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금수저 이야기-59화 (59/143)

〈 59화 〉 왕족 ­ 5

* * *

바흔의 왕족, 아멜리아 바흐니아가 손님으로 접대하기 시작한 지 며칠. 그동안 엄청나게 바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실상 가주 대리라는 이름으로 가혹한 상황에 빠진 나는 아침에 눈을 뜨고 다시 잠을 들 때까지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

“……저 하늘의 새가 아름답군. 나도 언젠가 저 새처럼 자유롭게 날 수 있는 날이 찾아오겠지. 새여, 새여. 푸르른 새여.”

“이상한 감상에 빠지는 건 시간 날 때 하시고 여기 추가 서류입니다.”

“너무한 거 아니야? 나 가주 대리야, 가주 대리. 혼낸다?”

“그래서요?”

차갑게 노려보는 클로에의 눈빛에 결국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내 최측근으로 호위 기사인 클로에의 업무는 나 못지않게 늘어난 상태다. 권한 자체는 내 업무 보조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내 업무가 늘어난 게 원인이다. 내 업무가 늘어났으니 클로에의 업무도 늘어난 것.

“이상하네요? 분명 행복한 밤을 보냈는데. 그다음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야근에, 야근에, 야근에, 특근…. 이거 수당은 들어오는 것 맞습니까?”

“크, 크흠.”

“행복하게 해준다는 일상은 어디에 갔고, 일에 치이는 삶이 나타난 거죠?”

“나도 이렇게 될 줄을 알았나…….”

“…….”

내 중얼거림에 바람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빠르게 돌린 클로에의 매서운 눈빛에 결국 시선을 피했다. 클로에에는 미안할 뿐이었다. 지금 내 근처에서 도와줄 애가 클로에뿐이라서….

물론 일을 돕는 가신들, 부하들이야 많지만 결국 내가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지내는 애들이 부족하단 소리였다. 역시 사람을 스카우트해야 하는 건가? 아, 싫다, 싫어.

사람을 책임지면 그만큼 일해야 한단 말이지.

지크는 붉은 피 박멸을 위해서 성을 나섰다. 아마 지금은 이자벨과 베아트리체를 만나서 협력하기 시작하려고 하겠지. 모험가나 뒷골목을 관리하는 집단의 우두머리가 도와주고 있으니 할만하려나? 뭐, 숨어있는 놈을 찾는 게 쉬울 리는 없겠지.

어쨌든 당장 문제는 그게 아니다.

붉은 피 문제는 애초에 단기간에 끝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일은 어디까지나 토대를 만드는 일. 아버지나 형님이 돌아오면 본격적으로 시작할 일이고.

애초에 지금까지 이렇게 거세게 일한 이유도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건 바로…….

­똑똑!

“…….”

잠깐 클로에와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고개를 끄떡이자 클로에가 문으로 향한다.

익숙한 기척과 마력.

레나였다.

“무슨 일이죠?”

“바흐니아 공주 전하께서 프란츠 가주 대리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또 입니까?”

레나의 말에 클로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멜리아 바흐니아 공주 자체를 몇 번 본 적 없는 클로에고, 애초에 별 감정도 없었지만 이제 슬슬 짜증이 나는 듯, 잘 숨겨왔던 감정이 드러났다.

단지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클로에의 그 말대로 그 공주는 몇 번이나 찾아왔으니까.

“벌써 몇 번째입니까. 이쪽은 누구 때문에 바쁜 것인지 알고 있습…….”

“클로에. 그 이상은 안 된다.”

“……죄송합니다.”

나의 저지에 클로에가 고개를 숙였다.

뭐, 클로에의 말처럼 계속해서 부르는 건 아니지만, 하루에 한 번은 얼굴을 마주 봐야 적성이 풀리는지, 그 공주는 계속 나와의 회담을 주선하고 있다.

다만 그 만남 자체가 아예 쓸모없는 일은 아니다. 서로 잡담을 하면서 정보를 캐거나 공유하는 수단으로 나쁘지 않고.

