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4)

11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대전, 대전역에 도착하겠습니다. 내리시는 승객께서는 잊은 물건이 없도록….”

아침부터 끄물거렸던 하늘은 결국 빗방울을 뿌려 대고 있었다. 은혜는 속상한 마음을 애써 잡아 누르며 비가 달라붙는 창에 커튼을 확 쳐 버렸다.

“오빠. 배 안 고파?”

옆 좌석의 정우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걸치고 턱을 괸 채, 미동이 없었다. 오늘따라 그는 평소보다 말이 더 적었다.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은혜가 그의 눈앞에 손을 휙휙 흔들며 여보세요, 하자 정우가 그제야 그녀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배 안 고프냐고”

“아니. 괜찮아. 이따 도착해서 맛있는 거 먹자, 은혜야.”

급하게 서두르다 택시 안에 두고 내린 샌드위치를 생각하자 다시금 열이 뻗쳤다. 어젯밤 그녀가 오늘을 위해 열심히 준비한 도시락의 행방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속이 상했지만 은혜는 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응. 내가 맛집 리스트 쫙 뽑아 놨으니까 걱정 말고 나만 따라와.”

은혜는 이번 생일 여행을 직접 계획했다. 언제부터인지 정우는 은혜와 함께 바깥에 돌아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낯선 곳에 가는 것을 꺼린다는 점이 맞았다.

늘 가는 곳에서 저녁을 먹고, 늘 들르는 곳에서 쇼핑을 하는 루틴 같은 매일에 질린 은혜는 이번 생일에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함께 여행을 가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늘 일에 치여 피곤한 정우를 위해 이번에는 운전하지 말고 편하게 가자고 기차를 예매했고, 바다가 바로 눈앞에 펼쳐진 숙소도 직접 잡았다. 꼭 들러야 한다는 유명한 식당도 눈에 불을 켜고 검색을 해 놨는데, 아침부터 일이 꼬였다.

은혜가 기차 시간을 겨우 30분 남겨 두고 눈을 떴을 때, 정우는 침대 아래 테이블에 앉아 자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움직이지 않는 조각상처럼, 조금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정우는 그녀가 일어나자 이내 얼굴에 미소를 지었지만 그전까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었는지 궁금했다.

“아침에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오빠?”

“그냥. 네가 너무 예뻐서. 이게 혹시 다 꿈은 아닌가 싶어서 보고 있었어.”

“치. 그렇게 말하면 다 해결되는 것 같지.”

“사실인데.”

허둥지둥 서두르느라 기차에서 사이좋게 나눠 먹을 도시락은 택시에 두고 내렸다. 기차 시간을 맞추는 건 무리라서 급하게 다음 기차로 시간을 겨우 바꿨다. 자리를 잡고 확인해 본 일기 예보는 오후 강수 확률이 100%였다.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선로에서 사고가 발생하여 출발이 지연되고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정비가 끝나는 대로 신속히 출발할 예정이오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서 대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설상가상으로 기차까지 지연됐다. 그들이 종착지인 도착역에 내렸을 때는 빗줄기가 이미 굵었다. 대합실에 딸린 편의점 매대에서 우산을 사는 정우의 뒷모습을 보며 은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단 뭐라도 좀 먹자.”

“이 근처에 맛있는 데 있다 그랬어.”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그녀를 염려해 아무 곳에나 들어가려는 정우를 이끌고 검색 리스트에 있었던 식당을 찾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원피스 자락에 다 튀었지만 꾹 참고 걸어서 도착한 식당은 하필이면 저녁 시간에 걸려 줄이 한참 길었다.

“안 되겠다. 일단 숙소에 짐부터 풀고 그 근처로 가자, 은혜야.”

정우가 큰길에서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는 곡예와도 같은 운전을 선보이며 그들을 숙소까지 태워 주었다. 지금 손님들이 가는 곳은 관광객만 바글바글하지 진짜 한적하고 좋은 바다는 따로 있다고 추천해 주는 기사의 친절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은혜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손님, 죄송하지만 객실 예약 확인이 안 되는데요.”

“네? 그럴 리가요.”

은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휴대폰을 들어 황급히 예약 확인 메일을 찾았다. 결제까지 다 마친 이메일을 찾아내며 안심한 것도 잠시였다.

“아…. 어제 날짜로 예약하셨네요. 노쇼(No-show)로 확인되십니다. 혹시, 날짜를 착각하신 걸까요?”

호텔 직원의 얼굴은 객관적으로 안타까움을 내뿜는 표정이었지만, 은혜의 시점에서는 세상에 어쩜 그렇게 바보 같은 실수가 가능하냐고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아…. 그럼…. 어, 어떻게….”

은혜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아침부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더니 결국 대형 사고가 터진 것이다. 충격에 정신이 혼미해 말까지 더듬는 그녀의 곁에서 침묵을 지키던 정우가 마침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그럼, 오늘 남은 방은 있습니까?”

“손님이 예약하신 타입의 방은 아쉽게도 전 객실 만실이고요. 현재는 시티 뷰 객실만이….”

거금을 주고 이 호텔을 예약한 건 전적으로 아름다운 오션 뷰 때문이었는데. 착착 맞아 들어가는 머피의 법칙이 은혜에게 오늘 너는 뭘 해도 안 될 거라고 킥킥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네. 그걸로 하죠.”

“베드 타입은 트윈인데 괜찮으실까요?”

“상관없습니다.”

무릎에 힘이 풀렸다. 여행까지 와서 따로 자야 한다는 말이었다. 망부석처럼 굳어 있는 그녀의 곁에서 정우가 체크인을 하고 카드를 내밀었다. 프런트의 직원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은혜가 마지막 희망을 담고 꾹 다문 입술을 떼려는 순간, 직원이 아쉬운 표정을 한가득 얼굴에 담고 먼저 선수를 쳤다.

“현재 기상 악화로 인한 안전사고 염려 때문에 야외 온수풀은 이용이 불가능하시구요, 원하신다면 저희 호텔의 인도어(indoor) 풀을 이용해 보시는 건 어떠실까요?”

바다와 맞닿은 수영장에서 로맨틱한 불빛을 받으며 정우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그녀의 발칙한 꿈은 모조리 다 깨졌다. 이럴 거면 수영복을 두 개나 챙긴 이유가 대체 뭘까.

