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교섭 2
* * *
가문의 선대 주인이 차기 후계를 고를 때, 중요하게 보는 것은 가문에 따라 다르겠지만, 주요 골자는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이 다스리는 땅을 제대로 통치할 수 있는가.
외적의 침입에 대적할 정도로 마력이 강대한가.
가문의 마력을 대대손손 계승할 수 있는가.
“처음 후계자로 선택된 것은 장남인 티르손 뮐러입니다.”
“분명 저희가 알기로 현재 후계자가 된 것은 차남이신 티르우스 뮐러님이 아니었습니까?”
내 의문에 트레인 뮐러가 쓴웃음을 지었다.
“현재는 그것이 맞습니다. 장남인 티르손 뮐러는 후계자 자격을 잃었고, 그 지위를 이어받은 것이 차남인 티르우스 뮐러님입니다.”
즉, 현재 일어난 내분은 티르손 뮐러로선 후계의 지위를 되찾아 가문의 주인이 되는 것이고, 티르우스 뮐러는 후계자의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건가.
“하지만 티르손 뮐러가 후계자 자격을 잃은 것은 자업자득입니다.”
“자업자득?”
트레인 뮐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건… 창피함과 분노였다.
“가혹한 통치가 시작됐습니다. 세금은 올랐고, 백성들의 삶은 고달파졌습니다. 전대 가주님도 영지민의 삶에 대해 무관심한 편이었지만, 반대로 그것은 영지민의 삶에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않았다는 뜻도 됩니다.”
전대 가주는 병으로 인해 은거했다. 마력으로 억누르며 여태까지 버텨왔지만, 나이가 든 지금 이 이상 버티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해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로 인해 실질적으로 가주를 대신하여 통치하는 티르손 뮐러를 막을 사람이 없어졌다.
“사실, 그건 그리 큰일이 아니긴 하죠.”
평민.
영지민들 입장에선 잔인한 일이지만, 아무리 그들의 삶이 고달파졌다고 해도, 흔히 말하는 높으신 분들에게는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마력도 없는 그들의 불만이 커져봤자, 바뀌는 일은 없다.
현대에는 칼과 총 앞에선 누구나 평등했다. 단두대가 떨어지면 그 누구나가 목이 뎅겅 잘렸지만, 이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설사 다수의 마력 보유자가 나타나 혁명을 일으킨다고 해도, 귀족… 그것도 영지의 주인 앞에서는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자신의 이득에 눈이 먼 그는 탐욕스럽게 부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는 세금.
두 번째는 상인들에게 징수의 양이 늘어났다.
실제로 이때부터 아버지는 사람을 보내 뮐러 가문의 상태를 지켜봤다. 웬만해선 상인들은 지정된 이상의 세금을 받지 않는 편이다.
대형 캐러밴이 아닌 작은 행상인들에게서 징수하는 세금에 이상이 생겼다는 건 무슨 일이 있다는 증거라며 아버지가 평소 수집하는 패턴 중 하나로 그러한 일이 있으면 자주 사람을 보내 무슨 일이 있는지 꾸준히 확인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영지 가신들의 자산에도 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하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가신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이유야 여럿 있지만, 받는 충성만큼 베풀어야 한다. 열정 페이에도 한계가 있다는 거다.
그만큼 오래 충성을 다한 가신에겐 그만한 대접은 해줘야 할 건데.
그런 가신들에게도 손을 썼다.
“아직 작위를 계승도 안 한 상태에서입니까?”
“네. 그 때문에 말이 많았죠.”
그때는 여러모로 고생했다, 그런 얼굴로 트레인 뮐러가 웃으면서 말했다.
“뮐러 가문의 가신들과 티르손 뮐러 사이에 불신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습니다. 물론 계속 그를 따르는 가신들도 있습니다. 장남 파벌이라고 할 수 있죠. 그들은 티르손 뮐러에 붙어 간신처럼 단 이야기만 뱉기 시작했죠. 그리고 영지와 가문을 위해 충언을 올리는 가신들을 쳐내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상황이 안 좋아졌습니다.”
잘도 버텼군.
오히려 여태까지 들키지 않은 것도 신기하다. 이게 아직 장남이 후계자였을 때의 이야기란 소리지?
뮐러는 굴란 산이 끼어있다고 해도 가까운 거리의 영지다. 그런 영지의 상황을 이렇게까지 막아내다니. 누군지 모르지만, 꽤 유능한데.
“이때부터 사태가 더 복잡하게 흘렀습니다. 처음은 굴란 산에 내려온 대형 몬스터의 등장입니다.”
“호오.”
그런 일이 있었나.
시선을 돌려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떡이며 동의했다.
“작년에 일어난 일이었지. 아이단이 나섰지만, 굴란 산 너머 뮐러 영지로 향했기 때문에 철수했다.”
“대형급의 마력은 확실했다. 기사단이 나서면 퇴치할 순 있어도 피해가 나왔겠지.”
아이단 형님의 말에 트레인 뮐러를 바라봤다. 그때를 생각하는 듯이 눈동자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대형 몬스터였습니다. 확실히 대형급 마력을 가진 멧돼지의 모습을 한 괴물이었다고 했습니다.”
“대형급 마력을 가진 멧돼지의 모습을 한 괴물. 흑마저군요.”
“네.”