단지 일이 바쁘므로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는 건데.

“추가 업무는 끝났나?”

“네. 중요한 업무는 일단 끝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됐어, 그러면.”

클로에의 말을 멈추게 하고 레나를 바라봤다.

“준비해 놔. 차는?”

“준비하겠습니다.”

“아, 그래. 그리고…….”

손짓으로 클로에를 밖으로 나가게 했다.

좀 예민한 이야기니까.

곧바로 고개를 숙이면서 물러나는 클로에를 본 후에 마력으로 주변을 차단한 후 레나를 바라봤다.

“요즘 어떻지?”

“그것이…….”

사실 귀족끼리의 관계에 레나 같은 입장이 참견하는 건 무례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레나가 머뭇거리는 것 같고. 하지만 그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레나의 판단에는 전달해야 하는 사항이라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래도 공주 전하께서는…….”

* * *

대산맥에서 나오는 특산물이라고 해봐야 대산맥이 워낙 커서 장소에 따라 차이가 심하다. 당연히 지역마다 특산품이 같거나 다르거나 한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이유야 여러 가지 있지만 애초에 자신의 영지에 대산맥이 포함되고 있다고 해도 그 근처에 마을이나 도시를 세우는 영주는 없다.

근처에 사람이 있다는 걸 대산맥의 괴물들은 쉽게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워낙 자주 내려와 습격하는 괴물들을 상대하는 건 귀족이라고 해도 쉽지 않고, 피해도 한 번, 두 번이 아니니 이득을 따지면 결국 그 땅을 포기한다.

화전민이나 도망자, 추방자 같은 놈들이 사는 걸 제외하고 그 근처에 도시를 짓고 관리하는 건 프란츠뿐.

그래서 구하는 난이도는 둘째치고 대부분 사람이 특산품을 구하기 위해 찾아오는 영지가 바로 프란츠다.

즉, 손님에게 대산맥에 나오는 특산품을 보여주는 건 좋은 접대 중 하나라는 소리다.

“이게 대산맥에 자주 나오는 삼입니다.”

“훌륭하다. 대산맥의 산삼…. 이 정도의 크기는 처음 본다.”

지구에서 본 산삼과 비슷한……. 진짜로 산삼이다. 솔직히 그런 거 챙겨 먹던 나이도 아니고, 대충 도라지 같은 게 사람 모양처럼 되어 있으면 그게 산삼이나 인삼이라고 하지 않나?

어쨌든 이 세계에도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하고, 그 효과도 현실의 지구 것을 먹어본 적이라곤 삼계탕의 그것뿐인 내가 실제로 인정할 정도로 효과가 좋다.

“깨끗한 마력. 순수하다.”

“뭐, 보관하는데 애먹으니까요.”

주변의 마력에 오염되지 않게 마정석을 가공해 안이 비치는 투명한 통에 담가진 산삼. 그래. 우리가 아는 그 술병. 그거다. 이건 어느 세계나 비슷하구나. 하여튼 그렇게 관리된 산삼이 들어간 통을 보며 아멜리아 공주가 눈을 반짝이며 보고 있다. 이런 귀한 물건은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관심이 있는 것을 보면 이 물건의 위상이 느껴지지 않나? 크기부터 시작해 품질까지. 이건 진짜 왕족에게 헌상하는 물건이다.

아버지도 어머니가 찾아오는 날 아니면 한 잔 마시는 것도 아까워할 정도다.

“그, 그러나.”

“음?”

아멜리아 공주가 잠깐 머뭇거리면서 내 눈치를 보고 있다.

“이렇게 귀한 걸 받아도 되는가…?”

외교에 도움이 될 정도로 고급품. 돈을 비롯한 수요의 문제가 아니라 공급이 안 돼서 구할 수가 없는 물건이다.

