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대지의 축복 2
* * *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조아린다.
신의 위엄에 굴복한다.
인간이란 홀로서는 약하며 무언가에 기대어야 하는 연약한 생물이다.
* * *
“하하.저거 참.”
눈 부신 태양을 밑에서 올려다본다.
어스레인 공작은 턱을 쓰다듬었다.가르침을 주긴 했지만,곧바로 실현하다니.재능이 있긴 하다.
“그렇지 않나?”
그렇군.
대지를 갈아엎는 거대한 갈색 두더지,어스 역시 위를 힐끔 바라봤다.
빛나는군.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그야 두더지니까.”
크흠.
어스레인 가문.
대대로 물려받는 이름,레인은 눈을 감고 하늘에서 느껴지는 고고히 빛나는 태양의 빛을,마력을 느꼈다.
“차오르는 활력이 느껴져.”
나는 기분이 나빠.몸이 말라가는 것 같은데?
“두더지니까.”
하 참.
혈통에서 내려오는 마력,레인.
혈통과 함께 가문을 지켜오는 수호신,어스.
그렇기에 둘을 합쳐 어스레인.그 두 가지 모두 물려받아야 진정한 어스레인 가문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당대의 공작,레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활력이 넘쳐.그의 마력에서 느껴지는 태양 에너지에 거부감 없이 흡수돼.”
이쪽은 내 눈을 멀게 하는 것 같다.아무래도 나랑 영 맞지 않는군.
“그래도 대지에 깃든 힘은 더 풍요로워졌어.”
음.단순히 토지에 영양분이 넘치는 것만이 아니야,여기서 재배될 곡물은 단순한 곡물이 아니겠어.
“그걸 먹고 자라는 동물들 역시 더 좋아지겠지.”
서로 느낀 것을 말한다.
계승 받을 때부터 함께해온 파트너와 이야기하며 더욱 객관적으로 확인한다.여기까지 온 이유 역시 그렇다.
하지만 이것으로 확실해졌군.
“그래.”
역시 하나로는 안된다.
마력.그것도 대지의 마력에는 쌍이 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리고.
“으음.선조는 왜 하필 두더지를 상징으로 삼아서.”
지금 내 탓하는 건가?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뭐,농담이지만.레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대지를 바라봤다.
“대지.생명의 근원.높이 떠있는 것이 있으니,그걸 받쳐줄 땅이 필요하다라.더욱 깊숙이 파고들 요소가 있겠어.”
그게 저 태양신인가?
“그럴수도 있고,혹은…….”
아직 확실한 건 없다.원래 마력의 탐구란 그러한 것.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모습에 어스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오,지금부터라도 공부하겠다는 건가?
“천만에.귀찮은 걸 내가 왜 하나?”
처음에는 사람과 사람으로.
그리고 가문이라고 할 수 있을정도로 커진 후에는 온갖 기록으로.
레인 공작은 비밀리에 보관된 연구 기록을 떠올리면 골치아파왔다.
“됐네.왕의 자리라도 노리고 싶다면 자식 놈이 알아서 하겠지.”
지금도2인자니3인자니 말이 많다.
문화가 발달하고,시대가 흘러서 그런가.요즘은 단순히 마력이 많다고 해서 존경받는 시대가 지났다는 것을 공작은 느끼고 있었다.
물론 압도적인 힘으로 굴복시키면 편해지긴 하겠지만,무척이나 귀찮고 뒷감당을 수습하는 건 짜증나는 일이다.
나의 일이 늘어나겠군!
“내가 은퇴할 때 같이 은퇴하지?분신을 남기면 되지 않나.”
실제로 가문의 조상 중에는 평생을 함께한 파트너와 함께 은거를 한 조상도 있었다.
아니!인간이 고개를 조아리는 건 보기 좋거든.
두더지 주제에.
인간에게 조아림 받는 게 기분 좋다고 말하는 모습에 피식 웃었다.공작은 하늘을 바라봤다.
“하지만…,그렇군.순수히 보랭 가문에게 넘기는 것도 좀 그렇단 말이지.”
