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교섭 1
* * *
“뮐러는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이오.”
중년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이쪽을 노려봤다.
그러나 문제는 그 남자의 의도와 다르게 이쪽의 그 누구도 그걸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까.
마치 길거리 구석에 박힌 돌멩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무감정한 눈으로 뮐러에서 온 사신과 그 호위로 함께 온 기사들을 바라보는 프란츠 가문 사람들의 모습에 남자는 경멸과 분노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분노한 남자의 전신에 아른거리는 남색 마력. 뮐러 가문 특유의 색을 확인했지만, 눈앞에서 발현되는 마력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가문의 사람들은 무심하게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경계하지도 않는, 대처하지도 않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바라보는 무심한 시선.
남자가 주먹을 불끈 쥘 때, 옆에서 호위하던 기사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체념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기사의 시선에 이내 남자는 마력을 가다듬었다.
“……민폐를 끼쳤소.”
“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회담의 장소에서 마력을 일으켰다는 건 당장 회담이 끝나도 이상이 없는 일이건만.
프란츠 가문의 대표로 참가한 문관의 말은 눈앞에 있는 중년 사내가 설사 마력을 일으켜 공격한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사소한 일이라는 것을 돌려서 표현했다.
그 뜻을 알았다고 해도, 뮐러에서 온 중년의 남자, 뮐러의 사신은 이를 악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흠.”
멀리서 시력과 청력을 강화해 회담의 장소를 바라보면서 일련의 상황을 파악한 나는 결국 예정대로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다.
뮐러의 사신이 왔을 때, 아버지는커녕 형님조차 나서지 않았다. 그저 가문의 문관 중 한 명이 대리로 맞이했을 뿐.
명색이 전쟁에 대한 일이거늘. 모든 안건이 몇 단계를 걸쳐서 아버지에 향한다.
“잔인하네.”
이게 약소국의 서러움이라는 걸까. 예전 고향이 생각난다. 어땠더라? ……이제 20년도 넘은 일이다. 기억이 잘 안 나긴 하네.
“그렇습니까?”
어느새 옆에 다가온 클로에가 나와 같이 회담의 장소를 바라봤다. 눈에 아른거리는 푸른 마력이 나와 같이 시력을 강화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결국, 뮐러에서 온 사신이 무엇을 항의하던 우리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 아닌가.”
“당연합니다. 전쟁 준비로 얼마나 많은 돈을 썼습니까.”
“그게 기사가 할 말인가…?”
“비서라면서요?”
내 태클을 태연하게 받아치는 클로에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얘도 나에게 꽤 적응했네.
“투자한 만큼 그 이상 이득을 얻어야 끝납니다.”
“전쟁이란 대체…….”
사업 그 자체네.
아니, 그건 현대도 비슷한가?
“레오릭님은 참석 안 하십니까?”
“내가? 굳이?”
클로에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애초에 나에게 그런 권한은 없다.
영지를 가진 귀족의 차남으로서 가지는 권력이야 그렇다 치고, 영지의 일에 간섭할 수 있는 내 권한은 어디까지나 도시의 치안에 한정되어 있다. 그것도 일시적이고, 범위도 좁다. 프란츠가 도시를 운영… 아니. 지배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한 직책에 불과하다.
그러니 애초에 영지 밖의 일에 대한 권한이 있을 리가. 나온다고 쳐도 그건 아버지와 형님에 대한 선을 넘는 일이다.
“형님도 나서지 않았는데 나설 필요가 있을까. 애초에 급이 안 되지. 사신이라고 보낸 놈이 방계에 겨우 저 정도 밖에 안되는 놈인데.”
중년의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을 바라봤다. 격이 다르다, 이 말이야. 뮐러 직계가 와도 프란츠보다 격이 달리는데. 저 사신이 여자였다면 혹시 몰랐을텐데.
다시 시선을 회담에 돌렸다. 사신이 전쟁을 준비하는 프란츠에 항의한다. 전체적인 대화의 흐름은 바로 이것이다.
그때부터 꽤 시간이 지나고, 슬슬 추수의 계절이 찾아왔다. 뮐러의 내전도 잠깐은 진정될 타이밍에, 프란츠가 전쟁에 나선다는 소식을 드디어 그들도 알아차린 것이다.
이 타이밍에 일부러 노린 것도 있다. 이번 명분인 내전으로 인한 귀족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명분 중 하나인 외적에게 자신의 백성을 지키지 못하는 것.
그들은 뮐러의 평민들을 위해서라도 우리와 대적해야 한다.
“꽤 조심스럽게 서로 싸워왔던 것 같지만, 이제는 늦었지.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들도 눈독 들이기 시작한 것 같고.”
우리가 제일 빨리 움직인다.
이미 오래전에 준비해왔고, 보랭 가문이 백업한다.
명분도 충분하고, 오랜만의 전쟁에 무관들의 사기가 충만하다 못해 솟구치고 있다.
자신이 없다.
패배할 자신이.
내가 지휘하는 건 아니지만.
똑똑!
“음?”
