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그들이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의 일이다. 중고 냉장고와 세탁기를 날라 준 승준이 집들이를 핑계로 다짜고짜 저녁까지 눌러앉았다.
“너 안 가?”
“와. 엘리베이터도 없는 집 5층까지 짐꾼으로 개고생시켜 놓고 야멸차다, 아주. 밥이나 먹이고 보내는 게 예의 아니냐?”
허리가 나가기 일보 직전인 승준과는 달리 정우는 멀쩡했다.
“나가자 그럼. 사 줄 테니까.”
“시켜 먹자. 움직일 힘도 없어.”
“은혜 내일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라서 안 돼.”
“뭔 상관인데? 네가 대학 가냐?”
승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정신 사납게 하지 말라고.”
말로는 안 되겠다 싶어 그를 끌고 나가려는데 줄곧 닫혀 있던 은혜의 방 문이 빼꼼히 열렸다.
“오빠, 나 괜찮아. 짐 옮기는 거 도와줬는데 인사는 해야지.”
식탁 의자에 늘어져 있던 승준이 은혜를 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와아. 이게 누구야? 너 그때 링 위로 올라와서 나한테 주먹질했던 꼬맹이 맞냐? 대체 언제 이렇게 컸어?”
길에서 마주치면 못 알아볼 정도로 성장한 은혜를 보며 승준이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우가 그의 앞에 서서 시야를 가리며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은혜, 방 안에 들어가.”
이럴까 봐 나오지 말라고 했던 건데. 은혜는 그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 좁은 주방으로 나왔다. 총총 걸어와서 승준에게 한다는 말은 이거였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근데 오빠. 우리 오빠한테 이상한 권투 일 소개해 주지 마세요.”
“뭔 소리야.”
승준이 당황해 눈을 깜빡였지만 은혜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한 발 다가섰다. 사실 그녀는 이 말을 하기 위해 나온 거였다.
“오빠는 주먹질하는 거 되게 어울리는 얼굴이지만, 우리 오빤 아니거든요. 우리 오빤 체질적으로 사람 때리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진지한 은혜의 얼굴을 마주한 승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체육관 동기인 최정우가 사람을 얼마나 살벌하게 팰 줄 아는 놈인지, 링 위에 처음 올라와서 글러브를 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와 함께 사는 여동생은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이 없는 걸로 보였다.
“뭐? 푸하하. 정우야. 너 동생한테 사기 치고 사냐? 내가 알기로 네 체질은 여태껏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헛소리하지 마. 은혜 넌 얼른 들어가고.”
정우가 승준을 작게 노려본 후, 은혜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제 살벌했냐는 듯 축축하고 부드러운 시선을 보며 승준이 입을 헤 벌렸다. 은혜는 정우를 향해 목소리까지 높이고 있었다.
“우리 집인데 왜 내가 잘못한 것처럼 방 안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해?”
“내일 바쁜데 괜히 정신 사납잖아.”
“하나도 안 바빠. 신입생 환영회, 안 가도 돼.”
목석같은 정우가 슬쩍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승준에게는 그저 생소할 뿐이었다. 귀찮은 일이라면 질색하는 그가 짐을 옮기는 걸 거들어 준 이유는 최정우가 보물처럼 꽁꽁 싸매고 있는 보육원 출신 동생을 보고 싶다는 마음도 1퍼센트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어, 안주 왔다!”
승준이 주문한 중화요리가 좁은 식탁에 한가득 늘어섰다. 은혜는 우리 오빠가 이걸 다 시켰냐며 동그란 이마에 주름을 꽉 잡다가 승준이 계산을 했다는 말을 듣고는 입을 딱 다물었다.
“와, 째려보는 거 봐. 진짜 독하다 독해.”
“집안 살림은 제 담당이라 어쩔 수 없어요. 아, 고마워. 오빠.”
은혜가 나무젓가락을 갈라 내미는 오빠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콜라 마실래?”
“응. 이따가 내가 오빠 거 잘 비벼 줄게. 오빠도 내가 해 주는 거 좋아하잖아.”
정우를 향해 작게 속삭이는 은혜를 보며 승준이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대화의 양상이 조금 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벼? 뭘… 해 줘? 너희 뭐, 뭐, 해?”
은혜가 그릇에 씌워진 랩을 잡아 뜯으며 가지런한 눈썹을 찌푸렸다.
“짜장면 비빌 건데요.”
그녀는 사실 체육관 시절부터, 정우의 배에 주먹을 날렸던 승준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우리 오빠,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하는데 짜장면 비비는 것만 귀찮아해서 제가 해 줘야 되거든요. 오빠 건 직접 하세요.”
승준은 브이넥 니트를 입고 열심히 짜장면을 비비기 시작한 은혜를 보며 저도 모르게 입 안이 말라 침을 삼켰다. 어찌나 기운차게 정우의 것을 비비는지 팔을 움직일 때마다 가슴골이 이리저리 모이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그녀는 약간, 경계심이 너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좋게 말하면 순진하고 나쁘게 말하면 백치미…?
그러기엔 공부를 잘한다고 들었는데.
‘씨발. 나만 쓰레기인가?’
승준이 괜히 찔려서 정우를 힐끗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방금 전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던 불순한 상상을 모조리 꿰뚫고 있는 것 같은 눈이었다.
“이거.”
정우가 서랍에서 앞치마를 꺼내 은혜에게 내밀자 그녀가 무해한 표정으로 생긋 웃었다.
“아, 오빠. 고마워. 안 그래도 흘리기 일보 직전이었어.”
