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금수저 이야기-98화 (98/143)

〈 98화 〉 아이단 ­ 1

* * *

잠에서 깨어나고,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

품에서 느껴지는 따듯한 체온. 코끝을 간지럽히는 감촉. 품에 안긴 그녀를 조심스럽게 껴안는다.

“으응….”

미끄러운 옷감 너머로 부드러운 그레이스 누나의 체형이 느껴졌다. 가녀리고, 작지만 풍만한 가슴이 내 가슴을 압박한다. 기분 좋다고 생각하다 배는 괜찮은가 싶어서 다시 자세를 잡는다.

이게 아이를 가진 아버지의 심정인가. 그런 잡생각을 하다가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아서 눈을 떴다.

“레오….”

이제는 익숙해진 방에 누나의 침대 위에서 잠에서 깨어났다.

내 팔을 베고 잠을 자는 누나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에 나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복잡한 생각도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기분만.

“으응….”

조금 내려간 누나의 이불. 그 위로 보이는 가슴에 눈을 한 번 빼앗긴 뒤, 뒤척이는 누나의 이불을 제대로 덮여주고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정리해준다.

“레오…? 일어났어요?”

“아직 이르니까, 더 자도 괜찮아요.”

“으응…, 그래요?”

내 손길에 눈을 뜨려는 누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감촉이 좋았는지 내 손에 얼굴을 비비다가 두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그대로 다시 잠들기 시작했다.

그런 누나를 보며 나 역시 웃으며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했다.

맞이한 건 좋은데.

손가락에 만져지는 두 개의 반지.

자.

이제 일을 벌인 건 좋은데.

“어떻게 하지.”

* * *

“형님이 돌아온다.”

그에 따라서 나 역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의 개인 물품부터 시작해 여러 물품을 준비하고, 나에게 배당되는 재산들 역시 챙긴다. 그뿐인가. 나뿐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가는 기사를 비롯한 가신들을 물건까지 챙겨야 한다.

“고맙다.”

“아닙니다!”

연구원들, 기사들, 병사들, 하인을 비롯한 시종들까지.

나를 따라온다는 건 프란츠에서 벗어난다는 것이고, 이 세계에서 고향을 벗어나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다. 모험가나 상인을 제외하곤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에 요즘 정황을 보고도 나를 믿고 따라오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물론 모든 준비는 내가 아닌 클로에와 지크를 비롯한 측근들이 하지만.

그럼 그동안 나는 뭐하냐?

“여기 뮐러에 대한 자료입니다.”

“또?”

“필수입니다! 꼭 읽어주세요! 그럼 저도 바빠서 이만!”

쌓여가는 자료에 한숨이 나왔다. 클로에가 단호한 얼굴로 꼭 읽으라는 잔소리와 함께 다시 일하러 가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떨궜다. 나 때문에 쟤도 고생하는데, 내가 모른 척 할순 없지.

클로에가 준비한 자료는 뮐러에 대한 자료다.

아버지와 함께 돌아온 문관들이 그동안 정리하고 준비한 자료. 실제 통치를 해야 할 처지니 요약해서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날 따라온 사람들이나 앞으로 일을 생각하면 한 땅의 주인이 될 처지니 기본적인 건 외워야 한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싫어도 억지로 참고 외우고 있다.

뮐러 영지에 대한 역사. 그 토지를 지배해온 뮐러 일족에 대한 것. 뮐러의 주도인 뮐러 도시에 대한 자료. 인구를 비롯해 도시의 외형이나 어떤 구조로 설계됐는지, 알고 있어야 할 건물을 비롯해 도시 내에 존재하는 여러 세력까지.

농지도 중요하고, 주요 특산품, 지리적인 특성, 주변 다른 영지와의 관계. 주로 교역하는 집단들. 쌓이고 쌓이는 자료를 보고 한숨을 쉬며 다시 책상에 박혀서 공부한다.

아침저녁으로 그렇게 공부하면, 낮에는 실전이다.

“따라와라.”

“예.”

엄격한 얼굴로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움직이는 아버지를 따라 성을 걷는다.

이전에 형님이 했던 일을 내가 하고 있다.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지. 군인을 보는 잼민이 짤이 기억난다. 웃고 있었는데…….

“가문의 가풍은 네가 정하는 거다. 앞으로 네가 세울 가문은….”

“제가 세워요?”

“훗.”

코웃음을 치진 말지.

듣는 자식 가슴 아프다.

“우리 프란츠는 극도의 소수 정예로 내정을 하지.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모든 일에 엄격한 시선으로 판단한다. 실력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나는 이게 완벽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차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유지하고 있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제일 높은 사람에게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있고 그 사람 역시 유능해야 유지할 수 있는 체제.

“선대의 선대는 조금 더 유연했다고 한다. 이에 반대되는 것으론 보랭이 있지. 너도 알다시피 보랭은 꽤 자유로운 기풍을 가지고 있다. 어떤 걸 선택하든, 어떤 비율로 유지하든 네가 앞으로 정해야 할 일이다.”

“으음.”

