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검문 5
* * *
구릿빛 매끈한 피부.
나올 데 나오고 튀어나올 곳이 튀어나온 실전적인 몸매.
찰랑거리는 머릿결.
그윽한 눈동자.
반짝이는 이. 아찔한 미소.
코끝을 간지럽히는 살 내음.
대머리 중년의 상인이 팔을 활짝 벌리며 자신 있게 웃으며 외쳤다.
“어떠신가요, 프란츠님! 우리 상단이 자랑하는 최고의 노예들입니다!”
“와…….”
세린인지, 클로에인지. 뒤에서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슨 뜻일까. 이해하긴 싫었다. 아직도 뇌가 거부하고 있었다.
난 지금 대체?
“어떻습니까? 제가 데리고 있는 모든 노예는 모두 질병도 없는 건강한 노예입니다!”
“그, 그래.”
마치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인 듯, 상인의 등 뒤에서 가지각색의 포즈를 취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있었다.
구릿빛 피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오일 같은 걸 발랐는지 반짝거리는 피부를 드러낸 채로 짝 달라붙는 팬티 같은 걸 입은 채 이를 반짝이며 웃고 있는 울퉁불퉁한 몸매를 자랑하는 모습에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흡!
“끄흡.”
“그류튀스가 자랑하는 최고의 바다 남자! 실전에서 단련된 근육! 지치지 않는 체력! 태양에 적당하게 태운 구릿빛 매끄러운 피부! 어떻습니까! 프란츠님의 안목에 드시는지요!”
“크, 크음…. 그, 그렇네.”
상인의 말에 다시 시선을 뒤에 있는 노예에게 향했다.
눈이 마주친 구릿빛 남자 노예가 환하게 웃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저거 지금 윙크한 거야? 시발?
으아아악! 눈이! 눈이! 안 본 눈 산다! 끄으으윽!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체면 때문에 참고 있다.
이 가슴에 차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까.
불끈 쥔 주먹을 부들거리며 가만히 서 있을 때, 뒤에서 클로에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류튀스의 남자 노예도 유명하죠?”
“뭐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저 남자들이 유명하다고? 저 숨 막힐 듯 더운 저놈들이?
멍한 눈으로 바라보자 클로에가 정말로 몰랐냐는 듯이 바라봤다.
아니, 내가 그런 걸 왜 알고 있어야 하냐고.
“진주랑 함께 유명합니다…. 진주를 알고 계셔서 아시는 줄 알았는데…. 그쪽 사람들이 워낙 튼튼해야죠.”
“나, 남자 노예만 유명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남자 노예만 유명할 리가 없어…. 이왕 유명할 거면 여자들도 유명해야지!
다시 그 남자들을 바라봤다. 피부가 구릿빛이긴 한데, 처음엔 태양에 태워 먹은 건 줄 알았는데 원래 저런 피부색인가.
인종이 다른 거였나?
……아니! 눈 색이랑 머리카락 색이 이렇게 컬러풀한데 인종도 따로 있었어? 어떻게 구별하는 거야? 피부색으로 구별하나? 대체 이 세계의 유전자는 어떻게 된 거야. 그런 건 몰랐는데. 딱히 책에 인종에 관련된 건 없던 것 같은데.
하긴 그런 것보다는 마력 차별이 심한 세계니까.
그래도 왜 저게 유명하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 여자 노예는?
“바흔 왕국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물을 이용한 마력 제어가 능숙하니까요.”
“그런 특성도 있었나?”
뭐야, 그 새로운 설정은.
전혀 몰랐다.
세린이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아주 미묘한 수준이긴 하지만, 귀족급 마력이라면 물에 한해서는 한 단계 높은 위력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만.”
“으음.”
역시 표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공부로는 접하지 못한 새로운 지식이 늘어났다. 속성을 뛰는 마력은 뭐, 판타지에서 흔한 설정이긴 하지. 물론 굳이 그렇게 분류를 하거나 하지 않지만, 프란츠는 물리 특화? 파괴 특화? 그런 느낌이고. 특화라. 게임도 아니고.
“어느 정도 부호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편이라 그들에게 꽤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노예라고 하지만, 거의 전속 시종에 가깝죠. 그러다 보니 저들 도시에서도 노예가 되는 건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건……. 흠.”
보디가드 같은 느낌인가. 스위스 용병?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지만. 귀족보다는 돈 많은 평민을 위한 노예인가. 확실히 느껴지는 마력 양 자체는 모험가보다 작다. …하긴 그 정도 마력이라면 모험가를 하고 말지.
“그렇습니다! 저희 바흔 왕국이 자랑하는 그류튀스의 남자 노예! 프란츠님도 어떻습니까!”
“아니, 싫다.”
“그, 그렇습니까.”
딱 잘라 거절하자 크게 겁먹은 표정을 짓는 상인이 잠깐 나를 보며 머뭇거리다가 세린과 클로에의 눈치를 봤다.
