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8월. 무더운 여름이었다. 좁은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선풍기에 얼굴을 댄 채 은혜가 아아, 하고 목소리를 냈다. 샤워를 마친 정우가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 한 개를 꺼내 들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어! 오빠. 땡큐.”
빙빙 꽈배기 모양으로 꼬인 하드를 입에 쏙 집어넣어 빨며 은혜가 눈을 감은 채 히죽 웃었다. 이제 스무 살.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하드 하나에 어린아이처럼 행복해하는 걸 보면 정우는 가슴 한구석이 일렁거렸다.
“오빤 왜 안 먹어?”
“그게 마지막이야.”
은혜가 그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 자신의 손에 들린 하드를 불쑥 내밀었다.
“한 입 줄게. 기분이야.”
“그냥 너 먹어.”
은혜가 스읍, 하고 잇새로 바람을 들이마셨다. 정우는 냉수로 샤워한 몸이 조금도 식지 않는 걸 느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과 치아, 혀에 닿는 감각이 달콤해 혀뿌리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어, 어? 사기꾼! 이게 한 입이야! 반을 다 가져가면 어떡해!”
은혜가 그의 벗은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고 새빨갛게 물든 입술로 난리를 쳤다. 정우는 입 안에 가득 퍼지는 단맛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억울하면 도로 줄까.”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은혜의 얼굴이 갑자기 달아올랐다. 약이 더욱 바짝 오른 모양이었다. 삐이. 선풍기 바람을 강풍으로 틀고 은혜가 다시 아아, 하는 짓을 반복했다. 커튼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옆모습을 비추었다. 달아오른 얼굴, 땀에 조금 달라붙은 머리카락, 붉어진 입술에서 정우는 여름이 깊어짐을 느꼈다.
“은혜야.”
“왜요 사기꾼님아.”
“넌 왜 이름까지 은혜니.”
은혜가 마치 눈이 시린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슥 고개를 돌렸다. 그녀 딴에는 무섭게 보이려고 어필을 하는 것 같은데 정우의 눈에는 마냥 사랑스럽다.
“촌스럽다는 뜻인가요.”
“아니야.”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우는 그저 웃음만 나왔다. 그 뒤에 은혜에게서 이어질 말은 상상하지 못했다.
“친아빠가 내 이름 지었대. 나중에 커서 은혜 갚으라고.”
흐리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조금, 씁쓸하게 보였다.
“근데 은혜원에 가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인생은 멀리서 보면 코미디라더니 딱 그거야. 아님, 진짜 선견지명이었나?”
어깨를 으쓱하는 그녀를 보며 정우는 말없이 입 안의 살을 지그시 씹었다. 그런 대답이 나올지 알았다면 정우는 절대, 그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선풍기로 얼굴을 돌린 은혜의 곁에서 정우가 그녀를 불렀다.
“은혜야.”
“네에. 은혜 갚는 까치 여기 있습니다.”
마른침을 삼킨 후, 정우가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을 부르면 입 안이 간지러워.”
“…응?”
은혜는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정우는 혀로 제 입술을 한 번 쓸었다.
“부르는 느낌이 귀여워. 내 감상은 그것뿐이었어. 넌 얼굴도 심장 터지게 예쁘게 생겼는데 이름까지 귀여우면 어떡하냐고.”
깜빡. 깜빡. 기다란 속눈썹이 느리게 움직였다. 평소에는 뭐라고 꼭 한마디씩 받아치는 그녀는 그날따라 그를 빤히 응시하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빠, 내 이름 좋아해?”
마침내 은혜가 입을 뗐다. 정우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응.”
“그럼 나도 좋다. 내 이름.”
후후 웃는 그녀의 동그란 이마 위에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날렸다. 바깥에서 매미가 쌔에, 하고 울었다.
여름이었고, 몹시도 무더운 날이었다.
***
은혜는 기억이 나지 않는 간질간질한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깼다. 눈을 떴는데도 눈앞이 깜깜했다.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는 건 정우였다. 그녀가 오전에 뿌려 준 향수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걸 느끼며 은혜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오빠…? 언제 왔어?”
“방금.”