승준은 그제야 왜 최정우가 여동생을 무슨 엄마가 장롱에 패물 숨기듯 꼭꼭 숨겼는지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굴은 상당히 청순하게 생겼는데 몸은 또 그렇지가 않았다.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볼 땐 언제고, 정우의 앞에서 무장 해제된 얼굴로 웃는 은혜를 보니 목덜미가 근질거리고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멋쩍어진 승준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최정우 코딱지. 이제 아주 그냥 다 커 가지고 흠흠, 거리에서 보면 못 알아보겠네. 예전에는 비쩍 말라 가지고 눈만 땡그란 게 나중에 시집이나 갈 수 있을까, 했는데….”
“헛소리하지 말고 그냥 먹어라.”
정우가 그를 향해 날 선 눈동자를 빛내며 낮게 내뱉었다. 순간이지만 주먹이 날아오는 줄 알았다. 승준은 움찔했지만 정우의 곁에 앉은 은혜는 그의 살벌한 눈빛을 보지 못한 듯했다.
정우가 건네준 앞치마로 불순한 수컷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한 채, 짜장면을 우물우물 삼킨 은혜가 승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빠는 코딱지가 168센티예요? 코도 그렇게 안 높은데 되게 신기하네.”
승준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예전에 권투하다 주저앉은 거라고 변명하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그녀가 탕수육에 소스를 듬뿍 찍어 정우에게 들이밀었다.
“여기, 오빠.”
“응.”
손에 깁스라도 했는지 자연스레 음식을 받아먹는 정우의 얼굴은 설탕이 듬뿍 들어간 커피처럼 들척지근하기 짝이 없었다. 원래 여동생이 있으면 다 저런 건가? 형제라고는 고추에 털이 부숭부숭한 시커먼 남동생만 둘인 승준은 소맥을 직접 제조하며 연신 들이켰다.
“야…. 미성년자 때 카네이션 받은 사람은 아마 최정우밖에 없을걸?”
술이 웬만큼 들어가자 입이 풀린 승준이 옛일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운동복에 색종이 꽃을 달고 왔을 때 얼마나 웃겼는지 아냐고 승준이 낄낄거렸다.
“와… 그 꼬맹이가 이제 다 컸다니. 대학생 됐는데 이제 남친도 슬슬 사귀겠네? 아니다, 요즘은 고딩들도 다들 연애하지?”
“그런 거 필요 없는데요.”
은혜가 무심하게 내뱉자 승준이 맥주잔을 비우며 손을 내저었다.
“네가 제대로 된 놈을 못 만나 봐서 그렇지. 내 바로 아래 남동생이 해병인데 이제 곧 제대거든. 어때. 소개팅 한번 주선할까?”
“아뇨.”
사려 깊은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는 은혜를 보며 승준이 눈을 부라렸다.
“왜.”
“저 얼굴 보거든요.”
“뭐? 인마, 넌 내 동생 본 적도 없잖아!”
“오빠 동생이 우리 오빠보다 잘생겼어요?”
은혜의 당돌한 질문에 승준은 말문이 턱, 막혔다. 말없이 자신을 쏘아보는 정우의 미끈한 얼굴을 한 번 보고 두꺼비 같은 눈을 껌뻑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저 새끼가 저게 잘생긴 거냐? 완전 기생오라비같이…. 무슨… 허옇게 생겨 가지고…. 남자는 자고로 이렇게 나처럼 좀 두둑한 면이 있어 줘야….”
“전 두둑한 사람 완전 싫어해요.”
은혜가 그의 말을 딱 잘랐다.
“얼굴만 뜯어먹고 사는 건 아니잖아!”
“하지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겠죠.”
“야, 잘난 놈들은 얼굴값 무조건 해!”
“못난 놈들의 처절한 자기 위로 아닐까요?”
은혜는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그녀를 순진한 햇병아리라고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이건 완전 불여우가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승준이 삿대질을 했다.
“야, 그러지 말고 이번 말년 휴가 때 나오면 한번 만나 보기라도 해.”
“싫다는 사람 자꾸 함부로 갖다 붙이지 마.”
가만히 술잔만 기울이며 만담 같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우가 마침내 입을 떼며 제 여동생 편을 들었다. 승준이 씩씩거렸다.
“아니, 갖다 붙이는 게 아니라 인마. 저 꼬맹이가 연애하면 너도 좀 편하게 연애할 거 아니냐.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너 그때 우리 같이 술 먹었던 시현이랑은 왜 연락 안 하냐?”
“…그게 누군데.”
“아유, 저 싹수없는 새끼. 더럽게 차가운 새끼. 둘이 영화까지 봤잖아!”
“아아.”
정우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말투로 짤막하게 내뱉었다. 승준과 함께 술을 마시다 그가 멋대로 불러낸 동창이었다. 자신이 마케팅을 담당한 영화 티켓이 생겼다고, 꼭 함께 봐 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몇 번을 고사하다 한 번 나간 게 다였다.
“아아?”
기가 찬다는 듯 혀를 차는 승준의 곁에서 눈썹머리를 모으며 은혜가 입을 열었다.
“시현이가 누군데요?”
“떽! 이 짜식이…. 시현이라니! 너보다 네 살 많거든? 나랑 동창이거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은혜야, 그만 방에 들어가.”
“나 아직 다 안 먹었어.”
은혜가 식은 탕수육 쪼가리를 전투적으로 씹으며 승준을 바라보았다. 소주를 혼자서 두 병 가까이 들이켠 승준은 취기가 얼큰하게 오른 얼굴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열받아 하는 은혜의 모습을 보니 신나서 이야기가 줄줄 나왔다.
