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4)

09

정우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역 회사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늘 바쁘게 움직였다. 휴일이 없어 어머니가 서운해할 정도로 회사 일에 매진했었지만 결국 사업에 실패했다.

여기까지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후의 대처는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방법이었다.

가족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장.

어떻게 그런 짓이 가능했을까. 어릴 적 정우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의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한 여자를 사랑하고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으면서, 끝까지 책임을 지기는커녕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비겁한 방법으로 가족을 저버렸다.

사랑하는 이를 죽음에까지 몰아붙였던 그를 이해하는 건 정우에게 평생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로서도 한 남자로서도, 그는 최악의 인물이었다.

탁.

차에서 내린 정우는 습관적으로 손의 냄새를 맡았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자조했다. 매일 집으로 돌아가기 전, 미처 지워내지 못한 폭력의 잔재가 남아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버릇은 이제 완전히 몸에 붙었다. 온갖 더러운 일을 다 하고 살아도 연인의 앞에서 악취를 풍기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에게 아버지의 전철을 밟는 것과 죽는 것, 둘 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정우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말할 것이다. 정우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실패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은혜.

가진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에게 선뜻 다가와 연인이 되어 준 그녀를 위해서라면 정우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었다. 그의 연인이 반짝거리는 세계 안에서 자신에게 웃어 주기만 한다면, 지옥으로 가는 열차 맨 앞자리에 몸을 실어도 상관없었다. 다만, 탑승은 그녀와 함께 하는 꿈같은 이 삶을 충분히 누린 후가 될 것이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시죠.”

어둑한 공간을 가로지르는 정우의 발걸음에는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었다. 연인을 위해 그가 택한 길이었다.

잘 조경된 정원수가 우거진 곳에서 고운 한복을 입은 여인이 그를 실내로 안내했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실내에 방이 몇 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돌로 조각된 조형물에서 거꾸로 흐르는 분수가 흘러나와 인공적인 푸른 이끼를 적셨다.

문이 열리자 처음 만났을 때와 머리카락 한 올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의 윤 회장이 그를 보며 마시던 술잔을 들어 올렸다.

“늙으니까 참을성이 없어져. 먼저 시작하고 있었어.”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있나. 최 이사 몹시 바쁜 건 내가 아주 잘 아는데. 이리 와 앉지.”

윤 회장이 뼈 있는 말을 던지며 그에게 손짓을 했다. 정우는 그제야 안으로 들어와 그를 마주하고 앉았다. 자그마한 잔에 금가루가 뿌려진 술을 채우며 윤 회장이 입을 뗐다.

“요즘 어때.”

그가 준 술잔을 한 번에 쭉 비운 후 내려놓은 정우가 회장의 잔을 다시 채웠다.

“회장님께서 신경 쓰실 일 없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겸손은 가끔 건방처럼 들리는 때가 있지.”

정우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지난 3년 동안 최 이사가 깔끔하게 처리한 일들만 몇 개인데. 그 덕분에 내 사업도 아주 날개 달린 듯 훨훨 날고 말이야.”

올해 예순인 회장이 건드리는 사업의 주축은 건설 쪽이었다. 90년대는 나이트클럽과 유흥업소를 관리하다 그 이후에는 개발이 가속화되는 지역에서 건설을 도맡았다. 로비와 협박이 번갈아 가며 이루어지는 물밑 거래에는 돈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사채는 훌륭한 자금원이었다.

3년 전 처음 일을 시작했던 정우가 현재 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는 사업이기도 했다. 항구 컨테이너 안에서 벌어졌던 내기 권투에서 정우를 불러내 돈 봉투를 건넸던 회장의 똘마니는, 정우의 ‘깔끔한’ 일 처리에 뒷전으로 밀려났고 결국 다리 하나가 분질러진 채 낙향했다.

물론, 그를 깔끔하게 처리한 것도 정우였다.

“과찬이십니다.”

정우는 회장의 말을 짧게 받았다. 그를 독대하는 식사 자리는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껄끄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반기는 쪽도 아니었다.

“최근에 이사했다고 들었는데. 어때. 괜찮은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확인받을 때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다.

“덕분에 생활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항상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신경은 무슨…. 자네처럼 일을 알아서 해 주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들지. 생선회는 오래 두면 못써.”

정우는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생선 살점을 천천히 씹으며 회장의 용건을 짐작했다.

“자네가 처음 나한테 연락을 했을 때가 생각나. 그때 최 이사가 뭐라 그랬는지 기억나?”

“원하는 건 전부 다 손에 넣을 수 있는 삶. 저는 그런 게 필요합니다. 주실 수 있습니까?”

“철이 많이 없었습니다.”

회장이 도저히 제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자네를 보고 누가 그땔 생각하겠나. 돈 이백에 내기 권투장 위에 오르던 풋내기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냔 말이야.”

