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찬란한 성인식 1
* * *
주인공인 레이디도 도착했다.
곧바로 시작하지 않지만, 슬슬 다른 곳에서도 귀족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뮐러 영주. 저는…….”
“아, 알고 있습니다. 트로이첸 남작님 아닙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런, 만난 적이 있었습니까?”
“하하하하. 프란츠에 한 번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멀리서 뵌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땐 정식적으로 인사하지 않았습니다만.”
“아…! 그때군요. 벌써 10년이 넘은 일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다니.”
진짜로 기억하진 않지만, 프란츠에서 보낸 목록들과 옆에서 수행 중인 클로에가 귓속말로 알려주면 적당히 상대를 추켜세우면서 인사한다.
나뿐만이 아니다.
“오, 뮐러 양.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군요.”
“네, 반갑습니다. 쿨레토 자작님. 오랜만에 뵙네요.”
나 혼자 상대했으면 피곤했겠지만, 다행히 트리아나가 있다. 트리아나 역시 제대로 작위를 계승 받지 않았기 때문에 미묘한 취급이긴 하지만 어쨌든 정식적인 귀족의 혈통을 가진 여자. 마중 나와서 인사할 자격은 된다. 물론 오래전부터 봐왔던 남부 지방의 귀족들만이 가능한 일.
예를 들면.
“흥. 쓸데없이 빛깔만 나고. 겉보기 좋은 마석에 불과하지.”
뭐냐, 그건.
빛 좋은 개살구, 뭐 그런 뜻인가?
어째 딱 봐도 악덕 귀족 같은 중년 사내가 거드름 거리며 나타났다.
뭐냐, 저놈은.
“수도에서 온 볼트론 백작인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긋이 바라보자 옆에서 클로에가 속삭여준다.
아, 확실히. 초대장을 보내놓긴 했지.
땅은 없지만, 그만큼 관리하는 사업이 많은 귀족이라 부호라고 했던가.
아, 짜증나.
“흥. 이딴 촌에 와서 굳이 성인식을 열겠다니, 보랭 백작도 딸 때문에 고생이 많군.”
천천히 걸어오면서 시부렁거리는 말들 보면 인상 찌푸리는 이야기밖에 없다. 주위에 있던 귀족도 슬금슬금 자리를 벌리고 있다. 그들도 어떻게 생각하든 대놓고 저렇게 말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기도 하고. 무엇보다 남부 지방의 귀족과 수도의 귀족이라는 점도 있겠지.
저거는 트리아나가 나서면 좋은 말 나오지 않겠지.
“반갑습니다. 볼트론 백작님.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흠. 뮐러 영주? 반갑군.”
명백한 하대에 움찔거리는 우리 가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예의에 어긋나지.
이 세계엔 어느 쪽이냐면 영지를 가진 귀족의 힘이 강한 세계다. 물론 어스레인 공작 같은 가진 영지 없이 살아도 강한 가문도 많긴 하지만. 이건 명백한 예의에 어긋나는 일.
가신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귀족도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수도 귀족이 와서 이 지랄 하는 건 보기 좋지 않거든. 나를 상대로 적당히 대화하면서 탐색전을 펼치던 남부 귀족도 이 순간만큼은 내 편이 된다.
든든하네.
“뭐. 그래도 볼만한 것이 많아 보이니, 내 기대하지.”
“……물론 백작님의 식견에 부족하지 않은 볼거리가 많이 있으니, 기대해주시죠.”
“흠. 그럼 안내하시…….”
“지크.”
마치 아랫사람처럼 말하는 볼트론 백작의 말을 끊었다.
“평소 지내는 곳이 없이 떠돌아다니시는 분이니 좋은 방으로 안내하도록.”
“무, 뭐?”
내 말에 이해하지 못한 듯이 눈을 깜박거리는 두꺼비 같은 모습을 보며 웃었다.
“자기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쉬십시오.”
“뭐, 뭐어? 뭐라고?”
떠돌이.
땅 없는 작위 귀족 상대의 최고 모욕이라고 할 수 있는 말.
나도 절대 안 쓰겠지만, 얼굴이 새빨개져 가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바로 뒤에 있는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오, 이분은 기억난다.
“오오. 그리누치 후작님. 오랜만입니다.”
“하하하. 반갑소, 뮐러 영주. 예전 봤을 때 아주 어렸던 소년이었는데, 이제는 이렇게까지 듬직하게 크다니. 선대 프란츠 영주가 떠오르는군요.”
“하하하. 할아버님과 비견되다니, 아직 부족합니다. 그분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노년의 귀족. 마치 신사라는 단어 그 자체를 나타내는 듯한 모습의 귀족. 무엇보다 수도의 귀족이지만 다른 지방의 귀족들과도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궁에서 서신을 가져왔네.”
“……이거 참. 수고 많으십니다.”
궁, 정확히는 왕족의 사자 역할을 주로 하는 귀족이라는 것.
그리고 주위의 시선이 순식간에 쏠렸다.
응?
“너, 너너너!”
“아직도 계셨군요. 피곤하시지 않으십니까? 지크. 어서 안내하도록. 나는 후작님을 모셔야겠군.”
