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4)

12

두 카페는 큰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위치였다. 테라스 구석 자리에 앉은 정우가 담배에 불을 붙여 피워 문 후, 귀에 꽂힌 이어폰을 지그시 눌렀다.

달칵.

커피 잔을 내려놓는 소리. 서류 가방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조심스러운 말투가 들렸다.

“사장님께서는 은혜 씨에게 많이 죄송해하고 계십니다.”

정우의 손에서 기다란 담배가 소리 없이 타들어 갔다. 사무적이고 어딘가 연극적인 남자의 말투가 딱딱하게 이어졌다.

“은혜 씨 모친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잠시 그곳에 위탁한 후, 성인이 될 때 은혜 씨를 찾을 의향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열여섯 살 이후로 행방을 알 수가 없어 안타까워하셨다고요.”

은혜는 말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안 되는 소리니 기가 차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녀의 친부가 그녀를 찾으려 했다면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딸을 버린 것이 의도적이었다는 건, 지금 이 대화를 듣고 있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정우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담배를 한 모금 더 깊숙하게 빨았다.

“회사 주식 12만 주 그리고 은혜 씨가 어머니와 살던 저택과 서울 시내 3층짜리 상가 건물 하나의 명의를 은혜 씨 앞으로 돌린다는 내용입니다.”

“…그게 단가요?”

침묵을 지키던 은혜가 마침내 입을 뗐다. 상대는 조금 당황한 듯 아, 하고 말을 더듬다 이내 건조한 말투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사후 재산을 말씀하시는 거면 지금 가족 관계를 정리하는 것보다는 유언장을 고치는 방향으로….”

“돈이 다인가요.”

은혜가 다시금 직원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정우는 창가에 앉은 그녀를 길 건너에서 바라보며 담배를 지그시 이로 깨물었다. 꼿꼿이 등을 세운 채, 지지 않고 상대를 바라보는 그의 어린 연인은 당당했다. 울지도 않았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지도 않았다.

“제 엄마를 미혼모로 만들고, 평생을 숨겨진 여자로 외롭게 살게 한 것도 모자라 아프니까 그 길로 버렸어요. 병실에 가둬 놓고 그 자리엔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어요. 엄마가…. 죽자마자 사람을 시켜 저를 시설에 보냈어요. 가족이 없었던 엄마가 죽기 전까지 바랐던 건 내가… 아빠와 같이 살 수 있는 거, 그거 하나였는데.”

“…유감입니다.”

“누가요? 아저씨가요? 아님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제 친부란 사람이요? 미안하다면…. 저한테 진짜 미안하다면 적어도 직접 제 눈앞에 나타나서 용서를 빌어야 맞는 거잖아요.”

정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앞에 그 쓰레기 같은 인간을 보일 계획은 처음부터 없었다. 세상에는 속죄가 되는 인간이 있고, 되지 않는 인간이 있으니까. 은혜의 친부가 확실한 후자라는 사실이 그의 결정을 더욱 쉽게 만들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

“이런 말 철없고 건방지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세상에는요, 아저씨.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어요.”

정우가 바란 것은, 은혜가 받아야 마땅할 권리를 그가 모두 지불한 후, 그녀의 인생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이 은혜에게 가져다 바친 것은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꺾인 날개였다.

“그걸… 사람의 진심이라고 해요.”

은혜가 운다.

그녀의 목소리 톤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정우는 길게 연기를 뿜어냈다.

“돈은 사양하지 않고 받을래요. 그래서 이 쓰레기 같은 돈이 얼마나 가치 있게 쓰일 수 있는지 보여 주고 싶으니까요. 아마 그분은 그것조차 아까워 벌벌 떨겠지만요.”

“…재산의 처리는 은혜 씨가 어떻게 하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은혜가 가방을 챙겨 들고 서류를 집어넣는 모습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앞으로, 남남으로 살자고 전해 주세요.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끝까지 울음을 참아 내는 목소리. 남들 앞에서 절대 눈물을 보이지 말라고 했던 그와의 약속을 그녀는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은혜 씨의 가족이기 때문에 중대사는 저를 통해 전해 드리는 걸로….”

