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대지의 축복 1
* * *
“와아아아!”
눈을 비비며 창문에 다가간 아이가 그 너머의 화려한 거리의 모습에 감탄의 비명을 질렀다.
“정말,저 아이도 참.누굴 닮았는지.”
그 모습을 보며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집안일을 하며 웃었다.며칠 전부터 준비한 거리의 모습인데 볼 때마다 소리를 지르는 아이가 그녀의 가족의 유일한 활력소였다.
“엄마!오늘 축제에요?”
“그럼.오늘이 바로 대지의 축복을 하는 날이란다.”
와!축제다!
남자아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어머니의 손길에 활짝 미소를 지었다.
매년 반복되는 축제지만,아이에게 있어서는 어찌 됐든 좋았다.어머니의 품 안에 파고들었던 아이는 고개를 들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저,밖에 나가 놀아도 될까요?”
“음.”
아이의 말에 어머니가 잠시 머뭇거렸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전쟁은 뮐러에 사는 평민들에게 있어서 큰일이었다.아무리 빨리 끝나고,큰 피해는 없다 해도 전쟁은 전쟁이었다.
거리의 분위기는 어두워지고,당연하게 치안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으니 아이가 계속 집에서 머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그러렴.하지만 이 근처에서 놀아야 한다?”
“네!”
활짝 웃고 곧바로 나가려는 아이를 붙잡고 옷을 입히며 어머니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전쟁으로 뮐러의 주인이 바뀌고 많은 평민이 걱정했다.선대 뮐러 영주는 좋지도,나쁘지도 않은 평생을 뮐러에서 살아온 평민들에게 평범한 일상이었지만,장남으로 바뀌는 순간 갑자기 올라간 세금과 영지 내 어느 마을이 몬스터에 의해 멸망했다는 소문까지.
불안에 떨면서 어떻게 추수의 날만 기다리며 허리띠를 붙잡고 살아온 어느 날,전쟁이 일어났고 귀족분들끼리의 내전이 일어났다는 소문에 숨을 죽이며 집에만 박혀 살았다.
주변 분위기에 겁을 먹은 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울먹이면서 큰 소리가 날 때마다 품에 꽉 안아주고 끝나기를 기도한 어느 날.전쟁이 끝났다는 소리와 함께 영지의 주인이 바뀐다는 말까지 평민에게 있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하지만 농사는 해야 하는 법.
잠깐의 평화가 지나고,프란츠 영지에서 온 귀족이 영주가 된다는 소문이 퍼지는 어느 날.
태양이 떴다.
태양이 있음에도 그것을 보자 태양이라고 생각했다.무릎을 꿇고 기도했다.아이도,남편도,자신도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누가 먼저 선동한 것도 아니었다.주변의 모든 평민이 동시에 그랬다.선대 뮐러 영주도 어머니인 여자가 기억하기로 존경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새 영주의 위엄은 한순간에 그걸 잊어버리게 했다.
“종이 치면 다시 와야 해.성 밖으로 나가니까.”
“정말요?!”
어머니의 말에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마치 생일처럼 기뻐하는 모습에 어머니 역시 웃음이 나왔다.아이에게 성문 밖이란 미지의 세계니 마치 모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끼겠지.
“그럼 조심히 놀아야 한다.”
“네!”
넘어질까,걱정될 정도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 역시 조금 있을 의식을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 * *
의식 자체는 곧바로 끝난다.성문 너머의 밭이나 많은 평민이 찾아오지 그 너머의 넓디넓은 밭을 전부 구경하기엔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땅은 보여주기식의 의식이 끝난 후에야 한다.
“여기다!”
아이는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걷던 도중,아버지의 목소리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 역시 웃으면서 그 아이를 안아 들었다.
“꺄아아앗!하하하핫!”
기쁜 듯이 웃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남자는 아내를 바라봤다.
“준비는 끝났어?”
“네.사람 많으니까,아이 꽉 붙잡고 있어요.”
“물론이지.그럼 갑시다.다른 가족들도 다 모였으니까.”
성안의 평민 대부분이 성 밖에 나오는 일이다.병사와 기사들이 사람들을 안내하는 걸 따라 걸으며 성문을 나선다.