***

졸업을 일 년 앞둔 여름, 은혜의 학과에서 행사가 열렸다. 방학을 맞이하여 해외에 자매결연이 되어 있는 대학교를 며칠간 둘러보는 연수였는데, 말이 연수지 학과 사람들과 함께 놀러 가는 여행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았다.

“다녀와.”

당시 정우의 과보호 때문에 작게 다툼이 있었던 터라 그랬는지, 정우는 순순히 은혜의 여행을 허락했다. 다툼의 발단은 그녀가 워킹 홀리데이를 간 정윤을 보러 외국에 놀러 가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갖가지 이유를 들어 그녀의 출국을 막던 정우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나오자 은혜는 어리둥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기회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회비를 입금하고 신청서를 낼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여권을 만들고 출국 날이 다가오자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오빠, 수영복도 가지고 오랬는데 솔직히 입을 일 없겠지?”

“…그래도 가져가 봐. 없어서 당황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정우는 정말로 괜찮은 듯 보였다. 부산스레 짐을 싸는 그녀의 곁에서 조언을 해 주기까지 했다. 떠나는 날, 은혜는 준비물을 꼼꼼히 챙기고 집 앞 공항 리무진 버스에 씩씩하게 혼자 올라탔다.

“전화할게, 오빠!”

“신경 쓰지 말고 재밌게 있다가 와.”

작은 창문을 열고 소리치는 그녀를 보며 정우는 옅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보였다. 버스가 떠날 때까지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오빠를 보니 가슴이 조금 싱숭생숭했지만 은혜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정우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니고 스스로 가겠다고 한 여행이었다. 웃으며 보내 주는 오빠를 생각해서라도 즐겁게 지내다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공항에서 터졌다.

“은혜야. 여권.”

“네, 잠시만요.”

가방을 뒤지는 은혜의 커다란 눈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작은 크로스백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여권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 어? 왜… 없지?”

“트렁크에 넣은 거 아냐?”

동기들까지 합세해서 찾아 주었지만 여권의 행방은 묘연했다. 분명히 마지막까지 확인을 했는데, 설마 집에 놔두고 온 걸까?

“집에 아무도 없어? 전화 좀 해 봐, 은혜야.”

은혜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손톱을 잘근잘근 씹다가 결국 정우에게 연락을 했다.

“오빠, 지금 회사지?”

- 아니. 아직 출근 전이야.

정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은혜는 정우가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 집에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느끼지도 못한 채 울상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 진짜? 오빠 그러면 혹시 집에 내 여권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어? 내가 분명히 확인하고 가방에 넣었는데… 하아, 버스에 떨어뜨린 건지 안 보여.”

- 응. 여기 있네. 식탁 위에.

은혜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 지금 공항으로 가져다줄게.

“진짜? 그래도, 돼?”

휴대폰 너머에서 정우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 당연하지. 최대한 빨리 갈게.

정우는 말 그대로 금방 왔다. 공항 터미널을 가로지르며 걸어오는 키 큰 남자를 발견했을 때,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은혜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그에게 뛰어갔다.

“오빠, 미안. 진짜 미안.”

“나 두고 여행가는 게 그렇게 정신없을 정도로 좋았어?”

정우가 손에 들고 있던 여권을 내밀며 부드럽게 웃었다. 은혜의 심장이 새삼 쿵, 하고 강하게 뛰었다.

대체 왜 이렇게 잘생겼지.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오늘따라 더 멋있게 느껴졌다. 몸을 우아하게 감싸는 스리피스 슈트를 갖춰 입고 은혜가 가장 좋아하는 타이까지 매고 나타난 정우는 주변의 시선을 단박에 잡아끌었다. 멀리서 학과 사람들뿐만 아니라 공항을 바쁘게 가로지르는 사람들이 그들을 힐끗힐끗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얼른 가 봐. 늦으면 안 되잖아.”

“으응. 오빠. 다녀오겠습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다 결국 떠나려는 은혜를 정우가 가볍게 포옹했다.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사랑한다, 은혜야.”

왜였을까.

자꾸만 오빠의 말이 사무치게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마음이 불안했다.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그와 물리적 거리가 이 정도로 떨어지는 상황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몸이 관성적으로 반응하는 걸까? 자꾸만 가슴이 쿵쿵거리고 방금 전 정우의 희미한 미소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은혜가 출국 수속 카운터 앞에서 돌아선 것은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선배님. 정말 죄송한데요. 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비행기 못 탈 것 같아요.”

미쳤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늘 함께 있는 오빠와 겨우 며칠간 떨어져 있는 걸 견디지 못한다고 말하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은혜는 정말로 떠나기가 싫었다.

“응? 무슨 말이야 그게?”

경비까지 다 내놓고 안 간다는 그녀를 보며 선배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은혜의 표정은 정말로 흙빛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아니, 나한테 죄송할 건 없고… 너 혹시 공황 장애 같은 거 있어…?”

선배의 조심스러운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은혜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넓은 공항 터미널을 냅다 달렸다. 그녀는 뛰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지금 어디야? 벌써 차 탔어…?”

빠르게 묻던 은혜의 말끝이 흐려졌다. 출국장 터미널 입구. 의자에 앉아 있던 정우가 달려오는 은혜를 보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모습이 시야에 보였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정우가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벌렸다.

탁.

은혜는 짐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그에게 뛰어들어 와락 안겼다.

“여기서 뭐 해? 오빠 왜 안 갔어?”

“쓸쓸해서.”

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는지 모르겠다. 은혜가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아프지 않게 쿵, 때렸다. 잘생긴 남자가 청승을 떨고 있는데 보기 싫은 게 아니라 심장이 아프게 울렁거렸다.

“오빠 바보야?”

“응.”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정우의 시선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다정했다.

사실 바보는 그녀였다. 여행을 간다고 선전 포고 해 놓고선 여권을 잊고 온 것도 바보 같았고, 막상 오빠 얼굴을 보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되돌아온 것도 바보 같았다. 오빠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 잠시간의 이별이 못 견디게 사무칠 건 또 뭐람. 이럴 거면 처음부터 가지 말 걸 그랬다.