잠깐 딴생각을 하던 중, 문이 두드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프란츠 백작가의 집사장, 스벤이 찾아왔다.
“주인님이 부르십니다.”
“아버지가?”
뭔가 데자뷔가 느껴진다. 클로에를 힐끔 바라보니 조용히 자리에 물러나 있었다.
잠깐 시선을 마주쳤을 때 고개를 저는 걸 보니 클로에도 모르는 것 같고….
“알겠어. 집무실에 계시나?”
“네.”
스벤이 문 앞에서 서서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봤지만, 여전히 무표정하다. 절대 불편한 사이가 아니다. 그렇지 스벤?
……스벤?
“크, 크흠. 클로에. 중요한 일은 처리했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해.”
“알겠습니다.”
꾸벅, 인사하고 먼저 떠나는 클로에를 보고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한 번 회담 장소를 바라봤다.
회담은 끝났는지, 뮐러의 사신이 얼굴을 붉힌 채 회담의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이 보였다.
“쯧쯧.”
목숨을 유지한 채로 이 땅에서 벗어난 놈들이 얼마나 적은 지, 저놈은 알까?
아버지의 시대, 야만의 시대로 불리던 그때라면 회담은커녕 목이 날아간 채로 성문 앞에 걸렸을 텐데.
“안내해.”
“네. 이쪽으로…….”
스벤이 조용히 앞장서서 움직이며, 그 뒤를 따라갔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때는 형수님과 섹스했는데.
……아, 다른 일도 있었지.
* * *
똑똑!
스벤이 문을 두드린 후,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조용히 섰다.
“아버지. 레오릭입니다.”
“왔군. 들어와라.”
안에서 허락이 있어야 겨우 들어간 집무실 안에 아버지와 형님의 모습을 보고 이전에 있던 가족회의가 또 열리는 건가 싶은 순간, 낯선 사람이 있었다.
“인사해라. 뮐러에서 온 사신이다.”
“반갑습니다. 프란츠 백작가의 차남, 레오릭 프란츠입니다.”
“반갑습니다. 트레인 뮐러입니다. 방계이므로, 편하게 대해주시길 바랍니다.”
“하하. 성을 계승 받은 이상 방계가 무슨 문제입니까. 오히려 저야말로 차남에 불과하니 편하게 대해주시면 됩니다.”
들어가자마자 느낀 집무실 안 분위기가 나쁘지 않고, 형님이 아니라 아버지가 직접 소개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적절한 예를 취하고 인사했다.
그 남자는 남색이 도는 검정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꽤, 마력이 풍부한 걸 보면 거의 직계에 가까운 마력이다. 만약 직계에 적당한 후계자가 없다면 이 남자가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작지 않겠지.
“소문으로 듣던 프란츠 백작가의 차남이군요! 비밀 무기로 소문이 무성한 레오릭님을 볼 줄이야.”
“비밀 무기가 소문이 무성하면 그건 더 이상 비밀 무기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닌지?”
“하하하하.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 나름의 품격이 있지 않습니까?”
소문이 난 비밀 무기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이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지만, 솔직히 오글거리는 것도 있다. 무협지에서 나오는 별호? 타이틀 같은 게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고. 이자벨도 있던 거로 아는데.
어쨌든 비밀 무기라니. 밖에선 날 뭐라고 부르는 건지.
일단 첫 만남은 나쁘지 않고. 형님을 힐끔 바라봤다. 여전히 웃은 채로 이쪽을 보다가 시선이 마주친 형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사신이라고 하신다면, 밖의 그 사람은 뭡니까?”
“그 사람도 진짜 뮐러에서 온 사신이지.”
내 의문에 형님이 답했다.
그럼 사신이 둘이라는 건데.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럼 이 분은 장남 쪽입니까, 차남 쪽입니까?”
“차남이다.”
“호오, 차남. 동질감이 느껴지는 군요.”
“하하하. 잘 부탁드립니다.”
현재 뮐러에서 일어난 내분의 원인이 되는 이유. 뮐러의 계승을 누가 하냐는 건데.
원래라면 장남이 계승하지만, 딱히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지구에서는 그 뭐더라? 장자상속이라고 하던가. 이 세계는 장남이니 차남이니 하는 것보다는 마력이 중요하다 보니 평민이라면 모를까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라면 핏줄만 이어진다면 클로에처럼 성을 물려주거나 양자로 삼거나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뮐러의 경우에는 후계자로 선택받은 것이 차남이다. 그걸 납득하지 못하고 내분까지 간 것이 장남이고.
“그럼 밖에 있는 뮐러의 사신은 장남입니까?”
“그렇다.”
아버지의 말에 차남의 사신을 바라보니 여전히 웃으면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꽤 내가 모르는 사정도 있는 것 같긴 한데. 굳이 내가 알아야 할 일인가?
“그럼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뮐러의 사신.”
아버지의 말에 차남이 보낸 사신이 입을 열었다.
왠지 나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사신은 입가에 지었던 미소를 지운 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항복하겠습니다.”
사신이 할 말은 간단했다.
전면 항복.
단, 차남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