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14/14)

에필로그

아이가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때리기는 자기가 때려 놓고는 저런다니까.”

“제가 가 볼게요.”

속상한 표정을 하는 김 선생님에게 눈짓을 한 후, 은혜가 똑똑, 조심스레 노크를 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제 아홉 살인 남자애는 입술에 힘을 준 채 크레파스로 스케치북에 검은색을 마구 칠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상현아.”

이름을 불린 아이는 은혜를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새까만 스케치북을 더욱 새까맣게 만들며 작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가까이 오면 때릴 거예요.”

“선생님도 때릴 거야?”

“나는 다 때릴 수 있어요.”

은혜가 같은 반 친구의 다리를 멍이 들도록 발로 찼다는 아이의 옆에 앉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때렸는지 말해 줄래?”

아이는 입을 꽉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은혜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선생님 눈에 상현이는 이유 없이 친구 때리는 사람으로 안 보이는데.”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거 다 알아요.”

“여기선 한 번도 친구들 때린 적 없잖아. 장난감도 매번 양보해 주잖아.”

상현이 까만 눈을 들어 은혜를 보았다. 부모 같지도 않은 부모에게 학대를 받다가 최근 시설에 입소한 아이였다. 숨을 몰아쉬는 아이의 눈에 들어차는 눈물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은혜가 말없이 팔을 벌렸다.

“이리 와.”

어깨를 들썩거리면서도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 아이를 품에 꼭 안아 주자 그녀의 품에 소리 없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은혜는 억울함과 서러움에 씩씩거리는 아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따끈따끈한 김이 나는 것 같은 머리를 쓸어 주었다.

“선생님은 상현이 믿어. 그래서 끝까지 상현이 편 되어 줄 거야.”

결국 아이의 입술에서 커다란 울음이 터졌다. 은혜는 아이가 마음껏 울 수 있도록 품을 빌려주었다.

***

“반장이라는 애가 주동해서 상현이를 따돌렸나 봐요. 계단에서 밀쳤대요.”

“아니, 다른 선생님들은 뭐 하고요?”

“안 보이는 데서만 그랬대요.”

벤치에 마주 앉은 김 선생이 머그잔을 감싸며 한숨을 푸욱 쉬었다.

“하여튼 요즘 애들 진짜 무서워. 이제 겨우 초등학생인데 이러면 어떡해…. 하필 원장 수녀님 안 계실 때 이런 일이….”

원장 수녀님은 서울에 일을 보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학교에는 제가 가 볼게요.”

“그럴래요? 응. 그래요. 은혜 씨가 가 주면 우리 애들 기도 팍팍 살 거야.”

김 선생이 반색하며 말을 이었다.

“애들이 오히려 더 솔직하잖아. 예쁜 엄마들이 학교 가면 자기들이 더 우쭐한대. 그런 건 본능으로 아는 거야 뭐야?”

“그럼 확실히 멋 좀 부리고 가야 되겠는데요?”

“응. 아주 그냥 은혜원 대표로 확실히 눈도장을 찍는 거예요.”

“그러게. 제 이름도 완전 딱이잖아요.”

넉살 좋게 마주 받는 은혜의 곁에서 김 선생님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은혜가 시설에 온 지는 겨우 1년이 조금 넘었지만 많은 것들이 확실히 바뀌고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젊어 긴가민가했지만 일 처리는 똑 부러졌고 아이들을 세심하게 챙기는 건 가끔 상상할 수 없는 부분이라 깜짝 놀랐다.

지난여름 방학 때는 은혜원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제주도에 여행까지 다녀왔다. 학교에 돌아간 후, 아이들의 사기가 끝없이 올라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시설은 이제 증축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모두 은혜가 진행하는 일이었으므로, 원장 수녀님이 그녀를 신뢰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게다가 그녀가 이곳 출신이라는 사실이 더욱 신뢰감을 주었다.

“아 참, 이 선생님 점심때 은행 갔을 때, 시내에 체육관 오픈했다고 누가 명함 주고 갔어요.”

“후원하시겠대요?”

은혜가 돌아오고 나서 후원자가 갑자기 늘었다. 개중에는 시설에 왔다는 새로운 젊은 선생님의 얼굴을 보러 온 이들도 끼어 있었다. 물론, 은혜의 칼날 같은 철벽 수비에 대부분은 들이대지도 못하고 끝나는 게 다였다.

