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왕족 2
* * *
이런 미친 새끼.
그 상인 놈, 뭘 한 거야?
진짜로 왕족을 납치했나?
철썩!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밀물과 썰물처럼, 마력이 밀어오고, 쓸려나간다. 실제로 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력으로 인해 개변된 현실. 환상이라고 할 수 없고, 현실이라고 할 수 없는 혈통에 따른 고유의 마력.
혈통과 혈통이 섞여 짙어지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집단이 형성된다.
강력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는 집단의 상징이 되며 그 핏줄에는 단순한 마력이 아닌, 우두머리에 대한 외경심, 신앙심 등,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서리기 시작한다.
괜히 과거에 귀족들이 신으로서 군림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계를 뛰어넘어 마력이 단순히 마력이라고 부르기 어려워질 정도로 격이 높아질 때,마력은 현실을 침식하고 지배한다.
철썩!
대기 중에 소금기가 느껴지며, 점점 습해지는 공기가 느껴진다. 마치 바다에 온 듯한 착각이 일어난다. 그러나 착각이, 착각이 아니게 된다.
상자에서 그것이 천천히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하얀 의복을 입고, 푸른 보석으로 장식된 예복을 입은 소녀다. 소녀의 공허한 검은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이건, 왕족이다.
* * *
옛날, 북쪽에는 괴물들이 살아가며 사람을 잡아먹는 거대한 산맥이 있고, 서쪽과 남쪽에는 바다가, 동쪽에는 거대한 강이 흐르는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농사하기에는 가능한 땅이 적었고, 사냥하기에는 사냥감이 적은 땅이었다. 그러나 그런 땅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강 건너에는 그들보다 더 강한 민족이 살아있었고, 때로는 침략해오는 그들을 강을 이용해 겨우 버티는 사람들은 결국 바다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의 바다는 지금의 바다보다 혹독했다.
배를 만드는 기술도 부족했던 그 당시 사람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바다에 나갔고, 매번 사람을 희생하며 근근이 먹고 살았다.
그러나 기껏 경험과 지식이 쌓기도 전에 바다에서 올라온 거대한 괴물이 나타났고, 그 괴물에 의해 도시 전체가 멸망할 뻔한 위험이 닥쳤을 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바다의 신이었다.
갈색 피부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의 손짓에 바다가 출렁거렸고, 폭풍이 몰아쳤으며 괴물은 비명을 지르며 결국 그의 손에 육지에서 그 생을 마감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를 바다의 신으로 우러러봤으며, 그는 결국 그 땅을 통치하는 신이자 왕이 되었다.
바흔 왕국의 건국 신화였다.
신의 시대에서. 귀족의 시대이자 야만의 시대가 된 지금도 한 나라의 왕이며, 신으로서 추앙받는 존재들이 아직도 있다.
바흔의 왕이자, 신이라고 불리는 바흐니아 일족. 그들은 바다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
* * *
정신을… 차렸나?
검은 눈동자와 마주친다. 공허한 눈동자에는 의지를 느낄 수가 없었다. 실제로 바흔의 왕족과 마주치는 것은 처음이니 저게 정상인지 아닌지 알 수가 있나. 마력을 가진 놈들은 하나 같이 어딘가 이상하다. 날 빼고.
철썩!
상대할 수 있냐고 물으면, 상대할 수는 있다. 승산도 있다.
왕족의 마력을 가졌다고 해서, 마력의 격이 높다고 해서 상대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저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도 특별하게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주변 환경에 영향을 끼치거나 영향을 받거나 하는 장단점이 존재한다.
만약 바다나, 강의 근처에서 만났다면 승산이 조금 적어지겠지만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바흔의 땅이라면 과연 힘들겠지만. 그러나 여기는 브람스 왕국의 땅이며, 프란츠령의 주도인 프란츠. 이곳은 프란츠가 지배하는 땅이다.
철썩!
이대로 싸우게 되면 도시가 엉망이 된다. 바다의 마력이라니. 딱 봐도 광범위에 특화된 것 같지 않나. 한바탕 싸우게 되면 엉망이 될 도시가 머릿속에 스친다. 솔직히 이대로 말로 끝나면 최곤데.
아니, 하필 아버지와 형님이 없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망할.
“…….”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을 한 바흔의 왕족.
왕족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마력의 파도가 철썩! 철썩! 거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이쪽이 먼저 나설 수밖에.
“저의 이름은 레오릭 프란츠. 여기는 프란츠의 땅입니다. 정신이 드십니까?”
“…….”
내 말에 눈썹이 움찔거리며 반응을 나타내는 소녀. 옆 나라 왕족에 대해서 어느 정도 배우는 것은 있다.
다만 왕족의 혈통 관리도 있어서 자세한 정보는 극비로 취급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현재 바흔의 왕족은 현재 바흔의 왕과 후계자인 왕자 하나에 공주 둘로 알고 있다.
그 둘 중 한 명은 이미 시집을 갔고, 제일 막내인 공주의 이름은…….
“혹시 그대의 이름은 아멜리아. 아멜리아 바흐니아 공주 전하가 맞습니까?”
“…….”
내가 부른 이름에, 반응이 나왔다.
아멜리아 바흐니아. 그 이름이 나오자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신이 있는 거 맞지? 아니, 왕족이면 단가? 내 말을 계속해서 씹네.
이쁘니까 봐준다.
“답한다. 그렇다.”
오.
맑은 목소리가 여관에 울렸다.
소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검은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본다. 대화가 되면 곧바로 사정을 이야기해서…….
