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무언가 눈썹을 간질이는 느낌이 났다. 정우는 가만히 누워 눈을 뜨지 않았다. 파양 이후, 그는 모든 일에서 의욕이 사라졌다.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생활을 바르게 할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빠, 자?”
강아지풀로 눈썹을 간질간질 훑으며 키득거리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제 열 살이 된 꼬마는 아직도 유치원생 같은 장난을 쳤다. 그가 미동도 하지 않자, 은혜가 그의 곁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제 학교에서 장래 희망 쓰라고 했거든. 근데 나 선생님한테 혼났다.”
은혜가 코를 한 번 쓱 훔치고는 정우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한참 단잠을 자는 중인지 정우는 움직임도 없었다.
“정우 오빠랑 결혼해서 예쁜 엄마가 되는 거라고 썼는데… 선생님이 그건 장래 희망이 아니래.”
정우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소리 없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미 새에게 각인한 오리 새끼같이 그를 졸졸 따르는 은혜를 막상 뿌리치지도 못하는 그였지만, 이럴 때면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근데 내 꿈은 진짜… 오빠랑 결혼하는 거야. 나 진짜… 그렇게 하고 싶어, 오빠.”
언제까지 바보 같은 어린애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낯이 뜨거워질 정도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벌떡 일어나려는데 정우의 얼굴에 무언가가 사뿐히 얹혔다. 나뭇잎 사이를 투과하는 햇살이 밀짚모자에 가려졌다.
“오빠, 잘 자. 헤헤. 내 꿈 꿔.”
은혜는 그 뒤로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정우의 팔뚝을 피아노 건반 삼아 딴, 딴 따단, 하고 옅은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정우는 모자 그늘 아래에서 피식 웃었다. 따스한 봄 햇살이 몸에 기분 좋게 내려앉았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그의 손에는 토끼풀로 만든 꽃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코를 대고 맡아 보니 꽃향기 대신 축축한 풀 냄새가 났다. 정우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은혜를 찾으러 가야 할 것 같았다.
***
열어 놓은 쪽방촌의 창문으로 봄바람이 불었다. 옷을 벗고 있어도 집 안은 더 이상 춥지 않을 정도였다. 배를 깔고 바닥에 누운 정우의 뒤에서 은혜가 습, 후, 습, 후를 반복하며 파스를 붙였다.
“오빠 많이 아파?”
“아니.”
정우는 정해진 것처럼 내뱉었다. 사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에서 관절이 뒤틀리고 근육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처음 해 보는 건설 현장 일은 운동과는 또 달랐다.
“됐다, 이러고 좀만 누워 있어. 오빠. 계란 다 삶아지면 까 줄게.”
부탄가스 버너에 얹은 양은 냄비에서 달걀 세 알이 팔팔 끓었다. 꼼꼼하게 등에 파스를 붙여 준 은혜가 개다리소반으로 돌아갔다. 펼쳐 놓은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리기 전 그녀가 엎드려 누운 정우를 한 번 불렀다.
“오빠.”
정우는 대답을 하지 않고 눈만 천천히 깜빡였다. 은혜가 그에게 눈을 맞춘 후,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오빠한테 진짜 잘할 거야.”
“…잘하는 게 어떤 건데.”
“오빠 고생시킨 만큼 행복하게 해 줄 거야.”
정우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은혜가 볼펜을 제 뺨에 눌러 딸깍, 하며 진지한 표정을 했다.
“두고 봐.”
얼굴에 닿은 베갯잇에서 그들이 쓰는 비누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세탁도 여의치 않은데 도대체 어디서 이걸 손으로 빤 걸까. 정우는 조용하게 넘어가는 책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은 후, 고개를 돌려 뜨끈해지는 얼굴을 베개에 천천히 파묻었다. 고된 노동에 몸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정우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다.
“오빠. 일어나서 이거 먹고 자. 응?”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굶주려도 상관없으니 은혜만은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오빠아. 한 번만 일어나 봐.”