솨아아아.
추수를 끝내 황폐해진 밭들.성밖에 너덜너덜해진 밭을 바라보며 수많은 평민이 길에서 저마다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신분이 확실한 귀족이나 기사들의 가족의 경우 성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와아아아!”
아버지의 품 안에 안긴 아이가 감탄하는 소리를 들으며 그 가족도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이제 뭐 해요?”
“뭐하긴,대지의 축복이 시작한단다.”
“대지의 축복?”
분명 작년에도 설명했던 것 같았는데.
어느새 까먹은 아이의 모습에 아버지는 웃음을 지었다.
“대지의 사제님이 오셔서 우리가1년 동안 지은 밭을 갈아엎고,다음1년 농사가 잘 되길 기도해주는 의식이란다.”
“와아아.”
아버지의 말이 이해는 됐을까.
그저 웃기만 하는 아이의 모습에 남편과 아내 모두 행복하게 웃었다.
쿵!
그때 북이 울렸다.
아버지는 아이를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이제 시작하네.조용히 해야 한다?”
“네!”
쿵!쿵!
웅성거리는 소리도 천천히 잦아드는 사이 병사와 기사들이 나타나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동시에 북소리가 점점 빨리 울리기 시작했다.그에 맞춰 평민들의 움직임도 조심스러워졌다.
오래 예전부터 농부들의 신이자 그 사자로서 대지와 풍요를 지배해온 대지의 사자들.그들은 두더지의 형태로 대지를 갈고,축복을 내려왔다.서서히 그 모습이 드러났다.
“아이에~”
길 사이로 나타나는 갈색 로브를 입은 채 나타난 사제들.그들은 기묘한 언어로 이루어진 노래를 하며 서서히 앞으로 나아간다.뜻이 중요한 게 아니다.정신을 집중하고,중요한 의식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
쿵!쿵!쿵!
“우와아.”
이제야 작년의 일이 떠오른 걸까.
아이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오른 기억을 되새겼다.
분명 갈색빛의 무언가가 대지를 갈아엎는 장면이었다.
“와!”
“쉿!조용해야지.”
그 모습을 기대하며 떠드는 아이를 어머니가 다독이며 드디어 의식은 중요한 곳으로 향했다.갈색빛으로 물든 사제의 손짓에 따라 뮐러 도시의 모든 밭이 갈아엎어진다.그러다 그 광경을 보던 어머니는 문득 평소와 다른 것을 깨달았다.
‘원래 한 사람이 했던가?’
아니,한 명이 더 있다.
사제들의 앞에 나타난 건 갈색 두더지가 그려진 로브를 입고 있는 사람과,아주 새하얀 로브를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쿵!쿵!쿵!쿵!
북소리가…….
아니,이것은 북소리가 아니었다.
대지가 흔들거린다.
“어머나?”
평민들이 위치한 길에는 그 여파만이 끼쳤지만,다른 평민들도 한두 명씩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황폐해진 논밭이 흔들거린다.마치 지진처럼.대지에 서서히 균열이 드러났다.
“워,원래 이랬던 간요?여보?”
“아니,그럴 리가…….”
여태까지 본 광경과 다르다.그걸 깨달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할 때,거대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쿠웅!
대지에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 * *
대단하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소비되는 마력은 지극히 적은데,그 범위가 뮐러 도시 주변에 있는 모든 논밭이다.내 감각에 걸린 논밭 전부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그러면서도 평민들이 있는 길 위에는 그 피해가 끼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상상.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오.”
갈색 두더지가 그려진 로브를 입고 있는 어스레인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마력을 일으켰다.
“재능있는 후배에게 가르침을 하나 주도록 하겠소.”
극에 다다른 마력은 주변의 환경을…현실을 바꾼다.
바흐니아가 그렇듯이.
“하지만 전부가 다 그런 건 아니오.결국,중요한 것은 목표요.가문이,자신의 혈족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
프란츠는 승리다.번영이며,성공이다.그 상징이 금이며,아주 오래전에 그 일대를 군림했던 금빛 사자다.
