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금수저 이야기-97화 (97/143)

〈 97화 〉 뒷정리 ­ 7

* * *

­탁!

평소와 다른 집무실의 분위기.

거기에 그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

“왔나?”

잔에 따라진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

방으로 들어오는 나에게 작은 미소를 짓고 있다.

최근 근엄하던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이 계속 확인하게 되네.

“준비하고 있더구나.”

“그렇죠. 이번에 데리고 갈 사람은 제 사람이라고 봐야 하잖아요. 책임져야죠.”

책임을 지는 것은 진짜 싫어했는데.

“뮐러로 간다면.”

아버지가 말을 흐렸다.

“뮐러로 간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으음.”

아버지치고는 이상한 말이네.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버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뮐러는 일단 프란츠의 속령 취급이지만, 그리 쉽게 되진 않겠지.”

“그렇겠죠.”

아무리 이 세계가 지방의 권력이 강하다지만, 지구의 역사처럼 중앙 권력이 그렇게 좋아하진 않겠지.

예전이라면 중앙도 쉽게 건들진 않겠지만. 아버지의 팔도 이 상태다. 힘을 낼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이전보다 약해졌다는 것 자체가 주변의 시선이 바뀔만한 이유가 된다.

중앙이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주변 영지가 욕심을 낼 수도 있다.

하물며 뮐러가 작은 편이라고 해도 영지는 영지.

영지에 있는 도시를 비롯한 넓은 땅을 탐내는 자는 적지 않을 거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의 노림수도 그거잖아요.”

“음?”

내 말에 아버지의 시선이 날 향했다.

“프란츠를 우습게 보는 자들을 노리기 위해 절 미끼로 삼는 거 아닙니까?”

“후후.”

아버지가 아무리 자식을 위한다고 해도, 프란츠의 가주다.

자식을 향한 사랑에도 이유가 있다.

“없진 않지. 하지만 진심이기도 하다.”

“그래요? 정말로 제 마음대로 살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하하하. 내가 말하긴 그렇지만, 그것도 쉽지 않을 거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와인을 따른다.

“주변은 너를 우습게 보며 노리겠지. 그뿐인가. 붉은 피들이 다시금 슬금슬금 나오기 시작하니 전쟁이 끝난 뮐러는 남부 지방에 뿌리를 심기엔 딱 좋지. 그게 아니더라도 뮐러와 너를 노리는 영지들의 분쟁만으로 충분하지.”

“하아.”

골치 아픈 놈들이네.

“거기에 중앙도 언제나 뮐러를 프란츠의 속령으로 내버려 두진 않을 거다. 어떻게든 손을 뻗겠지.”

“그럼 뭐 뮐러를 대충 통치하라는 건가요?”

“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네가 그 땅의 주인이 되면 그만인데.”

씁.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버지의 말은 독립하라는 소리다. 새로운 가문의 창시. 분명 복잡하고 귀찮은 일이 되겠지.

하기 싫어하는 내 모습에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중요한 건.”

“네?”

아버지의 눈동자가 빛났다.

“태양의 마력을 가지고서 언제까지 프란츠라는 성을 가지고 있으려고?”

“으으.”

마력의 어중간한 상태.

거기서 벗어나려면, 프란츠의 성을 때야 한다.

인식이 가지는 힘. 내가 진정한 태양의 마력에 각성하기 위해선 우선 프란츠라는 성을 버려야 할 때가 됐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뭐?”

내 말에 아버지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뭐 이상한 말 했나?

“푸하하하하하하!”

“우와, 깜짝이야.”

아버지가 입을 벌리면서 품위 없이 웃는 모습은 처음이다.

갑자기 웃어서 깜짝 놀랐네.

“아니, 넌 정말…….”

콜록거리면서 아버지가 진정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날 보는 시선이 이상한 건 기분 탓인가?

“넌 정말 재밌구나.”

“너무하네요, 친자식한테.”

“딴 귀족에게 그런 말을 하진 마라. 이상하게 볼 거니까.”

“……네.”

시무룩해진 내 모습이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네가 그러고 싶어도, 주위에서 그러지 않을 거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됐다.”