그의 어깨를 살며시 흔드는 은혜의 손길이 그 무엇보다 충분한 포만감을 주었으므로.
***
은혜가 없는 빈집은 고요했다. 일을 마친 정우가 공간을 가로질렀다. 작은 식탁 위에 남겨진 쪽지를 보는 순간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움찔거렸다.
1. 냉장고에 반찬 다 해 놨으니까 저녁 꼭 먹기 (검사할 거니까 먹었다고 뻥 칠 생각 말기)
2. 혹시 비 오면 베란다에 있는 빨래 걷어 주기
3. 사랑스러운 동생의 존재에 대해 새삼 감사함을 100번 느끼기
4. 보고 싶으면 언제든 전화하기♥
귀여운 그림을 함께 그려 넣은 쪽지에서 은혜의 표정까지 보이는 듯했다. 정우는 쪽지를 손에 들고 몇 번을 되풀이해 읽으며 관자놀이를 느리게 문질렀다. 익숙한 충동에 입 안이 말라붙어 물을 꺼내려 냉장고를 열었다. 포스트잇을 붙여 놓은 반찬 통이 정렬되어 있는 걸 바라보며 벽에 기대 생수 한 병을 다 비웠다.
갈증은 가실 줄을 몰랐다.
고작 일박 이 일 엠티였지만 그들이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 처음 있는 외박이었다. 가기 싫다는 은혜를 다녀오라 부추긴 건 그였다. 지하철역에서 그녀와 헤어지자마자 후회할 줄은 자신조차 몰랐다. 다녀올게, 오빠! 하고 손을 흔들던 은혜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에 속이 뒤틀렸던 스스로의 저열함은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늘 순식간에 지나갔던 저녁 시간은 혼자 있으니 느리게만 갔다. 은혜의 말대로 저녁을 챙겨 먹고, 비는 오지 않았지만 잘 마른 빨래를 걷어 갰다. 그의 인생에서 그녀가 나타난 것이 자신에게 얼마만큼 중요한 일이었는지, 지금껏 수천 번도 더 한 생각을 또다시 했는데도 시간은 여전히 오늘이었다.
“언제 오니.”
정우는 벽에 걸려 있는 은혜의 졸업 사진을 응시하다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슥, 부드럽게 만졌다. 그녀는 대답 없이 눈물을 달고 환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사랑해.”
휴대폰은 일부러 보지 않으려 했다. 휴대폰을 보면 전화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을 것이고, 전화를 해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을 것 같았다. 먼저 전화를 한 건 은혜였다.
- 오빠.
“응.”
- 뭐 하고 있었어?
대답할 수 없어 말을 흐렸다. 불도 켜지 않은 작은 방 안에 비릿한 욕망의 냄새가 그득했다.
- 나 없으니까 아주 편해?
“무슨 소리야.”
정우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잠기는 목을 가다듬으며 손등으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은혜는 어디 나와 있는지 주변이 조용했다. 뾰로통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보고 싶으면 전화하라고 했는데 전화 한 통도 없더라. 메시지도 읽고 씹고.
“너 노는 데 방해될까 봐 그랬지.”
- 하나도 재미없어.
은혜가 불평하듯 바로 내뱉자 가려진 손등 아래 드러난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 다들 술만 마시고, 진실 게임이랍시고 뭔 헛소리를 하지 않나. 뜬금없이 고백을 하질 않나.
“…고백?”
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 어. 정윤이가 엉망진창으로 취한 동기 남자애 하나 도와줬거든. 토하는 거 등 두드려 줬는데 그러고 나서 정윤이한테 사귀자 그랬대. 아 진짜 최악.
그가 안도와 불안이 섞인 한숨을 내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은혜가 아아,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집에 가고 싶다.
“데리러 갈까?”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온 말이었는데, 휴대폰 너머에서는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 어, 진짜? 오빠 진짜?
“네가 원한다면.”
한발 물러서며 마른침을 삼켰지만 은혜는 그의 시커먼 속을 알지도 못한 채 기대감이 가득한 목소리를 높였다.
