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아수라장 1
* * *
“후아아….”
지친다.
만능에 가까운 마력의 힘. 무의식으로 강화되는 신체라고 해도 정신력이, 체력이 버틸지 못한다.
특히 귀족과 만나서 대화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지친 일이었다. 어쨌든 지금 이 땅에 있는 프란츠는 나뿐이니까. 빈틈을 보여줄 수도 없었다. 계속 긴장한 채로 한 마디 한 마디 조심하며 대화를 나누고 드디어 잠깐 시간을 낼 수가 있었다.
“오늘 도련님께서는 충분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가주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응? 스벤? 어쩐 일이야?”
그렇게 시간을 내서 연회의 구석에 있는 회장에서 지친 사람 위해 준비된 방에서 쉬고 있을 때, 스벤이 어느새 다가왔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거리감이 조금 더 가까운 건 착각일까.
“피곤하실 거라고 예상해, 음료를 준비했습니다.”
“아…, 응. 고마워.”
스벤이 건네준 약차를 마셨다. 산삼까지는 아니지만, 대산맥에서 나오는 약초는 질 좋은 마력을 흡수해서 자라는 탓인지 약효가 좋다. 조금 편안해지는 속을 진정시킨 후, 창밖을 바라봤다.
“대단하시군요.”
“그런가?”
솔직히 나도 이 정도로 잘될 거라고 예상은 못 했지만, 인공 태양은 지금도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야말로 태양. 지금 도시는 대낮처럼 환한 빛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이러다가 불야성이니 뭐니 그렇게 불리지 않으려나?
그러고 보니 지구에서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말이 있지 않았던가. 그건 그만큼 그 나라의 영토가 크다는 걸 의미하는 거겠지만, 나는 물리적으로 해냈다!
“마력 유지는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일단 한 번 펼친 후에 소모량은 적으니까.”
“대체 어떻게…….”
스벤 역시 이 정도 크기의 태양엔 질렸는지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소모량이 적다고 해도 압박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마력이라는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만능의 힘. 그것은 구현하고 싶은 것을 알면 알수록,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소모되는 힘이 적어진다.
그렇게 연구하고, 격이 높아질수록 마력은 고유의 특성을 가지게 되는 편이지만…….
현대 지식으로 어느 정도 태양에 대해 알고 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도 어렵다. 평범한 사람이 태양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구조고, 그 열기가 어느 정도인지 인터넷으로 검색하기 전까지는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적지 않을까?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 그 정도만 알고 있어도 태양을 구현하는데 드는 마력의 소모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평소보다 더 거대하고, 강하게 만든다고 지쳐 죽을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이전보다 더 매끄럽게 마력이 움직여지는 것 같았다.
스으으윽.
“도련님?”
손에서 피어오르는 금빛 마력. 스벤이 당황해하지만, 나는 조금 고민에 빠졌다.
금빛 마력을 자세히 바라보지만…….
“역시 아직은 모르겠군.”
색이 좀 희미해진 것 같은데….
“이런. 도련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 그래. 나도 조금 쉬었으니 다시 나가봐야…….”
“아닙니다. 도련님. 잠시만 더 계시길 바랍니다.”
“응?”
갑자기 왜?
스벤은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내 시선에 스벤의 입가가 아주 약간 움직였다.
설마 저거 웃는 거야?
“그럼 푹 쉬길 바라십니다.”
“으응?”
그렇게 말하면서 방을 나서는 스벤. 그러면서 문 옆에 있는 어떤 스위치를 눌렀다.
방음을 철저하게 하는 기관 장치다. 물론 마력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긴 하지만, 일단 아예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닌 장치…… 근데 어째서 지금?
잠깐 멍하니 문을 바라보다가,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책장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여기에 비밀 통로가 있었나?
나도 이런 통로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아버지가 알려준 프란츠 직계라면 알고 있는 통로나, 형님과 나에게 각각 따로 자기만 알고 있는 통로라던가. 그런데 여기에 있다는 건 몰랐지만…….
덜컹!
소리가 난 책장을 바라봤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하더니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책장이 열리면서 그 안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그레이스 누나?”
조금 전까지 누나도 연회에 있었지만, 나보다 더 일찍 나와서 손님들을 맞이했었다. 당연히 피로도 쌓였을 테니 먼저 들어가서 쉬라고 했었는데. 언제 여기에…….
내가 당황하면서 바라보자, 그레이스 누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비밀 통로에서 나와 나에게 달려왔다.
“괜찮아? 몸은 어때?”
“괜, 괜찮아요.”
소파에 앉아있는 나에게 거의 몸을 기대면서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누나의 눈빛에 피곤해진 정신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누나야. 누나가 곁에 오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저런 거로 무리하기는……. 굳이 저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아니. 저 정도는 해야 해요. 여기는 수도가 아니니까.”
“……그렇구나.”
