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수도에서 온 손님 1
* * *
콰아아앙!
섬광.
그 말이 어울리는 속도.
이자벨이 두 손에 든 기묘한 형태의 단검이 허공을 가른다. 그 궤적을 따라 푸른 빛의 참격이 날아간다. 자유자재에 가까운 마력 조작. 수많은 실전 경험. 대인 경험보다 몬스터와 싸운 경험이 많은 특징 때문인지 자유로이 조작하는 마력의 제어와 만약의 경우를 가정한 회피 능력. 이 부분에서는 클로에를 뛰어넘었다.
“하아아아!”
날아오는 참격을 클로에의 신체 크기와 비견될 정도로 기다란 검을 휘두르며 지운다. 넓게 퍼지는 마력파가 이자벨의 참격을 없애는 것과 마력을 분사하며 앞으로 폭발하듯이 달려나간다.
쿠우웅!
마력을 가진 몬스터는 같은 동물이어도 다른 방향으로 진화한 돌연변이가 튀어나올 때가 많다. 그런 모험가의 특성이 이자벨의 움직임에 그대로 나타났다. 히트 & 어웨이의 전법에 근거리부터 원거리까지 거리를 상관하지 않는 공격 방식에 만약을 대비해 언제라도 몸을 뺄 수 있는 움직임.
그에 비해 클로에는 굳건하다. 그러면서 부드럽다. 만약의 사태에 자신의 주군을 지키기 위해 회피보다 방어를 선택하고, 귀족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어떻게든 버티며 흘리는데 더 익숙한 기사의 방식이 나타난다.
“흐읍!”
마력 방출을 이용한 순간적인 대쉬. 가속도를 이용해 그대로 내려찍은 클로에의 장검에 깃든 폭발적인 마력. 그걸 감지한 이자벨이 판단을 내렸다. 이자벨의 두 단검에 푸른 마력빛이 강해졌다.
콰아아아앙!
서로 맞붙은 무기를 중심으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여기까지 퍼져 나오는 먼지를 손을 휘둘러서 대충 치운다.
“제법인데.”
이렇게 말하니 만화에 나오는 실력자 같네. 피식 웃으면서 옆에서 같이 지켜보는 트리아나를 바라봤다.
“어때, 만약에 상대한다면 이길 수 있겠어?”
“음…….”
트리아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둘을 바라봤다.
클로에와 이자벨의 실력은 기사로서 상위권이라고 할 정도다. 프란츠에도 신인 중 뛰어나다고 평가받은 클로에다. 강한 마력, 세심한 조작 능력, 뛰어난 검술. 그런 클로에와 비슷하게 싸우고 있는 이자벨도 강하다.
하지만 영지를 대표하는 기사로 삼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 없진 않다. 차세대 기사단의 단장이 되기엔 적당하지만, 당장 그러기엔 부족하다. 현재 뮐러에서 그 자리에 적당한 것은 트리아나다.
“잘 모르겠습니다. 마력은 제가 더 강하다고 알 수 있지만…….”
다만 말을 흐리는 트리아나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여자. 실전 경험이 매우 부족하다.
암살이나 평소 생활에 편한 신체 강화는 배웠고, 어느 정도 기초적인 마력 조작도 뛰어난 편이지만, 그 정도다. 제대로 된 싸움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날 제일 빨리 알아차린 걸 보면 재능은 있지만.
“당연히 마력은 네가 더 높지. 괜히 자작의 핏줄이겠어?”
“네…, 죄송합니다.”
얼굴에 깃든 그늘, 우수에 젖은 보라색 눈빛. 신비한 분위기의 미녀. 그 미녀가 사죄의 표정을 지은 걸 보면 딱히 화가 난 건 아니지만, 미녀라서 용서할 수 있다. 어쨌든 트리아나의 이야기론 그런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의 험담을 하기 싫겠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꽤 가부장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았다. 바흔의 여왕처럼 뛰어난 마력을 가진 여자는 사회생활에 아무 문제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작의 마력을 가졌으면서도 밖에서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아버지의 업무를 돕는 정도가 끝이라고 했다.