- 아아, 안 그래도 오빠. 나 진짜 지금이라도 열차 있으면 타고 가려고 그랬거든. 오빠 정말 와 줄 수 있어?
“갈게. 기다려.”
차 키를 잡아채는 그의 동작에 조급함이 깃들었다. 낡은 트럭이 외곽 도로를 빠르게 달려 마침내 한적한 동네에 도착했을 때, 은혜는 불 꺼진 식당 앞에서 그에게 양손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정우는 심장이 뻐근해지는 걸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펴야 했다.
“짜잔!”
조수석에 오르자마자 그녀가 실실 웃으며 메고 있던 가방에서 맥주 캔과 콜라 캔을 각각 하나씩 꺼내 들었다.
“그게 뭐야.”
“훔쳤어.”
정우의 입술에서 마른 웃음이 터졌다.
“대학 보냈더니 도둑질 배웠어?”
“응. 나쁜 거만 잔뜩 배웠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오빠도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
은혜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에게 조준했다. 꼭, 저렇게 한쪽 눈을 감으며 말도 안 되게 귀여운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젠장. 키스하고 싶다. 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정한 오빠를 가장했다.
“어떻게 할까.”
“강가로 직진. 지금부터 최정우는 이은혜와 둘만의 엠티를 시작한다.”
강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강가에 트럭을 세우고 캔을 부딪쳤다. 만개한 벚꽃이 사방에 흩날렸다.
그의 마음을 훔친 사랑스러운 도둑은 만 24시간도 안 되는 공백을 견딜 수 없다는 듯 열심히 조잘거렸다. 정우는 고개를 그녀 쪽으로 돌린 채, 가만히 듣기만 했다.
“난 오빠랑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나도 그래.”
은혜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치….”를 내뱉더니 맥주 캔을 잘근 씹으며 웃었다. 정우는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정리해 주었다.
“엠티. 초대해 줘서 고맙다, 은혜야.”
눈을 깜빡이는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그늘이 졌다. 무슨 말이라도 잘못한 건지 곱씹으며 응시하는 정우를 향해 은혜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 대학 안 다녀도 상관없는데 그냥 때려치우고 공무원 시험에 올인할까?”
아. 뭔가 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드리운 건 죄책감이었다.
“솔직히 나 오빠 실망 안 시키려고 공부한 거라서 대학에 미련도 없어.”
“은혜야.”
“응?”
“난 아무것도 후회 안 해.”
후회하지 않는다, 정도로 지금의 마음이 표현될까 생각하며 정우가 말을 이었다.
“내 인생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어.”
은혜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휙, 하고 얼굴을 정면으로 돌렸다.
“네가 있어서 내가 살아.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면서 오빠 속상하게 하지 마. 알았니?”
눈을 부릅뜨고 강가를 바라보는 은혜의 눈동자가 빨갛게 젖어 들었다.
“대답해야지.”
마지막까지 그녀를 몰아붙이는 자신이 너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혹여나 그녀가 어설픈 죄책감에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리게 두는 것보단 이게 낫기 때문에. 눈에 눈물을 단 채 은혜가 애써 표정을 풀며 웃었다.
“알았네요, 알았어. 완전 알았다고 이 잔소리쟁이.”
정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은혜가 목소리를 낮추며 그에게 투정하듯 물었다.
“오빠 꼰대지.”
“응.”
얼굴을 들이밀며 예쁘게 눈을 흘기는 네 입 안을 혀로 핥고 싶다고 생각한다.
“인정은 또 빨라요. 사람 아무 말도 못 하게.”
낡은 좌석에 등을 툭 기대며 손을 빼려는 네 손을 움켜잡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은혜야. 우리 여기서, 해 뜨는 거 보고 갈까?”
“완전 좋지!”
목소리를 높이며 좋아하는 게 무색했다. 맥주 한 캔에 어느새 스르륵 잠들어 버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다가 그 역시 잠든 모양이었다. 보드라운 손이 그의 어깨를 살며시 짚어 흔들었다.