“제 가족은 세상에 하나뿐인데요, 그게 그 사람은 아닙니다.”

심장에서 무언가 터져 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정우는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투둑. 담뱃재가 그의 손등으로 마구 굴러떨어졌다. 정우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느꼈다.

***

“아버지 만나러 간 일은 잘 끝났어?”

은혜가 휴대폰을 귀에 붙이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하철역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는 걸 보니 아마도 택시를 탈 모양이었다.

- 응. 오빠. 잘 끝났어.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 와서 할래?”

- 아니. 별로 긴 이야기도 아니었어. 이제 와서 나한테 미안한지 돈을 주겠다고 그러더라고. 그것도 부하 직원 통해서.

“그랬구나.”

정우가 차분하게 대꾸하자 은혜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응. 그래서 돈은 받되, 다시는 서로 이름 듣는 일 없게 하자고 말했어.

은혜에게 서류를 건넨 남자의 휴대폰은 정우와의 통화로 계속 이어지고 있던 중이었다. 정우가 엿들은 내용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다.

은혜는 정말로, 그에게 숨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친부에게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을 때도 그에게 상의를 했었고, 정우는 한번 만나 보라는 답을 주었다.

“오빠가 같이 가 줄까?”

“…아니. 괜찮아.”

“긴장했잖아. 너.”

“응. 솔직히 긴장은 되는데 이건 내가 처리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리고, 그녀는 그의 염려가 무색하도록 훌륭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가 걱정했듯 상처받거나 울지 않았고 약한 모습을 보이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은혜야.”

- 응, 오빠.

이제는 정말로 어린아이가 아닌 것 같은 그녀를 보니 가슴 한구석이 또다시 뻐근해졌다. 정우가 그녀에게 낮게 물었다.

“…아버지한테 서운하지 않아?”

- 어렸을 땐 슬프고 서러웠지, 물론. 그런데 오빠랑 같이 살면서 다 잊었어. 정말 싹, 다.

정우는 어느새 필터 끝까지 다 타 버린 담배를 눌러 끈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로 마지막 확인까지 끝냈다. 심장이 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오빠가 데리러 갈까?”

- 이사님이면 회사 땡땡이쳐도 돼? 그럴 필요 없으니까 대신 오늘 저녁에 빨리 퇴근하고 와. 파티하자. 나 이제 부자 됐거든. 어쩌면 오빠보다 더.

쿡쿡 웃는 은혜의 목소리에 입 안이 말랐다. 정우는 빠르게 계산대로 향한 후, 손도 대지 않은 커피 값을 지불했다.

- 사랑해, 오빠.

매번 지치지도 않고 내뱉는 고백은 들을 때마다 그를 설레게 만들었다.

“…나도.”

정우는 뜨거워지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전화를 끊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골목에 주차해 놓은 차로 향하는데 손안에 든 휴대폰의 액정이 켜지며 다시 반짝였다. 잘 닦인 구두를 신은 발이 딱 멈추었다. 회장의 이름을 본 그의 미간에 날카로운 주름이 졌지만 망설인 건 찰나였다.

“예, 회장님.”

태연을 가장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회장은 지금, 제주도에 있는 골프 리조트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 어, 최 이사. 공사가 다망할 텐데 전화해서 미안하네.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목덜미에 쫙 소름이 달렸다. 정우는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그 자리에 서서 마른침을 삼켰다. 불행을 몇 번이나 겪은 사람은 자동으로 그 냄새를 알게 된다. 어디선가 그 불안한 냄새가 또다시 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 흥미진진한 소리를 방금 들어서 말이야. 실종돼서 죽은 줄 알았던 신명준이가 글쎄, 어떻게 눈치를 깠는지 오래전 싸지른 첩 자식까지 찾아내서 재산을 빼돌리고 있다지 뭔가.

제기랄.

정우의 턱이 빳빳하게 경직했다. 형사는 윤 회장의 영장이 나올 때까지 딱 일주일만 시간을 끌라고 정우에게 말했었고 그게 바로 내일이었다. 모처에 몸을 숨긴 은혜 부친의 행방을 회장이 알아낼 수 있을 리는 절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 최 이사와 함께 살고 있는 사촌 여동생이 그 첩의 자식이라니…. 우연의 일치라기엔 이게 너무 냄새가 나잖아?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정우가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살피는 그의 눈이 가늘게 일그러지며 미간에 주름이 팼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직접 뵙고 전부 설명드리겠습니다.”

