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대산맥 2
* * *
“호오. 생각보다 준비는 철저하게 하고 가는걸?”
“어이, 형씨. 날 너무 쓰레기로 보는 거 아니야?”
잘생긴 마스크 때문에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소중한 돈을 주시는 의뢰주다. 한스는 그 남자의 말에 투덜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나도 쓰레기라는 거 부정하진 않겠지만, 크크. 여기서 10년 경력이라는 건 우습게 볼만한 게 아니라고.”
“그건 그렇습…… 그렇다. 다른 도시라면 더 명성을 올릴 수 있겠는데, 아직 여기서 있는 것도 꽤 특이하다면 특이하군.”
한스의 말에 의외의 인물이 끼어들었다.
흉터를 가진, 모험가로 보이는 여자였다. 나이는 20대 후반인가. 한스보다 연하로 보이는 건 맞지만, 모험가로서 경력이 있는 인물인 듯하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같은 마력 보유자의 모험가나 부자나 상인 집안에 들어가는 건 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아가씨도 모험가였나 보군?”
“…그렇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뭐, 아가씨 나이라면 결혼할 때가 됐지.”
“칫!”
“응?”
혀를 차는 소리에 한스가 슬쩍 공기를 살폈다. 뭔가 잘못했나?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닌 건가? 남자를 바라봐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만 있었다.
“크, 크흠. 뭐, 젊었을 때부터 여기서 살아왔으니까, 이제 와서 다른 동네 가라고 해도 숨이 막히지.”
한스의 시선이 성벽 너머의 거대한 산맥을 바라봤다.
“여기는 좋아. 크고 넓고, 쓰레기 같은 나라도 자유롭게 살 수가 있으니까.”
“……그런가? 이 도시를 마음에 들었나 보군.”
“하하하. 그야 그렇지. 다른 영지라면 무슨 일이 있으면 모험가들도 징병하거나, 세금을 높이니까 말이지. 프란츠는 그런 점에서 꽤 자유롭지. 만만세라고.”
“호오. 하긴. 프란츠는 좋은 영지지.”
뭔가 고개를 끄떡이면서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거기다가 사람들도 마력 보유자라고 이상하게 보지도 않고, 창관도 잘되어 있고, 병 걱정할 필요도 없고. 그, 뭐라고 하더라? 복지? 복지였나? 그런 게 좋단 말이지.”
“모험가들 상대로 하면 그 정도는 기본이지. 그러고 보면 세율이 좀 높은 편인데 그쪽은 어때?”
“뭐, 그렇긴 하지. 듣기론 딴 영지보다 높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그만큼의 서비스를 받고 있으니깐 말이지. 호적만 준비하면 여태까지 낸 세금만큼 감면도 되고.”
그래서 여기서 모험가로 활동하다가 결혼하고 그대로 정착하는 사람도 많다. 아마 이 도시의 여러 가게의 주인 부부들은 대부분 그런 사람이겠지.
언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한스와 남자의 대화가 이어갔다.
말하는 걸 보면 세상 물정에 어둡다고 해야 하나, 지식에 편차가 느껴진다.
역시 부자는 맞는 것 같다.
겉모습을 봐서는 어딘가 귀족 가문의 자식 같지만, 마력이 전혀 느낄 수가 없다. 그럼 어디 부자나 상인의 자식인가? 뭐, 진짜로 귀족 가문의 자식이지만 운 없이 마력을 타고 나지 못할 수도 있긴 하지.
그래도 마력 보유자인 여성 모험가가 그런 곳에 처첩으로 들어가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한스가 보기에도 외모가 뛰어난 여자다. 마력은 잘 모르겠지만, 느껴지는 거로 봐서는 한스보다 못한 것 같으니 진작에 좋은 남자 물었나 보군.
그러다 한스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한스는 그의 금빛 눈동자 속에 일렁이는 무언가를 본 것 같다. 마치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알 수 없는 느낌에 몸이 오싹한 것 같은 느낌에 본인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씨익.
“자, 잠깐…! 레, 레오님!”
남자가 여자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리더니 자신의 품속으로 껴안았다. 그러더니 한스를 보고 웃는 모습에 좀 전까지 무엇을 생각했는지 잊어먹었다. 아니, 무슨 바보 같은 짓거리도 아니고. 길 한복판에서…….
“그런 생각으로 본 거 아니었는데….”
“아, 그래? 하하하. 내가 독점욕이 꽤 강해서 말이지. 보다시피 미녀들이잖아?”
이번에는 옆의 은발 여자의 어깨에도 팔을 올렸다. 단발 여자는 얼굴을 붉힌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은발 여자는 바보를 보는 눈으로 남자를 보고 있었다.
“미녀라고 생각은 하는데, 남의 여자를 건드는 취향은 없다고….”
“오, 순애 취향이구나. 나도 좋아해. 특히 일부다처애를 좋아해.”
“미친놈인가?”
일부다처애 이 지랄. 어이없는 놈이네.
한스도 모르게 욕을 해버렸지만, 주변의 여자들도 한숨을 쉬는 모습에 잠깐 진정됐다. 자연스러운 하대도 그렇고, 마력 보유자를 옆에 끼고 있는 모습도 그렇고, 진짜 잘 나가는 집안 자식인가 보군.
“그러니까, 의뢰주님?”
“레오라고 불러. 한스라고 했던가?”
“그러니까…….”
슬쩍 눈동자가 굴러갔다.
옆에서 바라보는 여자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이미 서로 하대하는 건 자연스러운 것 같고…. 크흠.