“눈 떠 봐, 오빠. 지금 밖에 너무 예쁘다.”
너만 할까.
정우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따스한 아침 햇살이 차창으로 비쳐 들고, 사르륵, 그의 어깨에 머리를 도로 기대는 은혜와의 시간이 꿈같이 행복했으므로. 이게 꿈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았다.
***
“일어나.”
더 자고 싶었다. 어린 시절 은혜를 더 많이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똑똑히 말해 주고 싶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고. 네가 나의 사는 의미였다고. 처음부터 그랬다고.
“그럼 지금은?”
은혜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우는 뭐라고 입을 떼려고 했지만 가슴에 뭐가 걸려 버린 듯 도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일어나, 오빠.”
원래 잔소리는 그의 몫이고 늦잠은 은혜의 전문이었는데 지금은 그녀가 그를 자꾸만 깨워 대고 있었다.
그 언젠가 그녀와 함께 보았던 강가에서의 아침 햇살이 사라지고 아득한 파도 소리와 함께 타오르는 노을이 보였다. 아니야. 이건 좋은 꿈이 아니다.
정우의 눈에서 눈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무릎 꿇고 앉은 그는 절벽 끝에 떠밀리듯 선 은혜와 눈이 마주쳤다. 은혜가 목이 터져라 그를 부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은혜가 절벽 아래로 추락한다.
“오빠!”
은혜가 그에게 눈물을 터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일어나. 일어나. 오빠! 제발. 일어나라고!!!”
정우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가야 했다. 꿈에서라도 은혜를 다시 놓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다 그의 잘못이었다. 그녀를 위험에 빠뜨린 것도. 그녀를 구하지 못한 것도 전부 그였다. 그가 사는 세상의 전부가 누군가에게 떠밀린다.
안 돼. 은혜야. 오빠 버리고 가지 마. 제발 날 떠나지 마.
“흐으, 흐으, 으, 흣.”
소란한 소음이 그의 귓가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번쩍 뜨고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환자 의식 회복했습니다. 맥박, 혈압 모두 돌아오고 있습니다.”
삐이, 삐이, 요란한 기계음과 자신이 내뿜는 호흡 소리가 귓가에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눈을 떴는데 은혜는 없었고, 세상은 고통뿐이었다. 정우가 발작하는 순간 누군가 약물을 투여했다. 다시 그녀의 꿈을 꾸고 싶었지만, 은혜는 나타나지 않았다.
***
공간은 조용했다. 정우는 가습기에서 퐁퐁 소리 없이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희미한 시야에 그도 익히 아는 얼굴이 보였다.
“정우야.”
원장 수녀님.
정우는 잠시 정신이 나간 듯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원장 수녀님이 그에게 다가와 염려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 무리하면 절대 안 된다, 정우야.”
뿌옇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선명해지며 현실로 돌아왔다. 몸을 일으키려던 정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링거에서 피가 역류했다.
“으… 은혜….”
입을 억지로 열어 목소리를 내자 사포에 갈린 것 같은 고통이 성대에 번졌다. 기도 삽관의 흔적이었다. 원장 수녀님이 흐리게 미소 지으며 그를 보았다.
“우리나라 구급대원들 아주 용해. 15미터 절벽에서 물속으로 떨어지고도 살아난 우리 은혜만큼이나.”
“하…. 아…. 흐으…. 아….”
일그러진 정우의 눈에서 기다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은혜… 은혜가…. 아….”
“그래. 정우야. 은혜는 무사해. 괜찮아.”
정우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이건 꿈인가. 내 무의식이 또다시 보여 주는 환상인가. 온몸에 번지는 고통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고 싶었다. 그래야지 이게 현실이란 걸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기를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을 쥐어뜯자 상처에서 피가 터지는 느낌이 났다.
“은혜가 잠도 못 자고 너 많이 걱정했다. 아무것도 안 먹고 기도만 했어. 이러면 안 돼, 정우야.”
원장 수녀님이 그의 팔을 붙들며 주름진 눈을 가늘게 떴다. 정우는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며 일그러진 얼굴로 간신히 입을 뗐다.
