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절벽 위의 꽃은 5
* * *
“오……. 평화로운 풍경이네요.”
이리나가 창문 너머의 뮐러를 바라보며 말했다.
똑같이 시선을 돌려봤자 보이는 건 한 번 갈아엎어서 황폐해진 땅의 모습. 빈말로도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다. 이 시기에는 농부들도 대부분 쉬는 탓에 밭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싱긋 웃으면서 나를 보는 이리나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참, 고맙다. 그렇게라도 말해줘서.”
“헤헤… 하야야얏!”
내 말에 이리나가 방긋 웃었다. 좋단다.
뺨을 꼬집었다.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땐 서로 존댓말도 하고 매너도 지켰는데 이리나 이 애가 갈수록 거리를 좁히고 있다.
부담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나도 미인이 나 좋다고 덤벼드는데 거절할 마음이 드는 건 아니다 보니 너무 진도가 팍팍 나가고 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이야?”
“뭐가요?”
득실득실한 귀족 친구들은 그렇다 치고.
“정말 아예 여기에 살림 차리려고?”
“어머나! 살림이라니. 꺄아, 부끄러워요.”
말을 돌리려는 이리나의 탱글탱글한 볼을 잡아당겼다. 고무줄처럼 쭉 늘어난다.
“아파, 아파파팟! 레, 레오님, 아파요옷!”
“저거 뒤에 있는 짐 마차들. 아무리 선물이라고 해도 너무 과하다 싶었더니. 뭐? 책부터 시작해서 개인 가구랑 마음에 드는 옷, 보석까지 전부 챙겼다고? 마음에 드는 침대 매트, 이불, 베개도 있으니까 조심히 옮겨달라고?”
“하지만 그거 제 애착 이불, 애착 베개라서 없으면 잠들기 어려워요!”
“그게 자랑이니? 자랑이다, 참.”
“앗, 매일 밤 레오님이 안아주신다면 잘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이리나의 볼을 한 번 더 꼬집었다. 으갸갸갸 비명을 지르는 이리나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나와 결혼할 생각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도 문제다.
트리아나와는 사정이 다르다. 가문이 망했지만, 혈통은 살아있다. 지구에서 소설 같은데 나오는 가문을 멸망시킨 악적 밑에서 온갖 치욕을 당하는 클리셰 같은 부분이 이 세계에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상황이어도 혈통을 유지하는 것을 더 높게 쳐둔다.
와신상담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내 밑에서 일하고 있다고 해도 결혼 자체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나랑 합방하거나 첩으로 들어가도 그거 자체를 욕보는 사람은 없다.
“음, 그 이야기는…….”
덜컥, 덜컥!
하지만 이리나는 사정이 다르다.
뭐, 뮐러 영지의 주인이라는 내 입장. 같은 백작 가문의 격. 나쁘지 않은 입장이다. 그렇긴 한데.
“내 입장은 알고 있지?”
문제는 내가 꽤 특이한 상황이라는 것.
백작 가문이면서 독자적으로 마력이 진화하고 있다. 이미 영지 하나의 주인. 차남이라는 입장으로 가문에서 반독립.
물론 뮐러 영지에서 나오는 수익의 절반 이상이 프란츠와 보랭에 보내지고 있지만, 이것도 사정을 이야기하거나 차후 협약을 통해서 충분히 조절 가능한 입장이다.
물론 이걸 보면 이리나와 딱 좋은 입장이다. 서로 가문도 나쁘지 않고 외모도 마음에 들고 성격도 좋다. 나도 예전이라면 그녀랑 결혼하는 걸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에 또 연락 왔다.”
“으으.”
어스레인 공작의 여동생.
알리나 어스레인. 나이는 20대 후반. 사진 없으니까 초상화만 받았지만, 이 시대 귀족 가문 여자들의 초상화를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고.
그뿐인가.
왕국 내 단 둘뿐인 공작 가문 중 다른 가문에도 연락이 왔다. 문제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솔직히 좀 그렇다고 거절했고, 공작 가문이 그러다 보니까 선볼 거면 우리가 소개해줄까 하고 왕궁에서 중매에 관한 서신도 왔을 정도다.
몇 없는 후작 가문에서도 연락 왔다. 유감스럽게도 맞는 나이의 딸이 없으니 괜찮은 마력을 가진 아가씨를 입양해서 연을 맺는 건 어떻냐고.
위가 그러니까 아래는 자중하는 것 같지만, 지금 성인식 초대장을 보낸 가문에서 온 답장 대부분이 내 딸도 같이 갈 건데 한 번 만나보지 않겠냐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거, 남부 지방만이 아니라 수도를 비롯한 다른 지방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남부 지방이 워낙 프란츠와 보랭이 확 잡고 있으니 어떻게든 영향력을 넓히려고 하는 다른 가문들의 연락에 주로 대응하고 있는 트리아나가 지칠 정도다.