“나 안 오면 언제까지 기다리려 그랬는데.”

그녀를 품에 끌어안으며 정우가 속삭였다.

“올 때까지.”

그날, 정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로 핸들을 돌렸다. 호텔 룸의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정우는 그녀에게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 커다란 호텔 창으로 정오의 햇살이 쏟아지던 날, 그녀는 고도를 높이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정우와 섹스를 했다.

“미안하다, 은혜야.”

여행을 가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그녀인데 정우가 사과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은혜는 비행기를 타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응? 수영복이 왜 여기 있지?”

분명 슈트케이스 안에 챙겨 넣었다고 생각했던 수영복이 서랍 속에서 얌전히 잠자고 있는 걸 보며, 역시 여행은 그녀의 체질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웃었을 뿐이다.

***

룸에 들어왔을 때 시간은 벌써 8시. 이미 해가 진 깜깜한 밤이었다.

“피곤하지. 좀 씻을래?”

“…오빠 먼저 씻어.”

식사는 체크인 직후, 호텔에 딸린 중식당에서 먹었다. 정우는 이 날씨에 식당을 찾아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게 더 낫다고 했다. 한 그릇에 2만 5천 원인 짜장면을 먹으며 은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은혜야. 화났어?”

“내가 왜.”

이럴 거면 오지 않는 것만 못했다. 괜히 고집을 부려 정우까지 힘들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목소리 들으니까 화난 것 같은데.”

정우가 짐을 놓아두곤 창밖의 야경을 우두커니 응시하는 은혜에게 다가왔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어제 늦게까지 괴롭혀서 미안해. 아침에 안 깨운 것도.”

사실 그녀가 늦잠을 잔 게 백 프로 정우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지난밤, 늘 그렇듯이 처음에는 정우의 리드로 시작된 정사였지만 나중엔 그녀가 흐느끼며 오빠에게 매달렸다. 잠깐만 눈을 붙인다고 해 놓고서 알람도 맞추지 않은 그녀에게도 확실히 문제는 있었다는 뜻이다.

“화난 거 아냐, 그냥….”

“그냥 뭐.”

정우가 그녀를 부드럽게 돌려세워 마주 보았다. 은혜가 입술을 깨물며 작게 고백했다.

“나 수영복 두 개나 가져왔어. 한 개는 엄청 귀여운 거고, 한 개는 엄청 섹시… 한 거라고 했어.”

“오빤 너 수영복 입은 모습 남들한테 보여 줄 생각이 없는데. 전혀.”

머뭇거림도 없는 그의 대답에 은혜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게 아쉬우면 지금 입을래?”

정우는 여전히 그녀의 속도 모르고 내뱉고 있었다. 은혜가 그를 올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바다도 보고 싶었단 말이야.”

“바다?”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오빠랑 바다 보려고.”

햇살이 부서지는 아침 바다를 바라보며 룸서비스를 먹고 싶다는 근사한 계획은 완전히 날아갔다. 비 내리는 도심의 야경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걸 위해 기차까지 타고 온 것은 아니었다.

“보면 되지.”

정우가 그녀의 말을 나직하게 되받았다.

“…응?”

은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정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바다가 코앞인데 직접 보면 되잖아.”

“…지금?”

“지금.”

굵은 빗줄기가 창문에 마구 빗금을 긋고 있었지만 정우의 표정은 태연했다. 은혜는 당황해 눈을 깜빡이면서도 그녀를 이끄는 정우에게 홀린 듯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밤바다에는 물론 아무도 없었다. 기상 악화라는 호텔 직원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돌풍까지 불어 머리카락이 사납게 날렸다. 놀러 간다고 바쁜 와중에 차려입은 플레어 원피스가 쉴 새 없이 펄럭거렸다.

정우가 그녀에게 우산을 들게 한 후, 신발을 벗고 그녀의 앞에 등을 보였다.

“업혀!”

철썩!

성난 파도가 백사장을 때리고 지나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은혜야, 업히라니까! 너 업고 내가 뛰어 줄게!”

빗물에 엉망으로 젖은 정우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는 은혜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우산을 휙, 내려놓고 샌들을 벗어 던졌다.

“나는 다리 없나, 뭐!”

“옷 젖잖아…!”

“이미 젖었거든!”

정우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아 제게로 당기며 근사하게 눈을 찌푸렸다.

“너 누가 그렇게 야한 말 하래.”

“속이 시커먼 사람한테만 야하게 들리는 거야.”

은혜가 그를 도발하듯 더욱 발칙한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아아. 이미 젖었지만 더 흠뻑 젖고 싶다. 그래서 오빠 완전히 적셔 버리게.”

“혼난다, 진짜.”

은혜가 입술을 삼키려는 그를 밀치고 맨발로 뛰었다. 젖은 백사장이 발을 움푹움푹 잡아끌었다. 파도의 포말이 부서지는 검은 물에 발이 닿자 은혜가 작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를 쫓아온 정우가 그녀를 붙들려는 순간, 은혜가 바닷물을 손으로 퍼서 그에게 확 뿌렸다. 정우가 젖은 머리칼을 털며 이은혜! 하고 소리를 치는 걸 들으며 그대로 달렸다.

“내가 오빠 적신다고 했잖아!”

차가운 바닷물이 순식간에 무릎 위로 올라온 치맛자락을 적셨지만 이미 쏟아지는 빗물에 젖은 몸이라 거리낌도 없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오빠… 하하….”

도망쳤지만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에게 뒤에서 끌어안긴 채 은혜가 두 손을 모으고 빌었다.

“생각 좀 해 보고.”

그녀를 번쩍 들어 안고 바다 밖으로 빠져나가는 정우의 목을 끌어안은 채, 은혜가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호텔 사람들이 우리 보면 진짜 미쳤다고 하겠다, 그치.”

“그래서 싫어?”

모래사장에 은혜를 내려놓으며 그가 되물었다. 은혜가 빗물에 젖은 얼굴로 어깨를 들썩이며 아이처럼 웃었다.

“아니. 좋아, 너무 좋아.”

파도 소리는 생생했고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는 부드러웠다. 바다 냄새가 코로 확 밀려들었다. 이보다 더 바다를 생생하게 느낄 수는 없었다.