“은혜… 은혜는….”
정말 은혜가 살아 있다면 왜 그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한숨을 쉬는 원장 수녀님을 보는 정우의 눈동자가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커졌다.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 널 가장 많이 걱정하던 아이야.”
정우는 떨리는 손으로 원장 수녀님이 건네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은혜가 죽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게 맞았다.
“착한 아이지만 고집은 아무도 못 말리지 않았니. 그 애가… 뭘 원하는지 잘 생각해 보렴.”
원장 수녀님이 조용히 병실을 떠났다. 정우는 그녀가 건네준 편지를 손에 들고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다가 이윽고 봉투를 열었다.
정우 오빠.
이 편지를 보고 있다는 건 확실히 깨어났다는 뜻이겠지. 이제 더 이상, 중환자실 앞에서 내가 오빠 이름 부르면서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겠지.
오빠가 잠들어 있는 보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오빠가 나에게 숨겼던 지난 3년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오빠가 과연 알 수 있을까.
오빠의 얼굴을 마주하면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보처럼 울어 버릴 것 같으니까 이렇게라도 말할래.
최정우 이 나쁜 자식아. 넌 정말 나쁜 놈이야.
정우는 눈물방울이 번져 마른 자국이 있는 편지를 들고 멈추었던 호흡을 간신히 내쉬었다. 격렬히 뛰는 심장이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일렁거려 터질 것만 같았다.
편지 안에서, 은혜가 그에게 생생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뭐든 괜찮았다. 그녀가 그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하고, 그의 몸을 불길에 집어넣는다 해도 좋았다.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손이 엉망으로 떨렸다.
그거 알아? 나는 우리가 함께 살기 시작한 날부터 단 한 순간도 오빠를 믿지 않은 적이 없었어. 최정우가 하는 말이라면 철석같이 다 믿었어. 만일 오빠가 하늘에 달이 두 개라고 말한다면, 난 오빠를 의심하는 대신 인류가 새로운 과학적 진실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을걸.
왜냐하면 최정우는 나한테 말한 걸 모조리 다 지켰으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불가능했을 모든 것들을 다 해 준 사람을 내가 어떻게 믿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어.
오빠가 그동안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작은아버지와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도, 보통 사람들은 많이도 나자빠진다는 사업이 불경기도 없이 승승장구로 진행될 때도, 나보다 내 친구들이 더 의아해할 때조차 나는 오빨 믿었어.
나보다 오빠를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거든. 자신했었거든.
그런데… 경찰이 하는 말은 다르더라. 그들이 말하는 최정우는, 내가 이제껏 알고 있던 최정우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더라. 나는, 오빠가 만들어 놓은 안락한 환상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헤헤거리면서 살았던 거더라.
그걸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된 내 마음이 어떤지 알아? 죽고 싶어, 오빠. 오빠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위험천만하게 사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침마다 행복하다고 속삭였던 바보 같은 나 스스로를 견딜 수가 없어서.
정우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네가 죽는다고. 뜨거운 불쏘시개를 목구멍에 집어넣는다 해도 그보다 더 고통스럽지 않았을 순간을, 내가 다시 느껴야 한다고.
은혜가 그를 협박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갈린 성대로 짐승 같은 숨소리를 내며 그녀의 편지를 읽어 내려갈 뿐이었다.
결국, 오빠는 날 안 믿었던 거였어. 아니. 못 믿었던 거겠지. 내가 어릴 때부터 오빠에게 했던 말들 중, 말을 하지 않은 건 있었어도 거짓말한 건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야.
경찰도 의사도 구급대원도 다 기적이래. 내가 그 높이에서 손까지 묶인 채 바다에 떨어졌는데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게. 아마 오빠도 마찬가지였을 거라 생각해. 내가 떨어지는 걸 보는 순간, 오빠의 그 절망적인 마지막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으니까.
나, 수영 잘한다고 말했었잖아. 오빠.