정우가 그녀의 목덜미에 뜨끈한 숨결을 내뿜으며 속삭였다. 비몽사몽인 상황에서 은혜가 확인할 수 있는 건 한 가지였다. 잠옷은 입고 있지만 팬티는 벗겨졌을 거라는 것.
그녀의 예상이 맞았음을 확인시키듯 정우의 것이 내벽을 완전하게 벌리며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은혜가 약하게 신음하며 시트를 붙들었다.
“흐응…!”
또 하나가 확실해졌다. 정우는 또 곤히 자는 그녀의 팬티를 벗기고 맘대로 애무해 몸을 연 게 틀림없었다. 삽입하자마자 밀려오는 절정감을 보면 확실했다. 묘하게 달콤했던 꿈의 원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오빠….”
고개를 돌려 그를 보려 했지만 눈앞이 여전히 깜깜했다. 은혜는 그제야 자신의 눈을 무언가가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빠가 이랬어? 이거 뭐야…. 답답해….”
은혜가 눈가리개를 벗으려 손으로 더듬자 정우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리며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이렇게 하고 싶어.”
“왜?”
“…오빠 얼굴이 엉망이라서.”
“말도 안 돼, 흣…!”
정우는 은혜가 스스로 가슴을 붙잡게 만든 후,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그 위를 겹쳐 눌렀다. 정우가 손을 주무르자 은혜의 가슴이 부드럽게 뭉개지며 아찔한 쾌감을 선사했다. 스스로 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정우가 만지는 것 같기도 한, 야릇한 느낌.
“아, 오빠… 진짜… 하아….”
은혜는 포기하고 그의 손길에 몸을 내맡겼다. 정우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가슴이 흔들리며 유두가 빳빳하게 솟았다. 잠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다.
“잘 땐 안 괴롭히기로 했었잖아.”
“…미안하다. 은혜야.”
투정 부리듯 내뱉자 정우가 꽉 낮아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사과했다. 눈가리개로 가려진 은혜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졌다.
평소에 그녀가 이런 말을 하면 ‘나는 동의한 적 없다’고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는 정우였다. 정우가 그들 사이의 벽을 완전히 무너뜨린 3년 전 그날 이후, 은혜는 그가 지금껏 어떻게 욕구를 참고 견뎌 왔는지 매번 놀랄 지경이었다.
지금껏 그들이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을까. 다이어리에 비밀스레 스티커를 붙이고 혼자 키득거렸던 것도 사귀기 시작한 처음 얼마간뿐, 나중에는 횟수를 세는 것도 포기했다.
정우는 그녀를 안는 데 있어서는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폭풍 같은 정사가 끝난 후, 그의 것을 안에 품은 채로 끌어안겨 까무룩 잠에 빠지는 것은 거의 매일이었다.
정우는 그녀가 오줌이 마렵다고 하면 화장실까지 직접 안아서 데려다준 뒤, 볼일이 끝난 후 침대로 다시 돌아와 성기를 넣고 그녀를 재웠다. 넣고 자는 건 이상하다고, 괴롭히는 것 같다고 말해 보았지만 정우는 자신의 의식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그녀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다른 연인들도 아마 다 이렇게 할 거라는 마지막 덧붙임에 은혜는 뭐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딱 다물었다. 그녀는 정우에게 완벽한 연인이고 싶었다.
그 때문에 눈을 떠 보면 이미 그와 섹스를 하고 있는 일도 많았다. 마치 오늘처럼. 버릇 같은 투정에 미안하다고 순순히 사과하는 그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했다.
“오빠….”
아연한 말투로 고개를 돌리는 은혜의 입술이 그에게 예고 없이 먹혔다. 불을 끈 데다 암막 커튼까지 쳐진 방에서 눈가리개까지 하고 있으니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우가 그녀의 입 안을 진하게 빨며 피스톤 운동을 반복했다. 이미 젖은 그녀의 내벽이 저절로 욱신거리며 그의 성기를 빠듯하게 조이자 정우가 입술을 뗐다.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이 음핵을 헤집으며 돌리자 은혜가 새되게 신음했다.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쾌감에 은혜의 몸이 녹아내리는 동시에 달아올랐다. 정우의 뜨끈한 숨결을 받아 마시는 은혜의 얼굴이 붉어지며 흐트러졌다.