“생일 축하해, 은혜야.”

정우가 빗물이 흐르는 그녀의 얼굴을 양 손바닥으로 닦아 주며 눈을 맞추었다. 하루 종일 속상했던 기분이 깡그리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역시, 그녀는 정우가 너무 좋았다.

“비 안 맞게 하려고 했는데, 다 젖어 버려서 어쩌지?”

“오빠, 있잖아.”

사랑에 빠진 얼굴로 그녀가 정우에게 속삭였다.

“나는 오빠가 나한테만 우산 씌워 주고 혼자 비 맞는 것보다, 이렇게 같이 비 맞는 게 백배는 더 좋은 것 같아.”

“…왜?”

“그게 더 재밌잖아. 지금 봐. 얼마나 즐거워.”

은혜가 눈꼬리를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정우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은혜와 함께 있으면 지금이 달빛조차 보이지 않는 밤인 것도, 폭우가 쏟아지는 것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24시간 그를 비추는 햇살이었다.

“비 맞으면 꼭 아픈 주제에, 말은 잘하지.”

“내가 맘 놓고 아플 수 있는 이유가 누구 때문인데.”

은혜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윤이가 워킹 홀리데이 갔다 와서 한국 땅 밟자마자 앓아누웠잖아. 오지에서 생고생을 했을 땐 감기 한 번 안 걸렸는데 옆에 간호해 줄 사람 있고, 병원 데려가 줄 사람 있다는 거, 몸이 아는 순간 긴장 풀린 것처럼 그렇게 아프더래.”

정우는 비를 맞아 더욱 하얘진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오빠 덕에 아플 수 있는 거야. 물론, 오빠가 아파도 내가 똑같이 해 줄 거고.”

너를 원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오빠, 우리 춤추자. 영화처럼.”

이건 전적으로 네 탓이다. 은혜야.

은혜가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며 그의 양손을 붙들었다. 달콤한 멜로디를 허밍하며 그녀가 빗속에서 그에게 다가왔다가 멀어졌다가 예쁘게 눈을 흘겼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든 순간을 눈에 담는 정우의 눈빛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은혜야.”

빗소리가 그의 낮은 목소리의 떨림을 집어삼켰다.

“응, 오빠.”

발가락을 간질이는 물거품을 느끼며 은혜가 정우에게 다가섰다. 매서운 빗줄기가 자꾸만 정우의 얼굴을 스치며 때리는 것 같아 그의 뺨을 손으로 훔쳤다. 철썩. 파도치는 소리와 함께 꿈결 같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앞에서 영원히, 이렇게 춤춰 줄래.”

“하하, 그럴게.”

은혜가 눈을 깜빡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젖은 속눈썹이 바짝 올라간 큰 눈에 그가 가득했다.

“그럼 결혼하자.”

“…응?”

환하게 웃던 얼굴이 어색한 표정으로 굳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너무 행복해서 환청이 들리는 건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는 그녀를 향해, 정우가 다시 한번 정확히 속삭였다.

“결혼하자. 오빠랑.”

“…오빠.”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은혜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나랑 결혼해. 아니. 난 너랑 결혼해야겠어, 은혜야.”

은혜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까치발을 번쩍 들었다. 그에게 더, 더 가까이 가고 싶었다. 뜨거운 입술로 그녀를 집어삼키며 문지르는 정우에게 가슴속을 몽땅 열어 보여 주고 싶었다.

은혜의 소원은 오빠와 결혼하는 거였다. 아홉 살 때부터, 그렇게 정해진 이야기였다. 구름에 달도 숨은 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철썩, 철썩, 했지만 그녀를 으스러져라 끌어안는 정우와 함께라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정우는 실수 연발인 그녀의 하루를 빛나게 만들어 주는 능력이 있었다. 아침부터 날씨가 나빴던 것도, 호텔 수영장이 문을 닫은 것도 모두 이 순간을 위한 것 같았다.

오늘은 최악의 생일이 아니었다. 그녀 인생 최고의 생일이었다.

***

달칵. 묵직한 문이 조용한 소음을 내며 닫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줄곧 손을 잡고 있다가 마침내 둘만의 공간에 들어오자 미묘한 공기가 둘 사이를 감돌았다.

“오빠, 먼저 씻을래?”

친절한 호텔 로비 직원이 건네준 수건을 목에 걸친 채, 은혜가 어색함을 이기려 입을 뗐다.

“아니.”

“어, 그럼 나 먼저….”

정우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를 마주 보고 섰다. 매일 마주 보는 얼굴인데 왜 이렇게 떨리는지, 은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우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침대가 두 개라서 다행이지 않아?”

“…뭐가?”

“지금부터 하나는, 몽땅 젖을 것 같으니까.”

은혜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젖은 수건이 휙, 날아갔다. 원피스 가슴 끈을 풀어내는 정우의 손놀림은 빨랐다. 묵직하게 젖은 옷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녀에게 진하게 키스하며 정우 역시 젖어서 상박에 딱 달라붙은 와이셔츠를 몸에서 떼어 냈다. 젖은 몸에 열기가 일어 뜨거웠다.

“프러포즈를 그런 식으로 해서 미안해. 실망했지.”

정우가 그녀에게 입술을 붙인 채 낮게 잠긴 목소리로 묻자 은혜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아니, 아니 오빠.”

꽃과 촛불로 화려하게 장식된 곳에서 깜짝 프러포즈를 받았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하지 말 걸 그랬다.

“좋았어. 최고로 좋았어, 오빠. 진짜야.”

“날 용서하지 않아도 돼.”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인 정우가 브래지어 어깨끈을 내린 후, 가슴을 받친 컵도 아래로 잡아 내렸다. 뽀얀 가슴이 속옷 위로 삐져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부들부들한 살을 손으로 매만지며 그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결혼하는 거 안 무섭니, 은혜야.”

“내가 왜… 무서워야 되는… 데?”

정우가 할딱이기 시작한 그녀의 목덜미와 쇄골에 쭉쭉 빨듯 키스하며 몸을 숙여 내려갔다.

“나랑 결혼하면 이제 너 밖에 못 나가거든.”