“예전에 체육관 다닐 때 정우 이 새끼를 우연히 보고 한눈에 반해서 짝사랑하던 애가 있거든. 걔가 버스에 휴대폰 두고 내린 거 네가 찾아줬다 그랬었나?”
“몰라. 기억 안 나.”
“아유 씨. 하여튼 직장도 번듯한 데다 마음도 아주 오픈 마인드에 천사야. 집도 잘살아요. 아버지 정비소 크게 하시고. 몸도 이렇게 여리여리하니….”
“그만해.”
정우가 낮게 내뱉었지만 승준은 멈추지 않았다.
“정우가 노가다를 뛰든 농사를 짓든 상관없다는 앤데, 이 새끼가 글쎄 영화만 딱 보고….”
“그만하라니까.”
길쭉하게 빠진 정우의 눈썹이 위로 휘었다. 화가 났다는 증거였지만 취한 승준의 입에서는 말이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집에 동생 혼자 있어서 무서워할지 모른다고 영화 끝나자마자 쌩하게 내빼는 놈이 인간이냐? 시현이 그 내성적인 애가 나한테 전화해서 정우 동생이 도대체 몇 살이냐고 묻더라…. 어, 왜 인마?”
“나와.”
정우가 그의 멱살을 붙들고 거의 끌어내는 수준으로 승준을 일으켰다.
“싫어! 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정강이 걷어차이기 싫으면 다리에 힘주고 똑바로 걸어라.”
정우가 작게 이를 갈 듯 내뱉자 승준이 퍼뜩 허리를 세우며 취한 눈으로 정우에게 물었다.
“똑바로 걸으면 나랑 2차 가? 클럽 어떠냐?”
“가고 싶음 너나 가.”
“여동생 뒷바라지한다고 좆 빠지게 고생하면서 자기한테는 돈 한 푼도 안 쓰고. 아주 지극정성이다.”
정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현관으로 내몰았다. 뒤에서 조용히 음식을 정리하는 은혜가 신경이 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주중엔 노가다 졸라 뛰고. 주말엔 링 위에서 졸라 처맞고. 나는 솔직히 이해가 안 간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상대를 위해서 네가 왜 그렇게까지….”
처음부터 승준을 집에 들이는 게 아니었다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승준이 운동화에 짝짝이로 발을 구겨 넣으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입을 놀렸다.
“자지만 존나 크면 뭐 하냐고, 딸꾹. 쓸 데도 없는데…. 집에 저렇게 큰 코딱지가 떡하니 달라붙어 있는데 대체 여자를 어떻게 데려오냐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승준의 말이 뚝 멈추었다. 정우가 그의 멱살을 틀어쥔 채, 조용히 속삭인 탓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한마디라도 더 하면 너, 진짜 맞는다.”
“…딸꾹.”
침묵이 흐르는 공간에서 승준이 딸꾹질을 하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달칵.
술에 취한 녀석이 계단에서 구를 뻔했기 때문에 정우는 결국 아래층까지 그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내려갔다. 이따위로 개가 될 거면 다시는 얼굴 볼 생각 하지 말라고 내뱉은 후, 정우는 빠르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문을 벌컥 열자 식탁을 정리하고 있던 은혜가 고개를 들었다.
“…승준 오빠 갔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묻고 있었지만 얼굴색이 어두운 건 감출 수가 없었다. 다 들었다. 결국 승준이 지껄이는 헛소리를 모조리 들은 모양이었다.
“설거지 내가 해. 이리 줘.”
“아냐. 됐어…. 어!”
은혜가 젖은 손으로 컵을 빼앗다가 그만 바닥에 놓치고 말았다. 머그 컵이 식탁 다리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정우가 빠르게 내뱉으며 얼른 허리를 굽혔다.
“아냐 오빠 내가….”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사기 조각을 집던 정우가 그녀를 향해 소리를 높이자 은혜의 눈동자가 금방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내가 할 테니까… 넌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알았어. 근데 왜 소리 질러?”
“미안해.”
정우가 입술을 씹으며 바로 사과했지만 은혜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눈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기를 쓰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우는 걸 그가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도 화나. 바보같이 컵 깨서 나도 열받는다고.”
그녀가 깨뜨린 컵은 정우와 놀이공원에 처음 갔을 때 기념으로 샀던 머그잔이었다. 은혜가 제일 좋아하는 컵이었다.
“컵 깨서 화내는 거 아냐. 아니, 처음부터 화도 안 났어.”
“…오빠 나한테 소리 질렀잖아.”
안 되겠다.
남들한테는 빈틈없이 구는 그녀가 그에게만은 항상 아이처럼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였다. 사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건 자신과 다름없었다.
정우는 바닥을 치우는 걸 포기하고 입술을 깨무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은혜는 흠칫 놀라면서도 그의 어깨를 꼬옥 잡았다. 정우는 그녀의 방 문을 열고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스레 앉혔다. 송아지같이 둥그런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내뱉었다.
“너 다칠까 봐 걱정돼서 그랬어. 목소리 높여서 미안해.”
그녀의 맨발을 조심스레 살피자 은혜가 꼼지락거리며 발을 뒤로 뺐다.
“하지 마.”
“가만있어. 다친 데 있나 보게.”
정우가 그녀의 양발을 꽉 쥐고 진지한 눈으로 꼼꼼히 살폈다. 다행히 깨진 컵 조각이 스치고 간 흔적은 없었다. 긴장이 풀린 정우가 그녀의 발등에 쪽, 하고 작게 입을 맞춘 것은 본능적인 충동이었다. 자신이 크게 잘못했음은 은혜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딱딱하게 얼어붙은 채 그를 바라보며 은혜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정우는 자신이 아직도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발을 뒤로 슬쩍 빼내려 했을 때야 깨닫고 얼른 손을 놓았다.
