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모험가 길드 2
* * *
성 아래 사람이 과연 자신을 지배하는 귀족을 알아볼 수 있을까?
정답은 땡!
아버지라면 모를까 한낱 차남은 못 알아본다.
내가 대외적으로 활동을 안 한 것도 있지만.
“이렇게 자유롭게 나온 건 처음인데.”
“하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체코를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영주성 아래 거대한 광장을 중심으로 뻗어진 길들이 보였다.
한낱 남부 지방의 영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한 영지.
“평화롭군.”
“적어도 호위의 기사들이랑 같이 가시는 것이…….”
체코의 잔소리를 끊었다.
딱히 호위가 필요한 이유도 없고 애초에 각종 연회에 참가한 일이 드문 내 얼굴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애초에 날 목적으로 암살 같은 건 비효율이지. 노린다면 형님이고. 만약 들켜서 뒷배라도 알려져 봐라. 즉시 전쟁이다.
“됐어. 괜히 우르르 몰려가면 시선만 끌고.”
“하지만.”
“자, 가자.”
말 많은 체코를 내버려 두고 먼저 움직였다.
괜히 병사나 기사를 이끌고 움직여 봐라.
그렇게 움직이게 되면 나도 복식을 갖춰야 하고, 가문의 문양이 박힌 복장에 프란츠 백작가의 상징인 빛나는 금발금안의 소년이 나타난다?
지금 활기찬 영지민들이 얼음처럼 딱 얼어붙어서 쥐죽은 듯이 조용해지겠지.
지금도 고급스러운 옷이라 주변에서 한 번씩 시선을 보내긴 하지만 기껏해야 프란츠 가문에 관련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어쨌든 핏줄 자체는 꽤 뿌려져 있으니까.
“아, 시끄러워. 계속 그렇게 떠들 거면 나 먼저 간다.”
뒤에서 계속 잔소리하는 체코를 내버려 두고 먼저 움직였다.
아까부터 귓구멍 아파 죽겠네.
모험가 길드가 있다는 구역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걷는 도중 이 도시의 사람들을 구경했다.
성에서 보는 것과 비교하면 낡은 옷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옷 자체는 깨끗했다.
거기에 얼굴에 그늘은 거의 없고, 활기찬 모습이 가득하다.
영지민에 대해 깊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니 나름 오는 게 있네.
“생각보다 더 활기차네.”
“이 모든 게 영주님 덕분입니다.”
뒤에서 따라오면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던 체코가 내 말에 백작님 찬양을 주절대더니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는 체코의 얼굴에 혀를 내둘렀다.
세뇌 수준이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아버지의 통치가 잘 하는 건 맞는 것 같다.
아니면 이 근처만 이런가.
“여기 근처는 잘 사는 사람들이 지내는 곳인가?”
“아, 네. 어느 정도 자산이 있는 평민들이 지내는 곳입니다. 중심 지역의 땅이 좀 더 비싼 편입니다.”
역시 땅값이란.
보통 말이나 마차로 이동해서 이렇게 보는 것은 처음이라 주변을 자세히 살피면서 걸었다.
가끔 지나가면서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호화로운데?
보통 중세 시대면 낡은 시장이랑 집들만 보는데 여기는 만화 같은 곳에 나오게 여러 가게가 가득 있다.
꽤 큰 건물들도 크고. 여기까지만 보면 여기가…… 중세?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생각해 보면 정말 중세는 아니구나. 중세풍 판타지긴 하지.
“아,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크네.”
조금 시간이 걸렸다. 느긋하게 걷긴 했지만 걷는 거리를 생각하면 중앙 광장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보다 외진 곳에 있군.
이 근처는 지나가본 적이 없었다.
“모험가들이 중앙 광장에 무슨 용무가 있겠습니까. 이 근처는 여관이나 술집이 많고, 성문에도 가까운 편이니 위치상 나쁜 편은 아니죠. 거기에 어쨌든 무기를 들고 다니는 놈들이니.”