“응. 그리고 애들 운동할 곳 필요하면 언제든 지원한다고. 부동산 오 사장님이 왜, 사거리 코너 건물 주인이 바뀌었다고 했잖아요. 내 촉이 말하는데 아무래도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

“딴맘 있는 것 같진 않고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짚고 넘어갈 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자세한 건 우리 깐깐한 이 선생님 있을 때 다시 와서 말하라고 했지.”

김 선생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웃으며 내뱉었다. 눈에 띄게 잘생겼다는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그만두고는 시계를 보더니 저녁 식사 준비를 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과 함께 요리를 만들고 조리 과정을 체크하는 것도 일과 중 하나였다.

“이 선생님은 좀 더 있다가 올 거예요?”

“네. 일광욕 좀 하다 갈게요.”

가을 햇살이 노란 은행잎을 투과했다. 수령을 알 수 없는 커다란 은행나무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금물결이 일었다. 팔랑, 팔랑, 떨어지는 낙엽은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은혜는 오래된 원목 테이블에 턱을 괴고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붉은 벽돌로 된 오래된 담벼락.

그곳에서 머리에 껌 붙이고 울고 있는 어린아이가 떠오르자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나타나 눈을 맞추던 소년을 생각하자 가슴 한구석이 아련하게 젖어 들었다.

“네가 은혜구나.”

모든 이야기의 시작. 눈동자가 밤하늘에 흐드러진 별처럼 반짝이던 정우를 만난 순간이었다.

원장 수녀님은 그녀에게 정우의 회복 결과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는 대신, 그를 믿으라고 말했다. 은혜 역시 수녀님께 많은 걸 묻지는 않았다. 그저, 그들의 사랑을 믿는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자신의 이름이 참 싫었던 아이는 결국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를 쫓아 달리던 자그마한 놀이터. 아이들과 빙 둘러앉아 있는 정우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공부방. 울면서 짜장면을 먹었던 식당. 그녀가 지금 앉아 있는 오래된 벤치까지 모든 곳이 다, 정우와의 추억으로 가득했다.

오빠. 오고 있는 거지.

가을바람이 짧아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헝클고 지나갔다. 먼지 없이 파란 창공에 꼬리가 빨간 고추잠자리가 날았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날이었다.

은혜는 턱을 괸 채 비행하는 작은 생명체를 따라 눈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낮은 울타리로 된 문에 멈추었다.

“…….”

스르륵. 그녀의 팔이 벤치 아래로 떨어졌다. 우수수 날리는 은행잎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서 있던 키 큰 남자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은혜의 눈에서 눈물이 툭, 굴러떨어졌다. 젖은 시야에 옅게 미소 짓는 남자가 보였다.

“이은혜 선생님.”

“…오빠.”

정우가 그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눈높이를 맞춘 채, 그녀에게 별빛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는 사람은 어린 시절과 같은 이였다.

“머리, 예쁘다 은혜야.”

그녀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 사람. 눈동자에 별을 박은 사람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인형인 줄 알았어.”

은혜가 눈에 눈물을 달고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난 그때처럼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떨리는 그녀의 입술이 마침내 툭, 열렸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미안.”

정우가 짤막해진 은혜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졌다. 은혜가 붉어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오빠 머리 다쳐서 기억 상실증에라도 걸린 줄 알았어. 내가 아는 최정우라면 한 달 만에 나한테 달려와야 되는데, 안 그래서….”

“네가 이렇게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어.”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응시하며 정우가 웃었다.

“널 믿었어, 은혜야.”

은혜가 그의 손을 살며시 붙들자 정우가 그녀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가느다란 손목에 흐릿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묶인 채 바다로 빠졌을 때 남은 상처였다. 아래로 내리깔린 정우의 단정한 속눈썹이 소리 없이 흔들렸다.

“오빠.”

정우는 홀로 남겨진 병원에서 나중에 형사를 통해 들었다. 너무도 ‘깨끗한’ 낙하였다고.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살아남으려고, 무슨 수를 써서든 살아남아 그에게로 돌아오려던 은혜의 노력을 떠올리면 가슴이 뜨겁게 젖어 들었다.

“오빠, 왜 울어.”

그녀가 한 행동은 비단 스스로의 목숨을 구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만일 은혜가 죽었다면 정우의 인생은 그야말로 완벽한 실패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은 누군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던 그는 결국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한 여자를 죽음의 문턱까지 디밀었다. 그리고, 은혜는 살아남음으로써 그를 구원해 주었다.

“바보.”

