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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금수저 이야기-123화 (123/143)

〈 123화 〉 절벽 위의 꽃은 ­ 1

* * *

귀족들의 모임이 있다.

사교계의 모임, 사교 클럽. 그다지 좋은 느낌의 단어는 아니겠지만, 이 세계에선 꽤 흔한 단어다.

같은 취미를 가진 귀족들의 모임은 인맥을 다지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며 혹은 그 나잇대의 청년, 처녀들이 모이기에 딱 좋은 것도 사교 클럽이다.

작위 귀족은 그 굴레가 강한 편이긴 하지만, 아예 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작위 귀족이 주체로 하여 여는 사교 모임에 작위가 없는 귀족들이 참가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보랭 가문이 그렇다.

사교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가문으로 도시 전체가 사교 모임에 이용할 수 있는 장소도 많다. 승마장부터 시작해 사냥터나 밖에서 할 수 있는 식사, 다도회, 음악을 듣는 장소부터 연주를 직접 하는 곳까지.

가문에서도 자주 열고, 다른 곳에서 열리는 모임에도 자주 참가한다.

직계, 방계 가리지 않고다. 얼마나 활발한지 영주가 자신의 성에 있는 적이 드문 달도 있다는 소문도 있다. 그리고 그 범위도 동부, 북부를 가리지 않고 외국까지 인맥이 있다는 소문이…….

“대단하긴 해.”

언젠가 봤던 장난기 어린 웃음으로 내 등을 두드리던 그 모습을 떠올리면 나도 웃음이 나왔다.

좋은 사람이지만, 방심할 순 없지.

“레오님.”

“왔나?”

­다그닥!

말을 타면서 기다리던 중 지루한 느낌에 하늘을 바라보니 문득 떠올린 생각이 이리나 보랭이었다. 그 생각이 여기까지 흘러들어오는 걸 보면 나도 참 따분했나 보군.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나와 같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클로에가 있었다. 혹시 모르는 상황이니 변장 같은 느낌으로 둘 다 쓰고 있다. 클로에는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만약의 경우고 나는 금발과 금안은 유명하니까.

“어때?”

“별 이상은 없습니다.”

클로에의 말에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말을 타면서 펼쳐진 넓은 하늘. 그리고 땅.

푸른 초원 너머에는 원근감이 망가질 정도로 괴이하게 거대한 산맥이 있었다.

“대산맥이라.”

눈에 마력을 강화해도 그 내부가 느껴지지 않는다. 모험 도시에서 봤던 거랑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거기는 반 정도 대산맥에 포함돼서 그런가 거절 반응이 없지만, 이 위치에서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외부의 반응을 전부 단절시키는 느낌이 든다.

“분명 수작을 부리려면 여기라고 생각되지만…….”

붉은 피, 그중에도 퍼플이라는 조직의 움직임을 보면 마을에 대한 테러 혹은 대산맥의 몬스터를 유인한다거나 그런 생각을 했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지부를 모두 공격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런가.”

클로에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뮐러의 모든 지부를 습격한 후, 그 소문이 점차 다른 영지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프란츠에서 온 서신을 보면 다들 붉은 피에 대해 어느 정도 조사를 시작하고 있는 듯했다.

“…….”

조사라.

그럼 반대도 알아봐야겠는데.

그 조사를 하지 않는 영지가 있는지. 돌아가면 이자벨에게 말해보자. 설마 그렇게 멍청하지 않은 이상 그런 척이라도 하겠지만.

“레오님.”

“응?”

갑자기 부른 소리에 클로에를 바라봤다.

“이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군.”

그 말에 주위를 둘러봤다. 이 땅에 오고 나서 제대로 돌아다닌 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주도인 뮐러야 근처 지리는 파악했고, 지도로 뮐러에 대한 전체적인 모습도 알고 있지만 역시 직접 보는 거랑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중세 시대의 지도라고 하기엔 정확도가 꽤 높은 건 마력으로 인해 지각 능력이 높아서 그런 거겠지.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 더 둘러볼까.

“뮐러를 관통하는 강이 대산맥 쪽이었던가?”

“네. 라이니아 호수로 가는 강줄기입니다. 정확히는 그중 하나지만요.”

그 근처에는 딱히 땅의 주인이 없다.

대산맥에 가깝기도 하고, 강으로 흘러나오는 몬스터의 수도 꽤 되니까. 사실상 뮐러 위에 있는 땅 대부분은 버려졌다.

“……흠.”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면서 지도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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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맥에서 툭 튀어나온 굴란산을 중심으로 우측에 위치해 대산맥과 딱 달라붙은 프란츠 영지. 그리고 좌측에 있으면서도 대산맥과 떨어져있는 위치의 뮐러 영지.

보다시피 뮐러 영지와 대산맥 사이에 공간이 꽤 많다. 다른 지역의 정밀한 지도는 구하기 어렵지만, 대략적인 지도를 살펴봐도 뮐러 영지만큼, 아니 뮐러 영지보다 더 떨어진 곳이 많다.

엄밀히 말해 뮐러의 윗부분도 뮐러 영지라고 볼 순 있지만 사실상 관리 포기에 가깝다. 대형급 몬스터의 위험은 둘째치고 자잘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일이니까. 다른 영지랑 비교하면 뮐러도 충분히 가까운 편이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프란츠가 비정상적이네.”

“프란츠 영지의 저력이죠.”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을 짓는 클로에를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주 한 명이 강한 영지는 한계가 있다. 프란츠처럼 병사, 기사들의 강함이 곧 영지의 강함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으니까. 그래서 발전이 필요한 거고.

“다만 대산맥 밑의 이 땅. 어떻게 이용할 수는 없으려나.”