“그래?”
얘도 꽤 많이 아네.
체코의 말처럼 확실히 여기까지 오다가 본 건물들 대부분이 여관이나 음식점이 많았다. 아니면 술집이나.
“근데 확실히 중앙 쪽보다 허름하네.”
그렇기보다는 보수 공사 같은 흔적이 많은데.
“그, 조금 험하게 노는 놈들이 많다 보니.”
체코가 조금 면목 없는 표정을 지었다.
“청소도 나름대로 하고 있습니다만.”
“아니, 그런 건 괜찮아.”
근데 모험가 놈들이 사고 치면 형장에 끌려가지 않나?
“그들도 그건 아니 적당히 사고 칩니다. 마력만 쓰지 않으면 뭐.”
“하.”
생각보다 잘 노네.
뭐, 피해만 없으면 딱히 탓할 필욘 없나.
자잘한 사고야 다 어느 정도 각오하고 하는 것 같고.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면 되나?”
주위를 둘러보니 확실히 판타지 세계의 모험가처럼 생긴 놈이 많다.
평소에는 못 보던 전투의 흔적이 가득한 갑옷이나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확실히 판타지긴 한데.
“비키니 아머는 없네.”
“네? 그런 게 왜 있습니까?”
“아니 어디서 본 것 같아서.”
유감이다.
아니, 내가 만들까? 가능할지도.
비키니 아머 기사단. 괜찮은데? 그 방법을 쓰면 방어적인 면에도 문제가 없고……. 아니면 메이드복 기사단도 괜찮고.
덜컹!
“실례합니다.”
한참 건물 앞에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건물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며 사람들이 점차 물러나기 시작했다.
체코 역시 내가 놀려먹을 때와 다른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내 옆에 섰다.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모험가 길드의 분위기 속에 나타난 건 짧게 친 빨간 머리카락과 한쪽 눈엔 새겨진 흉터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나이는 대략 20대 후반? 나이에 맞는 성숙한 매력이 돋보이는 여자.
“프란츠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을 맡은 이자벨입니다. 레오릭 프란츠님을 뵙습니다.”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허리 숙여 인사하는 여자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아까부터 건물 5층에서 다른 모험가 놈들과 비교하면 꽤 많은 마력을 가진 놈. 거슬리게 밖을 살피던 기척에 기를 죽여놨더니 헐레벌떡 뛰쳐나온 모습이 재미있다.
“그래. 네가 여기의 길드장인가?”
“네.”
정중한 태도 속에 보이는 식은땀. 그 속에 담긴 공포.
그 모습을 보며 살며시 웃었다.
* * *
“아, 이 차. 내가 좋아하는 찬데?”
“네. 요즘 유행하는 찻잎입니다. 입에 맞으시니 다행입니다.”
이자벨의 집무실이라고 안내된 곳에 도착한 후, 길드 직원으로 보이는 안내원이 내온 차는 기억에 있는 물건이었다.
적당히 달달한 향이 특징적인 차. 내가 주로 마시는 차가 분명했다.
근데 유행한다고?
내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자 체코가 나섰다.
“레오릭님이 자주 드신다는 소문이 나고부터 유행이 시작됐습니다.”
“뭐? 정말?”
아니 왜?
조금 당황스럽네.
체코가 희미하게 웃었다.
“귀족분들 사이에 유행하는 물건은 평민들 사이에도 유행하게 됩니다. 물론 그 대부분이 고가라 일반 평민들에겐 바라볼 수 없는 물건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찻잎 자체는 많은 양이 공급되는 편이라 조금 무리하면 손에 닿는 물건이죠.”
“내가 마시는 건 어떻게 알고?”
“알게 모르게 소문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죠.”
으음.
이게 소문이 날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다.
따뜻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그래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원래 주인이 앉아야 할 곳을 앉은 나는 눈앞에 있는 여자, 이자벨을 바라봤다.