“미안. 발이 너무 귀여워서 그랬어.”
은혜가 양발을 얼른 이불 속으로 쏙 감추었다. 어린애 취급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귀까지 새빨개진 채였다. 은혜는 스무 살이었다. 그저 어릴 때처럼, 아이 이마에 도장을 찍어 주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 자신이 얼마나 생각이 없었는지를 깨달으며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오빠.”
은혜가 그를 불러 세우더니 작게 입을 열었다.
“나 승준 오빠 마음에 안 들어.”
“나도.”
즉각적인 대꾸에 할 말이 없어진 은혜가 입술을 잠시 깨물었다.
“오빠 진짜로… 나 때문에 여자 친구 집에 못 데려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한 거야.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이가 없어져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그와는 달리 은혜의 얼굴은 쓸데없이 진지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그 오빠 말도 맞아. 동생이 집순이라 어디 나가지도 않고 맨날 집에 붙어 있는데, 오빠 성격에 누굴 어떻게 데려오겠어. 연애 못 하는 것도 당연하지.”
쪽방촌에 살았을 때도 고시촌에 살았을 때도, 집 밖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차고 넘치게 강조한 건 정우였다. 집에 붙어 있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정작 그라는 사실은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녀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정우는 죄책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며 태연을 가장했다.
“내 성격이 어떤데?”
“어떻긴 뭐가 어때. 걸어 다니는 도덕책이지. 오빠 밖에서 쓰레기 줍고 다니잖아.”
말도 안 되는 대답이다. 정우가 한숨을 터뜨리듯 약하게 웃었지만 은혜는 그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점점 더 심각해질 뿐이었다.
“나 때문에 뼈 빠지게 일만 하고, 놀지도 못하는 데다가 여자 친구도 맘대로 못 사귀고. 근데 난 맨날 사고나 치고.”
겨우 컵을 하나 깬 걸 가지고 사고 운운하는 그녀를 보며 정우가 소리 없이 숨을 내쉬었다. 침대에 무릎을 모으고 앉은 그녀에게 다가간 채, 여릿한 앞머리를 손으로 헤집고 이마의 흐릿한 상처를 부드럽게 쓸었다.
“자학하는 거야, 아님 어리광 부리는 거야.”
어린 시절, 양부모의 차를 타고 떠나는 그를 쫓아오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탓에 난 상처를 볼 때마다 정우는 심장이 조금 뜨겁게 뛰곤 했다. 어린 시절에는 죄책감과 미안함이었고, 지금은 조금 더… 복잡한 마음이다. 고시원을 나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로 하루하루가 더 달랐다.
“오빠 진짜 미워.”
승준이 쓸데없는 말을 한 건 사실이지만 오래간만에 은혜가 예전 모습을 보이자 가슴속에서 뜨끈한 것이 질척였다. 정우는 사실, 은혜가 자신을 보며 불안해하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자신에게 온몸으로 매달려 오는 은혜를 볼 때마다 속에서 만족감이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다.
새카만 타르처럼 끈적끈적한 감정. 이런 뒤틀린 마음을, 그녀는 절대 알아서는 안 된다.
“미워해도 상관없는데 자학은 하지 마. 그러려고 널 키운 건 아니니까.”
“오빠.”
은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나… 이제 대학생 됐으니까… 음…. 성인 됐으니까 오빠랑 따로 살아 주는 게 맞는 건가…?”
정우의 눈이 소리 없이 깜빡, 했다. 그가 무표정한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은혜원에서도 내 나이 되면 바깥으로… 나가잖아. 오빠도 그래서 독립한 거잖아.”
아. 화가 나려고 한다. 정우는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내리누르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더욱 몰아쳤을 테지만 언제부터인가 은혜는 가끔씩 돌발적인 행동으로 그를 놀라게 하는 일이 있었다. 경험상 이럴 땐, 혼내는 것보다 차분히 설득하는 편이 낫다.
“여기가 은혜원이니?”
“아니.”
부드럽게 묻는 정우를 보며 은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어디야.”
“…우리 집.”
“근데 집 놔두고 네가 어딜 가.”
은혜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간신히 꾹꾹 참아 내는 그녀를 정우가 다시 한번 쿡, 찌른다.
“네가 없는 집은 나한테 아무런 의미가 없어.”
정우는 울지 않으려 눈을 깜빡이지 않는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이로 깨물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너 외에 중요한 건, 내 인생에 아무것도 없어. 은혜야.”
결국 은혜의 입술에서 안도와 같은 한숨이 터졌다. 그녀가 오빠, 하고 부르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젖은 숨결이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치? 내가 아는데…. 내가 오빠를 제일 잘 아는데….”
아니. 넌 아무것도 몰라. 정우의 목울대가 소리 없이 일렁였다.
“그 오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이상한 말만 하잖아. 나 그 오빠 진짜 싫어.”
“다신 안 불러. 연락 끊을 거야.”
단호한 정우의 말에 오히려 은혜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아,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그래도 오빠 친구인데….”
정우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눈을 맞추었다. 머리칼을 헤집는 손가락에 욕망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은혜뿐이었다.
“네가 만나지 말라고 하면 만나지 않아. 나는, 친구보다 가족이 더 중요해. 나한테 가족은 너뿐이고.”
은혜가 그를 보며 빨개진 눈으로 속삭였다.