외제 차. 우아한 스타일로 맞춤 재단된 양복. 과시적인 소품이지만 때로는 사람의 콧등을 부수는 무기로도 쓰이는 고급 손목시계. 그리고, 보안이 철저한 고급 빌라.

이 모든 것들이 정우가 3년 만에 이룩해 낸 것들이었다. 회장은 보상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정우에게는 그러했다. 그는 최정우라는 인간의 능력치를 최대로 발휘해 낼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이였다.

“여전히 많이 배워야 할 풋내기일 뿐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정우는 웃고 있는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시선을 마주했다.

“예. 진심입니다.”

회장이 지금부터 그에게 시킬 일이 무엇이든 쉬운 일이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회장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

은혜는 푹신한 소파에 모로 누운 채 휴대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시간은 벌써 밤 열두 시를 넘기고 있었지만 정우는 아직 귀가 전이었다. 전화를 해 보았지만 수신 거부를 당했고, 문자는 늦으니까 먼저 자고 있으라는 짤막한 답변이 다였다. 그마저도 두 시간 전이 마지막이었다.

“너무해, 진짜.”

벌떡 일어난 은혜가 슬리퍼를 끌고 너른 거실을 가로지르며 작게 중얼거렸다. 반들거리는 냉장고 안에서 크랜베리 주스를 꺼낸 후 얼음을 꽉 채워 마셨다. 새콤한 맛에 혀뿌리에 타액이 샘솟았다. 정우가 맛있다고 말하는 그 맛이었다. 물론 그녀의 혀를 진득하게 빨며 내뱉었던 감상이었지만 말이다.

반짝거리는 대리석 식탁에 컵이 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한 게 틀림없었다.

오빠 내일 무슨 날인지 모르는 거 아니지

생일은 원래 열두 시 땡, 할 때부터 축하를 하는 게 정석이었다. 계획에 따르면 오늘 그녀는 정우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생일 당일인 내일 아침에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우는 갑자기 작은아버지와 약속이 생겨 그녀와의 저녁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내가 내 생일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거든. 사장님이면 다냐고, 오빠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니냐고.

화가 난 곰이 식탁을 절반으로 쪼개는 이모티콘을 붙여 답 없는 그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절반은 진심이 섞인 말이었다.

3년 전, 정우는 다시 만난 작은아버지의 사업을 도와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사업은 승승장구였다. 정우가 일을 시작한 후, 그들은 이사를 세 번이나 했고 그럴 때마다 집은 점점 넓어졌다.

은혜는 더 이상 장학금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되었고, 전세금을 올린다는 집주인 아주머니의 전화에 벌벌 떨어야 할 일도 생기지 않았다.

달라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우는 그녀에게 이제껏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많은 선물을 주었다. 가끔 그녀가 이건 조금 너무 심한 것 같다는 생각에 부담감을 표시할 때면, 무섭도록 싸늘한 얼굴이 되어 명품을 쓰레기통에 휙 던져 넣었다.

“나는 이런 거보다 오빠랑 그냥 같이 있는 게 훨씬 좋단 말이야. 응?”

“너는 비싸고 화려한 것들이 잘 어울려.”

그녀가 가진 것 중에 가장 화려하고 좋은 게 최정우라는 사실을, 그는 정말 모르는 걸까.

“꼭 그 일을 해야 되겠니? 차라리 공부를 더 해.”

취직을 하겠다는 그녀를 설득해 대학원에 집어넣은 것도 그였다. 공부는 싫어하지 않았지만 요즘 들어서는 꼭 그가 그녀를 바깥에 내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어이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여튼 과보호.”

물론, 그녀가 이제껏 생각하기도 싫은 위험한 일을 몇 차례 겪어 온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애인이라면서.”

엄연히 그의 애인인데, 정우는 그녀를 아직도 사귀기 전과 똑같이 대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역시 침대 위에서일까.

일이 많아 늦게 들어오는 날일수록 정우는 그녀를 뜨겁게 안았다. 그녀가 선물한 머스크 향수 냄새에 흐릿하게 섞여 있는 담배 냄새와 술 냄새가 싫었지만, 회사 사장님들의 회식 자리에 빠지라고 투정 부릴 정도로 어린애는 아니었다.

괜히 심술부린 거야. 미안해 오빠.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조심히 들어와.

키패드를 두드려 문자를 눌러쓰고, 혹시나 삐친 기운이 느껴지지나 않을까, 확인한 후 하트 모양이 즐비한 귀여운 이모티콘들을 연달아 전송했다.

공부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정우가 올 때까지 기다리려면 다른 수가 없었다. 은혜는 두꺼운 교재를 들고 거실로 돌아온 후, 졸린 눈을 비비고 집중해 읽기 시작했다.