“네, 알겠습니다. 백작님. 이쪽으로.”
“네, 네가 이러면 무사할 줄 알고 있……!”
“하.”
쿵!
금색 눈동자에 빛이 일렁거린다.
“다시 한번 말씀해보시죠, 백작.”
“너, 너너너!”
콰직!
백작 주위의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명색의 백작이라는 건지, 버티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이건 좋은 태도가 아니긴 한데, 내 땅에서 시비 거는 것을 넘기는 것이 더 안 좋다.
“피곤하신 듯하니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하시죠?”
“크, 크윽!”
부들부들 떨리는 살덩이가 흉측하다.
추하기 그지없다. 이게 수도의 귀족?
볼트론 백작이 힐끔 옆에 있는 그리누치 후작을 바라봤지만, 후작님은 그저 고개를 흔들 뿐이다.
“두, 두고 보도록 하지…. 뮐러 영주!”
“흠.”
그래도 백작이니 내 마력으로 증폭시킨 중력 안에서도 걸음을 옮긴다. 그 모습을 보고 슬쩍 마력을 뺐다.
“윽!”
갑자기 정상이 된 중력에 비틀거리는 백작이 마지막으로 이쪽을 노려보다가 걸음을 옮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좋지 않소, 뮐러 영주.”
“죄송합니다, 후작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무라 하는 그리누치 후작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그때 옆에 다가오는 귀족이 있었다.
“그 돼지 놈이 제대로 말을 해야지. 남부를 깔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소?”
“이런…. 토트 백작님. 오셨군요.”
건장한 체격과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남자. 토트 백작은 남부 지방에 있는 4명의 백작 중 하나다. 백작의 작위를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격 자체는 우리보다 한층 달리긴 하지만, 최근 급격히 세를 확장하고 있어서 수도와 사이가 좋지 않다.
“그리누치 후작님 앞에서 말하고 싶지 않소만, 요즘 수도 귀족의 텃세가 심하오. 오만하기 그지없소.”
쩌렁쩌렁한 그 말은 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눈을 부라리며 말하는 백작은 일부러 이 장소에서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실제 주변 다른 지방 귀족들도 고개를 끄떡이고 있다.
그리누치 후작은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토트 백작님.”
“천만에. 자네 같은 젊은 영웅을 직접 눈으로 봐야 만족하는 성격이니 심여치말게. 아, 아직 말은 높이지 않겠네.”
그 말에 눈을 깜박였다.
꽤 직설적인 남자라고 들었지만, 이건 뭐 정면에서 처박고 있네.
토트 백작은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직접 보니 알겠군. 머지않은 미래에 말을 높여야 할 것 같다면, 지금 미리 말을 낮춰서 불러야지 속이 풀려서 말이지.”
“하, 하하하.”
토트 백작이 쥔 어깨가 욱신거린다.
이게 단순한 악력이라 저항도 못 하겠고. 이 사람 운동이 취민가? 근육 봐.
눈이 마주치니까, 아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네.
“나중에 다시 한번 이야기 하고 싶군.”
“과한 칭찬, 감사합니다.”
히죽.
마지막까지 웃으면서 떠나는 토트 백작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곤란하군.”
“그리누치 후작님.”
조용히 서 있던 그리누치 후작이 한숨을 쉬었다.
주름진 눈가가 오늘따라 애잔하게 느껴졌다.
“갈수록 수도와 지방의 대립이 심해지고 있고, 붉은 피들이 암중에 암약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소. 사방이 좋지 않은 징조뿐이군.”
“……붉은 피라면 혹시 오늘 오신 이유도?”
내 말에 그리누치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처진 마력을 보면 역시 후작은 후작이라는 감상을 느꼈다.
“궁의 입장에선 그 괴물도, 새로 발견된 약품도 신경 쓰일 수밖에. 지금 밝혀진 부분이 있소?”
그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유감이지만 다른 지부를 습격해도 마땅한 증거품은 없다. 기초는 비슷한 부분에서 출발한 것 같지만 지부마다 서로 독자적으로 연구를 한 것 같다. 아예 상반된 이론이 적힌 문서도 있을 정도고.
“애초에 발견된 양이 너무 적습니다.”
이건 뭐, 실험하고 싶어도 헛수고가 될까 봐 함부로 실험할 수도 없고. 이 세계에 무슨 현미경 같은 초정밀 측정 도구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트라이 & 에러인데….
내 말에 그리누치 후작도 짐작은 했는지 고개를 끄떡였다.
“어쩔 수 없군. 일단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 봅시다. 뮐러 영주.”
“네, 알겠습니다. 후작님.”
툭툭.
서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곧바로 떠나는 후작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으음.
그래도 소문을 퍼트리길 잘했군.
토트 백작도, 그리누치 후작까지 오다니.
모두들 그것이 목적이겠지.
하하.
원한다면 주지. 난 내 일로도 바쁘고.
뮐러 영지에 있는 붉은 피는 싹 다 치웠으니, 이제 남은 건 너희들 영지에 있는 붉은 피들이다. 싸워라!
“미소가 나쁩니다.”
“크흠.”
옆에 있던 클로에의 말에 얼른 표정을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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