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뒷정리 5
* * *
‘아아아아아!’
눈이 뱅글뱅글 돌았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이자벨의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과 상관없이 시간은 흐른다.
“배고프지?”
레오릭이 가까이 다가와 이자벨이 들고 있던 짐을 들어줬다.
얼떨결에 짐을 놓친 이자벨이 뭐라 하기도 전에 레오릭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피곤하지?”
“네? 아, 아니…….”
“자, 이리로 와.”
“레, 레오님?”
뒤에서 미는 힘으로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걸음을 뗐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이자벨을 보며 레오릭이 눈웃음을 그렸다.
레오릭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별 건 없었다.
어차피 보고 때문에 한 번 만났어야 했고, 그거랑 다르게 앞으로의 일로 인해 제안이 있었다.
그러다가 한 번 그녀의 집이 궁금해서 몰래 찾아온 것뿐이다.
레오릭이 보기엔 독신 여자 혼자 사는 거 치곤 집이 좀 크긴 했지만, 그녀가 버는 돈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오히려 작은 편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후 집을 한 바탕 살폈다.
여자 집에 몰래 들어가서 집을 살피는 남자? 이거 완전 범죄 행위거든요. 그러나 그걸 처벌할 사람이 없다. 아니, 그게 당사자다.
레오릭은 태연하게 집을 살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서재로 보이는 곳에 있는 책들.
이 세계에도 문학은 어느 정도 있다. 물론 비싸기는 하지만 다른 중세 소설처럼 엄청 비싼 편은 아니다.
그리고 장르 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품격 높은 소설이나 귀족이나 사용할 문체만 적힌 것이 아닌 가볍고 읽기 좋은 소설은 돈이 조금 있는 부유한 평민이나 귀족들까지 읽을 정도로 어느 정도 인기를 구사하고 있다. 다만 프란츠 성에서는 그걸 읽는 사람이 없긴 하지만.
그런 서재를 구성하고 있는 책은 전부 연애 소설. 그것도 엄청나게 느끼한 것부터 시작해 달짝지근한 것까지.
레오릭도 처음 그걸 보다가 닭살 돋아서 닫았다. 그리고 다른 것도 펼쳤다. 똑같은 연애 소설. 결국, 이 서채를 가득히 채운 것은 전부 연애 소설 혹은 연애에 관련된 서적들뿐이었다.
그러다 재미있는 것을 생각난 것이 지금.
일단 같이 따라온 사람들부터 돌려보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거라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러났다. 그래도 이 근처에서 자리 잡고 있겠지만.
레오릭은 거기까지는 터치하지 않고 일단 집부터 한바탕 청소했다. 청소라고 해도 마력으로 깔끔하게 정리한 거지만. 태양의 마력을 이용해서 살균도 하고 공기도 환기하고 세탁도 깔끔하게 정리한 후 이번에는 밖에 있는 애를 시켜서 먹을 것 좀 사 오라고 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세계에 태어나서 요리를 해본 적은 없으니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이자벨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1인용 식탁을 가득 채운 따끈따끈하게 김이 오르는 음식들이었다.
“이, 이게……!”
“아, 혹시 들어오면 바로 씻는 타입이야? 미안해. 요리가 식기 전에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 아뇨. 그건 아니지만…….”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 이자벨이 눈치채기 전에 겉옷을 벗는 것을 돕는다. 레오릭의 손길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겉옷을 벗자 평소처럼 움직이기 쉬운 딱 달라붙는 이자벨의 몸이 드러났다. 그런 이자벨을 의자에 앉힌다.
“미안하지만, 요리할 줄은 몰라서 밖에서 사 왔어.”
“아, 아닙니다…….”
아직도 당황한 모습의 이자벨과 시선이 마주쳤다. 레오릭이 눈웃음을 짓자 이자벨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의 취향을 살펴보니 본인은 가정적인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연습하기 위해 그런 분야의 책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연애 소설 대부분이 사회 진출을 한 여성이 남자를 먹여 살리는 쪽이 더 많고, 더 자주 읽은 흔적이 있었다.
마력만 있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긴 하니 상관없긴 하지만.
“자, 이것도 먹어.”
“가, 감사합니다….”
녹슨 기계처럼 굳어 있는 이자벨을 위해 레오릭이 먼저 하나를 포크로 찍은 다음 이자벨의 입으로 움직였다.
레오릭과 눈이 마주치고 여전히 붉은 얼굴로 몇 번 고민하던 이자벨은 살짝 입을 벌리며 레오릭의 포크를 한입 물었다.
그 모습에 레오릭이 살짝 미소짓자 푹 고개를 숙인다.
철저하게 공략하고 있는 남자. 레오릭 프란츠는 속으로 미소지었다. 거의 넘어왔군.
* * *
“네, 네?”
“응. 씻고 와.”
“씨, 씻고 와요?”
“응. 뭐야, 평소엔 안 씻어?”
“아, 아뇨! 당연히 씻습니다! ……그, 그럼 씻고 올게요.”
새빨갛게 물든 얼굴은 여전하다.
이자벨은 손에 든 옷을 바라봤다. 속옷과 잠잘 때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 그걸 준비한 레오릭의 손에서 건너 받을 때 정말로 수치스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욕실로 들어가면 묘하게 깔끔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청소는 빠짐없이 하는 편이지만, 그거랑 다르게 분위기 자체가 바뀐 것 같은 느낌에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깨달았다.