- 사진 보니 여동생이 어리고 싱싱한 게 꽤 먹음직스럽게 생겼더군. 피가 섞였든 안 섞였든 우리 최 이사가 애지중지 물고 빨 만은 할 것 같은데, 그건 내가 직접 보고 확인하지.

정우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며 흔들렸다. 머릿속에 깨진 파편이 날아와 한꺼번에 박히는 느낌이다.

“씨발….”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의 몸은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골목을 미친 듯이 빠져나가자 길 건너편 횡단보도에서 은혜가 손을 들어 택시를 잡는 모습이 보였다.

“은혜야!”

정우는 차가 오는 것도 아랑곳없이 이를 악문 채 달렸다. 그의 앞에서 버스와 승용차가 귀가 찢어져라 경적을 울렸지만 상관없이 4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뛰었다.

“은혜야…!”

차에 탄 은혜가 열린 창문으로 두리번거리다 승용차 범퍼에 부딪히는 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오빠?’

놀라서 입이 벌어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정우는 다시 일어나 아스팔트 위를 달렸다. 부웅, 하고 속력을 내는 차를 따라 달리며 그가 절규하듯 소리를 질렀다.

“은혜야, 내려…! 당장 뛰어내려!!!”

위험을 직감한 은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잿빛으로 질린 오빠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달리는 차 문을 열고 내리려는 그녀의 코를 누군가가 틀어막았다. 일그러진 눈이 스르륵, 감기고 차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나갔다.

열린 창문으로 그를 노려보는 놈은 3년 전 내기 권투장에서 회장의 곁에 있었던 똘마니, 정우에게 다리가 부러졌던 놈이었다.

***

- 꼬리 달고 올 생각이라면 하지 않는 게 좋아. 네 여동생인지 여자인지가 곱게 죽느냐, 아니면… 우리 애들 손 타서 비참하게 죽느냐는 최 이사 선택에 달렸다는 걸 잊지 말고.

회장이 그를 불러들인 섬은 인천항에서 쾌속 페리를 타고 세 시간을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인구수가 200명이 되지 않는 무인도 같은 작은 섬은 인적을 찾기 힘이 들었다.

정우는 선착장에서 등대까지 가파른 길을 쉬지 않고 달렸다. 회장이 개인 배로 이곳까지 이동했다고 해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핏기가 완전히 사라진 그의 얼굴은 흥분보다는 오히려 무표정에 가까웠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갑판에 우뚝 선 채 하얗게 부서지는 물거품을 노려보면서 머릿속은 점점 명료해졌다.

정우는 은혜가 만일 무사하지 않다면, 그 자리에서 모두를 죽이고 그도 끝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해안과 마주 닿아 있는 절벽에 다다른 순간,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의 연인은 거기에, 입이 틀어막히고 손이 묶인 채 누군가에게 붙들려 있었다.

어린 은혜를 맨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머리카락에 지저분한 껌을 붙이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녀에게 남들이 괴롭히면 가만있지 말라고 했던 건 최정우, 바로 그였다.

정우는 그때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최초로 후회했다.

틀어 올려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엉망진창이었고 노려보는 눈에는 핏발이 서 독기가 가득했다. 입이 막혀 있었지만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리치는 그녀를 보며 누군가 욕설로 윽박질렀다.

“확 그냥 떠밀어 버리기 전에 가만 안 있어…! 엇, 저 새끼!”

정우의 목울대가 거칠게 일렁였다. 그녀에게 당장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정우가 재킷을 벗어 던졌다. 주머니에서 지갑과 휴대폰까지 꺼내 차례로 바닥에 내던진 후, 입을 열었다.

“늦었습니다.”

그가 맨몸으로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주춤하던 덩치들이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흑….”

정우를 발견한 은혜의 눈에 그제야 둥그렇게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정우는 그녀의 눈에 가득한 의문을 애써 외면한 채 회장을 주시했다.