“오빠, 오늘 이상… 이상해….”
“뭐가…?”
어둠 속에서 오늘따라 특별히 낮은 정우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내벽에서 찌걱거리며 나는 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시야가 차단되어서 그런지 다른 감각들이 더욱 발달하는 것 같았다. 쉬어 갈라진 그의 음성에서 거칠어지는 숨결.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욕망까지 들리는 듯하다.
“이거… 눈 가린 거 싫어….”
은혜는 지금 모로 누운 채, 한쪽 다리를 그의 무릎에 걸리게 들어 올린 자세로 섹스하고 있었다. 침대 옆에는 커다란 붙박이 옷장에 달린 거울이 있었다. 이런 자세로 낮에 섹스하면 백 퍼센트, 그녀의 내벽을 비집는 정우의 붉은 성기가 번들거리는 것까지 보일 게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은 밤이고, 눈가리개를 통해 들어오는 불빛도 없었다.
“얼굴… 보고… 할래, 오빠.”
무엇보다 은혜는 항상 그리운 정우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눈가리개를 더듬는 손이 정우에게 또 한 번 저지당했다.
“오빠 만져 줘.”
정우가 키스로 입을 막으며 은혜의 손을 아래로 내려 이어진 부분을 쥐게 했다. 혀 놀림이 갈급했다. 그녀에게서 나온 애액으로 잔뜩 젖어 미끄러운 성기의 움직임 역시 그러했다. 손으로 쥐고 있어 뿌리 끝까지 삽입된 것도 아니었는데 이미 깊었다.
“…내일 우리, 흣, 일찍 출발하기로 했잖아….”
타액으로 젖고 정우가 물고 빨아 온통 붉어진 입술로 은혜가 가쁜 숨을 내뱉었다. 정우가 미안, 하고 그녀를 달래듯 내뱉은 후 허리를 다시 강하게 디밀었다. 손안에서 맥동하는 성기가 그녀의 손을 마구 짜부라트리듯 짓눌렀다.
“오빠, 아앙, 오빠…. 흣…!”
견딜 수가 없어서 손을 떼는 순간, 성기가 그녀의 녹진한 내벽을 쫙 벌리며 뿌리 끝까지 박혀 들었다.
“아…!”
정우는 셀 수 없을 만큼 그의 연인을 많이 안았지만 충분한 애무를 하지 않으면 은혜의 작은 몸은 아직도 그를 받아들이는 걸 벅차했다. 들어가자마자 미친 듯이 조여 대는 빠듯한 내벽을 느끼며 정우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박은 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은혜야.”
그는 한계까지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있던 무릎을 내렸다. 그러고는 뒤에서 물결치듯 그녀를 박아 대기 시작했다. 단단한 매트리스가 소리 없이 출렁였다. 은혜의 팔뚝만 한 그의 성기가 내벽을 유연하고 빠르게 긁고 빠졌다. 길을 내듯 착실히 그녀의 몸을 여는 과정이었다. 깊은 곳에서 점성을 띤 애액이 쫘악 뿜어져 나오는 시간이기도 했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안 놓을 거야.”
은혜가 쌕쌕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젖가슴을 움켜쥔 그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엉망진창으로 젖어 들어가는 아래에서 쑥쑥 비집는 쾌감을 견디지 못해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정우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이상해…. 하아… 회사에서…. 흣…. 무슨 일, 있었어…?”
그는 오늘따라 목이 말라 죽기 직전의 사람처럼 급하게 굴고 있었다.
“아니.”
짤막하게 대답하는 정우의 목소리 끝이 흔들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은혜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가리개를 손으로 확 내렸다.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순간 정우가 삽입한 채로 그녀의 몸을 손쉽게 휙 뒤집으며 무릎을 꿇었다. 잠옷으로 챙겨 입은 하얀색 순면 원피스가 허리 위로 올라가며 은혜의 뽀얀 엉덩이를 훤하게 드러냈다.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은 풀어져 내렸지만 은혜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오빠…. 하…! 으응…!”
