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뒷정리 4
* * *
누구나 꿈꾸는 소망이 있다.
이자벨은 자신의 소망을 떠올렸다.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두 가지 선택이 존재한다.
마을의 지배자가 될 것인지, 모험가가 될 것인지.
예외로 가지고 태어난 소질이 좋다면 그 땅의 지배하는 귀족 가문이나 땅이 없는 귀족 가문의 밑에서 가신으로서 들어가는 일.
그 이외는 대부분 비슷한 인생을 걷는다.
하나는 태어난 마을의 지배자가 되는 것.
도시가 아닌 보통 평범한 마을이라면 재능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실상 그 마을의 암묵적인 지배자가 된다. 촌장이 있어도 그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마을의 처녀들은 그 씨앗을 얻기 위해 아양 떨며, 주변 다른 남자들은 그를 거역할 수 없다.
여자라면?
무식한 곳이라면 어떻게든 자식을 낳기 위해 수작을 부릴 거고, 그나마 나은 곳이라면 남자처럼 눈치를 살피며 권력을 잡을 수 있겠지.
유감스럽게도 이자벨이 있던 곳은 무식한 곳이었고 대단하다는 것을 알아도 실감하지 못하거나, 여자라며 우습게 보는 사람들에 의해 감금당해, 아이를 낳는 모체가 될 뻔했다.
부모는 없었고, 그대로 감금당했다.
꼼짝도 없이 당할 뻔했다. 이대로 영원히 갇혀 살아야 하나 절망에 빠졌다. 힘을 사용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컸다면 탈출할 수 있었지만, 초경도 오지 않던 어린 이자벨은 그저 무서워하며 벌벌 떨며 자신을 덮치려는 촌장의 모습에 비명을 질렀다.
지나가던 모험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로 당할 뻔했다.
스승이긴 하지만, 모험가는 떠돌아다녀야 한다며 곧바로 헤어졌다. 그러나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스승이 가르쳐준 지식은 피와 살이 되었고, 그녀 역시 그대로 모험가가 되었다.
대륙을 떠돌고, 미지를 탐험하고. 명성을 쌓고 평민 출신의 마력 보유자로 다른 귀족들에게 스카우트까지 받을 정도로 이름을 날리는 나날.
의뢰를 받고 해결하고, 여러 도시를 떠돌고 때로는 사람들을 도우며. 현실은 이자벨이 꿈꿔왔던 꿈처럼 쉽지 않았지만, 어린 날 스승처럼 모험가로서 열심히 해왔다고 이자벨은 자신할 수 있었다.
가끔 겹치는 활동 영역으로 스승님과 마주칠 때마다 이자벨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그때 구해준 꼬마가 이렇게 컸다고. 그렇게 말하면 스승님은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게 기뻐서 더욱 열심히 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모험가로서 활동하고 일 년, 이 년이 지나고 세월은 흐른다. 모험가 사이에서도 이제는 이름 높은 모험가가 된 어느 날.
“어머, 이자벨. 아직도 모험가하고 있었니?”
“스, 스승님?”
펑퍼짐한 옷을 입고 한 손에는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그 품에는 아직 아기로 보이는 애를 안고 있는 스승과 재회한 날.
한때 색기 넘치는 외모와 큰 가슴으로 다른 남성 모험가를 꼬시면서 여자들에게 질투의 시선을 받았던 스승님은 이제는 완전히 아줌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 언제 겨, 결혼하셨습니까?”
“어머. 몰랐었니? 아, 맞다. 그때 다른 지방에 갔었지? 결혼식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
예전에 봤던 차갑고, 냉철하고. 한 마리의 암표범 같던 여자는 어디 갔을까. 수많은 남자를 유혹하며 가지고 놀던 남자의 수만 한 무더기였었다.
그런 여자가 완전히 아줌마의 모습으로 호호호 웃는 스승님에 이자벨은 정신이 나가버렸다.
“인사하렴. 엄마의 제자란다.”
“제~자?”
“빠빠.”
스승님의 다리에 딱 달라붙은 채로 고개만 든 아이와 손을 휙휙 흔들며 스승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아기.