“지금부터라도 훈련은 해. 마력이 강하다고 해도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아예 필요 없는 건 아니야. 굳이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울 필요는 없지만, 마력을 가진 자가 무기를 이용하는 방법 정도는 알아야 해. 몬스터랑 똑같아. 모르면 죽어야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네. 알겠습니다.”
내 말에 트리아나는 고개를 끄떡이고 클로에와 이자벨의 대련을 지켜봤다. 재능은 있으니 상반된 두 명의 마력 조작을 보는 것만으로 많은 도움이 되겠지.
“이자벨도 좋지만, 너에게 맞는 건 클로에의 움직임이겠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라면 조금 더 튼튼하게 만들 수 있겠죠.”
“튼튼하다고 좋은 건 아니야. 강한 힘 앞에서 쉽게 부러지는 것은 거목이고, 살아남는 것은 바람에 몸을 맡기는 꽃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그렇군요.”
뮐러의 마력은 단단하다. 단단하다는 건 좋다. 강한 공격도 더 쉽게 막을 수 있고 본인의 공격도 아프다. 다만 너무 그것에 매달리는 것도 좋지 않다. 내 충고를 듣고 둘의 대련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을 때, 지크가 다가왔다.
“레오님.”
“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그 말에 떠오르는 건 있다.
하지만 벌써?
내 표정에 고개를 끄떡였다.
“대지의 사제들입니다.”
지크의 말에 트리아나 역시 고개를 돌렸다.
올 것이 왔군. 대련 중이던 두 명 역시 움직임을 멈췄다.
“둘 다 씻고 준비해. 우리도 준비하지.”
“네.”
“예.”
별일 없었으면 좋겠지만.
* * *
이 세계는 중세 시대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아사 문제에 대한 걱정은 없는 편이다. 중세 시대를 보면 대기근이니 뭐니 하면서 아사가 제일 큰 문제고,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한 나라는 망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 세계는 그게 없다. 아니, 아예 없진 않다. 북부 지방도 그렇고, 동부 지방도 황야 너머는 모르겠지만 그 근처는 황폐한 땅 때문에 제대로 된 농사가 힘들다. 서부 지방은 강과 호수가 워낙 많아 농사를 지어도 인구 전체를 감당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면 브람스 왕국은?
남부 지방은 대대로 대륙의 곡창 지대라고 표현할 정도이며 그 땅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브람스는 예전부터 많은 식량을 수출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날씨, 토지 등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마력이 빠질 수 없겠지.
그게 바로 대지의 축복이며, 많은 귀족이 꼭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다.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땅을 갈아엎고, 농사로 인해 쇠해진 지력에 새로운 힘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진정될 때까지 농부들도 일을 쉬는 기간이라 영지 전체가 축제를 여는 일도 많다.
정말 이 세계는 마력 없으면 살기 힘들다. 붉은 피 놈들은 어떻게 대체할 생각이지?
그리고 대지의 축복을 주도하는 건 왕족을 따르는 일파, 갈색 두더지라고 불리는 어스레인 공작 가문. 대지의 사제들이다.
“영주님도 가능하시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너도 가능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외성까지 가는 동안 트리아나가 질문해왔다. 엄밀히 말하면 클로에도, 이자벨도 가능하다. 문제가 있다면 효율이겠지.
“네가 그걸 한다고 하면, 그렇지. 뮐러 정도의 영지라면 한 달은 넘게 걸리지 않을까?”
“……제 마력으로도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내 말에 놀란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면서 웃었다. 유능은 한데, 실전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지, 전투도 그렇고 업무도 그렇고 가끔 어리숙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 자작 가문의 마력으로도 한 달은 넘어. 하물며 한 번도 한 적 없으니 더 걸리겠지. 프란츠야 한 달도 걸리지 않겠지만, 그건 원래 논밭이 뮐러보다 작은 것도 있겠지.”
효율이 다르다.