그렇게 말한 아버지는 잠깐 입을 다물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래. 그레이스가 임신했다고.”

“네. 그렇게 됐습니다.”

그레이스 누나.

숨 막힐 듯이 방에만 계속 지내고 있는 누나를 떠올렸다.

전에 보러 갔을 때, 많이 불안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첫 임신인 것도 있고….

“자주 찾아가라.”

“……괜찮습니까?”

아무리 나와 그런 관계라고 해도.

그레이스 누나의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단 형님이 될 것이다. 내가 이 이상 친하게 지내는 것도 좀 그럴 텐데.

“괜찮다. 너희들 사이가 나쁘다면 모를까, 후계자가 확정된 지금 그렇게 걱정될 건 없으니까.”

최근 분위기가 수상해지긴 했지만, 내가 뮐러로 가는 것이 확정된 이상 그것도 크게 상관없다는 건가.

홀로 불안에 떨던 여인이 머릿속에 스친다.

……그럼 자주 찾아가도 괜찮을까.

“정 뭐하면.”

마치 아무렇지도 않듯이. 지나가는 말로.

“데리고 가던가.”

* * *

어두운 복도를 걸어, 그레이스 누나의 방에 향한다.

미리 알려 아무도 가로막지 않는 길, 멀리 보이는 그레이스 누나의 방의 창문에 은은한 촛불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최근 계속해서 방에 있다는 레나의 말에 한 번 찾아가려고 했었다.

임신으로 인한 불안이 계속되면 유산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정도의 지식은 이 세계에도 있다. 레나가 내게 말할 정도라면 좀 걱정되는 것도 사실.

­뚜벅, 뚜벅.

걷는 길 도중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데리고 가라……, 인가.

“말은 쉽지만….”

태어난 아이가 나중에 프란츠를 잇는다면 그걸로 괜찮다는 태도. 아버지가 그렇게 말한다는 건, 형님이랑도 이미 이야기가 된 걸까.

나중에 형님을 볼 면목이 없어지지만. 그래도 내 선택은…….

“하아.”

품속에서 만져지는 단단한 감촉에 심호흡하고.

방문을 열었다.

“……레오.”

“누나.”

은은하게 비치는 촛불의 빛만을 의지한 채.

누나는 책을 보고 있었다.

“눈 안 좋게.”

방을 좀 더 환하게 할까, 마력으로 그렇게 하려다가 태내의 아이에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멈췄다.

“후후. 하지만 여기에 있어도 할 거라곤 독서뿐인 걸요.”

쓴웃음을 짓는 그레이스 누나를 바라봤다.

촛불의 빛에 비치는 누나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태양처럼 화사한 금발도,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도. 촛불과 함께 어두운 방에서 침대에 기대어 앉아있는 모습은 평소와 다른 아름다움을 뿜고 있었다.

“아니면, 같이 대화 상대로 해줄래요?”

“……그러죠.”

“어머나. 정말로?”

큰 눈을 깜박거리는 모습에 내심 좀 더 챙겨줘야 했나 싶었다.

나도 아이를 가진 건 처음이라고.

“오늘은 자고 갈게요.”

“……어머.”

내 말에 입을 살짝 가리며 놀라던 그레이스 누나의 눈이 이내 휘며 웃었다. 기뻐하는 모습에 자주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침대 곁에 다가가 앉았다.

곁에 있는 그레이스 누나의 모습은 이전과 크게 달라진 모습은 없었다. 내 시선이 가슴 아래 배로 향하는 것을 느꼈는지, 누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아직 배가 크진 않죠?”

“그러게요. 여전히 잘록하네요. 살 좀 쪄야겠어요. 밥은 먹고 있죠?”

“후후후. 당연하죠. 레나님과 사렌이 잘 챙겨주고 있어요.”

누나의 시녀, 사렌은 이전에 아버지와 같이 들어왔다.

곧바로 그레이스 누나에게 붙어서 이것저것 다시 관리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없을 때 임신한 것이 불안한지 여태까지 쭉 붙어있던 것 같았는데.