바흐니아는 왕으로서 한 나라를 위해 마력을 받친다.그것이 바다다.바다의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나라를 지키기 위해 바다를 지배한다.
어스레인은.
“보고 생각해보시오.그대는 아마 혈통의 창시자로서 앞으로 선택해야 할 것이 중요하오.그 목표 중 하나를 보여주겠소.”
공작의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모습과는 반대로 그의 몸속에 일으킨 압도적인 마력.그 마력에 처음으로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질이 다르군.
아버지의 마력은 양도,질도 나보다 높았지만,어디까지나 나 역시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멜리아 공주는 확실히 질이 달랐지만,그렇다고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스레인 공작은…….
드드득!
“이것이 대대로 혈통에 내려오는 우리 가문의 마력의 원천.어스레인의 갈색 두더지요.”
괴이한 소리와 함께 밭이 갈라지고.
쿠웅!
거대한 두더지가 나타났다.
“맙소사.”
마력의 실체화 같은 수준이 아니다.프란츠의 금빛 사자 같이 마력으로 그 형태를 뭉친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그 형태도,몸을 구성하고 있는 마력의 엮임도.느껴지는 압박감이,느껴지는 존재감이 말한다.
저것은 진짜다.
쿠쿠쿠쿠쿠쿠쿠쿵!
두더지가 움직이자 그 중심으로 대지가 갈아엎어진다.황폐해진 흙은 깊숙이,대지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며 그 안에 충분히 힘을 보충한 흙을 다시 들어 올리고 있다.
말 그대로 땅을 갈아엎어 환경을 정돈한다.
“자연 생태계를 아예 새로 구축하는 겁니까?무서울 정도로군요.”
“그 정도는 아니오.음.우리 가문은 어디까지나 대지와 풍요에 집중해있다오.내가 알기론 대산맥 너머의 트린델 왕국에는 그런 자연 생태계에 집중된 가문이 있다고 들었소.별명은 확실히 나뭇잎의 요정이었나?”
요정……?
엘프?
“음?표정이 왜 그렇소?”
“아니,아닙니다.크흠.”
순간 기대했네.곧바로 말을 돌리자 어스레인 공작이 이상하다는 듯이 보더니 다시 의식을 진행했다.
“그럼 대지에 힘을 불어넣어 봅시다.”
지금도 거대한 갈색 두더지가 땅을 정돈하고 있다.
원래라면 사제들이 구역을 나눠서 분담한다.보여주기식으로 처음에는 다 같이 모여서 하지만,차후에 한팀은 대지를 갈아엎고,한팀은 지력이 쇠해진 흙에 마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어스레인 공작은 손짓 하나만으로 대지에 힘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럼.”
“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난 입고 있던 로브의 두건을 벗으며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금빛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마력은 이윽고 빛으로 변한다.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빛은 이 일대를 비추기 시작한다.
중요한 건 상상과 확고한 기둥.
마력에 홀리지 말고 자기 자신이라는 확실한 기준점을 잡고 마력은 어디까지나 도구라는 것.
그 말대로 나는 마력을 신봉하는 성격이 아니긴 하다.
“그럼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최근 해왔던 것과 반대로,처음처럼 해보자.
부풀어 오르는 마력을 집중한다.금빛 사자처럼 마력으로 형태를 빚어내는 것은 같지만,더 촘촘하고 원하는 형태를 구현한다.들어 올린 팔 위로 새로이 태어나는 황금빛 태양이 세상에 드러났다.
형태는 이루어졌다.원하는 것은 하나다.인간만이 아닌 모든 생명체의 근원인 빛과 에너지를 뿌리는 것.
“대지에 축복이 함께하기를.”
“태양에 영원한 영광이 있기를.”
평민들의 기도 소리가 도시에 울려 퍼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마력의 질이 한 단계 높아진 것을 느꼈다.
* * *
“저것이 프란츠에서 새로이 나타난 태양신.”
멀리서 피어오른 거대한 태양을 바라보며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시발.고위 귀족은 전부 저런가?좇됐네.”
조직에서 탈퇴하는 방법이 뭐더라?
한 남자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골목길 사이로 몸을 숨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