재활과 경찰 조사를 병행해야 했던 긴 시간을 인내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다. 정우는 은혜의 앞에 당당히 설 날만을 기다렸다. 그의 인생에 유일하게 의미를 부여해 준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오빠 사실 울보지?”

은혜가 그의 얼굴을 붙들고 속삭였다. 오빠의 눈물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스무 살 이후, 정우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앞에서 운 적이 없었으니까.

“응. 맞아.”

정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넌 내 우는 얼굴에 약하지.”

은혜가 그를 보며 햇살과도 같은 얼굴로 웃었다. 가녀린 손으로 그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 주는 그녀의 눈동자 역시 붉었다.

“진창 같은 내 삶에 와 줘서 정말 고맙다, 은혜야.”

누가 할 소리를 오빠가 했다.

“제대로 된 인간으로 만들어 줘서… 고마워.”

은혜가 그를 보며 살포시 고개를 저었다.

“오빠는… 자기 자리로 되돌아온 것뿐이야. 내가 오빠를 변화시킨 게 아니라 오빠는 원래 따뜻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오빠를 내가 좋아한 거니까.”

정우가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랑한다, 은혜야.”

햇살이 그의 얼굴을 눈부시게 비추었다. 은혜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고 정우가 그녀를 꼭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구름이 떠다니는 파란 하늘에서 노란 은행잎이 나풀나풀 쏟아져 내렸다.

“이제 최정우로 살 거지?”

은혜가 그에게 이마를 붙이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고개를 기울인 정우에게서 맹세와도 같은 고백이 흘러나왔다.

“이은혜의 연인, 최정우로. 영원히 살게.”

먼 길을 돌아 우리는 다시 제자리.

은혜의 입술에 가을 햇볕보다 따스한 웃음이 걸렸다. 온 사방에 금물결이 출렁이는 계절. 다시 만난 연인의 계절이었다.

후일담

“긴장되니?”

“네. 조금요.”

정우가 상현에게 눈을 맞추며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주니어 국가 대표 선발 대회 토너먼트라는 현수막이 걸린 경기장 한쪽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를 높였다.

“불주먹 권상현 파이팅!!”

상현과 정우가 동시에 그곳을 바라보며 웃었다. 은혜가 자신을 꼭 닮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상현 오빠 파이팅!”

상현이 후, 하고 짤막하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승전 링에 올라가기 직전이었다. 상현이 정우에게 낮게 내뱉었다.

“절대 실망 안 시키고 싶어요. 은혜 선생님도. 코치님도. 은혜원 식구들도 전부요.”

“상현아.”

정우가 그에게 끝까지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진짜 강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했지?”

“…즐기는 사람요.”

“두려워하지 마. 네 뒤에 우리가 있다.”

마우스피스를 낀 상현이 글러브를 부딪치며 링 위에 힘차게 뛰어올랐다. 땡땡! 종소리를 시작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를 믿어 주는 이들이 있는 한, 아이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

달칵.

문을 닫고 들어오는 정우를 향해 은혜가 물었다.

“은우는?”

“목욕하고 상현이 옆에서 실컷 조잘거리다가 지금 막 잠들었어. 오늘은 밑에서 잔대.”

은혜가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맑은 다갈색 눈동자에 희미한 염려가 스쳤다.

“오빠. 상현이, 괜찮겠지?”

중등부 선수들 중에서도 가장 어린 나이로 출전한 상현은 결승에서 판정패로 아깝게 패배했다. 괜찮다고, 잘했다고 안아 주고 은혜원으로 돌아와서는 시설 식구들 전체가 다 회식을 했지만 아이가 혹시라도 실망했을까 봐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상현이라면 괜찮아. 다음 경기엔 아마 어마어마하게 성장해 있을 테니까.”

정우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하자 그제야 은혜가 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있지. 오빠가 그렇게 말만 해 줘도 안심되는 걸 보면 진짜 관성이란 게 무섭긴 하나 봐.”

표정을 풀고 예쁘게 미소 짓는 그녀의 이마를 슥, 쓸어 주며 정우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네가 날 그렇게 부를 때마다 내가 흥분하는 거랑 같은 건가?”

아이들의 앞에서 은혜는 그를 항상 코치님이라 불렀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간간히 여보, 라고 칭하기도 했었지만 오빠는 아니었다. 은혜가 살풋 웃었다.

“은우 헷갈릴까 봐 더 못 그러겠어, 진짜.”