늙은이의 심보가 떠오른다.
날개 달린 놈인가?그럼 마음에 들지 않는데.
“동감이야.”
평생을 대지에 붙어 살아와서 그런가.하늘을 나는 녀석들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특히나 실실 웃는 윌리엄 보랭 백작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치자 기분이 더 나빠졌다.
“유감스럽게도 자식은 아들 하나뿐이고….여동생은 아무래도 나이가 너무 많지?”
나이 차가 나는 여동생을 떠올렸다.성질이 너무 개 같아서 아직도 결혼 못한 노처녀다.공작의 말에 두더지도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걔는 결혼 안 하나?
“말도 말게.부모님도 포기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지 않나.”
그 더러운 성질머리에 두더지도 식겁했다.
두더지 고기는 어떤 맛이냐면서 습격당한 기억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땅의 힘이 농축된 귀한 걸 얻은 것 같은데,선대처럼 지금이라도 노력해보지?
“……으윽.”
진심으로 소름 끼치는 표정을 지으며 두더지를 노려보는 공작의 모습에 두더지가 웃음을 가리기 위해 대지를 파고 들어갔다.
들썩,들썩!
기묘한 진동으로 파트너인 두더지가 어떤 모습인지 파악한 공작은 한숨을 쉬었다.
“지는 섹스 한번 안 해봤으면서.”
뭐라고?
쿵!
공작의 말에 화났다고 광고하듯 대지가 흔들린다.그럼 뭐하나.
실제로 존재하나 결국은 핏줄,마력에 의한 생명체.일반적인 두더지라고 할 수 없는 이상,당연히 짝이 있을 리가 없다.평생을 동정으로 살아가는 주제에 이성에 관심이 많은 탓에 공작 역시 어렸을 때 지금의 아내와 연애하는 시절 수많은 조언을 들었다.
짐승의 조언은 듣지 말았어야 했다.
지난날 흑역사를 떠올리며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 * *
“뒤지겠네.”
너무 설쳤나?
정신 집중의 힘이다.
온몸이 노곤한 것을 참고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도시 속에서 성으로 들어갔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표정을 풀 수가 있어야지.
“수고했소.뮐러 영주.대단했소.”
“공작 각하야말로 그 이후에 다른 곳도 축복을 내려주신다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하하.어스레인 가문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해온 일이니 이젠 익숙하오.그리고 남은 농지는 다른 사제들이 할 것이오.”
“감사합니다,공작 각하.”
축제는 이제 시작이지만,이후의 업무는 아랫놈들이 한다.
이제 난 좀 쉴 수 있겠지만….
“급한 일이 없으시다면 다음 주에 연회를 개최하겠습니다.규모는 그리 크지 않겠지만….”
“음…….아니.이번 일이 끝나면 사실 바로 돌아가야 했소.지금도 사실 급하게 내려오기 위해 일정을 미뤘던 것이 많아 곧바로 돌아가야 하오.”
“허어.그렇습니까.”
…으음.
이건 좀 안 좋은데.
공작 직위의 손님이 왔는데 제대로 된 연회를 하지 않은 건 명예가 먹칠이 되는 이야기다.사실 지금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아니,애초에 대지의 축복을 위해 찾아온 어스레인 공작 가문의 사람을 위한 작은 연회는 준비하고 있었다.그게 하필 공작이라서 다시 준비해야 했을 뿐이다.
그런 내 표정에 어스레인 공작은 웃음을 지었다.
“내 알기론 여기에 보랭 가의 영애가 성인식을 한다고 들었소.”
“네,그렇습니다.”
그 말에 곧바로 고개를 끄떡였다.
내 성인식에 대놓고 떠든 이야기니 사교계에는 이미 다 퍼졌겠지.
“그 성인식에 다시 한번 오겠소.이대로 떠나는 건 손님으로서 예의가 아닌 것은 나 역시 잘 아니 그때 다시 한번 보는 것이 좋겠소.”
“오오.고맙습니다.”