“지금도…. 많이 나가지도 않는데 뭐….”

젖꼭지에 입맞춤이 떨어지자 은혜가 얼굴을 붉혔다. 단단하게 선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자극하며 그가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일도 못 하게 할 거야.”

은혜가 잠시 망설인 후, 젖은 한숨을 토해 냈다.

“어차피 뭘 하고 싶은지도 아직 잘 모르겠으니까… 주부 하면서 생각하면 될 것 같…. 아, 오빠…. 으응…!”

정우는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은혜의 유두를 흡착하듯 쭉쭉 빨았다. 은혜가 흐느끼듯 신음하며 그의 젖은 머리칼에 손을 파묻었다. 아릿하게 빨리는 느낌이 평소보다 더욱 강렬했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젖꼭지가 엉망으로 붉어져 마침내 그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이번에는 양손으로 틀어쥔 채, 달래 주듯 혓바닥으로 번갈아 핥았다. 은혜가 목까지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빠….”

정우는 그녀의 몸을 욕실과 가까운 침대 위로 천천히 누인 후, 양 무릎을 열었다. 민트색 순면 팬티가 완전히 젖어 달라붙은 채 둔덕을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에 숨이 막혔다.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젖은 속옷 위를 지그시 문질렀다.

“으으응…!”

은혜가 허리를 떨며 신음했다. 얇은 막 같은 천 너머로 정우의 손길이 더욱 뜨겁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빗물이 아닌 애액으로 흠뻑 젖은 속옷을 그에게 보이는 것이 몹시도 부끄러웠다. 손으로 직접 팬티를 끌어 내리려 해 봐도 소용없었다.

오빠, 하고 속삭이듯 애원하자 정우가 그녀의 속옷을 벗겨 주는 대신 마치 가림막을 걷어 내듯 옆으로 치웠다.

곧장 아랫도리를 맞출 것 같았던 정우는 손으로 그녀를 먼저 애무하며 열기 시작했다. 은혜가 흥건하게 젖어 있는 질구에 천천히 들어오는 손을 느끼며 허리를 조금 떨었다. 마디가 툭툭 불거진 정우의 굵은 손가락이 뜨겁고 부드럽고 꽉 조이는 그녀의 내벽을 천천히 누르며 자극했다. 누군가 심혈을 기울여 빚어 놓은 것처럼 예쁘고 고상한 느낌을 주는 얼굴과는 달리, 정우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에 거칠고 딱딱했다.

거기에는 고된 노동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커다란 손도 포함이었다. 그 손에 온몸이 부드럽게 만져질 때마다 은혜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정우의 몸 자체가 그의 인생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달려온 삶이었다.

“어제부터… 이상했던 이유가…. 하아…. 설마 프러포즈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였어…? 오빠 긴장해서 그랬던 거야?”

은혜는 흥분에 달뜬 눈으로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행복한 기색을 감출 줄을 몰랐다. 정우는 그녀를 보며 마른침을 삼킨 후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싫으면 싫다고 말해. 그러면 깨끗하게 포기해 줄 테니까.”

은혜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가녀린 손가락으로 핏줄이 솟아오른 그의 팔뚝을 아프게 꽉 움켜쥐었다. 정우는 물러나는 대신 더욱 깊숙이 그녀의 내벽을 파고들었다. 은혜가 손톱을 세우자 보란 듯 손가락 하나를 더 늘렸다.

허벅지 사이에서 연신, 젖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흥분에 벌어진 입술에서 열기 오른 숨결이 연신 내쉬어졌다. 그의 두 손가락이 내벽을 꾹꾹 짓누르듯 자극하자 뜨거운 애액이 그의 손등까지 흘러내렸다. 모든 것이 전부, 정우의 의도대로다.

“…거짓말쟁이.”

은혜가 발그레한 눈으로 그를 원망하듯 노려보는 순간, 정우가 그녀의 몸에 자신을 밀어붙이며 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맞아. 거짓말이야.”

난 너 포기 못 해. 죽어도 안 놔.

“그럼 그런 소리는 대체 왜 해…?”

“…글쎄. 왜일까.”

“오빤 맨날 그러지. 사람 한껏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불안하게 하면서 뒤흔드는 거.”

사실 불안한 건 정우가 더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줄곧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은혜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과거의 연결 고리가 그녀에게 그 어떤 파장이라도 줄까 봐 두려웠다.

이제껏 인생에 최정우라는 둥지밖에는 없었던 은혜가 기댈 다른 곳이 생기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하기라도 할까 봐, 무슨 수를 써서든 그녀를 제 곁에 붙들어 두고 싶었다.

“오빠 미워.”

너는 내 것이다. 은혜야.

“응. 미워해. 마음껏.”

정우는 은혜의 친부에게 그녀가 응당 누려 마땅한 것들을 모두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은혜원에서, 쪽방촌에서, 고시원에서, 초라한 집에서 고생하고 살았던 시간을 물질적으로 보상하되, 그녀의 앞에 다시는 나타날 생각도 말라고 협박했다. 사실 그에게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욱 중요한 조건이었다.

가두고 싶다. 널 가둬 버리고 싶어.

“그게 내 청혼에 대한 네 대답이야?”

3년 만인가. 이렇게 시커멓고 끈적거리는 충동이 올라와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든 것은. 그가 만들어 놓은 초라한 둥지를 은혜가 떠나려 했을 때의 충격이 다시금 그를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은혜가 마침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흐느끼듯 목소리를 높였다.

“거짓말인 거 알잖아. 내가… 오빠보다 오빠를 더…. 사랑하는 거, 알잖아…. 으응…!”

“그건 불가능해, 은혜야.”

중얼거리듯 내뱉은 정우의 손이 그녀의 안에서 더욱 빠르게 왕복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완전히 젖은 그녀의 내벽에서 물이 튀는 소리가 났다. 그가 격렬하게 몰아붙이듯 섹스할 때 나는 소리였다.

“아…! 으응. 오, 오빠… 아… 오빠…!”

은혜는 숨을 헐떡이며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으로 애원했다. 사실, 정우는 손 쓰는 일이라면 뭐든 잘했다. 은혜는 언제 어디서건 그의 손길만으로 무참하고 강력한 절정에 달할 수 있었다. 익숙하고 부끄러운 감각이 온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흑, 아, 안 돼, 응, 으응, 오빠 제발… 아흣…!”