정우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린 채, 뒤에서 밀어 치기 시작한 탓이었다. 그의 다른 한 손은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아 지탱하는 동시에 어디도 가지 못하게 구속하고 있었으므로 은혜는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그저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너도 그럴 거지, 은혜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 있을 거지…?”
뒤에서 몰아치는 정우의 몸짓이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도 가장 느끼는 부분만을 집요하게 박아 오는 그의 다정함은 잔인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그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정우의 의도는 명백했다.
“대답해.”
정우는 그녀에게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은혜는 그의 움직임에서 간절함을 읽었다.
“응! 응! 으응! 아! 흣! 오… 빠… 아흑…!”
감당할 수 없는 쾌감을 퍼부으며 몰아붙이는 그가 지금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몸으로 느껴졌다.
“하…. 오…빠. 정우 오빠….”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핥으며 은혜가 신음과 함께 속삭임을 내뱉었다. 아랫도리는 뜨거웠고 애액은 사방으로 튀었다. 정우의 움직임은 점점 폭주하는 이처럼 빨라지고 있었다.
“…괜찮아.”
그가 염려하고 있는 게 무엇이든 지금 이 순간은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괜찮아, 오빠.”
“하아. 흣…. 아…! 은혜야….”
“내가… 내가 있잖아… 응?”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뜨겁고 커다란 손이 마침내 떨어졌지만, 쾌감에 함락된 은혜의 눈동자는 어둠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은혜를 볼 수 있는 건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을 어둠에 감춘 정우뿐이었다.
“사랑한다고 했지.”
“응. 사랑해요, 오빠.”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는 대답. 그래도 부족하다.
“날 얼마나 사랑하니, 은혜야.”
그의 작은 연인이 그에게 할딱이며 속삭였다.
“내 전부를 다 주고 싶을 만큼.”
짐승같이 신음하며 욕설을 삼킨 정우가 그녀의 입을 다시금 격렬히 장악했다. 내벽에 몇 번이나 길게 파정하는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 떨렸다. 은혜는 자신의 안에서 한참 동안 몸을 물리지 않는 그에게 오래도록 가만히 안겨 있었다.
솨아.
미세한 물줄기가 욕실에 마주 선 두 사람의 몸에 떨어졌다.
“최정우 이사님, 진짜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습니까?”
은혜가 팔을 뻗어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물었다. 마침내 빛 아래에서 보게 된 정우의 얼굴은 엉망이기는커녕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완벽했다. 정우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쪽, 하고 입을 맞추며 희미하게 웃었다. 숨 막히는 미소에 은혜의 가슴이 새삼 두근댔다.
“아무 일도 없진 않고.”
“무슨 일인데…?”
정우는 그저 그녀에게 눈을 고정하고 있을 뿐, 쉽사리 입을 떼지 않았다.
“나한테 말해. 얼른. 응?”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처럼 그녀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정우가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을 응시하며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은혜는 그가 반듯한 입술을 슬쩍 혀로 축이는 모습을 보며 숨을 죽였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은혜를 번쩍 안아 들며 정우가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네 생일이잖아. 이제 열두 시 지났으니까.”
“으응? 진짜 그게 다야?”
“너 말고 나한테 중요한 게 뭐가 있을 것 같은데.”
흐음, 하며 입술에 힘을 주는 은혜의 눈에는 아직도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난 네가 한 살 한 살 먹어갈 때마다 흥분해. 몰랐니?”
“치.”
은혜가 눈높이가 같아진 그의 목에 양팔을 감으며 마침내 웃었다. 정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이 풀린 그녀가 예쁜 입술로 조잘거리는 모습을 응시했다.
“아… 난 또. 갑자기 막 정신없이 몰아쳐서 깜짝 놀랐잖아.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내가 평소엔 너한테 여유를 많이 줬었나?”
“응?”
“섹스할 때 하품 나오게 만들었다면 반성 좀 하려고.”
“전혀 아니거든요!”
은혜가 그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툭, 치며 예쁘게 눈을 흘겼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는 모습을 보며 정우는 그의 내부에서 다시금 위험한 소유욕이 머리를 치켜드는 걸 느꼈다. 간신히 잡아 누른 후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
“은혜야.”