“소개한다. 내 이름은 아멜리아. 아멜리아 바흐니아. 바흔 왕국의 제 2공주이자, 바다의 무녀.”
“……응?”
무녀?
그런…… 게 있었나? 그런 지식은 없는데.
혹시 왕족 내 호칭인가? ……알고 싶지 않다.
“추궁한다. 바다의 일족을 납치한 자는, 그대인가?”
“……뭐?”
지금 얘가 뭐라고?
고오오오오오!
등 뒤의 태양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내 감정에 이어진 태양이 감정과 마력을 연료로 더욱 그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당장.”
“…….”
“당장 사죄하시오, 바흔의 왕족.”
금빛 태양이 나의 마력을 연료 삼아 그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마력은 정신과 감정의 힘이자 영혼의 힘. 혈통으로 이어진 마력은 혈통에 대한 모욕에 극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간단히 말하면 소녀의 말에 빡친 나의 분노에 호응하며 그 크기를 더욱 키우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등 뒤에 커진 금빛 태양이 일렁거렸다.
“이곳은 정진 정명한 프란츠의 땅이며 난 이 땅을 통치하는 일족의 혈통이다. 그 말을 프란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당장 사죄해라, 바흔의 왕족.”
이 년이 버릇없게?
금빛 안광이 서린 눈동자로 바라보자, 바다가 출렁거리며 소녀가 잠깐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연다.
“……이해했다. 그렇군. 모욕에 대해 사죄한다. 프란츠여.”
쫄았냐?
근데 아직도 반말하네. 이년이.
“느껴진다. 강대한 금빛 마력. 응축된 영혼의 힘. 백작급, 아니 후작급인가?”
소녀의 눈동자가 등 뒤의 태양과 날 바라본다. 일단 사죄를 했으니, 받아들여야겠지. 왕족도 납치당한 후 이제 눈을 뜬 것 같으니까, 혼란스러웠겠지. 그래. 어른인 내가 참자.
“프란츠 백작의 차남, 레오릭 프란츠입니다.”
어쨌든 왕족이니 예의는 차려야지.
아직도 멍한 눈동자지만, 어쨌든 제정신이긴 한듯하다. 주변을 채우던 바다의 마력이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녀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바다의 마력이 느껴진다. 아직도 경계를 완전히 거둔 것은 아니었다.
“들어보았다. 백작……. 프란츠 백작. 라이니아 너머의 브람스 왕국. 그 남부를 지배하는 금빛 사자. 승리와 성공. 그리고 번영을 이루어내는 자.”
“영광이군요.”
소녀의 말에 일단 예를 갖추며 대답한다.
말투가 조금 어지럽긴 하는데. 외국인…… 외국인? 아니, 언어는 같지 않나? ……어쨌든 이쪽이 이해하자.
“…….”
“…….”
잠깐 서로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대충 파악되는 건 대머리 상인이 왕족을 납치한 것 같긴 한데.
대체 어떻게?
“크흠. 그럼 바흔의…….”
“이름으로 좋다. 나는 아멜리아. 아멜리아 바흐니아다.”
“……음, 그럼 아멜리아 공주 전하는 현재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확실히는 모른다. 그대에게 청한다. 그대가 아는 정보부터 얻을 수 있는가?”
“물론입니다.”
그래 봤자 말할 건 없지만. 여기서 팅겨 봤자 이득이 되는 것도 없고. 아니 있어도 일단 사고를 방지하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
노예 상단과 대머리 상인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그 설명에 아멜리아 공주의 검은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의식이 있었다.”
“의식?”
바다의 향이 느껴졌다.
단지 떠오르는 것만으로 주변의 마력이 영향을 받아 침식된다.
한숨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왕족은 이래서 싫다. 이걸 막아야 하는데 일단 아무리 봐도 납치당한 여자애의 자기 방위에 대해 터치하면 더 안 좋은 반응이 나올 수도 있으니 일단 참자.
그래도 최소한의 억제를 위해 태양은 유지해놔야겠다.
“바다의 의식. 바다의 괴물들을 견제하기 위한 바흐니아의 의식. 적어도 연안까지 접근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의식이다.”
“호오…. 그런 것이.”
이것은 몰랐는데. 살펴보면 나오는 부분인가? 아니면 바흐니아 일족의 비밀인가. 비밀이라고 하기에는 태연히 말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면 내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는데.
“그 의식을 준비하는 도중 의식을 잃고, 눈을 뜬 지금은 이 땅에 있었다.”
“과연. 참고로 누가 그런 일을 벌였는지는 아십니까?”
“모른다. 그러나 좁힐 수 있다. 의식 자체는 유명하나, 의식을 준비하는 과정은 비밀리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궁이 통제한다.”
……응?
그 말은.
“궁에 배신자가 있다. 프란츠의 아들, 레오릭이여. 전언을 부탁할 수 있나?”
“……하.”
하아아아.
귀찮은 일에 말려 들어가는 느낌이 물씬 일어났다.
하지만 단순한 귀족의 차남인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알겠습니다. 단지, 사정이 있어서 이 땅을 떠난프란츠의 진정한 주인. 프란츠 백작이신 제아버지에게도 사정을 설명해야겠습니다. 그때까지 손님으로서 프란츠에서 머물러주시길.”
“……이해했다. 프란츠의 아들. 갑작스러운 방문에 사죄한다.”
“아닙니다. 프란츠의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멜리아 공주 전하.”
갈색 피부에 검은 눈동자의 소녀.
여태까지 허공에서 있던 소녀가 천천히 내려와 땅에 착지했다.
바다가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