“나 효도할게요. 진짜… 효도할게.”
정우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웃었다.
“또 어버이날 꽃 주면 너무 민망한데.”
“아,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진짜….”
은혜의 눈빛에 불안함이 사라지고 마침내 웃음을 찾는 모습을 보며 정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네가 이렇게 내 품 안에서 예쁘게 웃을 때마다 내가 어떤 기분인지, 너는 알고나 있을까.
“…그리고 오빠.”
“응.”
뭔가를 결심한 듯 은혜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여자 친구는 오빠가 데려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 줘. 그럼 내가 도서관에서 시간 때우고 올 테니까….”
정우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승준을 역시 딱 한 대만 패야겠다고 생각하며 은혜의 말을 부드럽게 끊었다.
“여자 친구 필요 없어. 사귈 시간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고.”
“진짜?”
은혜가 벌어지려는 입술을 꽉 다물고 희한한 표정을 지었다. 기뻐하는 걸 애써 숨기는 모습이 미치게 사랑스럽다.
너는 참 사랑스러운 존재다. 은혜야.
“하긴. 나도 그렇거든, 오빠. 남친 사귀어 봤자 겁나 피곤하기만 할 것 같아.”
“왜?”
“엄청 귀찮게 들러붙는대. 밀폐된 공간은 또 엄청 좋아한대. 코인 노래방 데려가서 키스하려 그랬대. 그게 말이 돼?”
너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과연 그 개새끼를 죽이지 않고 참을 수 있을까.
“좋지 않네.”
다정한 오빠인 척 염려하는 얼굴로 중얼거리자 은혜가 그의 속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치. 완전 속이 뻔하지?”
은혜가 베개를 주먹으로 팡, 치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런 애가 내 남친이라고 상상만 해도 징그러워 죽겠어.”
“혹시라도 그런 일 벌어지면 나한테 말해야 해. 무조건.”
그의 시커먼 속도 모르고 은혜가 히죽 웃었다.
“어. 근데 그럴 일 없어.”
보송보송한 복숭아같이, 누르면 달콤한 물기가 묻어날 것 같은 말랑한 뺨을 손으로 슥, 쓸어 준 후 정우가 일어서자 은혜가 그를 붙들었다.
“오빠 우리 영화 보자.”
“영화?”
“응. 오랜만에. 액션.”
그들의 영화 취향은 예전부터 같았다. 악당은 쓰러지고 선인이 승리하는 해피 엔딩의 히어로물이었다.
“그럴까?”
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오래된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그녀의 비좁은 싱글 침대에 어깨가 겹쳐질 정도로 나란히 앉은 채 몇 번이고 봤던 옛날 영화를 틀었다.
“근데 오빠.”
“응.”
“그 언니랑은 무슨 영화 봤어?”
정우는 잠시 그녀의 말을 곱씹고 나서야 은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어? 아아. 그게….”
한 템포 늦은 대답에 은혜가 그의 널찍한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대며 중얼거렸다.
“됐어. 하나도 안 궁금해.”
정우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승준의 동창과 함께 본 영화의 제목을 생각해 내려 했지만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 와중에 귓가에서 새근거리며 잠든 은혜의 숨소리가 들렸다. 영화는 이제 곧 악당이 나올 차례로 한참 재밌어지는 전개였다.
“은혜야.”
가수면 상태인지 그녀가 눈을 뜨지도 않고 희미하게 대답했다.
“…응, 오빠.”
아까, 승준이 그녀를 놀리며 자극해서 두어 잔 받아 마신 소주에 취한 모양이었다. 은혜는 아이 취급을 하면 발끈하는 면이 있었다. 그 모습이 더욱 아이같이 느껴지는 줄도 모르고.
이불 속에서 정우의 손이 꽉, 주먹을 쥐었다. 승준을 친근하게 오빠라고 부르던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작게, 고백하듯 속삭였다.
“너한테 오빠는….”
“…….”
“…평생 나 하나였으면 좋겠다.”
뒷말은 한참의 간격을 두고 아주 작게 흘러나왔다. 잠결에 취한 은혜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대답 없이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정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곤히 잠에 빠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나란히 한 이불을 덮고 영화를 보는 건 이제 불가능할 것 같았다.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그의 품 안에서 자고 있는 그녀가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면, 이 평화는 산산조각 날 게 분명하기에.
네 숨소리가 들릴 만큼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방에서, 밤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안다면… 너는 날 어떤 눈으로 볼까.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우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술 앞에서 살짝 날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귀 뒤로 넘겼다.
정우는 천천히 그녀에게 고개를 기울인 후,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멈추었다. 그녀의 숨결을 들이마시자 그것은 몸속에서 시커먼 흥분으로 바뀌었다.
은혜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입술을 조금 벌렸다.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 새로 다시금 숨결이 흘러나와 그의 입술에 닿았다. 살갗은 대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숨결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불순한 흥분이 내달리며 사정할 것 같은 기분.
이대로 입술을 집어삼키고 혀를 섞는다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발등에 가볍게 입 맞춘 것만으로도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랫입술 안쪽을 꽉 씹으며 속으로 열을 셌다. 그녀의 뺨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손에서 맥이 미친 듯이 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딱 10초만. 나의 이 더러운 욕망을 용서해 주기를. 은혜야.
정우가 그녀를 가볍게 흔들어 깨우자 은혜가 잠에 취한 얼굴로 부스스 웃었다.
“나 졸려.”
“그래. 이제 그만 자자.”
잠이 뚝뚝 묻어나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은혜가 정우와 나란히 서서 이를 닦았다. 이를 닦으면서도 은혜는 그의 너른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댄 채였다. 나란히 붙은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은혜가 잠옷 바람으로 그를 불렀다.
