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왕족 4
* * *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대머리 상인의 표정을 보니 이해를 못 한 듯했다.
유감이군. 신분 제도, 마력에 의한 차별에 대해 일어선 조직의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했다. 진짜로 이용당하는 것에 불과했나.
한 가지만 더 확인해야 하나.
“네 가슴에 품고 있던 그 마정석. 그게 무슨 물건인지는 알고 있었나?”
“그, 그건 만약에 대비한 물건이다. 그것만 있다면 한순간이지만 귀족의 힘을 쓸 수 있다고…….”
몰랐나 보군.
그건 어떻게 쓰든 터지게 돼 있는 물건이다.
평민을 위한 조직이라고 하면서, 클로에가 막지 못했다면 얼마나 많은 영지민이 다쳤을지는 모르는 건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말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너무 들은 말이다.
누군가를 위한 조직이 그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클리셰의 조직은 믿을 게 못 된다.
“그래. 마력이 없는 평민이, 귀족이 부러워 보일 수는 있겠지. 열등감을 느낄 수 있겠지.”
“뭐, 뭐어?”
내 말에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대머리 상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어쩌겠나. 세상은 원래 이런 것을."
툭툭.
어깨 아래가 텅 빈 그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뭐가 정답인지 알 수 없다. 애초에 몬스터도 있는 판타지 세계다. 평상시 존중을 받는 이유가, 목숨을 걸고 몬스터를 토벌하는 것이 귀족의 의무라고 생각하면 그걸 악이라고 평하는 것도 억울하지 않을까.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전생이 생각나는 대화였다. 다른 주인공들이었다면 그런 세계를 꿈꿀 수도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지금 이 세계가 좋다. 좋은 이유 중 대부분이 바로 내가 그 금수저로 태어났기 때문이겠지만.
이 이상 대화를 해봤자 얻을 건 없어 보였다.
기사를 바라봤다. 잠깐 당혹스러운 얼굴을 짓고 있던 기사는 내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알아낸 정보는?”
“붉은 피인 건 알겠지만, 그 중에도 말단인 듯합니다. 평상시에는 노예 상인으로 조직원들을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 같지만, 자신이 안내한 사람들이 누군지는 모르는 듯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놈이었군.”
“크, 큭!”
꽤 실망했지만 없는 건 없는 거였고. 그나마 알아낸 정보는.
“목적지는 수도를 지난 동부 지방이라.”
“네. 그것도 정확한 목적지까지는 몰랐다고 합니다. 도중에 만나는 조직원에게 상자를 건네주는 것이 이번 임무였다고 합니다.”
“동부 지방. 황야인가.”
아멜리아 공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동부의 황야. 황무지. 버림받은 땅. 브람스 왕국이 2~3개는 더 들어갈 정도로 넓은 땅. 하지만 그게 대륙의 끝은 아니다.
“그보다 더 동쪽일 가능성도 있죠.”
“동제국…….”
흔한 판타지에 나오는 오리엔탈의 나라는 아니다. 무공 같은 것도 없고. 거기에 동부 지방에는 동제국만이 아니라 사막에 있는 나라하면 떠오르는 나라도 있다. 동부 지방이라고 해도 목적지는 여러 곳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과연 사람의 손이 잡힐까?
황야를 건너는 건 어렵다. 돈의 망자인 상인 집단도 황야의 위험함에 백기를 들 정도라 거대한 캐러밴이 1년에 1번 교역할 정도다.
특히 이번 교역은 이미 끝났다. 황야 너머로 가는 건 어렵다. 그렇다면.
“어쩌면 붉은 피 일당은 황야에 존재할 수도 있겠군.”
“뭐?!”
대머리 상인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얘는 아는 게 없겠지. 점조직인 이상 밖에서 활동하는 조직원에 거기까지 말할 것도 없고. 황야는 미끼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일부러 이런 추측을 하게 만드는 게 목적일 수도.
“상자를 받았을 때 만났던 사람에 대한 증언은 없나?”
“네. 교환 장소도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자에는 하루에 1번 꼭 이 약초를 불에 지핀 상태로 집어넣으라는 지시만 들었다고 합니다.”
“약초는?”
“보관하고 있습니다.”
약초는 따로 조사하고.
보아하니 약초로 정신을 잃게 하고 여기까지 재운 상태로 이동했다는 건가.
……뭐, 더 할 이야기는 없나?
공주를 바라봤지만, 공주도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네가 보기엔 더 파고들 부분은 있나?”
“없습니다. 개인사 같은 사소한 내용은 모두 조사했고, 다른 노예들도 심문을 끝냈습니다. 여기서 다 파고들어봤자 나올 건 없어 보입니다.”
“그래?”
그 말에 대머리 상인을 바라봤다.
겁먹은 눈으로 이쪽을 보는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이런 자가 귀족들을 전부 죽여서 평등한 세계를 만들겠다라.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겠고, 해봤자 결국 망하는 미래만 보인다.
하지만 먼저 잽을 맞은 이상, 어퍼컷으로 갚아줘야겠지.
“그럼 뭐, 이 이상 붙잡아놔봤자 쓸데없겠군.”
“네.”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희망적인 눈빛을 보내는 붉은 피의 마력이 없는 평민을 바라봤다.
“우리 푸른 피의 보호가 필요 없다고 하신다.”
“네.”
기사도 웃으면서 그를 바라봤다.
“알아서 살아갈 수 있게 하자고.”
“알겠습니다.”
뚜벅, 뚜벅.