***

새벽 세 시.

정우는 소파 앞 키 작은 테이블에 엎드려 잠든 은혜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가 만들어 놓은 그들의 공간 안에서 잠든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못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한 채 새근새근 깊은 숨소리까지 내고 있다.

푹신한 러그가 그의 발자국 소리를 삼켰다. 곁에 다가갔지만 은혜는 여전히 일어날 줄을 몰랐다.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살짝 벌어진 예쁜 입술이 움찔거렸다. 정우는 무방비한 상태의 그녀를 거칠게 안아 버리고 싶은 위험한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최 이사 같은 고급 인력에게 언제까지 떼인 돈 받는 허드렛일을 시킬 순 없지.”

지난밤, 저녁 식사 자리에서 회장은 그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대표란 놈이 어리숙하지 않고 영 쥐새끼 같은 놈이라…. 임원진들한테 설치고 다니면 내 계획이 완전히 망가질 것 같아서 말이야.”

최근, 건설업의 불황이 이어지며 회장이 새로이 손대고 있는 건 기업 사냥이었다. 탄탄한 기업을 사채로 사들여 임원진과 실무자들을 이용해 주가를 부양한 뒤, 팔아 치워 깡통 회사로 만드는 수법이었는데 사진 속 인물 역시 그의 타깃이었다.

“죽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가끔 느끼지만 우리 최 이사,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그를 보며 회장은 껄껄 웃었지만 살기 넘치는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꼴에 승마가 취미라는데, 달에 한 번씩 말 탄다는 핑계로 근교로 떠나 일박을 해. 만나는 여자가 있는지 계집들 끼고 노는지는 알 바 아니지만, 개죽음당하기엔 딱 좋은 환경이지. 안 그래?”

“그게 오늘입니까?”

“그거야, 자네 손에 달린 거 아니겠나.”

정우는 식사 자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옷을 갈아입었다. 은혜에게서 오는 연락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조폭들의 칼부림에 낀 적은 있었으나 일반인을 죽인 적은 없었다.

다른 이를 보내는 대신 정우를 직접 보내는 회장의 속내는 두 가지로 정리되었다. 첫 번째는 시험, 두 번째 역시 의미가 다른 종류의 시험이다. 그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충성도를 시험하는 동시에 그의 일 처리 솜씨를 시험해 보겠다는 뜻과 같았다.

회장은 그간 그가 이룩한 것들이 우연으로 이뤄진 것만은 아님을 증명하듯 의심이 깊었다. 확실한 건, 만일 이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벌어질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다는 것이다.

가짜 번호판을 붙인 트럭의 핸들을 잡은 그의 손에 땀이 들어찼다. 도심을 벗어나자 가로등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캄캄한 비포장도로의 끝, 인적이 드문 길에 차를 세운 정우는 복잡한 머릿속에 가닥을 잡아 갔다.

3년 전, 그가 아무 생각도 없이 어둠 속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준비한 탈출구는 사용하는 순간 또 다른 감옥에 그를 가둘 수도 있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오빠 내일 무슨 날인지 모르는 거 아니지

그가 살아가는 이유가 그의 어둠에 불빛을 깜빡, 깜빡, 비췄다.

내가 내 생일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거든. 사장님이면 다냐고, 오빠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니냐고.

깜깜한 밤바다에 불을 밝혀 주는 등대처럼, 그에게 네가 와야 할 곳은 이곳이라고 말했다.

괜히 심술부린 거야. 미안해 오빠.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조심히 들어와.

파이팅 이모티콘과 함께 어지러울 정도의 하트 무늬가 휴대폰 액정을 꽉 채웠다.

정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며칠 전, 타이를 골라 주며 그녀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은혜는 그가 너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오빠가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너무 좋다고,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지금이라고 말했었다.

정우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사진을 클릭해 띄웠다. 함께 간 놀이동산에서 머리띠를 한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은혜의 얼굴이었다.

“오빠. 오늘 우리 사귄 지 백일이다? 그건 몰랐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연인이 된 후, 그녀가 하루하루 날짜를 세는 것도. 휴대폰에다 그와 하고 싶은 데이트를 번호순으로 적어 놓은 것도.

“괜찮아. 오빠 요즘 한창 바쁘니까 봐준다. 난 너그러운 애인이거든.”

그날 팔짱을 끼면서 후후 웃던 그녀가 얼마나 예뻤더라. 참지 못하고 둘뿐인 관람차에서 결국 키스했을 때, 사과처럼 붉어지던 그녀의 뺨이 얼마나 부드러웠더라.