“최근엔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오늘은 푹 쉬라고 했어요. 제 상태도 많이 좋아졌고.”

“다행이네요.”

계속 방에만 있었을 텐데.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는지 쌓여왔던 이야기를 계속하는 누나를 바라봤다.

화장기 없는 민낯이지만, 여전히 이쁜 얼굴. 아니 조금 핼쑥해졌나. 현대였다면 또래의 여자들과 아직도 대학교에 다니거나 갓 취직했을 나이인데.

“음? 아버지를 아직 못 보셨어요?”

“네…. 크게 다쳤다면서요? 보고 깜짝 놀라면 몸에 안 좋다고 그냥 안부만 전해줬어요.”

처음에 찾아오지 않아서 불안했다고 한다.

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시아버지가 찾아오지 않은 건 문제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으니까.

“다친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아직도 정정하시고.”

“다행이네요.”

가슴에 손을 올려서 안도의 한숨을 쉬는 누나를 바라봤다.

흐음…….

“누나.”

“네?”

날 보며 눈을 깜박이는 모습에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제 곧 떠나야 한다면. 누나는 어떤 얼굴을 지을까.

이렇게 될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그 상황이 되니 입이 떨어지지 않네.

“레오? 괜찮아요?”

내 모습에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누나의 손을 잡았다.

임신한 누나를 내버려 두고 떠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임신한 채로 위험할 수도 있는 뮐러로 데리고 가는 것도 누나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저, 이제 곧 뮐러로 갑니다.”

“……아.”

내 말에 그레이스 누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꽈악.

내 말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 불균형 때문일까. 차가워진 누나의 손을 잡았다. 나의 체온으로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는 것을 바라면서.

서로 맞잡은 손을 보면서 누나가 말했다.

“그, 그렇네요. 원래 그렇게 된 이야기였죠. 하, 하지만 생각보다 이르네요? 원래라면…….”

입술이 떨리면서 애써 태연한 척 말하는 누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다쳤으니까요. 아이단 형님도 곧 돌아오실 거고 돌아오면 곧바로 떠날 겁니다.”

“……그, 그렇군요.”

누나의 손이 떨리는 것 같다.

고개를 살짝 내린 채, 힘없이 말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릿하다.

……그러니까.

“앞으로 보기 힘들어지겠죠.”

“……그, 그렇죠.”

누나와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게 보이는 모습도 진심이라고 생각해서,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난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러니까. 누나 몸 상태가 괜찮아져서 안정기가 되면. 혹은 아기를 낳고 나면.”

“……레오?”

내 말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누나와 시선이 마주친다.

흔들리는 누나의 시선을 보고 나도 조금의 용기를 낸다.

상자 안에서 반지를 꺼냈다. 대형급 몬스터, 미식가를 잡고 그 몸에서 꺼낸 푸른 마정석. 그 마정석에 나의 마력을 꽉 채워 넣었다.

혹시나 위험한 상황이 되면, 누나를 지킬 수 있게. 그런 내 의지와 소망이 담긴 반지를 잡고.

“저랑 함께해주실래요?”

“아…….”

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이런 건 처음이다. 긴장되고, 초조한 마음을 삼키며 누나를 바라봤다. 누나의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에 한 방울 눈물이 흐른다. 싫어하는 걸까. 초조한 마음에 애써 마음을 억누른다.

“정말, 저 같은 여자라도 괜찮아요?”

“누나 같은 여자가 아니에요. 그레이스 누나라서. 누나니까 제가 선택한 결정입니다.”

누나가 미소를 지으며 왼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고 가느다란 약지에 반지를 넣는다.

“행복하게 해줄 거에요?”

“약속할게요. 행복하게 해줄게요.”

누나의 손을 잡았다.

가느다란 약지에 있는 두 개의 반지 감촉이, 아직은 낯설게 느껴졌지만.

사랑스러운 누나는 울고 있었다.

“사랑해요, 누나.”

“……흐윽. 기뻐요…! 레오!”

그 날 밤은 애무도, 섹스도 없었지만.

어느 때보다 충실했던 밤이었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