이 시간을 내서 찾아온 다정한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머나. 이제는 정말로 레이디가 되셨네요.”
“뭐야? 여태는 레이디가 아니었다는 거야?”
“매일 교양 수업은 도망치고, 모험이라면서 나가 놀았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엘레노아의 놀리는 듯한 말에 째려봤다.
그런 이리나를 귀엽다는 듯이 웃으면서 엘레노아는 곧바로 가지고 온 보석함을 열었다.
“아직 준비는 덜 됐어요. 자, 움직이지 마세요.”
“그래.”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갑갑하게 꾸미진 않았지만, 오늘은 다르니까. 생에 한 번 있는 성인식…… 그리고 레오님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자리다.
그러니까 참아야지.
“방심했군요, 아가씨! 흐읍!”
“꺄아아아아아악!”
허리가 조이는 고통에 그만 비명을 질렀다.
“에, 엘레노아……! 너무 강하게 조이는 거 아니야?!”
“이 정도는 해야죠! 이전처럼 대충대충 나서는 건 안 돼요! 적어도 오늘만은! 백작 부인님이 저에게 명심하라고 얼마나 이야기했는지 알아욧?!”
“아흑! 주, 죽을 것 같앗!”
“평소에도 하셨으면 이 정도는 참으셨어요!”
코, 코르셋이 없어도 완벽한 몸매라고 자랑할 수 있는데…!
슬쩍 뒤를 돌아보니 이제는 아예 두 명이 붙어서 각자 끈을 잡아당기고 있네!
“죽어! 죽어! 너, 너너! 샬롯 맞지? 언제 나타났어?!”
“오랜만에 뵙네요, 아가씨! 그건 그거고 한 번 더 당깁니다!”
“꺄아아악! 안돼! 나 죽어! 엘레노아! 너도 정말 이러래?!”
“아가씨!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지 마세요! 저도 합니다?”
“꺄아아아아!”
토할 것 같아앗!
* * *
“……비명이 들린 것 같은데?”
착각인가.
아니, 분명 들린 것 같지만…….
뭐, 아가씨가 꾸미는 거에 이 이상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안 되겠지.
나 역시 성인식 준비를 위해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 * *
이번에 준비한 건 진짜로 별거 아니다.
애초에 이제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
뮐러에서 어느 의미 영주가 있는 내성보다 화려한 장소인 연회장. 아무리 뮐러라고 해도 이런 장소는 제대로 준비되어 있다.
물론.
“그, 그래도 전부 관리는 잘 해서 새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솔직히 전 이런 데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고풍스러운 느낌이 드네요.”
어떻게든 커버치려는 트리아나랑 돌려서 말하는 클로에.
“그럼 뭐해요! 모두 한 세대 이전 유행하던 물건들이에요! 싹 다 뜯어서 리모델링 해야겠어요!”
“모두 집합!”
샬롯과 네리아는 기겁하며 건물을 아예 뜯어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에 상처받은 얼굴인 트리아나와 그걸 위로하는 클로에 등 뭐, 재미있는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새로 리모델링한 연회장은 요즘 수도나 보랭 가문에서 유행한다는 장식품과 나를 상징하는 태양과 빛이라는 컨셉을 섞어서 새로 꾸민 연회장. 거기서 나는 손님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맞이한 귀족들도 있지만, 오늘 낮에 오거나 시간에 맞춰서 오는 귀족도 있기 마련. 예전 내 성인식에 그레이스 누님이 한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그 역할을 맡았다.
“뮐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뮐러 영주. 과연…. 이전에도 뮐러에 온 적이 있으나, 그때와는 정말 전혀 달라진 모습입니다.”
“과찬입니다.”
“보랭 영애가 어째서 여기에서 성인식을 하고 싶었는지, 이제는 알겠소. 남부 지방의 새로운 명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군!”
“하하하! 고맙습니다!”
분명 서로 소개했지만, 이름이 뭐더라. 기억이 애매한 귀족과 적당히 대화하고 얼굴에 금칠도 좀 해주고 잡담을 나눈다.
“소문으로 들었지만, 실제로…….”
“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일 또 새로운 자리를 마련할 생각입니다.”
“아, 과연. 기대하겠소, 뮐러 영주.”
“오늘은 그저 이 자리를 축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하. 내 과한 걱정을 한 모양이오. 그럼 그러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적당히 탐색전을 펼친 후에 나오는 본론.
붉은 피에 관한 이야기. 새로운 병기. 거의 필수로 물어보는 이야기들.
그리고 내 생각보다 더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다른 것이 아닌.
“그러고 보면 뮐러 영주. 그대 역시 슬슬 결혼해야 하지 않겠소?”
“네?”
“내 좋은 처자를 알고 있소. 그대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동부의 브레테인 남작가라고 혹시 아시는지?”
“아……. 동부의 브레테인 남작 가문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잘됐군! 그 가문의 영애가 때마침 나이가 찼고, 그 미색이 훌륭해 남부까지 소문이 날 정도니 뮐러 영주, 그대와 어울리는 한 쌍이 되지 않겠소?”
“아, 그 이야기는…….”
“어허! 남부의 새로운 별이 될 뮐러 영주와 동부 사람과 결혼이라니. 안 될 일이지. 그보다 이번에 성인이 된 내 친척 중에 참 이쁜 아가씨가 있소.”
“음.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하하하.
애써 웃으며 나를 둘러싼 아저씨들의 무리에서 벗어났다. 무슨 나에게 꿀이라도 발라졌나. 결국, 적당히 대답만 해주고 곧바로 자리를 피했다.
내가 없으니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 봐라.
“아니, 식겁했네.”
결국, 테라스로 자리를 피했다.
일단 이리나의 등장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 여기서 좀 쉬어야겠군.
“이리나의 성인식인데 여기서 결혼 이야기라니.”
들고 있던 잔에 담긴 술이 어느새 미지근해진 걸 느끼고 마력으로 차게 식히면서 곧바로 들이켰다.
“그만큼 그대가 꿀 발린 사과처럼 매력적이단 소리겠지.”
“…….”
어느새 등 뒤에 나타난 기척에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이제야 느껴지는 기척. 아무리 다른 귀족들이 많아 마력을 파악하기 어렵다지만 이 거리까지 가까워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컨트롤.
그리고 느껴지는 마력의 기척은 최근 느껴본 적 있는 기척이었다.
“……도착했다는 연락은 들었지만, 회장에 들어오시진 않으시군요.”
“훗.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빛내는 자리에 굳이 가고 싶지 않군.”
“그렇습니까? 그래도 기껏 찾아오셨으니……. 뮐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짙은 주황색? 아니면 연한 갈색인가. 연회장에서 비추는 빛으로 인해 그 색이 애매해지는 어둠 속 테라스 깊숙한 곳에 그녀가 있었다.
웨이브가 짙은 풍성한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한 듯한 모습. 머리카락으로 한쪽 눈이 가려졌지만, 반대쪽 짙은 아이라인이 그려진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가 있었다.
“후우우…….”
곰방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기다란 파이프 담배를 손에 든 채로, 남성복이라 할 수 있는 정장을 입고 있는 여자.
그리고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한 번 느껴본 적이 있는 거대한 마력.
“알리나 어스레인님.”
“반갑군. 뮐러 영주.”
뿌연 연기 속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