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아수라장 2
* * *
이상하다.
여기는 분명 휴게소.
성인식 도중 잠깐 쉬어서 체력과 정신을 회복하는 장소였는데….
“…….”
“…….”
“…….”
세 명의 여자가 차가운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고백? 프러포즈한 이리나도 뒤늦게 두 여자를 알아차렸는지 지금은 나를 중심으로 두고 둘러싼 형태로 앉아있었다.
휘이이잉!
분명 구조상 따뜻해야 할 방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콜록! 콜록!”
숨 막힐 것 같은 분위기에 목이 말라져서 헛기침이 나왔다. 곧바로 반응이 나타난다.
“괜찮아요, 레오? 자, 이거 천천히 마셔요. 제가 준비한 약차에요. 몸에 좋을 겁니다.”
“아, 고마…….”
“레오님! 그러고 보니 선물을 아직 드리지 못했죠! 다른 선물들은 전부 창고에 넣어놨지만 이건 직접 드리려고 들고 왔어요. 저희 보랭 가문이 만든 비약입니다! 분명 몸에 좋을 거예요!”
“으, 응. 쓴 건 잘 못 마시지만, 잘 마실…….”
“레오릭 프란츠. 몸속에 있는 마력의 흐름이 복잡하다. 지금은 변해 가는 도중이라 평소보다 더 부담이 큰 것 같다. 내가 마력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더 부담이 덜 가도록 유도해주겠다.”
“……가, 감사합니다. 공주님.”
“…….”
“…….”
“…….”
살려줘.
* * *
레오릭 프란츠가 난처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지만, 여기에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아멜리아 바흐니아는 선수를 쳐야 했다.
타국의 영지……. 물론 프란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현재 가문의 주인인 에이번 프란츠와 그 후계자인 아이단 프란츠에 대한 정보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더군다나 서부와 남부라는 거리는 아직 공주인 그녀가 신경 써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 짧은 시간, 아멜리아는 주변 사람들과 접촉하며 정보를 구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거는 단순한 질문으로, 교묘한 말투로 간접적으로 물으면서 현재의 프란츠와 레오릭,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남부 지방에 대해서 파악했다. 특히나 지금, 성인식으로 여러 귀족이 모인 지금 잠깐의 대화에서 어느 정도 유추가 됐다.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프란츠의 차남.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 이유는 프란츠의 혈통이면서도 가지고 있는 마력의 양이 적다니, 유전병으로 인해 마력으로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흉하다니… 그런 악의적인 소문이 퍼져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소문도 있다.
레오릭 프란츠가 손에 댄 사업이 유명하다. 문학, 예술, 음악 등 물론 그 대부분은 적당히 힌트만 뿌리고 아래 사람들에게 시킨 것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최근 남부 지방의 예술은 크게 발전됐다는 등…….
중요한 건, 이번에 처음으로 만난 레오릭 프란츠라는 사람은 인재라는 것이다.
본인은 소문처럼 외부 활동을 하기 싫어하는 낌새는 있지만, 받은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 소홀히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뮐러 영지에 관한 이야기. 아주 잠깐 있는 것만으로 남부 지방의 정세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단순히 뮐러 영지만 얻는다고 해서 그걸로 끝이 날까?
아멜리아 바흐니아는 냉정하고 냉철하게 생각했다.
뮐러 근처의 땅을 얻는다면 바흔과 좋은 거래 상대가 될 것이다. 설사 자신이 여왕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이 인맥은 앞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
즉, 지금 침을 발라야 했다.
금발금안의 신비로우면서도 화려한 외모.
체내의 마력은 이미 백작 직위의 혈통이라고 하기엔 그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다. 양과 질 모두 백작의 위계에서 벗어나, 후작을 바라보고 있다. 특히 그 마력에는 프란츠 혈통의 능력만이 아닌 그만이 가진 그의 고유한 특성이 희미하게 감돌기 시작했다.
성격은…….
성격도.
아멜리아 바흐니아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녀라고 해서 불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눈을 뜨면 낯선 땅에 있었다.
그런데도 태연하게 있던 것은 왕족이라는 혈통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이 피를 위해야 한다는 의무.
마지막까지 왕족으로서 책임을 지려고 했지만, 그는 그런 자신을 배려했다.
그가 준 선물, 성인식이라는 핑곗거리. 왕족이라는 인맥에 대한 무게는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그가 그녀에게 베풀어 준 것은 조금 과할 정도였다.
특히나…….
‘불안을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 같이 있어 주는 시간이 길어졌다…….’
사소한 이야기.
주변 극장에서 연극을 보며, 차를 마시며 잡담한다.
자신을 배려하는 그의 손짓이, 시선이, 어조가. 왕족이라는 배경이 아닌 오직 아멜리아라는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 소리가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다. 아멜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를 제외한 두 명의 여자. 레오릭 프란츠의 형수, 그레이스 헤밀리언과 프란츠 백작 가문과 동급의 격을 지녔다고 알려진 남부 지방의 또 다른 지배자. 보랭 백작 가문의 이리나 보랭.