단순히 가문의 한 사람부터 그 가문의 주인이 되는 자의 교육은 다르다. 하나, 하나. 아버지에게 직접 교육을 받으며 단련한다.

지크와 클로에 역시 가문의 각 분야의 유능한 가신들에게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뭐, 원래 일하고 있다 보니 그런 시간보다 내 준비를 돕는 시간이 많긴 하지만.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레오님.”

집무실에 박혀 있는 사이, 클로에가 들어온다.

다시 공부할 자료가 늘어난다는 공포가 반. 잠깐이라도 쉰다는 생각에 기쁨이 반.

미묘한 얼굴로 클로에를 바라봤다.

“뭐야, 무슨 일인데?”

“아이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래.”

그 말에 들고 있던 펜을 놓았다.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창문에 고개를 돌렸다. 때가 왔군.

* * *

왔다고 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없다.

일단 형님도 할 일이 있으니까. 아버지와 먼저 만나고 지금까지 있던 일과 뮐러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하고 의견을 교류하고 있을 거다.

그런 형님을 기다리며 정원에서 혼자 멍하니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레오.”

“오셨습니까, 형님.”

오랜만에 본 형님은 여전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살짝 지어진 미소.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나를 맞이해줬다.

으음.

“뮐러의 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니,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전부 다 아버지와 기사들이 했으니까.”

그렇게 말하지만, 전쟁에서 직접 전장을 나섰다고 들었다.

실제로 직계랑 붙어보기도 했다던가.

피식 웃으면서 내가 준비한 자리에 아이단 형님이 앉았다.

차를 따라준 후, 주변에 있던 시종과 하인도 전부 자리를 비켰다.

“여전하구나, 너는.”

내가 준비한 차를 한 번 마시더니,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하는 형님을 보고 웃었다. 그럴 줄 알고 다른 차도 준비했지.

“진작에 이걸 줬으면 됐을 것을….”

“맛있는데, 이 맛을 모르는 형님이 불쌍하오.”

“또 무슨 소설이라도 읽었니? 하하.”

권력, 재벌 가문의 형제치고 나쁘지 않은 사이.

아니, 오히려 좋은 형제 사이다. 서로 시답지 않은 잡담을 계속하다가 문득 형님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의 모습엔 놀랐어.”

“제 잘못입니다.”

조금 더 빠르게 처리했어야 했다.

냉정한 말이지만, 병사나 모험가, 기사를 미끼로 삼아서라도 빨리 처리했어야 했다.

“아니. 이런 일은 흔하지. 대형급 몬스터는 설사 흑마저라도 방심할 수 없지. 제일 약하다고 하지만, 방심해서 짓눌리는 순간 그대로 짓밟히니까.”

거대한 체구. 지치지 않은 체력. 강철 같은 피부. 하지만 단순하게 돌격만 하는 성격을 이용한 사냥은 병사나 기사에 피해가 생길 수도 있어도 귀족이라면 쉽게 사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흑마저는 대형급 몬스터다. 방심하고 짓밟히는 순간, 방어에 특출하지 않은 귀족이라면 그대로 짓밟힐 가능성이 작지 않다. 형님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위로해줬다.

“네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너도 그걸 대형급 몬스터라고 예측한 순간부터 움직였잖아? 오히려 잘했어. 아버지가 당한 것은 방심한 것도 있겠지만, 놈의 특성이 특이한 것도 있지.”

은밀 타입은 어느 쪽이냐면 드문 타입이긴 하지. 보통 그 정도로 성장하게 되면 필요한 먹이가 많아지는데, 은밀하게 이동하는 거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래도 형님의 위로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

……그레이스 누나의 이야기?

벌써 이야기하나.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신다.

“태양의 마력에 각성했다면서?”

아, 그거.

“완전히 각성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손을 들어 올렸다.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태양의 마력.

색은 금빛에 가까운 무언가. 아이단 형님이 지긋이 바라봤다.

“대단하구나.”

“아직 미숙해요. 힘도 오히려 소비가 많아지고.”

실제로 프란츠 때보다 사소한 마력에 소비가 더 늘어난 것 같다. 태양의 힘을 쓰려고 하면 당연히 더 힘이 들고.

“아버지 말로는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서 그렇다고 하던데요.”

“그렇겠지. 나도 자세히 모르지만, 고유의 성질을 얻으려고 하다 실패한 곳도 많다고 하니까.”

그리고 그런 시도가 쌓이는 순간, 그것이 가문의 역사가 되고, 가문의 힘이 된다.

다른 가문에도 나 같은 경우가 일어나는 순간, 두 가지 선택이 일어난다. 그 가문의 마력을 특화하거나, 나처럼 독립하거나.

“힘든 길이겠지만,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으면서 평소와 같은 태도에 나도 긴장이 풀렸다. 일단 오늘은 일단 넘어가는 걸까?

“그레이스가 임신했다며?”

“쿨럭!”

콜록! 콜록!

아이단 형님의 갑작스러운 말에 목이 막혔다.

내 소리에 깜짝 놀란 형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찮아?”

“네, 콜록! 괜찮, 괜찮습니다! 콜록!”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