일 때문에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모험가는 거친 직업. 그렇다 보니 어린아이들과는 영 연이 없던 이자벨은 움찔 몸을 떨었다.
“제자…….”
“으, 윽.”
똥글똥글한 아이의 순진한 눈동자가 이자벨을 지긋이 보고 있다.
그 시선에 압박감을 느꼈다. 익숙지 않은 작은 생명체의 모습은 어린 시절의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이자벨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을 때,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혼은 좋아.”
“스승님이 그런 말을 하실 줄이야…. 계속해서 자유롭게 살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여자였던 거겠지.”
그렇게 말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에는 모성애가 가득했다.
세상에. 그 스승님이 엄마라니. 졸도해버릴 것 같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 이자벨의 모습을 보며 스승은 따뜻한 눈빛으로 이자벨을 바라봤다.
어떤 누구보다 이자벨의 과거에 대해 아는 그녀다. 자신을 동경하면서 활동하는 건 좋지만, 이런 가족의 관계에 얻을 수 있는 기쁨을 그녀가 알아주기 바랐다. 그러니까.
“그러고 보니 이자벨. 나이가 몇이니?”
“……네?”
갑작스러운 말에 이자벨은 자기도 모르게 스승님을 바라봤다.
눈을 빛내며 스승님이 다가왔다.
“이자벨도 슬슬 결혼해야지. 남자 친구는 있니?”
“네? 저기, 스승님?”
스승님의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껌벅거렸다.
이전보다 풍채가 한 층 커진 스승이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왔다. 착각일까. 쿵! 하고 대지가 울리는 소리가 이자벨의 귓가에 울렸다.
아까보다 더 겁이 났다. 무의식적으로 뻗은 뒷걸음. 그 찰나의 순간에 다가온 스승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꽈아아악!
살림으로 단련된 근육이 이자벨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이 사람. 정말 은퇴한 거 맞아?
이전보다 더 두꺼운 팔을 이루고 있는 근육. 이게…… 실전 근육?
“아니, 그전에 너. 남친이 있긴 있었니?”
“가,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거기서 왜 그 이야기가 나옵……!”
“이전부터 한 번씩 만날 때마다 이상하다 했는데, 너 왜 남자를 안 만나니? 딱히 남자가 싫은 건 아니지?”
“저, 스승님? 따, 딱히 남자를 싫어한다던가 그런 게 아니라…….”
“잘됐다! 내가 참한 청년을 알고 있는데 소개해줄까?”
“아뇨, 저기! 스승님! 잠시, 잠시만!”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모험가 때와 다른 의미로 터프해진 모습은 그녀에게 있어 아직 낯설었다.
* * *
그때 이후였을까.
결혼을 비롯해 남자와 연애에 대해 부쩍 관심이 늘어난 것이.
아직 육체는 전성기다.
전성기의 신체는 아직도 강인하고 하고자 하면 곧바로 반응해주고 있다.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마력 역시 자유자재로 움직여 주고 있다.
아직도 충분히 현역의 모험가로서 활동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스승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남편의 뒷담화를 하고, 아이들의 말썽에 녹초가 된다면서 힘들다, 힘들다며 웃고 있는 모습이. 그 아이들과 남편을 바라보는 따스한 눈빛이 가슴을 간지럽게 했다. 또다시 그녀의, 스승님의 모습이 새로운 꿈이 되었다.
그래서 은퇴했다.
그래서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 됐다.
“……그래서 되긴 했는데, 인연이 없어!”
현역 때 워낙 거칠게 다닌 탓일까. 같은 남자 모험가 동료들은 어디까지나 동료를 보는 시선이고, 일반인은 당연히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그래도 모험가와 일반인 커플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나 역시 꽤 이 근처에 돌아다녔는데…….
“웬 아저씨들만 엮이고!”
그야 도시의 유력자 중 하나니까. 그런 건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업무도 성실히 하고 있고.
콰앙!
“뭐어? 노처녀?”
영지의 업무 때문에 몇 번 만난 그 남자. 지크라고 했나? 그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감히 내 앞에서 노처녀라고?