세상을 산 지 갓 5년 차인 은우는 은혜와 정우를 반반씩 꼭 빼닮은 딸아이였는데 호기심이 넘치게 많았고 누굴 닮았는지 눈물도 많았다. 침실에 걸린 엄마 아빠 결혼식 사진에 언니 오빠들은 다 있는데 왜 저만 없냐고 꺼이꺼이 서럽게 울었다.

자기도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아빠랑 결혼하고 싶다고 주장했다가, 아빠와는 결혼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한 5분을 멍해 있다가 그러면 상현 오빠랑 결혼하면 된다고 말을 바꾸곤 눈가에 눈물을 단 채 헤헤 웃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정우의 표정을 떠올리면 지금도 은혜는 웃음이 났다.

“걘 누굴 닮아서 그런지 정말 모르겠어.”

“벌써부터 결혼에 집착하는 걸 보면 엄마 닮은 거 아닐까.”

정우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근사하게 웃었다. 은혜는 조금 달아오른 얼굴로 맞받아쳤다.

“오늘 상현이 권투 경기 보더니 자기도 권투 선수 된다던데, 그건 아빠 닮은 건 아닐까요?”

정우가 옅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천사를 낳아 줘서 고맙다, 은혜야.”

여동생 바보였던 남자가 딸 바보가 되는 건, 아마도 필연적인 일일 테다. 은혜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옅게 웃다가 문득 물었다.

“오빠. 가끔 다시 운동하고 싶은 생각 안 들어?”

“왜?”

“그냥. 물어봤어. 혹시 아쉬울까 봐.”

정우는 현재 완전한 지도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오늘 출전한 경기에는 상현뿐만이 아니라 그가 훈련시키는 다른 선수들도 여럿 참여했다. 작년에 국가 대표로 선발된 선수도 정우의 체육관 출신이었다. 매스컴을 몇 번 탄 이후로는 입소문이 돌아 그를 찾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난 주먹 쓰는 데도 소질 있지만 사람 가르치는 걸 사실 더 잘해.”

정우는 은혜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사랑스럽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기도 때문에 체육관이 망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어린 은혜가 이런 식으로 보일 때면 참을 수가 없어진다.

“…하긴. 오빠는 진짜 사람 조교하는 데 탁월한 소질 있어.”

한번 맡은 선수는 끝까지 책임지는 데서 그의 집요함은 여실히 드러났다.

“칭찬이지?”

“네. 그럼요. 그 증거가 눈앞에 있잖아요.”

장난스레 쿡쿡 웃는 은혜를 보자 입 안이 더욱 말랐다. 그녀의 입술을 꽉 깨물어 핥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정우가 몸을 떼어 냈다.

“피곤하겠다. 이제 그만 자자.”

분명 키스할 거라 생각했던 정우가 등을 돌리자 은혜가 조금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응? 난 괜찮은데….”

“서울 갔다 와서 바로 경기 보러 오느라 힘들었잖아.”

원장 수녀님은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 은혜원 아이들과 시간을 더욱 많이 보내기를 원했다. 그래서 웬만한 대외적인 일은 은혜가 처리하는 편이었다. 은혜가 친부에게 받은 돈은 모두 은혜원 아이들을 위해 쓰였지만 이 세상에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 아직 너무, 많았다.

정우를 기다리기 위해 다시 돌아온 은혜원에서, 은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드디어 찾아냈다. 일정 나이가 되면 퇴소해 턱없이 부족한 독립 지원금을 받고 떠밀리듯 어른이 되어야 하는 아이들. 막막한 상황과 절박한 심정을 직접 겪은 그녀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은혜는 아이들을 위한 지원 사업이라는 큰 그림을 그렸다. 그런 그녀를 든든히 뒷받침해 주는 지원군은 물론,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이 세상 무서운 남자들 중 가장 다정하고, 아마도 이 세상 다정한 남자들 중에서 가장 무서울 수 있는 남자.

“오빠는 나 안 보고 싶었어?”

지난 사흘 동안 쪽방촌, 고시원, 주민 센터와 직업 교육소를 바쁘게 다니면서 은혜는 예전 생각이 너무 많이 났다.

그녀를 위해 어른이 되어야 했던 정우를 떠올리며 매 순간 그가 그리웠다. 빨리 집으로 돌아와 그의 너른 품에 안기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그녀와는 달리 담백하게 구는 정우를 보니 조금… 애가 타는 느낌이다.

“말이라고 하니.”

돌아서던 정우가 움직임을 멈추고 나직하게 물었다. 똑바로 바라보는 깊은 눈동자에 심장이 두근, 떨리고 긴장되는 것 역시 관성일 것이다.