듣기로는 한때 모험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지금은 그 공적을 인정받는 형태가 돼서 길드장이 됐다는 여자.
그때 시절의 흔적이 조금씩 보였다.
움직이기 쉽게 달라붙는 옷으로 인해 옷 위에서도 보이는 단련된 신체.
치유된 흔적이 있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자잘한 상처 자국.
특히 인상적인 눈가에 새겨진 상처.
그리고 그 몸에 숨겨진 기사급 마력.
야성적인 누님의 매력이 물씬 풍겨 오는 여자였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여기의 길드장, 이자벨이라고?”
“네.”
나와 같이 찻잔을 들고 있지만, 긴장감에 가득 찬 표정이 잘 보였다.
차를 그렇게 마시면 제대로 맛이나 볼 수 있을지.
“좀 더 편하게 있지?”
“아, 아닙니다. 지금도 편합니다.”
그런 얼굴로 말하니 설득력이 없는데.
나를 받들고 사는 하녀도 이것보다 공손하지는 않겠다.
하긴 평범한 사람이 귀족을 앞두는 상황이 익숙할 리가 없나.
하물며 평생 거친 일만 해온 여자다. 지금도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오늘 왜 방문한 건지 궁금한 것 같네.”
“아, 아닙니다.”
싱긋.
긴장감 해소를 위해 살짝 웃었지만, 이자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니, 대체 왜?
옆에 있는 체코를 바라보자 체코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내가 뭐했다고?
뭐, 좋아.
“별건 아니고. 이제부터 내 관리하에 들어올 곳이 궁금해서 찾아왔다.”
“……꿀꺽.”
다리를 꼬고, 편하게 앉으면서 말했다.
……얼굴이 죽어 가고 있는데, 괜찮나?
* * *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이자벨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애써 참았다.
눈앞에 있는 금발금안의 남자.
신비롭게 빛나는 금안을 마주하자, 당장이라도 도망치라는 본능을 억눌렀다.
밖에서 느껴진 이상한 기척에 마력 탐지를 썼던 순간.
이자벨은 자신의 신체를 압박한 강대한 마력에 기절할 뻔했다.
거대한 절벽이 자신을 감싼 듯한 그 압박감.
거대한 해일에 자신이 가진 마력이 그대로 휩쓸려 나갈 것 같은 마력의 폭풍에 영혼이 뽑혀 버리는 것 같았다.
이게.
이게 인간의 마력이라고?
인간이 이 정도의 마력을 품을 수가 있나?
과거 바다에서 봤던 거대한 폭풍을 떠올렸다.
자연재해와 이 눈앞의 인간과 다른 점이 뭐가 있지?
귀족의 힘이 강력한 건 알고 있었다. 실제로 전장에서 힘을 발휘한 귀족을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나?
“얼굴이 새파랗군. 모험가들을 이끄는 길드장이 이리 약해서야.”
“하, 하하하. 죄송합니다. 신경 쓰겠습니다.”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하지만, 이 남자의 금빛 눈동자에서는 무엇 하나도 느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눈앞의 사내에게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 조금 전까지 아주 희미하게 흘려 들어오는 마력의 낌새가 완전히, 완벽하게 사라졌다.
마력을 품은 자라면 조금이라도 느껴야 하는 마력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 있으면서도 실제로 눈앞에 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의 기척.
진짜 인간인지, 괴물이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프란츠 가문의 차남. 그 뒤에 있는 그의 부하가 좀 전까지는 냉정하게 보던 시선이 어느새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뀌는 걸 보면서 이자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한 이자벨은 체면 따윈 벗어 던지고 당장이라도 펑펑 울고 싶었다.
* * *
아까 장난친 마력이 문제인 것 같아서 자제했는데, 이젠울려고 하는데?
괜찮나, 이 여자?
“체코, 얘 정신이 이상한 것 같은데?”
“……불쌍하네요. 이 여자.”
“뭐가?”
“그것보다 레오릭님. 제 이름은 지크입니다.”
“아.”
쏘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