“레오님? 이라고 부르지. 그래서 준비는 어느 정도 됐으니까, 슬슬 올라갈 생각이다. 말했다시피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이틀이 걸리는데. 괜찮겠지?”
“물론. 그 정도의 준비도 했고.”
남자, 레오가 가리킨 곳에는 은발 여자의 등에 있는 거대한 짐이었다. 도저히 사람 한 명이 들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짐. 그러나 마력 보유자는 감당할 수 있는 정도라 한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고. 노란 언덕.”
모험 도시 트레슬의 성문을 넘으며 네 사람은 출발했다.
* * *
“……지루해!”
“어이, 이쪽은 지금 일하고 있다고.”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3시간.
계속해서 산을 오르고 있다. 때로는 언덕을 내려가며, 숲으로 향하고 나무를 뚫고 들판을 걷는다.
한스에겐 익숙한 광경이다. 1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한 세계.
그러나 레오라는 남자에겐 지루한 광경인 것 같았다.
“더럽게 넓네.”
“그거야 대산맥이니까.”
“겉에서 봤을 때는 그저 거대한 산들이었는데, 어째서 안으로 들어오면 이렇게 넓어지지?”
“글쎄?”
레오의 질문에 한스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건 10년 경력의 모험가인 한스 역시 모르는 일이었고, 그걸 연구하려는 사람들은 한스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다.
“말했잖습니까. 귀찮고 힘들기만 하다고.”
“이럴 줄은 몰랐지. 그냥 등산이랑 다른 게 없는데?”
대산맥의 초입부. 거대한 필드에 레오의 질린 얼굴을 보고 한스가 피식 웃었다.
“그건 그런 길만 골라서 온 겁……, 온 거다.”
“오, 아가씨. 잘 아는데? 대산맥에 자주 왔나 봐?”
“몇 번 정도는.”
단발 여자의 말대로, 그런 길만 골라서 왔다.
“뭘 상상한 지 모르겠지만, 모험가라는 건 다 이런 거야. 소설처럼 전투하는 건 진짜 멍청한 놈들이라고.”
“그래? 진짜 실망인데.”
“마력도 만능은 아니고 여기 필드는 그놈들의 앞마당인데 싸우면 손해밖에 없지. 다치기라도 하면 소득도 없이 철수해야 하고.”
“그래……. 흠.”
레오의 재미없어 보이는 말에 한스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런 거지. 로망은 로망일 뿐이고. 그나저나.
한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생각보다 더 조용한데.”
들려와야 할 자연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니, 들리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더 적다.
“평상시랑 다르다는 건가?”
레오의 말에 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산맥이라고 해도 뭐라고 하더라. 샌님들이 말하는 게 있었는데.”
“생태계?”
“그랬나? 잘 모르겠지만, 대산맥에도 그런 게 존재하고 그 때문에 길드에서도 의뢰를 조절하기도 하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이상하다.
“최근 주기에는 소동물들의 수가 늘어나야 한다고 전에 길드에서 공문을 띄었거든. 그래서 사냥을 자제하는 분위기니까 늘어나야 하는데…….”
한스의 말에 레오가 주변을 둘러봤다.
“없군. 없다라. 이 말이지…….”
레오의 눈이 반짝거렸다.
* * *
“아, 응…!”
“…….”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돈을 벌어야 하나?
한스는 현자 타임에 빠진 채로 자신의 삶에 회의감이 들었다.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두 사람이 붙어 있었다. 단순히 붙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미쳤어, 미쳤어…. 여기 대산맥이라고.”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 그게 말이 쉽냐고.”
옆에서 따라 걷던 은발 여자는 앞만 보고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뒤에 있는 두 명은 난리가 났다.
“저, 그, 아, 안돼…는데…!”
“괜찮아. 아무도 안 봐.”
“그런, 하윽!”
미친놈들아! 내가 보고 있다고!
레오는 단발 여자의 곁에 달라붙어서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거의 껴안은 상태로 걷고 있었다.
“……마력도 없는데 잘도 걸어 다니는군.”
“아……, 네. 그렇죠. 몸 하나는 정말로 건강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대산맥의 풍부한 마력에 압박감을 받기도 한다는데, 잘도 올라오면서 여자와 스킨쉽을 즐기다니.
“……어쨌든 생각보다 일찍 도착할 것 같은데. 이러면 오늘 안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흠. 저건 뭡니까?”
“저거라니, 뭐…… 허. 뭐야 저거.”
길게.
길게 파여있는 무언가가 거기에 있었다.
무언가 거대한 삽 같은 것으로 대지를 갉아먹은 흉터가 거기에 있었다.
“자연스러운 건 아닌데.”
한스도 처음 보는 흔적이다. 이 근처는 자주 다니는 곳은 아니지만, 이런 흔적은 소문이라도 들었어야 했다.
“레오님.”
“오, 도착했어?”
뒤늦게 올라온 레오가 은발 여자의 말에 쑥 나타났다.
그 뒤에 단발 여자가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헐떡거리며 올라왔다.
조금 흐트러진 옷차림을 재빨리 다듬다가 대지에 새겨진 흔적에 얼굴이 굳었다.
“이 흔적이 있었습니다.”
“와우. 뭐야, 이거. 한스, 본 적 있어?”
“아니, 나도 처음이다. 이건 위험한데.”
한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산맥에서 새로운 흔적을 발견한다?
엿됐다.
“튀……!”
거대한 입이 한스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