허벅지로 꽉 눌러 그의 손길을 저지하려 했지만 무리였다. 은혜는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쥐어짜듯 움켜쥔 채 울음을 터뜨리듯 절정에 오르고 말았다.

“아으응…!”

정우는 침대를 모조리 적실 거라는 그의 말을 사실로 만들고 나서야 드디어 은혜의 속옷을 차례로 벗겨 주었다. 그 역시 젖은 바지와 드로어즈를 벗어 던진 후, 아직도 절정의 여운에 헐떡대는 그녀의 반대 방향으로 누워 그녀의 다리 사이를 게걸스레 핥았다.

“하…. 아….”

은혜는 자신의 눈앞에 빳빳이 고개를 쳐든 그의 욕망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정우가 그녀의 얼굴에 성기를 대는 건, 오늘의 정사가 특별하게 길어질 거라는 걸 예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은혜도 이제 알고 있었다. 그녀의 연인은 무서울 정도로 소유욕이 강한 남자였다. 그녀의 술에 약을 타서 강제로 가지려다 정우에게 구타당한 주혁은 사건 이후 한 달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학기가 다 끝나 갈 무렵 어딘가 조금 달라진 얼굴로 나타난 그는 그녀를 슬슬 피해 다니다 가을 졸업을 했다. 그녀가 아니라 정우가 두려워서였음이 틀림없었다.

비단 그녀에게 위험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정우를 닮은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함께 봤을 때, 신나서 배우에 대해 조잘거리는 말을 한마디도 되받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정우는 그날 밤 처음으로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물렸다.

“흡…. 읍, 흣….”

자그마한 휴대폰 액정 안에서, 그 배우가 출연했던 드라마의 하이라이트 클립이 여전히 재생되는 와중에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오빠의 성기를 빨아 주고 있었다. 휴대폰이라도 끄고 싶었지만 정우는 그녀에게 그럴 틈조차 주지 않았다.

그날 뒤부터 은혜가 그 배우를 볼 때마다 떠올리는 건, 정우의 성기가 입 안을 가득 채우며 목을 자극하던 아찔한 느낌과 그녀의 머리를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던 정우의 눈빛뿐이었다.

은혜는 허리를 움찔거리며 그의 성기를 조심스레 붙잡았다. 선액으로 흥건하게 젖어 끄트머리가 갈라진 선단을 혀로 핥자,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 난잡하고 음란한 소음이 은혜의 아랫도리에서 퍼져 나갔다.

동시에 그녀의 손안에서 성기가 맥동하며 선액이 주르르, 다시 흘러내렸다. 오빠는 참 무섭게 야한 사람이었다.

“나도 해 줄까, 오빠…?”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자마자 정우가 대답 대신 잔인하게 발기한 성기를 그녀의 입술 새로 들이밀었다. 두렵다기보다 입 안이 말랐다. 은혜는 핏줄이 툭툭 불거져 저절로 꺼떡이는 오빠의 몸 일부분을 간신히 빨았다.

그녀가 움직일 새도 없이 정우가 허리를 천천히 밀어 넣기 시작했다. 볼 안쪽과 혓바닥, 치아에까지 스치는 페니스의 감각이 생생했다. 턱이 한계까지 벌어지고 타액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그녀의 입 안에서 더욱 진해지는 남자의 체향에 저절로 숨이 뜨거워졌다.

정우는 그녀의 붉어진 음부에 자신의 얼굴을 틀어넣을 기세로 애무하며 연신 스스로를 움직였다. 서로 얽혀 꿈틀거리는 두 육체 아래에서 침대 시트가 엉망으로 구겨졌다.

정우가 깊숙하게 빨면 그녀도 그렇게 했다. 정우가 부푼 음핵을 혀로 핥으면 은혜 역시 그의 선단을 마구 핥았다. 서로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감각이 두려울 정도로 음란했다.

정우와 이제껏 연인이 할 수 있는 모든 비밀스러운 행위를 다 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가장 야한 짓을 꼽으라면 은혜에게는 이것이었다. 오빠에게 모든 것을 숨김없이 다 내보이고, 그 역시 그녀에게 모든 것을 보여 준다. 아찔한 쾌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느끼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비강을 통해 진한 남자의 체향이 터져 나갔다.

“흡… 흣…. 하아….”

정우가 뒤로 성기를 물리자 끈적한 타액이 정액과 섞여 기둥을 타고 길게 늘어졌다. 은혜는 몸을 돌려 그녀의 위로 올라오는 그를 달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우가 그녀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으로 제쳤다. 흐릿하게 남은 이마의 상처를 엄지로 쓰다듬으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

“맛있니, 은혜야.”

“쓰고…. 짠데….”

가슴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 그의 흔적을 입술에 묻히고 인상을 가늘게 찌푸리는 은혜의 얼굴은, 범죄 그 자체다.

“…오빠 거라고 생각하면 맛있어.”

정우가 입술을 짓씹으며 무서운 표정으로 그녀를 덮쳤다. 이성의 끈이 완전히 끊어졌다.

“씨발…!”

그가 물고 빨았던 그녀의 안으로 성기가 단박에 치고 들어왔다. 정우는 한 번 뿜어내고도 크기를 줄이지 않은 성기를 녹아내린 질 안에 완전히 틀어박은 후, 턱턱 소리가 나게 박아 쳤다.

“아…! 아, 오빠…. 아…!”

그를 부르는 그녀의 입술이 타액으로 흥건했다. 정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 자그마한 입술이 그의 욕망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을 떠올리며 그녀의 입 안에 두 손가락을 넣어 젖은 혀를 문질렀다. 은혜가 손을 아프게 깨물었지만 더욱 좋았다.

“더 세게 씹어 봐. 내 거 맛있다며. 피가 나게 물어 봐.”

은혜가 눈가에 눈물을 단 채 그를 바라보았다. 투박한 손가락에 잇자국을 남기는 대신 핥으며 부드럽게 빨기 시작한 그녀를 보는 정우의 눈에서 시커먼 욕망이 터져 나갔다.