“오, 우리 최 이사. 어서 와. 내 고향은 처음인가.”

뒷짐을 진 채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던 회장이 그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고요한 섬. 누구 하나가 죽어도 모를 섬으로 그를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회장이 그를 위해 준비한 마지막 무대였다.

“이번 일이 깔끔하게 끝나면 최 이사와 함께 낚시나 하고 싶었는데… 유감이구만.”

정우는 떨고 있는 은혜,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목에 칼날을 툭 빼 드는 이를 보며 턱이 부서져라 이를 깨물었다. 심장이 갈빗대를 구타하듯 격렬히 뛰었다. 그의 눈에 핏발이 터지며 열기가 일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누가 숨통을 틀어막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면 지금은 온몸이 묶인 채 불 속에서 활활 타는 것 같았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침착을 가장하며 입을 떼는 그의 성대가 꽉 막혔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은혜의 얼굴 아래에서 빛나고 있는 시퍼런 칼날이 그의 몸을 완전히 결박하고 있었다.

“최 이사, 난 말이지. 세상에서 뒤통수 맞는 걸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거든.”

회장이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선 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차라리 깔 거면 앞에서 까는 게 낫지 않냐 이 말이야…. 이렇게.”

회장이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자 은혜가 몸부림을 치다 누군가에게 머리칼을 거칠게 잡혔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벨 것 같은 칼의 존재에 정우의 온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정우는 터진 입술을 한 채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토해 내듯 내뱉었다.

“죽이기 전 겨우 몇 푼 빼돌린 걸 가지고 이러십니까.”

이글거리는 정우의 눈빛을 보며 회장이 입술을 들어 올렸다.

“나도 처음엔 그 정도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눈감으려 했었지. 신명준이 하나 죽이는 건 너한테 개미 새끼 죽이는 것만큼 쉬웠을 테니 죽이기 전에 그 새끼 약점 하나 파고들어서 용돈벌이 정도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정우가 이 자리에 오면서 준비했던 시나리오가 회장의 입을 타고 술술 흘렀다.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근데, 저 어린 핏덩이는 네가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손톱만큼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더구나. 신명준이를 네가 어디 숨겼냐고 하니 그게 무슨 소리냐며 바득바득 화를 내고. 내가 누구냐길래 너한테 돈 주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더러 네 작은아버지냐고 묻는데….”

회장의 뒤에 선 은혜의 눈이 일그러진 채 엉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하하, 오래간만에 정말 진심으로 웃었어.”

오빠. 아니지. 아닌 거지. 깡패라니. 사채업자라니. 전부 거짓말인 거지.

“그래서 생각했지.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우연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처리하라고 명령한 상대가 알고 보니 네가 신분까지 위장해 가며 물고 빨던 여자의 진짜 아비였다는 거 말이야. 그래서 이제 내 밑에서 더러운 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겠지. 어차피 넌 돈 때문에 내 밑에 기어들어 와서 깡패 짓 한 거니까. 온갖 더러운 일은 다 하고 산 주제에 네 눈깔은 3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빳빳하니까, 네가 내 뒤통수를 쳐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정우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럼 저만 묻으시면 되는 간단한 일 아닙니까.”

“그건 네가 한 짓에 비해 너무 너그러운 처사가 아니겠나?”

회장이 낮게 코웃음을 치며 담뱃불을 찰칵이자 똘마니가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정우는 피하지 않고 맞았다. 연이어 날아오는 주먹이 그의 얼굴과 명치를 강하게 강타했다. 마른기침이 저절로 터져 나갔다.

“무릎 꿇어, 이 새끼야.”

정강이가 걷어차여 바닥에 무릎 꿇린 그의 머리에 각목이 날아왔다. 이마에서 찌릿한 핏물이 터져 가며 그의 얼굴 한쪽을 벌겋게 물들었다. 하늘은 이제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를 보는 은혜가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자신의 목을 노리는 칼 같은 건 상관도 하지 않은 채 오열하는 그녀를 보며 정우는 제발 그녀가 움직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바닥을 짚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건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는 네 그 눈빛이 좋았다. 가진 건 하나도 없는 주제에, 양아치들을 경멸하는 주제에 내 앞에 무릎을 꿇고 하찮은 돈 몇 푼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걸 보면 뭐랄까…. 아주 즐거웠거든. 한 인간이 착실하게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정우에게서 등을 돌린 회장이 은혜를 향해 걸었다.