노산이라고? 순산형이 아니라고?
뿌득.
“아직 젊다고! 주름 한 점 없고, 피부도 아직 탱글탱글하잖아?!”
“……아, 네.”
이자벨을 도와주던 길드 사무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진짜로 젊다고 하면 젊은 편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평민이나 높으신 분들의 결혼 시기를 생각하면 나이가 있다는 말은 사실이긴 했다.
그래도 결혼하자고 하면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 본인도 명성 높은 모험가로 기사급의 강한 마력을 가진 보유자. 어딘가의 기사 가문과 결혼해도 문제없을 정도.
그래도 여태까지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남자 보는 눈이 높은 것이 있고 나머지 하나는…….
“여기 보고서입니다.”
“아, 고마워. 그럼 내가 내일 레오릭님에 제출할 테니 너희들은 이만 퇴근해.”
“네! 그럼 수고하세요, 길드장님!”
이자벨이 마지막으로 확인한다며 보고서를 살펴보는 것을 사무원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직접 제출한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얼굴을 스친 표정.
‘역시 소문이 사실인가 봐.’
길드 사무원들이 서로 속닥거리면서 꺄르르 웃었다.
얼마 전부터 길드를 비롯해 근처에 퍼진 소문.
이자벨은 인기가 없다는 듯이 말하지만, 외모와 마력. 둘 다 이름난 재녀다. 모험가 출신으로 이 정도로 성공한 그녀를 탐내는 곳은 많았다. 단지 본인의 눈이 높아서 전부 거절한 것뿐이지만.
근데 최근 그것마저 뚝 끊겼다.
그 이유는 하나. 프란츠 가문의 차남, 레오릭 프란츠가 손을 댔다는 소문 때문이다.
사무원들이 보기엔 본인의 반응을 보면 끝까지 간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주위에서 알 방도가 없고, 설사 알고 있다고 해도 거기까지 간 상대를 건드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안 그래도 나이가 신경 쓰이는 이자벨은 어느 날 갑자기 뚝 끊긴 혼담에 당황했다. 정말로 나이가 차서 그런가? 이자벨의 스트레스가 마하로 늘어날 때쯤, 한 번 보자는 레오릭 프란츠의 연락이 왔다.
순식간에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지어졌다.
“크흠.”
입가가 풀린 것을 자각한 이자벨은 헛기침을 하면서 보고서를 정리하고 짐을 챙겼다.
이제 내일 곧바로 성으로 가서 보고서를 제출한다. 얼마 남지 않은 레오릭님과의 만남. 그녀 역시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길드장이라는 직책을 놓고 갈 수는 없었다.
그것을 유감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자벨은 집에 도착했다.
“……?”
이상한 기척이 느껴진다.
이자벨의 감각이 날카롭게 바뀌어 간다. 마치 기어가 바뀌는 듯이, 체내의 마력이 점화되고 육체가 강화된다.
희미한 푸른빛을 내는 눈동자로 자신의 저택을 살핀다.
“…….”
불법 침입한 흔적은 없지만.
안에 누군가 존재한다.
끼이익.
이자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품에서 애용하는 단검을 꺼내며 기척을 죽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방 안으로 들어간다.
“어, 왔어?”
“……에?”
눈을 깜박거렸다. 어, 왜? 이분이 왜 여기에?
앞치마를 입은 채로 냄비를 들고 있는 레오릭 프란츠. 그분이 거기에 있었다.
“배고프지? 오랜만에 요리 좀 했다. 자, 여기 와.”
“어, 어? 레, 레오님?”
“아 참. 세탁물이 좀 쌓였더라. 내가 빨래해서 마당에 널어놨거든. 제대로 했는지 한 번 볼래?”
멍하니 바라보던 순간, 레오릭의 말에 눈동자가 끼리릭, 움직였다.
마당의 빨랫대에 있는 옷과 속옷이 보였다.
곰이 그려진 팬티까지. 서로 짝이 맞지 않은 속옷이나 싼 값에 샀던 속옷까지.
“……꺄아아아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