“정우 오빠.”
“응.”
말간 얼굴로 그녀가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작게 입을 뗐다.
“난 오빠가 내 오빠라서… 진짜 새삼 너무… 너무 좋아.”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빤히 바라보자 민망해진 은혜의 하얀 피부가 붉어졌다.
“잘 자, 오빠.”
그녀가 도망치듯 방으로 쏙 들어간 후, 정우는 수건을 쥔 손을 내리고 그제야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툭 불거져 발기해 트레이닝팬츠를 쑤시는 아랫도리의 궤적이 적나라했다.
“씨발….”
최정우. 그는 여동생에게 발정하는 개새끼였다. 자신을 다정한 오빠라고 믿고 있는 은혜의 신념은 이미 그의 안에서 산산조각 난 지 오래란 뜻이었다.
은혜는 그를 도덕책이라 말했다. 자신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의 실체가 배덕하기 짝이 없는 음란의 집합이란 사실을 안다면, 은혜는 지금처럼 말갛게 웃어 줄 수 있을까.
자기 동생과의 소개팅을 운운하던 승준의 말을 자르지 않은 것은, 그녀의 반응을 살피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녀는 그를 지금처럼 믿을까.
정우는 꽉 닫힌 그녀의 방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툭, 하고 뒤통수를 벽에 댔다. 깎아지른 턱 아래로 쭉 뻗은 목에 서서히 피가 몰렸다. 지금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는 뭐든 다 할 수 있다. 그의 더러운 욕망은 그녀가 모르게 혼자서 풀면 될 일이었다.
딸깍.
깊은 밤, 정우의 방 문이 쇳소리를 내며 잠겼다. 옆방의 은혜는 잠이 다 달아났는지 음악을 약하게 틀어놓고 작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중이었다. 아마도 침대에 엎드려 있을 것이다. 쭉 뻗은 종아리를 공중에서 교차시킨 채, 그 예쁜 발을 까딱거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정우는 그녀의 흐릿한 멜로디를 들으며 손을 거칠게 움직였다.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숨길 수 없는 남성성을 드러내며 툭 불거진 목울대가 사정없이 일렁였다. 신음을 참는 목에 핏대가 섰다. 휴대폰을 들어 배경 화면에서 웃고 있는 은혜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빠르게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묵직한 욕망이 점점 부피를 늘려 한계에 치달았다.
오빠. 너무 좋아.
오빠가 너무… 너무 좋아요.
찐득한 욕망이 손안에서 터져 나가 벽까지 튀었다. 정우는 잇새로 들락이는 거친 숨을 애써 참아 냈다. 어리고 아름다운 그의 상상 속 연인은 이 사실을 절대로 몰라야 했다.
비릿한 욕망의 향기가 그의 방에 잔뜩 배어 있다는 사실도.
***
은혜가 속옷을 챙겨 방에서 나오다 멈칫했다. 때마침 들어오는 정우와 마주친 까닭이었다. 그는 요즘 귀가 시간이 들쭉날쭉했다. 은혜의 표정이 조금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무심하게 바뀌었다.
“…오빠 저녁은?”
“아직.”
“샤워하고 나와서 챙겨 줄게.”
욕실로 들어가려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정우가 말을 걸었다.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을까.”
“아니. 약속 있어.”
작게 대답한 후 은혜가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정우는 벽에 걸린 자그마한 시계를 바라보았다.
저녁 8시. 금요일 밤 8시에 약속이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창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대학생에게는 오히려 한가한 주말이 드물 것이다. 하지만, 은혜는 여태껏 주말은 늘 그와 함께 보냈다.
“오빠. 나 집 나갈게.”
사흘 전 은혜의 폭탄선언 이후 정우의 신경은 온통 그녀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라고 해서 그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커멓고 끈적거리는 그의 욕망의 실체를 봐 버렸으니 은혜가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상황을 수습하려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화나고 당황해서 그냥 하는 말이라고 믿고 싶었던 건 그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은혜가 그에게서 떠나기로 마음을 결정했다는 확신이 들자 심장을 누가 터뜨릴 기세로 움켜쥐는 것 같았다.
솨아.
현관 옆에 붙은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정우는 은혜의 방으로 향했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휴대폰을 들고 익숙하게 패턴을 그리는 손놀림은 자연스러웠다.
깜빡.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휴대폰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
“내 말 듣고 있어?”
상념에 잠겨 있던 은혜가 주혁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네?”
그는 불금인데 술이나 한잔하자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은혜는 그의 제안에 잠시 망설이다 알았다고 답했다.
그와 만나기로 한 바는 테이블이 적어 이미 만석이었다. 주혁은 자신의 오피스텔이 이 근처라고, 괜찮으면 거기 가서 술을 한잔하겠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머뭇거림 끝에 결국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제껏 주말은 늘 정우와 함께였지만 며칠 전에 일어난 사건 이후, 그녀는 더 이상 정우와 단둘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입술만 봐도 그때의 느낌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얼굴에 피가 몰리는데 정우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
은혜는 그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동요하고 있는 건 그녀 혼자뿐이라는 사실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투명 인간 된 기분인데?”
이제까지의 말을 그녀가 하나도 듣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혁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죄송해요. 딴생각을 좀 했어요.”
“너 진짜 재주 있는 거 알지.”
“…무슨 재주요?”
“남자 승부욕 자극하는 재주. 알고서 일부러 그러는 거면 완전 고수고. 나랑 단둘이 있을 때 집중 안 하는 여자애들은 별로 없거든.”