“자, 둘이 마지막으로 할 말 있으면 한번 해 봐. 멍청한 년 하나 때문에 죽으러 온 우리 로맨틱한 깡패 새끼한테 작은아버지가 아니라도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회장이 낮게 웃자 은혜의 곁에 서 있던 이가 칼을 거두었다. 입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 내자 은혜가 목에서 피가 나도록 그를 불렀다.

“오빠…! 정우 오빠!!!”

정우는 핏물이 스며드는 눈을 일그러뜨리며 은혜를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와 눈을 맞춰 좋을 게 없었다. 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시간을 최대한 끌어야 했다. 회장의 이목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키지 않으면 은혜가 위험했다.

“뒤통수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회장님 밑에서 썩기엔 아까운 재목이란 거, 이미 아시지 않았습니까…!”

그를 향해 발길질이 날아왔다. 구둣발로 강하게 걷어차일 때마다 내장이 뒤틀렸다. 회장을 둘러싸고 서 있는 이들은 그를 제외하고 총 다섯이었다. 전부 정우를 향해 칼을 갈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여…!”

“아가리를 찢어 버릴까요.”

“그래. 어디 한번 보기 좋게 만들어 봐.”

정우가 칼을 쥐고 다가오는 놈을 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빛냈다.

“얼굴이 갈기갈기 찢겨도 너보단 내가 나을 것 같은데.”

머리를 빡빡 깎은 놈이 비릿한 웃음을 지워 내며 칼을 휘두르려는 순간, 은혜가 손이 묶인 채 달려와 온몸으로 놈을 밀쳐 내고 바닥을 굴렀다.

“이 미친년이…!”

“은혜야!!”

“하지 마…! 하지 마!!!”

은혜가 덜덜 떨며 칼 든 놈을 노려보았다. 맞았는지 시뻘게져 엉망이 된 얼굴에서 눈물이 후드득후드득 흘러내렸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고 있었지만 핏발이 선 눈빛만은 형형했다.

“저리 꺼지라고 이 깡패 새끼들아!!!”

정우가 그녀의 몸을 거칠게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숨기며 속에서 피를 토하듯 중얼거렸다.

“아직 어린앱니다.”

바닥을 짚은 그의 주먹에서 뼈가 살을 찢고 튀어나올 듯 도드라졌다.

“이 씨발 새끼가….”

공중에서 칼날이 날았다. 피하는 대신 은혜를 제 몸으로 감싼 탓에 어깨의 살점이 깊게 베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오빠…!!”

정우의 흰 셔츠가 붉은 피로 순식간에 물들었다. 경악하는 은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애 이리 데리고 와.”

“이거 놔…! 놔!!!”

은혜가 끌려가면서도 발버둥을 치다 누군가에게 뺨을 거세게 얻어맞았다. 정우가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이의 팔을 반사적으로 잡고 관절 반대 방향으로 꺾자 놈이 소리를 질렀다. 은혜가 마침내 그녀에게 눈을 마주친 정우를 향해 악을 썼다.

“싸울 수 있잖아 오빠! 근데 왜 아무것도 안 해!”

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정우는 칼에 맞는 순간에도 짤막하게 숨을 들이쉬었을 뿐,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폭력을 그대로 감당하는 그를 보는 은혜의 가슴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가 움직일 수 없는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오빠의 짐이 될 수밖에 없는 걸까.

“오빠 괴롭히는 사람들한테 왜 가만히 얻어맞고 있냐고!!!”

은혜가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소리치는 순간, 정우의 손이 오히려 멈추었다.

“나 죽는 거 안 무서워…! 흐윽…!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오빠 제발…!”

퍽, 하고 그의 얼굴이 다시금 모로 돌아가자 은혜가 몸이 붙들린 채 발작하듯 오열했다.

“어린애란 말이 사실이긴 하군.”