“응?”
정우가 욕실 벽에 그녀를 지그시 기대게 한 후, 젖은 머리칼 사이로 그녀를 보았다. 숨 막히는 각도. 완벽한 이목구비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넌 날 위해서 태어난 거 맞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정우가 작게 속삭였다. 그가 아는 은혜는 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은 그녀의 입을 통해 확인받고 싶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그녀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은혜가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말간 눈으로 중얼댔다.
“…오빠 오늘 정말 이상하네.”
난 두려워.
“대답해 줄래?”
날… 미치지 않게 네가 붙잡아 줄래.
“응. 맞아. 나는, 최정우 애인 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야.”
은혜가 에헴 하고 목을 가다듬은 후 그를 보며 후후 웃었다. 따끈한 그의 몸을 손바닥으로 쓸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래서 최정우랑, 이렇게, 저렇게, 야한 짓도 잔뜩 하려고 태어난… 으응…! 아, 오빠 흣… 미워…!”
정우가 그녀의 입술을 머금으며 잘 익은 복숭아를 쪼개듯 그녀의 엉덩이를 갈랐다. 그가 조금 전 직접 손으로 씻어 준 음부를 벌린 후 다시 벅차게 비집고 들어오는 순간, 은혜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날이 밝으면 정우와 함께 바다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는데 이미 바깥은 새벽이 밝아 오는 것 같았다.
정우가 따끈해진 그녀의 목과 쇄골, 젖가슴을 흡착하듯 빨며 허리를 움직였다. 늦잠을 자면 안 된다는 걱정과 염려는 산발적으로 퍼지는 오르가슴에 이내 희미하게 날아갔다.
단단하고 뜨거운 오빠의 몸에 안겨 마음껏 흔들리며, 은혜는 문득 정우를 보았다. 쾌감에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마치 괴로운 것처럼 보이는 건, 그녀의 착각일 뿐일까.
***
은혜는 오래전 그에게 말했었다. 착한 그를 괴롭히는 게 귀신이건 악마건 모두 무찔러 줄 거라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눈을 가려 주었다. 제가 보듬은 게 얼마만큼 시커먼 악을 저지를 수 있는 남자인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죽이기 전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칼날과 벽 사이에 그어져 잘린 짤막한 머리카락을 얼굴에 붙인 채, 남자가 잿빛 얼굴로 몸을 덜덜 떨었다.
“자식이 몇입니까.”
공식적인 그의 자식은 딸 하나 아들 하나였다. 그의 가족 관계에 당당히 오른 자식들. 어릴 적부터 그의 재산을 하나씩 물려받아 이미 삶에 부족함이 없는 이들. 은혜가 겪어야 했던 그 모든 눈물겨운 시간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이들일 것이다.
“세… 셋요. 세 명이에요.”
남자의 생존 본능은 정우의 예상보다 더 강렬했다. 어쩌면 정우의 입에서 은혜의 이름을 듣는 순간 직감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책임지지 못할 씨를 맘대로 싸지르고 방치한 자신의 죗값이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을.
정우는 깨진 유리 조각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아이를 응시한 후, 시선을 다시 남자에게 박았다.
“선택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에 따르겠습니까?”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주변은 적막하고 고요했다. 나체로 도망친 여자는 감히 경찰을 부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달아난 듯했다.
“뭐든 다 하겠습니다… 뭐든…. 다…!”
죽음을 목도했을 때 사람에게 느껴지는 감각은 거의 동일하다. 생에 대한 갈망. 자살을 선택한 사람이 죽기 직전에 선택을 후회하는 일이 닥쳐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살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야 오죽할까. 정우는 그의 눈앞에서 잿빛이 된 얼굴로 떨고 있는 은혜의 친부를 똑바로 응시했다.
“거절해도 괜찮습니다.”
거절하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사람의 선택은 한 가지뿐이었다. 정우의 앞에서 뭐든 다 하겠다며 머리를 바짝 조아린 초라한 남자의 옆에서, 은혜는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표정으로 천사같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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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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