은혜의 웃는 얼굴을 보니 결심이 섰다. 그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세상의 도덕관념 따위 그의 손으로 직접 부숴 버린 지 오래였지만 은혜가 그걸 알아서는 안 된다. 마음 약하고 어린 그의 연인이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간신히 손에 넣은 이 평화를 놓아 버리기엔 아직, 그는 그녀를 충분히 가지지 못했다. 철컥. 작은 칼이 그의 손에서 시퍼런 빛을 내뿜었다.

***

서울 근교, 산 중턱에 마련된 2층 저택은 꽤 화려했으나 연식이 있어 보였다. 정리되지 않아 무성한 정원수는 일부러 안쪽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려는 수작일 것이다.

대문 앞에 설치된 CCTV는 불이 들어오지 않은 채였지만 정우는 모자를 푹 눌러써 얼굴을 가렸다. 저택을 빙 돌아 잠기지 않은 창문 하나를 발견하고 그 안으로 몸을 날렸다.

집 안의 인테리어는 밀회를 위한 별장이라고 하기엔 평범했다. 거실에 있는 커다란 피아노와 벽에 걸린 엄마와 아이의 사진은 일반 가정집을 떠올리게 했다. 눈속임이라면 나쁘지 않았지만 집 안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우는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2층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남녀의 정사 소리가 들려오는 중이었다. 젊은 여자는 기계적인 신음을 내뱉고 있었고 남자는 심장 마비라도 걸리기 직전의 사람처럼 억, 억, 소리를 냈다.

미리 확인한 남자의 인생사는 돈 많은 대다수의 이들이 그러하듯 법망을 교묘히 피한 악행의 연속이었다. 죽어도 상관없는 쓰레기란 뜻이다. 이제 와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건, 그의 마음속에 이미 사라진 양심 대신 자리하고 있는 한 줄기 빛, 은혜에게 구하는 최소한의 속죄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

찰칵.

정우는 손에 들린 나이프를 한 번 휘돌렸다. 오래된 목조 계단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음을 냈다. 정사에 열중한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테지만 설사 들린다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희미한 빛이 점점 더 밝아졌다.

“으억! 윽! 흑! 흐윽…!”

문이 열린 줄도 모르고 남자는 허리를 털고 있었다. 추하게 말라붙은 고환이 여체의 엉덩이 사이를 때려 대는 모습을 바라보며 정우가 발소리도 죽이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먼저 발견한 건 그의 몸에 깔려 기계적인 신음을 내뱉던 여자 쪽이었다.

“어… 어맛…! 누구… 누구세요!!!”

늙은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았다. 얼굴이 희게 질려 바들바들 떠는 여자에게 나가라고 명령했다. 찰나의 순간 얼어붙어 있던 여자가 옷도 걸치지 않은 나체로 뛰쳐나갔다. 경찰에 신고할 정도로 담력이 강하다면 앞으로 5분, 그렇지 않다고 해도 10분 안에는 처리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 이봐, 돈을 주겠네. 도, 돈을…!”

장갑 낀 손으로 서랍을 휙, 휙, 열어젖히는 정우를 보며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를 강도로 착각한 건 의도한 일이었다. 근교에서 밀회를 즐기던 기업체 사장은 가정집인 줄 알고 침입한 강도에 의해 살해당한다.

집 안을 기계적으로 뒤엎는 정우의 눈치를 보던 남자가 덜덜 떨며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복도 벽에 걸린 엽총을 향해 뛰어나가는 그를 뒤에서 발로 걷어찼다. 그 옆에 걸려 있던 유리 액자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깨졌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한 번에 끝내 드리겠습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남자에게 칼을 휘두르려던 순간 정우가 멈칫했다.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깨진 액자에 담긴 사진을 비추고 있었다.

“제발… 뭐든 다 할 테니 제발 목숨만은….”

정우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승마복을 입고 저처럼 작은 말의 고삐를 잡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아이는 그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은혜.”

정우가 마침내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벌거벗은 남자가 파들파들 떨다가 흠칫 놀라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인생이 정리된 파일에서 복잡한 여자 문제는 관심도 없어 건너뛰었었다.

“이 아이가 누굽니까.”

흔들리는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정우는 답을 읽었다. 두려움을 가득 담은 남자의 눈매에 흐릿한 잔상이 겹쳐지자 그의 인상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누군가 관자놀이에 잘 벼린 칼날을 밀어 넣는 것 같았다.

“…당신, 인간 맞아?”

친딸이 살던 옛집을 그대로 놔둔 채, 그곳에서 자신의 딸과 별반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여자를 불러 안는 남자가 은혜의 아비란 더러운 놈이었다.

은혜를 버리고, 그녀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상대.

정우는 이제껏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강렬한 살인 충동을 느꼈다.

눈앞의 남자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고 싶었다. 시체조차 남지 않게 샅샅이 태워 버리고 싶었다. 그의 칼이 허공에서 날카로운 빛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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