이 두 명의 여자가 그와 심상치 않은 관계라는 것은 여태까지 얻은 정보뿐만 아니라 여자의 감이라는 것으로 알아차렸다.
특히 위험한 것은…….
이리나 보랭이다.
푸른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 마치 바다를 연상시키는 듯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자유로운 하늘. 그녀의 혈통도 최소 백작급이라는 소리.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실상 약혼 관계!’
정확한 교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시녀들 대부분이 그렇게 알 정도로 유명한 사이. 레오릭 프란츠의 얼마 되지 않는 외부 활동 대부분이 그녀라는 것을 보면 설득력은 충분했다.
하물며 남부 지방을 지배하는 두 가문. 동맹은 질길수록 나쁘지 않다.
거기에 앞으로 얻을 뮐러 영지에 관한 이야기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지만, 조금 전의 대화를 보면 사실상 두 명의 공동 통치…… 혹은 이리나 보랭과 연관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뮐러를 통치하는 것은 좋지만, 거기에 그녀가 있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멜리아 바흐니아는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낮추지 않은 채 그리고 여기서 제일 위태로운 위치를 알고 있기에 곧바로 움직일 각오를 굳혔다.
* * *
‘위험해, 위험해요!’
이리나 보랭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은 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도 눈앞의 두 명의 여자를 바라봤다.
그녀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프란츠 영지에 나타난 바흔의 왕족이자 공주인 아멜리아 바흐니아 공주.
그리고 레오릭 프란츠의 형수이자 그의 동정을 따먹은 그레이스 헤밀리언.
‘큭!’
동정.
동정이라니.
동정이었어요?! 레오님!?
“……!”
“으, 으응?”
갑작스럽게 노려보는 이리나의 모습에 레오릭은 당황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에 대해 배려심 많고 자상한 모습에 성욕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프란츠의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리나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윌리엄 보랭도 은밀하게 알려줬으니까.
그러니까, 이미 진작에 동정은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심 그에 대해 각오는 했다. 했지만….
‘저는 아직 처녀인데……!’
물론 그걸 탓하진 않지만, 그래도 치사하다! 이리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별로 처녀를 버리고 싶다거나, 다른 남자가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래도 이왕 경험할 거면 첫사랑의 남자와의 첫 경험. 그때 서로 처녀와 동정을 버리는 것이 로맨틱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그 첫 경험의 대상이 문제다.
‘그레이스 헤밀리언!’
아이단 프란츠의 아내, 차기 백작 가문의 안주인. 그녀가 사랑하는 레오릭 프란츠의 형수님.
아이단 프란츠의 경우 외부 활동을 안 하는 것은 아니었고, 보랭 영지에 크고 작은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에도 스치면서 본 적이 있었다. 아니, 애초에 결혼식에도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름다운 모습에 진심으로 축복했었지만…….
설마 사랑하는 사람의 동정을 먹을 줄이야!
‘여우! 여우에요! 여우!’
헤밀리언 가문을 상징하는 동물이 여우였는지, 진실은 모르지만 이리나의 눈동자에 그레이스의 모든 행동이 여우 짓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랬다!
‘가까워요, 꺄아아! 뭐에요, 저 손가락은!’
지금도 그와 가까이 앉은 채로 자연스럽게 팔이 얽히고, 가슴에 닿고,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채, 손가락이 까딱거리면서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다.
헤밀리언 가문의 특성을 이용한 마력 치료를 위해 가까이 있는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저 정도의 스킨쉽…….
‘애초에 형수와 도련님 관계에요! 불륜이에요, 불륜!’
귀족 가문이라고 해도 항상 질척거리고 더럽고, 음란한 관계일 리가 없다. 하물며 프란츠 가문은 성욕으로 가는 본능이 전부 투쟁 본능이나 명예로 갔다고 알려진 진성 무인 가문.
그런 가문에 형님을 대신해서 아기를 낳기 위해 섹스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머리가 아득해지면서 쓰러질 뻔한 걸 이리나는 아직도 다시 생각하면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단순히 몸만의 교제가 아닌 것은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다.
“괜찮아요?”
“네, 고마워요.”
지금도 무슨 병에 걸린 남편을 간호하는 요조숙녀 같은 모습에 이가 갈린다. 이리나는 빠득, 빠득 거리는 이를 마력으로 강화하면서 그레이스를 노려봤다. 그레이스 헤밀리언의 눈빛에도 애틋한 감정이, 그런 그녀를 보는 레오릭 프란츠의 눈빛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과 다른 애정이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더 아버님을 믿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이에요…!’
무언가 계획이 있는 것 같지만, 더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여기선 선수를 쳐야 해요! 공격이에요, 공격!
이리나 보랭의 눈동자가 반짝이며 각오를 굳혔다.
* * *
그레이스 헤밀리언은 두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기세에 눈을 감고 호흡을 다스렸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무엇을 얻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것을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
……여기서 제일 위험한 건.
그레이스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눈앞의 여인을 스쳤다.
아멜리아 바흐니아. 바흔의 왕족.
갑작스럽게 나타난 공주. 이 소녀를 견제해야 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