내 말에 누나가 슬픈 듯이 중얼거렸다.
수도에서 저런 짓은 절대 하지 못하지만, 여기는 지방이고, 프란츠의 땅이다. 어느 정도 실력을 보여줘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쉬렴.”
“이미 충분히 쉬었는데.”
내 말에 고개를 흔들면서 그레이스 누나는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별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이거라도 해줄게요, 레오.”
“충분한 도움이 됐어요. 고마워요, 누나. 누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이 정도는 익숙해서 괜찮아요. 수도에는 이보다 더한 손님을 맞이한 적도 있으니까요.”
내 말에 웃으면서 누나는 아직 괜찮다고 말했다. 나에게 거의 기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누나의 몸에서 푸른빛의 마력이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미 충분하다고 했지만, 누나의 눈빛과 손길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마음에 아무 말 없이 그 손길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새 조용해진 방.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역시 거의 들리지 않았다.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있는 나와 그런 나의 옆에 앉아 나에게 몸을 기대면서 땀을 닦아주는 누나.
가까이 다가온 누나의 몸에는 여태까지 움직여서 그런가, 뜨거운 체온이 공기를 넘어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다.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그 속에 은은하게 느껴지는 누나의 향이 느껴졌다.
이날을 위해 준비한 향수와 몸에서 느껴지는 선천적인 몸의 향. 촉감과 후각, 그리고 청각까지.
누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레오…….”
“누나…….”
서서히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져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고, 입술이 겹치려는 순간.
벌컥!
“레오릭 프란츠. 수고했…….”
“…….”
“…….”
갑자기 비밀 통로가 열리며 또 한 사람이 등장했다.
아멜리아 공주였다.
공주는 통로에서 나온 채 멍하니 이쪽을 바라봤다.
“……그레이스는 분명 프란츠 장남의 아내가 아니었나?”
“그, 그렇습니다.”
멍하니 이쪽을 보는 아멜리아 공주와 시선이 마주쳤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검게 물든 눈동자가 더욱더 어두워진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까.
일단 자세를 똑바로…….
“누나?”
조금 자세를 일으키려고 했는데, 내 몸 위로 기대어있는 누나가 움직이지 않았다.
“……누나?”
조금 고개를 숙인 채 있던 그레이스 누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야, 평소와 같은…, 같은…….
무셔.
“어머나, 아멜리아 공주 전하. 인사가 끝났으면 잠깐이라도 쉬는 것이 어떨까요?”
“…………그레이스 헤밀리언. 아니, 프란츠의 장남의 아내이자 차후 프란츠 백작가의 안주인이 될 여자. 그대의 걱정은 고맙지만 나는 지금 레오릭 프란츠에게 이야기가 있어서 왔다.”
뭔가.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이 둘, 조금 친해지지 않았던가? 분명 내가 바쁠 때 누나가 대신 아멜리아 공주랑 같이 행동하지 않았던가.
“레오릭…… 레오는 지금. 조금 피곤해서 가족이 아닌 사람이랑 대화할 시간이 없네요. 조금이라도 더 쉬어야 해서요.”
오싹하다.
분위기가 차갑다.
분명 마력이 움직이는 느낌은 없었는데, 철썩거리는 바닷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걱정되는군. 하지만 지금 레오릭 프란츠의 체력이 회복된 것이 느껴진다. 그보다 급한 건 레오릭 프란츠의 몸속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깊이다. 그 제어 솜씨가 너무나 능숙해서 파악하기 어렵지만, 태양과 연동된 지금은 알 수 있다. 장래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레오릭의 형수인 그대는 잠깐 물러나 줄 수 있을까?”
“…….”
“…….”
두 여자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불꽃이 튀는 것 같다.
아니, 그보다 잠깐. 신경 쓰이는 단어가 있었다. 마력의 깊이에 태양? 그 말에 공주를 바라봤다.
내 시선에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아멜리아 공주가 입을 열었다.
“지금 너의 몸속에 있는 마력의 질이 바뀐…….”
벌컥!
“레오님!”
아멜리아 공주의 말이 끊기고, 좁은 방에 또 한 명이 나타났다.
푸른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 방의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타난 이리나는 곧바로 나에게 다가왔다.
“레오님도 참! 저런 멋진 기술을 숨기셨다니! 전에 찾아왔을 때 보여줬어야죠!”
“자, 잠깐 이리나양?”
거의 누워있는 내 몸 위에 기댄 그레이스 누나와 그걸 지켜보는 아멜리아 공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야? 이 방의 차가운 분위기는. 얘는 무슨 강심장을 가진 거야?
“역시 전부터 생각했지만……!”
주먹을 불끈 쥔 이리나는 곧바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기겁해서 겨우 잡아챘지만, 거의 키스하기 직전까지 다가온 이리나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저희 결혼해요!”
“…….”
“…….”
“…….”
“꺄아, 말했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