나는 어릴 적에 뉴질랜드에서 엄마와 함께 5년을 살았어. 물놀이는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부터 시작했었고 바다 수영은 거의 매일이었어. 거대한 고래가 배를 내밀고 뛰어오르며 수영하는 걸 본 적이 있어, 오빠? 나는 언젠가 오빠에게 그걸 보여 주고 싶었어. 어린 내가 본 광경 중에 가장 숨이 멎는 광경이었기 때문이야.
나는 아빠가 없어도 행복했었어.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고아였던 엄마는 나를 정식으로 아버지 자식으로 만들고 싶어 했어. 자기가 아픈 걸 알고 나서부턴 그걸 더욱 원했지만 결국 엄마의 소망은 말 그대로 소망에 불과했던 거였어.
내 아버지에게 나는 한순간 저질렀던 불륜의 흔적인 동시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씨앗이었으니까. 그나마 엄마가 살아 있을 때 우리 두 식구가 부족함 없이 생활했던 건, 엄마의 처절한 노력 때문이었다는 걸 철이 들고 나서 깨달았어. 이 진실을 오빠에게 말하지 않았던 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어.
어느 겨울날, 불어 터진 짜장면을 앞에 두고 스무 살 최정우가 나한테 그랬잖아. 날 버린 가족은 가짜라고. 내 눈앞에 있는 최정우만 진짜라고. 난 그때부터 오빠가 하는 말을 다 믿었는데. 오빠는 그러지 않았던 거였지.
그래서 슬퍼. 가슴이 아파. 나, 너무 아파 오빠.
나는 최정우가 목숨을 바칠 만큼 나를 사랑한다는 걸 의심하지 않아. 하지만 오빠. 믿음이 없는 사랑의 유효 기간은 과연 얼마일까?
나는 오빠와 비를 맞아도 좋다고 했어. 폭우가 쏟아져도, 최정우만 내 곁에 있으면 다 좋고, 견뎌 낼 수 있는 자신이 있었어. 그런데 결국, 나는 오빠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던 거겠지.
그러니까 오빠는 마지막까지 나를 속이고,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내 행복을 위한다는 핑계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자충수를 뒀던 거겠지. 내게 있어 행복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도 못한 채 말이야. 최정우와 함께하는 곳이 어디든 나한테는 가장 행복한 집이란 걸. 그 간단한 사실을 오빠는 왜 끝까지 몰랐을까.
마른 뺨을 타고 눈물이 엉망으로 떨어져 은혜의 고백을 적셨다. 죽기 직전 그가 보았던 것은 과거의 기억이었다. 생의 마지막에 그의 뇌리를 잠식했던 것은, 스스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의 편린이었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었다.
깨어나지 않는 오빠를 보면서 계속 생각했어. 그리고, 어쩌면 오빠가 이렇게 된 것의 일부분은 내 책임일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어.
이제껏 나는 오빠한테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빠 역시도 진짜 이은혜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말이야. 오빠 앞에서 스스로를 어린애로 만든 건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내가… 최정우 코딱지 이은혜가… 인생 최초로 오빠한테 한 번 제대로 대들어 보려고 해.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똑똑히 명심해 오빠.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나는… 이은혜가 최정우의 동생이 아닌 진정한 연인이길 바라. 서로의 눈을 가려 줄 필요 없이 온갖 무서운 것들을 함께 보고 헤쳐 나갈 수 있는 관계이길 바라.
오빠한테 죽을 만큼 힘들 일이란 거 알아. 하지만 그럴 각오가 없다면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우리 서로의 행복을 빌어 주면서, 그렇게 영원히 이별하고 살자.
정우는 그녀의 말을 보며 소리 내어 오열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두꺼운 벽들이 일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연인이 그 작은 주먹에 피가 터지도록 벽을 두드리는 탓이었다. 이건 반항이나 협박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소리치는 은혜의 간절한 고백이었다.
사랑해.
사랑해요.
누군가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다 준대도 당신 하나와 바꿀 수 없을 만큼,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최정우의 연인, 이은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