흑마저. 희귀한 대형급 몬스터 중에서 그나마 자주 출몰하는 놈. 흑색 털이 인상적인 놈으로 거대한 체구와 맷집으로 끊임없이 돌격하는 놈이라고 들었다. 발을 멈추지 못한다면 밭이나 마을에 큰 피해를 얻게 되는 놈이라, 발을 묶는 게 대처 방법인 놈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위험한 놈은 아닐 텐데. 나는 아직 상대한 적은 없지만, 아버지의 훈련으로 어느 정도 강도로 돌격하는지 경험해봤다. 적어도 가문의 후계자 정도라면 감당 가능한 문제라 사태가 복잡해질 이유가 없을 텐데.
“장남, 티르손 뮐러는 출진하지 않았습니다.”
“음?”
뮐러 영지의 기사단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모르겠지만, 그럼 피해가 꽤 나올 텐데. 차남이 나섰나?
“네. 차남이신 티르우스 뮐러님이 출진했습니다.”
대형 몬스터가 나왔다고 해도 기사단에서 감당 가능하다면 꼭 가문의 주인이나, 직계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기사단도 어느 정도 활약은 해야 하니까.
다만, 큰 문제가 없다면 직접 나서는 편이다. 그게 피해가 없고, 주위의 선전에 도움이 되니까. 게임으로 치면 명예 수치가 오른다고 할까.
“문제는 흑마저가 내려온 촌락은 아주 작은 촌락입니다. 대산맥 바로 아래에 있는 작은 촌락. 들어오는 세금도 얼마 되지 않는….”
그 말은.
내 시선이 이 세계의 귀족들에게 향했다.
차가운 눈빛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버지와 형님.
이 이야기를 하는 트레인 뮐러도 경멸의 눈빛을 나타냈다.
“예. 티르손 뮐러는 귀족의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돈과 시간과 세금을 비교하여 이득이 안된다고 판단한 그는 영지의 기사단에 대기 명령을 내렸습니다. 흑마저가 다시 대산맥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으니, 가까운 도시를 다시 습격하지 않는 한 대기하라며. 그 모습을 참지 못한 티르우스 뮐러님이 직접 가신을 이끌고 출진하였지만, 그때 촌락은 이미 멸망한 뒤였습니다.”
그런데도.
현 가주인 뮐러 자작은 조용히 은거를 유지했다.
티르손 뮐러에게 후계자 자리를 뺏지 않았다.
“티르우스 뮐러님이 직접 가주님을 뵈었지만, 가주님은 장남인 티르손 뮐러를 막고 싶다면 힘으로 쟁취하라고 했답니다.”
“그건 참.”
뮐러 자작은 무투파인가?
솔직히 만난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버지를 바라보니 아버지도 고개를 저으며 자신도 별로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일단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편이라고 했다. 그럼 전쟁 세대이긴 하겠네.
“그 상황에도 내분을 일으키고 싶지 않으셨던 티르우스 뮐러님은 불만에 가득 찬 가신들을 다독이며 참았으나,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찌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결정타라.”
확실이 악덕 영주라고 할 수는 있지만, 내분이나 반란이 일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평민이나 가신들이 불쌍하긴 해도 이 정도의 악덕 영주가 없지는 않겠지. 주변 다른 가문에게 전쟁의 명분이 될 수도 있는 내분이 일어난 결정적인 계기가 따로 있겠지.
“모든 마력 보유자는 임신과 출산을 의무로 한다. 그런 법을 제정했습니다.”
“응?”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뭘 들었지?
트레인 뮐러를 바라봤다. 나를 비롯해 아버지와 형님도 그를 바라봤다.
그는 잠깐 말을 머뭇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기혼자는 자신을 비롯해 처나 첩에게 매년 임신을 유지해 마력 보유자를 출산시켜야 하며, 미혼인 기사들은 비슷하거나 조금 높은 마력을 지닌 자와 파트너 관계를 맺어 임신시키거나, 출산해야 합니다.”
“으응?”
그러니까…….
혹시 야겜에 나오는 인간 목장 같은 건가?
“무엇보다 이 법은 차남이신 티르우스 뮐러님에게도 적용됐습니다. 이미 자식을 가지고 계신 티르우스 뮐러님도 다시 자식을 낳으라고 했으며, 무엇보다 티르우스 뮐러님을 분노케 했던 것은.”
티르우스 뮐러의 딸, 트리아나 뮐러는 직계, 방계를 가지지 않고 가문의 사람들과 자식을 가져 가문의 마력의 질을 높여 귀족의 의무를 다해라.
아버지인 티르우스 뮐러 앞에서 직접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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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딸을, 마치 짐승처럼 교배와 출산을 반복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없었던 일은 아니었다.
강대한 마력 보유자가 많을수록, 그 세력이 강해진다면. 강제로 임신시켜 마력 보유자를 출산시킨다는 생각은 누구나가 한 번 정도는 했을 거다. 그래 생각 정도는.
다만.
“추하군.”
아버지의 눈동자가 얼어붙었다. 그 차가운 시선에 트레인 뮐러의 몸이 얼어붙었다.
“추하다 못해 더러워서 구토가 나오는군. 티르손 뮐러는 귀족의 피를 모욕하고 있는 건가?”
언제나 단정한 아버지의 금빛 눈동자에, 금빛 마력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황금 사자의 후예라고 일컫는 프란츠 가문의 주인.
에이번 프란츠가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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