“오빠랑 싸워서 마음이 계속 안 좋았어요. 선배 말 일부러 무시한 건 아니에요.”
주혁이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재를 툭, 떨었다.
“술 한잔할래?”
은혜는 맛도 모르는 와인을 꿀꺽꿀꺽 한 잔 다 비운 후,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이거 원래 이렇게 달아요?”
주혁이 그녀의 빈 잔을 다시금 가득 채웠다.
“네가 오늘 술발이 받나 보지.”
그가 은혜에게 건넨 술은 기실 포트와인이었다. 도수는 세고 맛은 달아서 식후주로나 작게 한 잔 마시는 술을 입술에 댔다 떼며 주혁이 싱긋 웃었다.
“오빠랑은 왜 싸운 건데? 좀 권위적으로 보이긴 하더라. 나이 몇이야?”
“스물다섯요.”
“뭐야. 나보다도 어리잖아. 난 나보다 두셋은 많을 줄 알았는데.”
은혜의 눈에 눈앞의 남자는 애같이 보였다. 어려 보인다는 뜻이 아니다. 모자라 보인다는 뜻이었다.
“…우리 오빠가 혼자서 절 키우면서 일찍 어른이 됐거든요.”
“아아, 그래서 남매가 더 각별해 보였던 거구나.”
주혁이 느끼한 목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은혜는 속이 일렁이는 걸 느끼며 술잔을 다시 비웠다. 정우를 생각하니 속에서 뜨끈한 것이 치밀어 오르며 목이 탔다.
“오빠 얘기 좀 더 해 봐. 서로에 대해서 좀 아는 시간도 가질 겸.”
“그동안은 철없이 굴었는데, 이제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독립하려고 생각 중이에요.”
“독립? 좋지. 여자 혼자 사는 거 얼마나 편해.”
“근데… 막상 나는 오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으니까 내 자신이 한심해지고….”
혼잣말처럼 내뱉는 은혜의 곁에서 주혁은 잔을 다시 그득하게 채웠다. 은혜가 숨을 들이쉬며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래서 집에 있기 싫어서 나온 거예요.”
“응.”
“딱히 선배를 만나고 싶어서 나온 게 아니고요.”
“그런데 넌 지금 나랑 같이 있잖아, 결국.”
은혜는 그제야 어느새 자신이 그와 굉장히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낯설어 고개를 뒤로 물리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주혁이 내뱉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오늘 여기서 자고 갈래?”
은혜는 말라 가는 입술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왜?”
“오빠한테 말을 안 해서요.”
주혁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오빠랑 싸웠다며. 아니, 싸우지 않아도 그래. 성인인데 외박하는 것도 일일이 허락받아야 해? 미성년자도 아닌데 그건 좀 이상하잖아.”
은혜는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한 걸 느끼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급하게 마신 술에 취기가 오르는 걸까. 아까부터 자꾸만 핑핑 도는 것 같은 느낌이다.
“목마르지? 좀 마셔.”
은혜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주혁이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건넸다. 은혜는 급하게 물을 받아 마셨지만 갈증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지난번엔 내가 말이 좀 심했어. 대뜸 돈 이야기 운운한 거, 그냥 네가 나한테 관심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생각해서 홧김에 내뱉은 거야.”
주혁이 대답 없는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자존심 상하는 걸, 내가 좀 못 참거든. 미안하다.”
“…목걸이 일은 저도 사과드릴게요.”
“아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런 것쯤 얼마든지. 집, 나오고 싶다고 했지? 내가 도와줄까?”
“…선배가 어떻게요?”
“나랑 사귀자. 독립하는 거 도와줄게. 뭐, 정 부담스러우면 돈을 빌려줄 수도 있고.”
조용한 공간에 은혜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화를 건 사람은 정우였다.
은혜는 주혁이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는 것도 모르고 휴대폰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몸에 익은 습관처럼 바로 전화를 받으려는 순간, 주혁이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오빠한테 모든 걸 맡기고 살 순 없을 거 아냐, 너도.”
은혜의 손이 조금 떨렸다. 끊겼던 벨 소리가 다시 울렸다. 은혜가 떨리는 손으로 통화를 거절하자 주혁이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생각 좀 해 봐. 그동안 난 샤워 좀 해야겠다.”
솨아.
욕실 안에서 음악 소리와 함께 물소리가 들렸다. 은혜는 우두커니 앉은 채 블라인드가 걷힌 오피스텔의 통창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침대 구석, 사이드 테이블 근처에 동그랗게 말려 있는 건 여자의 속옷이었다.
이 오피스텔에 과연 얼마나 많은 여자가 들락거렸을지는 굳이 예상할 필요도 없었다. 3분의 2가 비어 버린 와인병을 보자 뒤늦은 두려움이 그녀를 덮쳤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은혜는 탁자 위에서 무음으로 반짝이고 있는 자신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부재중 전화 19통.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 함을 열었다.
늦은 시간이라 걱정돼서 전화한 거야. 아직 정윤이랑 같이 있니?
오빠가 데리러 갈 테니까 밤에 택시 타지 말고.
전화 왜 안 받아. 기다리는 사람 걱정하는 거 생각 안 해?
이은혜
은혜야. 오빠가 미안해.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제발
주르륵 이어지는 정우의 메시지 내용을 보자 참았던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일방적인 대화는 전부 그녀를 걱정하는 말뿐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정우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은혜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 내가 다 잘못했어, 은혜야.
정우가 두서없이 내뱉으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꽝꽝 울렸다. 그는 마치 복도를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 집에 가자. 은혜야. 응?