회장이 담배를 하나 피워 물며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은혜의 뒤는 낭떠러지였다.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정우의 머릿속에 온갖 시나리오가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싸우다 칼을 맞고 몸이 찢기는 게 두려운 게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수는 너무 많았고 그가 버티기 전까지 경찰이 오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은혜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휘청거리며 어깨의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뭐든 다 하겠습니다.”

정우가 그의 앞에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이마가 땅에 닿도록 숙인 그의 머리통이 회장의 구둣발에 짓눌렸다. 회장이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며 웃었다.

“네가 언젠가 그랬지. 네 무릎을 꿇리려면 뱃가죽을 쑤시면서 협박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그때 알았지. 네놈한테는 그게 협박이 되질 않는다는 걸.”

바닥을 짚은 정우의 주먹이 소리 없이 흔들렸다. 아니, 그의 몸 전체가 떨리고 있었다.

“그땐 너한테 가장 필요한 게 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봤더니 내가 뭘 하나 놓쳤던 거였어.”

회장이 그의 머리에서 발을 치웠다.

“처음부터 저년을 잡았어야 했어.”

반쯤 피운 담배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정우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혼재한 악(惡)이 즐거운 빛을 안고 터져 나가는 걸 생생히 목격했다.

“일어나… 일어나 오빠…!”

악을 쓰는 은혜의 모습 그리고 회장의 신호를 받은 놈 하나가 그녀를 뒤로 밀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느린 화면처럼 박혔다.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혜야.

짐승처럼 포효하며 그녀를 향해 달리자 복부에 뜨끔하게 무언가가 들어왔다. 주먹을 날려 상대를 밀치며 그녀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오빠.

은혜의 몸은 이미 아찔한 절벽 아래로 떠밀린 후였다.

“은혜야!”

푸른빛과 붉은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추락하는 은혜와 눈이 마주친 건 찰나였다. 은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아가리를 벌리며 넘실거리는 짙푸른 파도를 향해 쑥 빨려 가듯 떨어지며 그녀가 눈을 감았다. 안 돼. 아니다. 아니야. 이건 아니잖아, 은혜야.

“이은혜!!!”

성대가 찢어져라 부르는 그녀의 이름이 절벽 아래로 울려 퍼졌다. 배에 칼이 박힌 채, 아래로 몸을 날리려는 정우의 어깨가 누군가에게 붙들렸다.

“저 씨팔 새끼 고기밥이 되지도 못하게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려!”

정우의 눈이 뒤집힌 건 목에 핏대를 세우는 회장과 시선을 마주했을 때였다. 그에게 주먹을 날리는 놈의 턱을 부수고 난 후 회장에게 달려들었다.

“…죽어.”

회장의 목을 꾹 눌러 조르는 그의 뒤에서 누군가 다시 칼로 정우를 찔렀다. 정우는 뒤를 돌아 그의 손목을 잡아 비튼 후, 멈추지 않고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이미 머릿속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죽이고 은혜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도망가는 회장을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머리를 돌바닥에 처박았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고 싶다는 소망을 그의 몸이 배반했다. 배에 박힌 칼을 뽑아 모가지에 틀어박았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다.

“…회장님!”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이 한꺼번에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정우는 주먹을 내지르고 받아 냈다. 온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그들을 후려쳤다. 칼을 맞은 만큼 휘두르고 받은 것의 배로 되돌려 주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그의 손에 들리면 흉기가 되었다. 눈부신 황혼이 사라지고 어둠이 하늘을 까맣게 물들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굉음을 일으키며 소방 헬기가 도착한 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정우가 절벽을 향해 휘청거리며 걸음을 옮기다 툭, 앞으로 쓰러진 후였다.

얼굴을 시뻘겋게 뒤덮은 비릿한 피 냄새는 사라지고 바닥에 짓눌린 그의 코에 축축한 풀 냄새가 났다. 오래전, 햇살같이 웃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냄새였다. 벌어진 그의 입술에서 간헐적인 호흡이 끊기며 느려졌다.

…은혜야. 오빠가 갈게. 오빠가 지금, 가고 있어.

무거운 눈꺼풀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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