크.
역시 어스레인 공작 각하야!감사합니다.
사실 내 명예만 먹칠하면 난 상관없지만,내 밑의 부하들을 생각하면 그리 내버려 둘 수도 없고.거기에 아직은 프란츠 속령 취급이라 프란츠의 명예까지 먹칠 당할 수 있다.거기에 심할 경우 명분까지 발전한다.
거,프란츠의 차남이 제대로 귀족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오호?그럼 영주로서 자격이 없네?
같은 식으로 주변 영지가 선전포고할 가능성도 있다.
“그럼 다음에는 보랭 영애의 성인식에서 뵙겠습니다.”
“음.좋소.그때 또 봅시다.”
어스레인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 곧바로 떠났다.정말로 바로 떠날 줄은 몰랐다.다행히 미리 말은 잘 해놔서 다행인지 같이 찾아온 대지의 사제들은 열심히 일해줘서 의식 자체는 문제없이 끝났지만.
“아,지쳤다.”
푹신한 소파에 지친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그래도 마력의 질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니 왠지 기분은 좋네.
“앞으로도 별일 없었으면 좋겠구만.”
* * *
“어스레인 공작이라니.대체 어떻게 된 거냐!”
“죄송하지만,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도 모르는 일입니다.귀족분들의 정보는 저희도 알기 어려운 거 잘 아시잖습니까.”
“으으으!젠장!”
조금 살찐,고급스러운 의상을 입은 남자는 그렇게 외치며 쥐고 있던 와인 잔을 던졌다.푸른빛에 휩싸인 와인 잔은 곧바로 벽에 부딪히며.
그대로 벽에 박혔다.
“에이!그놈의 레오릭!레오릭!”
뮐러 영지는 별다른 특산품은 없지만,땅 대부분이 논밭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제대로 내분을 일으켰으면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야지!”
“제 예상보다 프란츠가 더욱 빨리 알아차렸습니다.그 부분은 저희 역시 예상치 못했습니다.죄송합니다.”
로브를 덮어쓴 남자는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그걸 바라보는 남자는 흥,코웃음을 치며 소파에 앉았다.
“됐다.그놈이 어스레인 공작과 무슨 인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남부 지방이다.아무리 공작이라고 해도 수도의 귀족이 함부로 손을 뻗을 곳이 아니지.”
“그렇습니다.”
남자의 말에 로브를 덮어쓴 사람은 맞장구를 쳤다.정말로 그 의견에 동의하다가 보다는 그저 남자의 화를 누그러뜨리려 하기 위한 행동인듯했다.
“이젠 어떻게 하지,어떻게 해야 그 땅을 먹을 수 있을까.”
남자는 초조한 듯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브를 덮어쓴 사람은 조용히 속닥였다.
“우선 치안부터 악화시켜볼까요?”
“치안?”
로브를 덮어쓴 사람의 말에 남자는 시선을 돌렸다.
“아직 거기에는 저희 조직의 사람이 있습니다.그리고 저희가 연구한 결과물도 아직 시험 단계이지만 어느 정도 완성되어있습니다.”
“호오?”
“결과물을 이용해 일단 도시의 치안부터 악화시키고,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면서 선전포고하는 건 어떨까요?”
“으음.”
그 말에 남자는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그걸로는 부족하다.차라리 산 아래에 몬스터를 유인할 수는 없나?비슷한 게 있다고 들었는데.”
“그거라면.아직 부작용이 너무 심해서 연구 중입니다만…….”
“해.”
“그러나 이왕 얻을 논밭이 망가질 가능성이…….”
“일단 손에 얻고 나서 고치면 되는 일이다.뭐가 중요한지 알겠지?”
“……네.알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고개를 숙인 로브의 사람은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며 문을 열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며 로브를 쓴 사람은 차가운 눈으로 문을 바라보다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우선 도시에 숨어 있는 조직원에게 연락해야겠군.”
유감스럽게도 그 조직원은 얼마 전 퇴사를 하기로 한 걸 이 사람은 아직 몰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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