그녀의 골반이 위로 번쩍 들렸다. 상체를 일으킨 정우는 그녀의 허벅지를 감아쥔 채, 집요하고 격렬히 박기 시작했다. 침대 발치를 향해 거꾸로 누운 상태였던 은혜의 몸이 치받힘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밀려났다.

결국 은혜의 머리가 매트리스 아래로 떨어졌다. 커튼이 열린 창을 통해 불빛 어린 도시의 야경을 배경으로 오빠가 자신을 집어삼킬 듯 탐닉하고 있는 모습이 흐릿하게 비쳤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위험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모습까지도.

“어딜, 보는 거니, 은혜야.”

정우가 숨을 몰아쉬며 발톱을 숨긴 짐승처럼 낮게 속삭였다.

“오빠랑 섹스하면서 어딜 봐.”

“나… 떨어질 것 같아… 오빠… 아….”

그녀의 몸이 휙 들리더니 순식간에 자세가 바뀌었다.

“그럼 날 꽉 잡아야지.”

은혜는 이제 정우의 몸 위에 말을 타듯 올라탄 채였다. 정우가 그녀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 쳤다. 마찰할 때마다 더욱 끈적끈적해지는 액이 성기 기둥과 회음부에 붙어 길게 늘어졌다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흔적이 정우의 음낭까지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른 곳으론 눈 돌리지 말고, 나만 봐야지. 나한테만… 매달려야지, 은혜야.”

은혜는 정우에게 손이 깍지 껴진 채 움직일 수도 없이 그의 폭격 같은 움직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오빠의 위에서 섹스를 하면 자세 때문에 그의 성기에 완전히 꿰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저히 더 깊이 들어올 수 없는 곳까지 그가 닿아 오는 느낌.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두려울 정도로 노골적인 섹스를 할까. 정우와 섹스할 때면 은혜는 점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주는 쾌감에 울고 흐느끼며 그를 원망할 뿐이었다.

“안에서 너무 많이 나온다. 소리 들리니.”

“아…! 아…! 오빠 미워… 흑… 미워, 흑, 흐윽…!”

그녀가 엉엉 울수록 그가 더욱 흥분하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난 좋아. 미치겠어, 은혜야.”

번들거리는 성기가 연신 빠르게 질을 들락거렸다. 욕망이 잔뜩 고인 음낭이 하얀 엉덩이를 세게 두드려 발갛게 만들었다.

“나 봐.”

은혜가 눈을 꽉 감은 채, 고개를 가로젓자 정우의 움직임이 더욱 격해졌다. 절정까지 빠른 속도로 밀어붙여졌다. 그의 애정을 차고 넘치게 받아 더욱 부푼 젖가슴이 연신 반대로 원을 그리며 출렁였다. 남자의 몸 위에 올라탄 은혜의 입술에서 신음이 짤막하게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오빠 얼굴 보고 그렇게 야한 소리 내 봐, 은혜야.”

“으으응…!”

은혜가 눈을 질끈 감은 채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오빠의 얼굴을 보고 표정을 갈무리할 수 없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현재 사는 집에 이사 와서 처음 섹스했을 때, 커다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최초로 보고 느꼈던 충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눈에는 눈물을 매단 채 입술은 반쯤 벌어지고, 온몸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짐승처럼 신음하는 모습을 정우는 늘 봤다는 뜻이었다.

그의 몸 위에 무너지듯 쓰러지며 끙끙거리자 정우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쑤셔 박으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내가 싫어?”

정우는 꼭 그랬다.

“다시는 섹스하지 말까. 예전처럼 너한테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참아 볼까. 난 그걸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이니까.”

“시, 싫어…!”

“그럼 눈 떠.”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난 후에도, 도저히 더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녀에게 자신을 감당하라 명령하는 것이다. 결국 은혜는 눈을 떠서 쾌감으로 가득한 제 눈동자를 그대로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 응. 으응…. 흐으…. 이상해 오빠… 나 지금 이상하잖아…. 흐윽….”

“맞아. 이상해. 너무 이상하다, 은혜야.”

정우가 혀를 내밀어 보란 듯이 게걸스레 키스하며 중얼거렸다. 한 손으로는 흐느끼는 그녀의 머리를 제게 틀어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풍만한 엉덩이를 손자국이 나게 움켜쥔 채 그 안에 빠르게 박아 넣었다. 은혜가 가장 잘 느끼는 부분이 정확히 찧어지고 문질러지고 압박되었다.

“그러니까…. 이런 모습은… 평생 나한테만 보이는 거야.”

내게만. 오직 나한테만, 은혜야.

“알았니.”

은혜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새된 신음과 함께 절정에 올랐다. 눈물 흘리는 그녀를 마주 안고 정우가 입술을 한 번 빨았다 놓았다. 은혜는 그의 목에 양팔을 두르고 그저 숨을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방만하게 벌어진 다리 사이로 그의 성기가 여전히 삽입되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진짜… 못됐어.”

은혜가 손을 들어 그의 높다란 콧등을 살짝 스치듯 만졌다. 정우가 그녀의 입술에 연신 키스하려 다가왔으므로 손바닥을 펴서 막아 내자 이제는 손까지 핥으며 입맞춤을 퍼부었다.

“맞아.”

그는 악한 인간이었다. 그녀에게 뭐든 다 해 주고 싶은 동시에 그녀의 날개를 모조리 꺾어 버리고 싶은 마음을 은혜는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오빠. 혹시 무서워…?”

은혜가 그에게 속삭이자 눈을 감고 그녀의 손을 핥던 정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은혜는 심연의 바다 같은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다시 한번 속삭였다.

“날 사랑하는 게, 불안하고 무서운 거야?”

너는 가끔, 이리도 나를 두렵게 만든다. 그의 속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그녀가 중얼댔다.

“근데… 나도 그래, 오빠.”

은혜가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어릴 때와 똑같이 예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나도, 늘 오빠가 어디서 다쳐 오기라도 할까 봐…. 무슨 교통사고라도 나서 이 세상에 나 혼자 남을까 봐 가끔 무섭거든.”

“…그럴 일 절대 없어.”

“응. 믿어.”

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한 점 의심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오빠 믿어. 믿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은혜야.”

