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금수저 이야기-102화 (102/143)

〈 102화 〉 뮐러 ­ 3

* * *

거대한 회의실에 사람이 가득 찼다.

왜냐면 거의 모든 성의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전부 들어와 있거든.

“다음, 세율 관리담당의…… 터널. 나오십시오.”

“크흠.

긴장된 표정으로 한 사내가 올라오고 있다.

분위기가 상당히 차이가 있다.

프란츠 사람의 얼굴에는 여유로움이 있고, 뮐러 사람의 얼굴에는 긴장으로 굳어져 있다. 지크야 여느 때랑 마찬가지로 띠거운 표정이지만.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서 여유롭게 그들을 바라봤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원래 방식이 이렇습니다.”

“그러니 그게 비효율적이라는 말입니다. 애초에 이 정도로 예산이 분배됐으면 그만한 성과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성과도 없는 주제에 보고서에 적힌 결과조차 없다는 것이 말입니까?”

지크가 아주 지랄하고 있다.

그래. 이겨도 병신, 져도 병신이라면 이기는 병신이 되고, 그게 우리 팀이면 더 좋은 거지.

지크가 미리 파악한 보고서를 더 붙어 아주 짧은 시간에 여기에 있었던 가신들이 정리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아주 완벽히 쥐어짜고 있다. 뮐러의 중년 아저씨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든 변명을 하고 있지만, 내가 들어도 엉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간에 해 먹은 것도 잘못된 거긴 하지만, 애초에 적당히 해 먹어도 그에 따른 성과만 내면 나는 터치하지 않는다. 선을 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그 성과 자체가 없다면 말이 다르지.

그리고 변명이라도 잘 하면 모를까, 하는 변명이라고는 마음에 드는 것도 없다. 응. 쟤는 해고.

­툭툭.

회의에 참석 중인 사람들의 명단에 이름에 손을 툭툭 건드리자 옆에 대기하고 있던 클로에가 종이에 그 이름을 적는다.

“저, 저기!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아, 됐습니다. 다음에 다시 보고서 작성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토지 관련 부서의 트젠님.”

“그, 여, 여기 있습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내 눈치를 보던 뮐러 사람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린다. 자기들도 대충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

클로에가 적고 있는 종이는 그들에게선 살생부라고 할 수 있다. 지크에게 지적받던 남자는 창백한 얼굴로 물러났고, 다음으로 호출당한 남자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시커먼 안색으로 올라온다. 다들 그런 분위기 속 나를 찌르듯이 바라보는 시선에 힐끔 눈동자만 돌렸다.

“…….”

부드러운 남색 머리카락. 보라색 눈동자.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미녀 한 명이 뮐러 사람 중 제일 앞에 있는 좌석에 앉아 있다.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 몸을 작게 떨지만 이내 다시 나를 바라본다. 사람 얼굴 쳐다본다고 죄는 아니니까. 내버려 두고 있지만, 시선이 상당히 강렬한걸.

트리아나 뮐러.

뮐러의 유일한 직계.

원하는 것은 뮐러 일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과 아주 먼 미래 이 땅을 다시 되돌려 받기 원하는 것.

아주 당돌한 소원을 아버지 앞에서 말하는 담력은 인정해주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녀를 어떻게 써먹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벌써 회의가 끝나갔다. 거지는 4시간이나 걸린 기나긴 회의는 마지막까지 지크의 독무대로 끝났다.

“앞서 말한 그것처럼 더욱더 효율적이고, 낭비가 없는 업무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태까지의 필요 경비에 관한 내용 보고서를 올리시길 바랍니다.”

“그, 그런!”

“그게 얼마나 많은 양인지는 그대도 알 것 아니오?!”

“평상시부터 정리했다면 그리 긴 시간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럼.”

아니, 어렵잖아.

지크도 진짜로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만, 어휴. 내 상사가 저랬다면 바로 사직서 냈다.

돌아서는 지크의 모습은 여전하지만, 눈동자 속에 담긴 희열을 느낄 수 있다. 진짜 쟤도 변태라니까.

“크흠……!”

“허…! 어찌….”

한바탕 지크가 휩쓸고 난 뒤의 회의실은 허탈한 표정을 짓거나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린 표정을 지은 사람들까지 가지각색이었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집중하기 위해 테이블을 두드렸다.

­탁!

그냥 시선만 집중시키려 했는데. 지방 방송이 갑자기 꺼졌네.

날 보는 얼굴이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것 같다. 너무하지 않아?

“대충 이야기는 끝난 것 같고.”

넓디넓은 회의실에 내 목소리만 울렸다.

“다음에는 당연히 오늘 준비해온 그것보다 잘 준비하겠지?”

“……크흠.”

다들 내 시선을 피하기 바쁘구만.

“아, 그래도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회의실이 역시 좁긴 좁군.”

내 말에 무슨 말인가 하는 사람들을 보고 웃어줬다.

“그래도 다음에는 여기 사람들의 반 정도는 못 볼 것 같으니 굳이 회의실을 개축할 필욘 없어 보여.”

“그렇습니다.”

나의 말에 태연하게 대답하는 클로에.