이걸 선물로 주는 것은 그에 해당하는 대가나 빚을 덮어놓는다는 소리. 즉, 단순히 받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괜찮습니다. 귀한 거긴 하지만, 땅의 특성상 구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이거는 제 생일에 받았던 물건이라 온전히 제 것이니 어떻게 쓸 것인지는 제가 정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으으음.”

부담스러워하지만,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납치당했다는 현재 상황에서 이런 거라도 챙겨 가야 들을 욕을 그나마 덜 듣지 않을까. 실제 그녀의 현재 상황이 어떻게 될까.

바흔의 정치 문제에 대해서 모른다. 기본적인 건 알고 있고, 옆 나라라고 하는 특성상 모르는 건 아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아버지가 알고 계시겠지.

일단 이제 내 명령을 듣게 되는 아랫사람에게 시켜서 어느 정도 정보를 얻고는 있지만….

“공주 전하에게 도움이 되면, 그것으로 물건값을 충분히 하는 거겠죠.”

“……이 은혜, 잊지 않겠다. 레오릭 프란츠.”

결국, 가지는 것으로 결정했는지 눈을 딱 감고 그 산삼이 들어간 통을 챙겼다. 나야 외국에 인맥이 생기니 좋고,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만회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를 얻는 것으로 만족하고.

일거양득이다. 솔직히 별로 맛있지도 않아서 내 취향은 아니었다.

“프란츠의 땅은, 정말로 풍요롭다.”

“엄밀히 말해선, 다른 땅도 비슷합니다.”

말했다시피 대산맥의 물건을 구할 수 있고자 하면, 누구나 가능하다.

그런데도 그걸 하지 않는 것은.

“그 정도로 심한가? 대산맥의 아래는….”

“음, 모르시나요?”

서부 지방에 있는 바흔 왕국도 대산맥을 가지고 있을 건데.

“버려진 땅이다. 대산맥 아래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전부 화전민이나 추방자다.”

“뭐, 그렇겠죠.”

그걸 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얻는 이득보다 손해가 크기 때문이다.

가까이 갈수록 매일 덮치는 몬스터 상대로 도시를 유지해야 하고, 상인이나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로 치안을 유지해야 한다.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에 본 극장도 대단했다. 그…… 헐리우드라고 했나?”

“크흠. 그거 말이군요. 발리우드라고 하죠.”

현대 지식 치트 중 하나……라고 해봤자, 말만 적당히 건네면 아랫사람이 알아서 잘 만드는 것뿐이지만.

이 세계에도 문학은 존재하고, 연극도 없지는 않았다.

다만 평민이 접근하기 어려웠을 뿐이고, 다른 땅에 유통하기가 쉽지 않아 제대로 된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평민들의 유흥을 비롯한 문학적인 장르를 좀 더 쉽게 소비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 지구에 있는 어느 나라의 방식이다.

복잡한 내용이나 비극 같은 건 귀족이나 그에 가까운 자들은 모를까, 평민이 접근하기 어렵다면, 춤으로 해결한다.

그것이 발리우드!

“예술에도 능통하다니 대단하다…….”

감탄 어린 눈빛으로 보는 아멜리아 공주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현대 지식 치트를 이용할 때마다 느낀 거지만, 이걸 유도하거나 그냥 내가 생각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점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감탄하는 건 조금 창피한 부분이 있다. 그 정도로 얼굴 가죽이 두껍지 않으니까. 그래도 아는 걸 안 쓰는 것도 바보 같으니까, 쓸 건 써야지.

알아듣긴 힘들지만 조금 들뜬 어조로 말하는 아멜리아 공주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 조금 전에 레나가 말한 것이 기억났다.무표정한 얼굴에 감정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소녀다. 왕족으로서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어쨌든 나이는 이 세계나 현대나 아직 성인이 아닌 소녀였다. 그런 소녀가 갑자기 이국의 땅에 눈을 떴다. 그것도 정체 모를 사람에 의해 정신을 잃고 강제로 온 것이다.

­아무래도 레오릭님이 곁에 없으시면 불안해하는 것 같습니다.

씁.

미래가 기대되는 애라서 내가 봐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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