이제 두 가문의 영향력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내 입장에선 그리 나쁘지 않은 사이인 프란츠나 보랭보다 다른 가문과 인맥을 튼튼히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니까 윌리엄 백작님도 이리나가 이렇게 돌아다니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굳이 말리지 않은 걸 보면 이리나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둔 게 아닐까.
“백작가 딸내미가 남의 영지에서 성인식 하는 것도 문젠데, 거기서 계속 지낸다고? 너, 결혼 못 한다?”
“흐흥. 그럼 레오님이 책임져주실 거죠?”
새초롬하게 말하는 이리나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눈앞까지 가까이 다가간 상태로 한 번 더 물었다.
“아마 정실은…….”
“괜찮아요. 레오님. 저는 레오님 곁에만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헝클어진 이리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자 내 손에 얼굴을 묻으며 그 손길을 즐기는 이리나를 바라봤다.
강아지 같이 애교부리는 모습에 나 역시 슬그머니 웃음이 지어졌다.
그녀가 좋다고 하니까. 그리고 그녀를 생각하면 나 역시 물러나야겠지만, 지금 내 곁에 있는 그녀를 포기하고 싶진 않다.
그러니까.
“이리나.”
“아…….”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가에 작은 눈물이 맺혔다. 그것을 닦아주면서 새빨갛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감싼다.
“미안하다.”
“아니에요, 레오님…. 저는 드디어 이루어지는 것만으로 행복해요.”
내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더 자유롭게 살았겠지.
마치 하늘을 나는 새처럼.
그러나 나는 내 곁에 찾아온 파랑새를 놓치지 않는다.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쪽.
립스틱으로 촉촉한 입술을 겹친다.
* * *
“역시 시골이군요.”
길게 이어진 행렬의 중간에서 말을 몰면서 앞에 있는 화려한 마차를 바라보던 에녹은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이런 곳에서 굳이 성인식이라니…. 이리나님도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그러게 말입니다. 그분도 아직 아이라는 거겠죠.”
“…….”
주변에서 떠드는 남자들의 말에 에녹은 그저 입을 다물고 앞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 끝에 있는 화려한 마차에는 이리나와 그 남자가 타고 있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으음.”
그런 그를 향해 말을 거는 일행의 말에 그제야 시선을 돌린 에녹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에녹은 주변 다른 귀족 자제들의 반응에 골치가 아팠다.
‘너희들이야말로 어린애가 아닌가.’
물론 자신도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놓고 영지의 주인에게 지랄하는 건 결코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애초에 아까 전의 그 해무리를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 한 건가.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죠.”
“그러나…….”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성인식은 열립니다. 그런 성인식을 망치는 것은 다른 건 둘째치고 이리나님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됩니다. 그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때야 조금 불만이 줄어들었다.
애들같이 구는 주변 남자들의 반응에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에녹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봤다.
평화로운 시골의 풍경이라며 주변 귀족 자제들이 비웃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레오릭 프란츠가 뮐러의 영주가 된 지 이제 반년이 겨우 넘었을 거다.
그리고 애초에…….
‘남부 지방의 귀족이 이 광경을 그저 시골이라고 비웃다니…….’
이런 생산력이야말로 남부 지방의 힘이며 근원이다. 그걸 모르는 주변 사람들의 지식수준을 비웃어야 할까. 아니면 그런 놈들과 어울리는 자신을 욕해야 할까.
“뮐러가 보입니다!”
에녹은 다시 한번 한숨을 참았다.
앞에서 외치는 시종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이제 곧 도시다.
뮐러는 처음이지만, 조사해본 바로는 이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영지의 도시라고 했다. 이번에 영주가 바뀌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면, 그것이 잘 나타나는 건 영지겠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 뮐러의 성벽과 성문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몰았다.
* * *
“……이것은.”
호오.
아르윈은 감탄했다.
아직 날은 밝지만, 태양은 저물고 서서히 하늘이 어두워지는 가운데, 도시만이 밝게 빛나고 있다.
태양의 마력을 각성했다는 뮐러의 영주, 레오릭 프란츠가 힘을 쓰고 있는 걸까.
아니 그것이 아니다.
“이것이 가로등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뮐러 영지에서 붙여준 시종들 역시 말을 타면서 거리를 설명해주고 있다.
거리 전체를 환하게 밝혀주는 도시의 빛은 수도를 몇 번이나 가본 그 역시 처음 본 것들이었다. 아니, 빚을 내는 물건들이야 많지만…… 이런 식으로 유리 전체가 빚을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단하군요. 말 그대로 태양신이 거주하는 도시군요…….”
도시의 주인만이 아닌 도시 전체에 빛이 흘러넘치는 장소.
화려한 도시의 풍경이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