“아니 그게….”

정우가 그녀가 앉아 있는 창틀에 도로 양손을 짚고 몸을 기울였다. 이제 서른넷이 된 정우는 여전히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눈을 홀리게 할 만큼 멋지고 근사했다. 사람이 갈수록 더 멋있어지는 건 확실히 반칙이었다.

“그게 뭐.”

공식적으로 부부가 된 지 한참인데도 매번 사랑에 빠지는 기분. 짝사랑이 깊으면 원래 여운도 이렇게 오래가는 걸까. 은혜는 괜히 억울해졌다.

“몰라.”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내려오려 했지만 실패했다. 정우가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한 번 빨았다.

“뭘 몰라.”

뜨거운 입술 안쪽이 진득하게 빨리자마자 온몸에 익숙한 긴장이 찾아들었다. 은혜의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가늘게 떨렸다.

“오늘 하면 폭발할 것 같아서 간신히 참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거니, 아니면….”

얇은 잠옷 위로 드러난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는 손의 힘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가 그녀에게 눈을 맞추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렇게 시작해 버리면 못 끝낸다는 걸 모른다는 거니.”

은혜가 황급히 블라인드를 내리는 순간 가운처럼 걸치고 있던 잠옷의 가슴 끈이 스르륵 풀렸다.

“은혜야. 대답해야지.”

옷을 미끄러뜨리며 맨어깨를 드러내는 손길이 능숙했다. 은혜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젖가슴을 입에 담는 정우를 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다.

“오, 오빠….”

선수들의 훈련 때문에 바빴던 건 정우 역시 마찬가지였던 터라 본의 아니게 섹스의 공백기가 길었다. 그를 증명하듯 정우의 애무가 시작부터 깊었다. 유두와 젖가슴이 강하게 빨리는 느낌에 아찔하게 신음이 터졌다.

쪽. 쪽. 그의 입술이 살결을 빨아 당겼다 놓으며 점점 아래로 향했다.

그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속옷이 서슴없이 종아리까지 내려가고 정우의 혀가 더욱 거침없이 그 안을 비집었다.

“오빠, 야해.”

“우린 부부야.”

다정하지만 확고하게 내뱉는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부부, 라는 단어가 주는 건 결속되어 있다는 느낌만이 아니었다.

“난 내 아내에게 얼마든지 야해도 되고.”

최정우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의 입을 통해 확인받는 순간, 은혜는 매번 가슴에서 꽃망울이 툭툭 터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럴 수 있게 해 줘.”

결국 은혜는 떨리는 허벅지를 넓게 열었다. 아무리 신축 건물을 지었다고 하지만, 그들이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터라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싫은 건 절대 아니고, 더욱 흥분이 고조되는 느낌이다.

정우의 턱은 소리 없이 움직였지만 야한 혀가 무섭게 치덕대는 음부는 그렇지 못했다. 액이 흐르는 점막에서 연신 젖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음핵에 피가 몰리며 질구가 저절로 움찔거리기 시작하는 순간, 정우가 숨을 몰아쉬며 얼굴을 떼어 냈다.

“자자, 이제.”

은혜는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쪽, 하고 입을 맞춘 채 엉망으로 젖은 얼굴을 손으로 훔치며 일어나는 정우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오빠….”

“왜.”

한번 시작하면 못 끝낸다면서, 너무나 잘 참고 있는 정우를 보니 머리가 아찔하고 눈가에 열기가 몰릴 지경이었다.

“미워.”

창틀에서 내려와 씩씩거리며 침대로 향하려는데 그녀의 몸이 휙 돌려졌다. 바지와 속옷을 단번에 내린 정우가 그녀의 다리를 휘어 감았다.

“왜 미운데.”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정우는 물론 달랐다.

“오빠가 섹스 안 해 줘서?”

은혜는 목까지 붉어진 채 그의 단단한 어깨를 아프게 꼬집었다.

“그 정도로 해서 되겠니?”

정우가 간지러운 듯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딱딱한 흉기 같은 성기를 거부하려 허리를 뒤로 빼 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정우가 방금 전 애무에 완전히 녹아내린 안쪽에 단박에 성기를 꽂아 넣으며 속삭였다.

“난 분명 미리 경고했다. 내일 투정 부리기 없기야.”

“으응…!”

쫘악 밀려나며 질벽이 성기를 빠듯하게 조였다. 이제는 정우도 참을 수가 없었다.

“안 할 거야. 안 해, 흑… 응. 응…!”