정우의 목소리가 잠긴 채 떨렸다. 그렇게 강한 남자가 고작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두려워한다는 사실에 은혜는 가슴이 뻐근했다. 그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추자 정우가 아픈 사람처럼 신음했다.

“있지. 오빠는 날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욕심이 너무 강해서 두려운 거야. 근데 내가 말했잖아. 나는 오빠랑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아. 비를 맞는 것도 괜찮고,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 빠져도 상관없어.”

은혜가 벌겋게 물이 드는 그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오빠 머릿속을 불안하게 하는 게 뭐든, 내가 다 내쫓아 줄 거야.”

정우의 호흡이 거세게 바뀌며 상처투성이인 어깨가 들썩였다.

“무슨 귀신이든 다 무찔러 줄 거야.”

은혜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 남자 건드리면… 그게 누구든 용서 안 할 거거든.”

거칠게 한숨을 토해 내며 정우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사랑해, 은혜야.”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상체를 세운 채, 은혜의 안을 빠르게 몰아치며 몇 번이나 고백했다.

“사랑해.”

은혜가 새빨개진 얼굴로 그를 보며 스스로 클리토리스를 문질렀다. 그녀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다. 정우를 미치게 만드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응. 나도…. 나도, 오빠….”

다른 손으로는 흔들리는 제 가슴을 살며시 움켜쥐며 달뜬 쾌감에 신음하는 은혜의 모습은 정우의 눈을 멀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그뿐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정우는 뭐든 다 할 수 있었다.

“미치겠어, 은혜야.”

몸이 다시 뒤집힌 은혜가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신음했다. 방 안은 온통 난잡한 정사의 향을 풍기고 있었다.

“예뻐…. 예뻐 미치겠어.”

정우는 그녀의 여린 목덜미와 쑥 들어간 등골에 키스를 흩뿌렸다. 은혜의 여린 몸을 양다리 사이에서 끼워 빠져나가게 하지 못한 후, 뒤에서 쉴 새 없이 박았다. 아름다운 여체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매혹적으로 흔들렸다.

“은혜야, 오빠… 이제 할 것 같은데… 어디에다 쌀까.”

“흣… 으응…. 마음대로…. 응… 흐응….”

또다시 흐느끼면서 은혜가 속삭였다. 그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배 위에다 쏟아 내 줄까. 그럼 네 얼굴까지 튈 텐데. 그것도 보기 좋겠다. 응?”

“싫어….”

“그럼 어디에.”

은혜는 눈물을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신사의 얼굴을 한 야만적인 연인에게 그가 원하는 대로 애원해 주었다.

“안에 해 줘. 오빠… 내 안에…. 안에다가…. 흣…. 안에 해 주세요….”

정우의 허벅지에 피가 몰려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그녀의 귓가를 잘근거리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 그럴게. 그럴게, 울지 마. 은혜야…. 은혜야…. 아아…!”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길게 파정한 후에도 성기를 쉽사리 물리지 않는 그에게 안겨 은혜가 작게 그를 불렀다.

“오빠.”

등 뒤에서 한참 있다가 나지막하게 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은혜는 커다란 남자의 손에 자신을 겹치며 토닥, 토닥, 두드렸다. 그녀는 늘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그가 괴로워하는 일이 무엇이든 전부 다 그녀의 행복을 위하는 마음이 기반이라는 것뿐이다. 그가 평정심을 잃을 정도의 일이라면 그녀에게도 중요했다.

오빠.

“나 오늘부터 피임 안 할래.”

내가 있으니 불안해하지 마.

마음속으로 속삭이는 은혜의 귀에 정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강력하게 뛰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그대로 전달되어 왔다.

“나 아이 낳고 싶어. 아니, 낳을래.”

이제 겨우 스물넷. 아직 세상에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은 어린 나이였다. 그녀를 결혼으로 붙잡아 두는 것도 모자라 발목에 또 다른 족쇄를 채우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은혜가 눈물방울을 눈가에 달고 옅게 웃었다.

“한 세 명 낳을까? 우리 오빠 능력자니까.”

만일 3년 전, 은혜가 딱 자신 같은 남자를 만나서 이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면, 정우는 맹세컨대 상대를 목 졸라 죽일 수도 있었다. 몇 번이고 같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줄 수 있니.”

하지만 지금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답은 이따위 말뿐이었다. 남이 지껄였다면 절대 용서할 수 없을 말. 어린 여자 인생을 저당 잡고 통째로 흔들려는 비열한 수작질.

“나한테…. 다 줄 수 있니, 은혜야.”

은혜가 졸린지 하품을 참아 내면서 그러엄, 하고 말을 늘였다.

“정말 착하다. 우리 은혜.”

“나는 오빠한테만 착한 건데.”

그의 품 안에 안긴 채, 여전히 연결된 아랫도리가 불편한지 꼬물거리면서도 잠에 빠져드는 은혜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역시 그는 아무것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은혜도, 은혜가 누려 마땅한 밝은 인생도.

그를 위해서라면 끝까지 모든 걸 숨기고 완벽하게 일을 진행해야 했다. 정우는 점점 깊어지는 숨소리를 들으며 지금쯤 도망쳐 은신하고 있을 은혜의 부친을 생각했다. 그리고, 윤 회장이 이 일을 알게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생각했다.

길어야 사흘. 조금 더 버티면 일주일일까.

회장이 여태껏 저지른 범죄의 증거는 3년 동안 충분히 모았다. 기르던 개에게 손을 물리면 목을 비틀어 버린다는 그였지만, 정우에게는 해당이 없는 일이었다.

그가 목줄을 쥐여 준 건, 그의 품에 있는 한 사람이 유일했으니까. 그는 처음부터 그 누구에게도 속한 적이 없었다.

창밖에 비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정우는 상체를 일으킨 후 욕실로 향했다. 따스한 물수건으로 그의 흔적이 온몸에 남아 있는 나신을 부드럽게 닦아주자, 잠결에도 은혜가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그 밤, 정우는 흐릿한 상처가 남아 있는 그녀의 이마에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이로써 완전하게 그녀를 책임질 수 있게 되었다. 날개를 꺾어 버린 것에 대한 속죄는 평생 그녀의 곁에서 하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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