이거 뭐, 심기를 거슬렸다고 생각하는 건가.
“다른 노예는 없나?”
“물론 있죠. 사실 이쪽으로 오면서 업계 사정을 살펴보고 여러 상품을 구매하거나 팔거나 했죠. 사실 저도 여기까지 오는 건 처음이라 가치 넘치는 시간이었습니다. 다만 실제로 거래한 건 거의 없습니다만….”
“흠. 이 근처는 확실히 노예가 적긴 하지.”
세금을 못 내는 평민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풍요로운 땅이라 큰 편은 아니다.
굳이 노예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까 싶지만.
“그런데도 굳이 여기까지 왔나?”
“음, 그, 그게 그렇게 크게 이상한 일입니까?”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상인이 머리를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굽실거렸다.
“세금도 세금이고. 노예면 관세가 꽤 세지 않나?”
“그건 그렇죠. 하지만 그만큼 가격에 프리미엄이 붙습니다. 실제 이 근처에 그류튀스 노예는 드물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확실히 거의 없지. 나도 솔직히 처음 보고. ……근데 그건 내가 외부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편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클로에와 세린을 바라봤지만, 그들도 고개를 젓고 있다.
“수도까지…… 아니, 보랭 영지까지만 가도 엄청나게 프리미엄이 붙을 겁니다. 노예들에게도 고가에 거래되는 건 나쁘지 않은 조건이죠.”
“그래도 나라를 넘어서까지 거래를 하려고 하다니. 꽤 끈기 있군.”
“하하하! 상인이니까요. 돈만 있다면 어디든 갑니다.”
나라면 귀찮아서 그딴 짓은 안 한다. 어쨌든 대충 알겠고.
“일단은 요즘 분위기가 어떤 건 알지?”
“아, 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뮐러와의 전쟁으로 이쪽에 불안한 요소는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만약의 사태라는 걸 대비해야 하고, 그래서 검문이 강화된 거다. 내 호기심도 있으니 확인할 건 해야지.
“서류는?”
“아, 넵! 여기 교역 허가증입니다. 바흔과 브람스 양쪽 모두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가 여태까지 방문했던 영지들의 인장입니다.”
상인이 건네준 서류를 클로에가 받은 후 천천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이상은 없나 보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내가 볼 필요 없고, 클로에가 확인해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위조라면 내가 봐도 알아차릴 방도는 없고.
그리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다른 노예는 어디 있지?”
“여기 있는 그류튀스 남자 노예들이 제가 가진 최고의 상품으로 다른 노예를 보여드리기엔 격이 떨어집니다만…….”
“남자 노예를 봐서 뭐하겠다는 거지?”
진심으로 이해 불가하다.
상인이 조금 헷갈리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어쨌든 내 요구에 맞춰 조금 더 안쪽의 마차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로 나오겠지? 여자 노예가!
“그류튀스의 여자 노예도 있겠지?”
“네, 네…. 있긴 있지만 프란츠님의 안목에 맞을지는…….”
“괜찮아, 자, 어디?”
“이쪽입니다. 안내하겠습니다.”
* * *
“……갔습니까?”
“닥쳐.”
지금 이 새끼가 뭐라고 하는 거지?
대머리 상인은 곧바로 뒤돌아서 헛소리하는 노예에게 닥치라고 말했다.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노예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의 대화가 들릴 수도 있다.
“귀족분들의 심기를 거슬리는 언동은 하지 마라. 목이라도 날아가고 싶냐? 아니면 같이 죽자는 거냐?”
“네, 네. 죄송합니다.”
대머리 상인은 노예에게 한바탕 외친 후, 식은땀을 훔쳤다.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일류의 모험가가 얼마나 괴물인지 대머리 상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모험가를 과거 전쟁에서 수도 없이 학살했던 기사의 모습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도 공포에 질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기사보다 더 괴물인, 살아있는 대형급 몬스터인 귀족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치게 된다니. 대머리 상인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귀족 상대로 방심할 수는 없다.
애초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인제 와서 덜미를 잡혀 망칠 수는 없다.
“짐 정리하고, 노예들 상태 점검해. 유감스럽게도 프란츠님의 안목에 맞는 노예를 준비하지 못한 건 우리 상단의 큰 실태다. 다음에는 더욱더 좋은 상품을 준비해 언젠가 다시 찾아오는 것으로 만회하도록 하자. 자, 서둘러 정리해!”
“네.”
조심스럽게 말하면서, 미리 정해둔 사인으로 의사를 전한다.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이거까지 알 방도는 없겠지. 원래 여기까지 조심스럽게 해동하지 않았지만, 전쟁 때문인지 귀족과 마주친 건 처음이다.
행동 하나, 하나. 어색한 점이 없도록 평범한 노예 상인으로 행동한다.
그류튀스의 남자 노예들이 재빨리 움직이는 걸 지켜보며 대머리 상인은 일단 안도의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