퍽, 퍽, 밀어 치며 완전히 길을 낸 후 정우가 그녀를 달래듯 귓불을 잘근거리며 속삭였다.

“빼 줘야 빼지, 은혜야.”

엉덩이에 손자국이 나도록 틀어쥐고서 정우가 침대를 향해 걸었다. 그럴 때마다 삽입된 성기가 내벽을 자극해 온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무릎으로 앉은 정우가 그녀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눕혔다.

“보고 싶었어.”

정우가 그녀의 달아오른 살결을 굳은살 박인 손으로 샅샅이 쓸며 속삭였다.

“이러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

“안 미치고 멀쩡한데?”

아직도 얄미운 기분에 원망하듯 내뱉자 정우가 그녀의 가슴을 꽈악 움켜쥐었다.

“내가 자위를 몇 번이나 했는지 알고 싶니?”

“오빠 변태지.”

은혜가 붉어진 눈으로 그를 흘겨보자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변태가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응.”

그녀가 당황할 때마다 더욱 흥분하는 걸 보면, 그는 변태가 맞았다.

“부부끼린 숨기는 거 없어야지.”

은혜가 대답 대신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뜨겁고 격렬한 섹스가 시작되었다. 완전하게 젖어 든 몸이 서로를 쉴 새 없이 집어삼켰다.

은혜는 켜켜이 쌓인 욕망이 흘러내리는 정우의 눈동자를 보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서로를 잃을 뻔했었던 사건 이후, 은혜원으로 돌아온 정우는 그녀를 예전과는 다르게 대했다.

“사흘 만에 보니까 새삼 더 예쁘네. 우리 은혜.”

새장을 열어 주면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까 두려운 새처럼, 누군가 보면 탐하기라도 할까 두려운 장식장의 보석처럼 꼭꼭 숨겨 놓았던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그가 근본적으로는 바뀔 리가 없었다.

“평생 연애하는 기분이다. 너랑은.”

그저, 정우는 참는 것뿐이었다. 은혜를 위해 스스로를 몇 번이나 깨부수는 중이었다.

“사랑해, 오빠.”

은혜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향해 고백했다. 그녀를 위해 자신의 집착까지 내려놓을 수 있는 정우의 사랑은 역설적으로 더욱 집착적이었다. 스스로의 한계까지 부숴 버리는 그의 사랑은 더할 나위 없이 그다웠다.

“사랑해요.”

“내가 더.”

정우가 짐승 같은 숨을 토해 내며 그녀를 더욱 뜨겁게 몰아치듯 비집었다. 귓바퀴를 잘근거리고, 목덜미와 이어지는 여린 살을 빨고, 오직 그만이 볼 수 있는 몸 깊숙한 곳에 마음껏 자신의 입술 자국을 남겼다.

어렸던 정우의 꿈은 사랑하는 이들을 평생 책임지는 것이었다.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힘들게 만들지 않고 평생 웃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연인은 그에게 그 기쁨을 여실히 알게 해 주었다. 방황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이 정우에게 기댈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은혜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과거의 아픈 기억. 상흔이 가득한 그의 어깨, 가슴, 팔뚝을 눈에 담으며 뜨거운 살결을 보드라운 손으로 훑어 내렸다.

“왜 그렇게 봐?”

“새삼 너무… 멋있어서.”

거칠었던 삶이 그대로 드러나는 몸을 만지며 속삭이는 은혜의 눈빛에는 거짓이 보이지 않았다. 정우는 은혜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은 늘 그러하니까.

“사랑한다, 은혜야.”

그녀는 그에게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다 주었다. 그의 어둠을 하나하나 지워 내고 그 자리에 촛불을 밝혀 준 거나 다름없었다. 말간 눈동자에 눈물을 단 채 은혜가 물었다.

“오빠. 오빠는 날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지?”

“응. 맞아.”

햇살을 잔뜩 받은 잎사귀가 아름답게 물드는 계절에 태어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은혜를 위해서 태어난 남자지.”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드리우자 더욱 근사해졌다.

“그래서, 너랑 평생 이렇게 야한 짓 하려고.”

은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위험한 터널을 함께 빠져나온 그들에게로 보드라운 달빛이 쏟아졌다. 열린 창문 틈으로 그 후로도 오랫동안, 서로를 닮아 가는 이들의 웃음소리와 속삭임이 들렸다.

당신은 나의 연인.

수줍은 고백의 끝에 날 웃게 만들어 준 사람.

16668356499921.jpg 연인 完 -

AGITOON ♡수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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