대지의 마력을 자랑하는 어스레인 공작 가문. 대지의 사제들이라고 불리우는 직계와 방계의 마력은 작위 하나나 둘은 가볍게 무시할 정도로 다르다.
“그리고 그게 수도가 남부 지방의 세력을 견제하는 방법의 하나지.”
“으음.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스레인 공작 가문 역시 아주 예전에는 신으로 추앙받았다고 했다. 대지의 신, 풍요의 신 같은 느낌이겠지. 그런 전설을 가진 그들이 오랜 시간 동안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해왔고, 많은 농부가 그들을 믿고 있다.
“그런데 다른 영지는 일주일도 안 돼서 끝나는 일을 우리는 한 달이 넘게 걸린다? 파종 시기도 있는데? 귀족으로서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거든?”
원래 전통적으로 그들이 해오는 일이기도 하고.
게임이라면 영지민의 민심이라거나 가신들의 충성심이 낮아지는 이벤트라고 할 수 있지. 프란츠와 보랭이 남부 지방의 핵심 세력이면서 수도와 관계가 나쁜 것도 이거다. 보랭은 원래 상업 위주라 영지 자체는 작은 편이고, 프란츠는 그 땅 대부분이 대산맥과 이어진 곳이니 원체 그럴 필요가 적어서 그렇다.
그런데 그런 프란츠의 차남이 이번에 농업 중심의 영지를 얻었다. 이 말은?
“견제가 심하려나요?”
그걸 알 수가 없다.
우리도 적당히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선물이라는 이름의 뇌물을 주거나 했지만, 과연 수도가 어떻게 나올지는……. 지크와 같이 고민을 좀 했다.
“프란츠의 속령이니까, 견제할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회유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회유라면 설마 작위입니까?”
“가능성은 적겠지만.”
아니면 오늘은 간만 볼 수도 있고.
일단은 만약을 대비해 뇌물도 준비하긴 했다. 괜히 여기까지 와서 신경전을 벌이다가 질질 끌거나 그들이 떠나는 일도 있다. 그런 경우도 드물지만 있는 편이고 영주로서도 민심이 떨어져도 일단 자급자족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니.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마차에서 내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오늘 대지의 사제가 도착하는 소문은 이미 퍼져있다. 성 사람들이 정리한 성문에 많은 농부가 나와서 기도를 하고 있다. 저건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니 신경 쓸 필요는 없고.
굳이 영주가 직접 나서야 하는 이야기도 없는 건 아니지만, 이게 또 전통이라…….
찌릿!
“……응?”
내 감각이 신호를 보냈다.
대지의 사제들은 대부분 방계와 소수의 직계로 이루어졌는데, 뮐러는 논밭이 좀 큰 편이니 직계가 왔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지만….
“영주님?”
“……잠시만.”
조금 집중해서 멀리 보이는 집단을 바라봤다. 눈에 마력을 집중시켜서 겨우 보이는 거리에 있는 그들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보이는데…….
“이거 참….”
곧바로 지크를 불렀다.
“사람 보내서 누가 오는지 정중하게 확인해. 그만한 대우를 준비해야 하니까. 그리고 트리아나. 조금 더 정중하게 맞이할 수 있게 준비해. 기사들을 시켜서라도.”
“네? …알겠습니다.”
“네!”
내 말에 곧바로 움직이는 둘을 보고 다시 멀리 있는 대지의 사제들을 바라봤다. 그들을 맞이하는 준비는 했지만, 이번은 부족한 것 같다. 왜냐하면.
“영주님!”
지크가 급한 얼굴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만 내 시선은 그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 멀리, 선두에서 말을 타고 다가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이번 뮐러에 찾아오는 대지의 사제는……!”
“응. 됐어. 알겠다. 보이네. 손님 맞이할 준비나 해.”
“네!”
시선이 마주쳤다.
웃음을 짓는 그 모습이 보였다. 나 역시 미소를 지으면서 예를 갖춘다.
암. 예를 갖춰야지.
“공작이 직접 올 줄이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귀찮아지겠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