이렇게 가까이 오니까 땅 자체는 역시 토질이 좋아서 그런가, 농사하기엔 나쁘지 않다. 근처에 강도 있어서 물길을 트는 데 별문제 없고. 오히려 강의 물길만 이용할 수 있다면 배를 이용한 교역도 가능할 것 같은데. 농사만이 아니라 도시를 건설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축산업을 하기엔 동물들을 노리고 올 몬스터를 생각하면…… 아니, 밭도 마찬가지겠지만. 역시 다른 목적으로 써야 하나?

“으으으응.”

역시 이런 일까지 생각하니 뭔가 진짜로 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이다. 어쨌든 당장 손을 쓸 수 없는 비어있는 땅을 보니 여러 가지 계획이 떠올리긴 하는데 당장 뮐러의 여력이 부족하다. 역시 나만 강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아랫사람들의 강화도 필요하다.

“뭐, 이게 정상이겠지만.”

게임도 아니고, 1턴 종료하면 병사가 만들어지거나, 건설되는 것도 아니다. 뭘 하든 시간이 걸리고, 사람도 구해야 하고, 돈도 필요하다.

“이게 인생이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흥얼거리고 있는 것을 들은 클로에의 표정에 지도를 접고 품에 넣었다.

“대충 둘러봤지만, 역시 이 땅이 아까워.”

“하지만 여기에 무언가 하기엔 무엇보다 군사가 부족합니다.”

“당장 해결할 일은 아니지. 지금부터라도 천천히 알아보자.”

어차피 이 땅은 내 땅이다.

그리고 사람은…….

­삐이이이이이이!

멀리서 피리의 소리가 들려와서 하늘을 바라봤다. 떠오른 태양이 정상에 도달한 느낌이다. 시계가 없으니까 불편하네.

어쨌든 벌써 이런 시간이 됐군.

“클로에, 가자.”

“예. 알겠습니다. 이럇!”

­히이잉!

약속된 시간이 됐다.

다그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말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 *

에녹 타트라.

타트라 자작 가문의 차남.

작위는 있지만, 영지는 없다. 공을 세우거나, 전쟁에 성공해야 하지만 그게 쉬울 리가 없다.

어쨌든 그런 가문에서 태어난 에녹은 어렸을 때부터 형님보다 많은 마력과 질이 좋다는 이유로 가문의 기대를 한 눈에 받았다.

“에녹. 너라면 남작이 되는 것도 꿈이 아니다.”

“네, 아버지.”

주위의 시선 때문일까, 에녹 자신도 자신이라면 작위라는 마력의 벽을 넘어서 높은 지위까지 갈 수 있다.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의 단련을 멈추지 않았다.

어린 나이의 자존심은 끝도 없이 치솟았고, 또래의 다른 남자들에 비해 우월한 능력을 갖췄다는 오만한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고.

그리고 그 꿈이 무너진 것은 언제였을까.

“이리나 보랭. 보랭 가문의 후계자는 아니지만, 그 혈통은 고결하기 짝이 없으니. 넌 꼭 그녀의 환심을 사야 한다. 알겠지?”

“네. 저만 믿으세요.”

보랭 도시는 수많은 모임이 있다. 인맥을 위한 교류회는 시시때때로 계절을 가리지 않고 개최한다. 그중 제일 인기가 많은 건 역시 영지의 주인, 보랭 백작 가문이 행사하는 것이겠지.

에녹이 주변을 훑어봤다.

다 한 번씩 보거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있었다.

저 사람은 어떤 가문의 장남이고, 저 사람은 어디 지역의 누구 자식이니……. 하지만 이 중에서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은 자신이 분명했다. 그런 이유 없는 자신감이 에녹에겐 있었기에, 누구보다 당당히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타났다.

“이리나, 이리나 보랭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여러분!”

귀족가의 아가씨가 하기엔 너무나도 활짝 지은 미소. 싱긋 웃으면서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인사하는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에녹의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바, 반갑습니다. 타트라 자작 가문의 차남, 에녹 타트라입니다.”

“어머. 타트라 가문의 행사에는 몇 번 참석한 적이 있었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시선이 마주치고, 손 인사를 할 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창피한 일이지만, 주변에서 보기엔 얼굴이 붉어진 에녹의 심정을 바로 알아차리겠지.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주변의 다른 남자들을 보면 다들 똑같았다.

자신감 있던 표정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녀의 앞에 서면 다들 에녹처럼 말을 더듬었고,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단지 웃는 것만으로 이 장소의 모든 남자를 홀렸었다.

그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도, 에녹도 다 똑같았다.

이리나 보랭은 보랭 가문의 자식답게…… 아니, 오히려 심할 정도로 모임이 많았다.

미술, 음악, 문학, 승마…… 어떨 때는 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위험한 구역까지 직접 나설 정도로 활기차고, 활동량이 엄청났다.

에녹도 지칠 정도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결국 암묵적인 합의를 통해 서로 겹치지 않은 영역을 나눈 후, 그에 맞는 모임만 참석했다.

그러므로, 에녹은 만나지 못했다.

그녀의 모임 중, 아주 적은 인원만 참석하는 서로 학문적인 내용을 토론하는 작은 학술회. 그것도 참석 횟수 자체가 적고 인기가 없는 편에 속하기에 인원 미달로 자주 파투가 났던 그 모임에는 어느 한 사람이 참석했고.

그 사람은 오직 그 모임만 참석했었다.

이리나 보랭의 성인식.

제대로 된 성인으로 인정받는 것과 동시에, 자유로운 가풍인 보랭 가문은 이리나의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게 한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떠돌기 시작해 모든 남자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 그 순간.

레오릭 프란츠.

프란츠 가문의 차남이자 뮐러 영지의 주인이 된 남자.

그 남자의 영지에서 성인식을 연다는 소문이 돈 것은 그 타이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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