마지막으로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대머리 상인을 바라본 후, 등을 돌렸다.
“그럼 아멜리아 공주 전하. 차나 한잔하실까요?”
“좋겠지. 그 달콤한 차. 나쁘지 않았다.”
“제가 좋아하는 겁니다. 입에 맞으시다니, 영광이군요.”
그 차, 아버지나 형님에겐 악평이었거든.
덜컹!
거대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공주의 뒤로, 기사 역시 천천히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보살핌이 필요 없는 붉은 피가 있는 그 감옥의 문은.
당분간 열릴 일이 없겠지.
음?
안의 대머리 상인은?
뭐, 자기 알아서 하겠지. 우리 도움이 필요 없다는 붉은 피니까.
* * *
“레오릭 프란츠. 태양의 업을 등에 진 남자.”
…태양을 업을 등에 진 남자는 무슨 소리야.
날 칭하는 칭호가 점점 거창해지는 건 착각인가.
어쨌든 날 부른 소리에 고개를 돌려 아멜리아 공주를 바라봤다.
“평상시에도 그 생각을 했나?”
“그 생각이라면?”
무슨 생각?
여자 생각밖에 안 하는데.
“……그 차별에 대해서다.”
“아, 차별.”
웃기는 이야기였다.
글쎄. 언젠가 먼 미래에는 현재와 다른 정치 체계가 있겠지. 민주주의, 공산주의가 나타날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정치 체계가 나타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고, 지금의 내가 할 걱정은 아니었다. 후손이 알아서 잘 하겠지. 환경 보전 같은 일도 아니고.
“글쎄요?”
“……모르겠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대가 했던 말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특이한 말이었습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날 보는 아멜리아 공주를 보며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무표정한 건 원래 성격인가.
“지금도 돈이 없어서 일어나는 차별은 존재합니다. 세금을 못 낸 평민이 노예가 되는 것과 그 노예를 사고파는 상인도 그중 하나죠.”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에 빠진 아멜리아 공주를 뒤로하고, 나도 내 일을 해야겠다. 어쨌든 우리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프란츠의 땅에 마정석을 터트린 대가는 치러야겠지.
“클로에.”
“네.”
하루 푹 쉬게 해줬지만, 곧바로 옷을 차려입고 나온 클로에가 곁에 다가왔다.
“감히 우리 땅을 짓밟은 자가 있다. 용서할 수 없겠지?”
“그렇습니다.”
클로에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살기가 가득 찬 미소다.
주변의 다른 기사들의 기세도 높아진다.
다른 누구도 아닌 푸른 피에 반하는 레지스탕스, 붉은 피가 벌인 일이다. 당연히 좋은 감정이 생길 리가 없지. 애초에 이걸 내버려 두는 가문이 있을 리가 없다.
이제 와서 보면 노예 상단을 내버려 둬서 누구랑 접촉하는지 알아보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붉은 피를 조사하고, 철저하게 박멸해라. 우선은 프란츠부터다.”
“알겠습니다.”
프란츠령의 주도, 프란츠부터 시작해서.
그놈들이 지나친, 접촉한 모든 곳을 조사한다.
“당분간 소란스러워지겠군요.”
“우리 바흔도, 시끄러워지겠지.”
우리는 아직 모르지만.
궁까지 잠입한 건 확실한 바흔은 피바람이 불겠지.
아멜리아 공주가 쉬는 한숨에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건 그거고.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연락은 아직인가?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됐을 텐데.”
“그거라면 이쪽에.”
역시 왔군.
애초에 출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아버지 혼자 간 것도 아니고, 군대가 이동하는 거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겠지.
기사가 직접 전달한 서신이니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을 거고.
클로에가 건네준 서신을 받았다. 우리가 감옥에 있을 때 도착했나 보군.
아버지의 마력으로 봉인된 서신을 풀었다.
파아아앗!
“음.”
과연.
아버지도 참.
금빛 마력의 빛이 서신에서 뿜어져 나오며 황금 사자 한 마리가 나타났다.
착!
주변 모든 기사가 무릎을 꿇었다.
클로에마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이 자리에서 조금 전과 같은 건 나와 아멜리아 공주 두 명뿐.
난 아멜리아 공주를 바라봤다. 지금부터 하는 행동에 대한 신호였다.
공주는 고개를 끄떡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지금까지도 딱히 흐트러진 것은 없었지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내가 아닌, 아버지이자 이 땅의 주인인 에이번 프란츠의 말.
나는 마력을 가다듬어 목에 실었다. 서신에서 나타난 아버지의 마력이 내 마력에 섞여 들어왔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선언은 이 땅에 있는 기사와 가신을 비롯한 모든 백성에게 향하는 선언.
“아, 아.”
아버지의 마력에 의해 목소리가 바뀐 것을 확인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내 목에서 나오는 것은 어색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서신을 펼쳐 들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프란츠의 모든 백성은 들어라.”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프란츠의 주인 에이번 프란츠가 명한다. 지금부터 에이번 프란츠가 돌아오는 그 날까지.”
귀찮은 걸 주셨군. 아버지.
“프란츠의 모든 권한을 레오릭 프란츠에게 위임한다.”
모든 기사가 일어서며 검을 들었다.
쿵!
“우리들의 정당한 지배자. 레오릭 프란츠에게 경례를!”
“프란츠에 승리를! 성공을! 번영을!”
“모든 것은 프란츠를 위하여!”
주위 기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눈을 감았다.
…………아니, 내 평화로운 일상은 어디로 갔어?
젠장.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