욕실…. 아니 집 전체를 감도는 따스한 빛을.
‘레오님의 태양의 마력….’
아직도 그 날이 떠올랐다.
그분을 모시는 여기사, 클로에와 함께 도착했을 때 눈부신 광휘를 발하는 그분의 모습. 아름답다고 못해 성스러운 모습에 이자벨은 쿵쾅거리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아아…!’
그분의 마력이 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이렇게만 있어도 황홀한 기분이 느껴졌다.
계속 함께하고 싶다. 영원히 그분의 곁을 모시고 싶었다.
하지만 모험가에 불과한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쏴아아아!
물이 나온다. 따스한 물이다. 아무리 그러한 장치가 있다고 해도 이렇게 성능이 좋았던가?
전부 레오님이 준비하신 거겠지. 물로 몸을 씻어내던 이자벨은 문득 구석에 보관 중인 목욕용품들을 바라봤다.
“으으음….”
관리를 안 한 건 아니다. 몸 전체에 자잘한 상처 자국이 있긴 있지만, 거기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관리하기 위한 용품들과 특별한 날을 위해 비싼 돈을 주고 산 용품. 그렇게 구별해놨던 상자였다.
그 상자에 손을 뻗었다.
혹시, 혹시나.
오늘은 특별히 집까지 찾아왔으니까.
‘그, 그런 상황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이자벨은 진지한 표정으로 몸을 씻었다.
구석구석. 빡세게.
* * *
“왔어?”
“네, 넷.”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 채, 이자벨이 욕실에서 나왔다.
뽀송뽀송하고 살짝 붉게 물든 여자의 모습은 이쁘다. 난 웃으면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로 와.”
“……네, 알겠습니다.”
내 손짓에 고개만 떨구며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이자벨의 모습을 바라봤다. 부끄러운 듯이 손끝이 옷을 여민다. 내 옆까지 다가온 이자벨이 조심스럽게 앉는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막 씻은 사람의 특유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평소엔 이젠 뭐해?”
“그, 그렇네요. 저녁 먹고 난 후에는 보통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씻기 전에 몸을 한 번 더 움직여본다거나 씻고 나서 책을 읽고 나서 잠드는 편이네요.”
“아하.”
이 세계엔 TV도 인터넷도 없다.
아무리 발전해도 불편한 점은 많다. 특히 평민은 나 같은 귀족보다 즐길 거리가 부족하다.
동료나 친구와 술 한 잔 마시는 것이 아니라면, 보통 다른 평민들은 저녁을 먹고 난 후 잠깐 시간을 보내고 곧바로 잠들겠지.
하지만 부부나, 연인 같은 남녀 사이에는 다른 즐길 거리가 하나 있지.
스윽.
이자벨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움찔, 몸을 크게 한 번 떠는 이자벨이 우물쭈물하더니 조심스럽게 내게 몸을 맡겼다.
방금 씻고 온 여자의 냄새가 느껴진다. 몇 번을 맡아도 기분 좋은 향. 어깨에 두른 손가락으로 이자벨의 촉촉한 머리카락이 만져졌다.
“이자벨.”
“……네에.”
부끄러운 듯이 작게 말하는 이자벨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새빨갛게 물들고, 눈가가 촉촉해진 이자벨의 얼굴이 보였다. 흉터가 있지만, 그래도 야성적인 매력을 감출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난 프란츠를 떠나서 뮐러로 간다. 물론 두 번 다시 여기에 못 오는 건 아니지만.”
이자벨의 눈을 보면서 천천히 다가간다.
서로의 숨결이 스치는 거리까지 왔다. 눈앞에 이자벨의 얼굴이 보였다.
큰 눈동자, 오뚝한 코. 새빨간 입술. 하나하나 천천히 살펴보면서.
“나랑 함께 가지 않을래?”
“아…….”
아니, 이 분위기에선 이 말은 조금 그런가.
“너도 알지만 난 여자가 좋아. 너 같은 아름다운 여자라면 더욱.”
“레오…님.”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봤다.
“내 여자가 돼라.”
“흐윽!”
눈물이 글썽이는 이자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신체 접촉을 했지만, 압도적인 입장에서 질척거린 거다. 물론 날 보는 시선에 호감이 생기긴 했지만, 처음에는 정말로 무서워했었는데.
“저, 저 같은 사람이라도 괜찮다면…….”
“너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그렇게 말하면, 다른 평범한 여자는 어떻게 해? 그리고 어떤 남자가 널 싫어하겠어?”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춘다.
키스라고 하기엔 그저 입만 맞추는 행위지만.
“아!”
이자벨은 새빨개진 얼굴로 부끄러워했다.
그러는 사이 흐트러진 옷 사이로 이자벨의 피부가 드러났다.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몸을 움찔거린 이자벨이 자기도 모르게 움츠려두다가 멈췄다. 새하얀 피부와 평균 크기의 가슴이 은근슬쩍 드러나기 시작했다.
“괜찮지?”
“……네. 전 이제 레오님의 여자니까요.”
기특하네.
그런 이자벨의 몸을 들어 올려 일어섰다.
“그럼 방으로 갈까.”
끄덕끄덕!
내 품에 안겨 부끄러워하는 이자벨을 안고 천천히 걸었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