당연히 회의실의 분위기는 썰렁해졌다.

창백해진 그들을 보며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그들 앞에 놓인 차들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아 보여 안타깝다. 저게 다 얼만데. 아니면 나처럼 싼 거 마시든가. 내 코끝을 간지럽히는 달콤한 향을 음미하면서 한 모금을 마셨다.

“다들 알겠지만.”

달콤한 맛이 입안을 간지럽힌다. 유일한 단점인 입안이 텁텁해지는 것이 있지만, 달콤한 맛을 즐기기 위해선 이게 최고다. 나중에 민트 같은 거 하나 먹으면 그만이고.

“수도에서 연락이 오면 뮐러는 정식적으로 프란츠의 속령이 된다.”

날 보는 트리아나 뮐러의 시선이 강렬해졌다.

적의까지는 아니지만, 뭘까. 시선에 담긴 감정은. 어쨌든 뮐러의 이름을 이어받고 싶어서 하는 그녀로서는 좋은 소식은 아니겠지.

“당연히 새 술은 새 잔에 따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진짜 그 말이 있나?

비슷한 말은 있겠지. 세상 다 똑같으니까.

이후에 나올 말을 짐작하는지, 여기 사람들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뮐러라는 과거의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으로 갈아타야 하지 않겠나?”

내 말에 원래 조용하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귀족이라는 건 단순히 마력이 많고, 강한 일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부터 프란츠 일족이 황금사자 신앙을 가졌던 것처럼 지배하는 그 땅, 그 토지에 오랫동안 있던 자들이다.

그런 자들의 이름을 지우고, 새로운 이름으로 바꾼다.

민족 멸살 통치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고, 실제로 많은 곳에서 이런 방식을 따른다. 새로운 지배자를 받아들이는 과정 중 하나다.

다만 우리나라랑 경우가 다른 것이 있다면 드물지만, 이번처럼 남의 영지를 속령으로 삼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거다. 어쨌든 같은 왕국 사람이고, 언어와 문화 등 하나의 민족에 대한 정체성 자체를 없애는 것도 아니다.

평민들에게는 큰 영향은 없다. 다만 가진 자들은 다르지.

“……레오릭 프란츠님.”

“뭐지?”

새하얀 백발. 깊은 주름. 꽤 많은 나이의 노신사가 입을 열었다. 회의 내내 다른 사람과 달리 엄격한 얼굴을 유지하며 회의를 지켜보던 사람이다. 내가 알기론 이 성을 관리하던 집사장이라던가.

“뮐러라는 이름은 저희 뮐러 자작 가문만이 아닌 예로부터 이 땅을 칭하던 명칭입니다.”

“그래서?”

금빛 눈동자에 빛이 일렁거린다.

태양은 유일하고 고고한 것. 단지 마력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그 시선을 받는 자가 당하는 압박감은 장난 아니라고 했다. 난 잘 모르지.

어쨌든 내 시선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니 내심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성의 관리는 앞으로도 필수고, 저 사람 같이 경력자는 이 시대에 구하기 어렵다. 인터넷 고용 사이트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주 과거부터 서쪽의 침략을 수호하는 방패라는 뜻을 가진 뮐러의 이름은 저희뿐만이 아닌, 수많은 영지민도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왔습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적어도 뮐러라는 이름을 유지할 수 있게 레오릭 프란츠님의 자비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온 그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한스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 모습은 보기 좋지 않지만, 귀족인 이상 나는 냉정하게 그를 봐야 했다.

그를 보다가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몇 명은 그의 모습에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고, 누군가는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외면했다. 트리아나 뮐러는 주먹을 꽉 쥐며 눈을 감고 있었다.

“……흐음.”

그의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여기 있는 모든 뮐러인들 중에서 제일 오랫동안 뮐러라는 이름과 함께 했을 거다. 듣기로는 중립을 지켰지만, 그 때문에 장남파에 꽤 시달렸다고 했다. 그런데도 가문을 위해 그가 나서고 있다.

이런 자들이 있다.

여기 사람들도 사기를 치고, 살인을 저지르는 등 각종 범죄는 꾸준히 일어났다. 그걸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우리들의 역할이고.

그런데도 이 자처럼 실리보다 감정을 따르는 자들이 존재한다. 이대로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간신에게 눈과 귀가 막힌 왕에게 따끔한 충언하는 충신처럼. 그로 인해 왕에게 미움받더라도. 그 끝이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저렇게 나서는 자가.

그런 자들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게 아버지에게 받은 교육이며, 프란츠 일족이 추구하는 명예다.

“훗.”

내 웃음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

“이 일은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자비에 감사합니다. 레오릭 프란츠님.”

“그건 마음에 들지 않는군. 영주님이라고 부르도록.”

내 말에 그의 고개가 살짝 들으며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노인의 갈색 눈동자는 웬만한 젊은 사람보다 뚜렷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회의는 이걸로 끝. 다음에 다시 정리해서 올 때는 지금보다 좋은 모습을 기대하지.”

난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일어섰다. 내 뒤를 따라오는 클로에를 비롯한 프란츠 사람이 회의실에서 벗어날 동안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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