은혜는 입을 꽉 다물고 젖은 숨을 몰아쉬었다. 정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의 긴장이 다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은혜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마치 그가 앞에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갈 거야. 안 그래도 지금 정윤이랑 헤어지고 집에 가려고….”
- 데리러 갈게.
은혜는 그제야 자신의 휴대폰에 위치 검색 애플리케이션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에게는 고등학교 때부터 당연한 일이었다.
“아, 아니 오빠 그럴 필요 없….”
“뭐 해?”
욕실 문이 열리는 순간, 은혜가 당황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주혁이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입을 여는 걸 보며 서둘러 전화를 뚝 끊었다. 그 와중에도 주혁의 목소리가 혹시 정우에게 들리기라도 했을지 염려가 되었다. 휴대폰은 다시금 ‘오빠’의 이름을 띄우며 끊임없이 불을 밝혀 대고 있었다. 빨리 나오라고 그녀에게 경고하는 것 같았다.
“저, 가 봐야 될 것 같아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우리 아직 이야기 안 끝났잖아.”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주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하얀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며 은혜는 여전히 손에서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아뇨, 저 선배랑 더 이상 할 이야기 없…!”
갑자기 거리를 좁혀 다가온 그에게 놀라 뒷걸음질을 치다가 침대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 주혁이 그녀의 뺨을 손으로 쥐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자고 있어야 정상인데.”
그의 눈빛에 소름이 쫙 내달렸다. 은혜는 떨리는 눈을 부릅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제부터 알게 될 거야.”
은혜는 이제 완전한 공포에 사로잡혀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몸에서는 열이 펄펄 나고 머리가 핑 돌았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가 몹시 이상했던 이유를 뒤늦게 직감할 수 있었다. 설마.
“놔…. 놔…! 흣…!”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뜯어내는 그를 발로 밀어내자 주혁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은혜가 부들부들 떨며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그를 향해 내뱉었다.
“경찰에 신고할 거야.”
“우리 큰아버지가 서에 있는데?”
후후 웃는 그의 눈이 번들거리는 게 끔찍했다. 은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렀다. 정우의 말이 다 맞았다. 그녀가 만나려 했던 이는 쓰레기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쁜 쓰레기였다.
“한번 박혀 보면 좋을 거야. 나 잘하거든. 속는 셈 치고 벌려 보면 후회 안 할걸?”
죽어도 싫었다.
“놔…. 놔!!!”
은혜가 울부짖으며 소리치는 순간, 누군가 오피스텔 문을 쾅쾅쾅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주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았다.
“도와주세요!!!”
은혜가 소리를 지르자 주혁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은혜가 그의 손가락을 깨물자 그가 뺨을 거칠게 날렸다.
“씨발, 쪽팔리게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번엔 문짝을 마치 부서뜨릴 기세로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주혁이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은혜는 그에게서 자유로워지자마자 엉금엉금 기며 찢어진 옷을 여몄다. 아직까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리석 바닥의 무늬가 일렁이며 코앞으로 치솟는 것 같았다.
“뭡니까? 지금…!”
주혁이 벌컥, 문을 여는 순간 누군가 그를 거칠게 밀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은혜가 정우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었다. 맺혀 있던 눈물이 툭, 흘러내렸다. 그녀의 붉어진 뺨과 터진 입술을 보는 정우의 턱이 빳빳하게 경직했다.
“뭐야. 당신이 여기 어떻게 여기 있…. 흣…!”
주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정우가 그의 멱살을 틀어쥔 채 턱에 주먹을 날린 탓이었다.
“큭…!”
한 방에 날아간 주혁이 뒤로 넘어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입술에서 피가 터져 흐른 걸 보며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이 깡패 새끼가…!”
그의 몸 위에 정우가 걸터앉아 멱살을 쥐자 주혁이 캑캑거렸다.
“나가 있어, 은혜야.”
그가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것과 달리 정우의 목소리는 무서우리만큼 차분하게 낮아져 있었다. 그의 얼굴 역시 무표정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은혜는 지금 정우가 미치게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하게 알 수 있었다. 정우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면 오히려 냉정해지는 이였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 씨발.”
“오빠….”
“나가 있으라고 했지.”
정우가 뜨거운 불쏘시개를 목에 쑤셔 박은 것 같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내뱉었다. 그의 망설임을 다르게 이해한 주혁이 억눌린 목소리를 높였다.
“씨발 새끼…. 내가 너 가만 안 둬… 교도소에 처넣을 거야, 흣!”
퍽! 하고 주먹이 주혁의 얼굴에 다시 꽂혔다. 은혜가 엉금엉금 기어가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바위처럼 딱딱해진 그의 몸이 느껴졌다. 정우가 그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은혜의 동공이 풀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그녀의 뒤에 와인병이 보였지만, 이건 그냥 술 취한 눈동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너 얘한테 무슨 짓 했어.”
처음의 기세는 오간 데 없이 주혁이 덜덜 떨었다.
“한 번만 더 물어. 이번에 대답 안 하면 넌 죽는다. 은혜한테 무슨 짓 했어.”
노려보는 정우의 눈이 시퍼렇게 변해 살기를 띠었다. 코뼈가 으스러진 주혁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자, 잘못했습니다! 약을… 좀 타긴 했지만….”
“약?”
은혜가 인상을 찌푸린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정우의 얼굴에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주 조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사과드립니다. 잘못했습니다.”
“이 씨발 새끼가…!!!”
정우가 짐승처럼 포효하며 그의 미간에 주먹을 내지르려는 순간, 은혜가 그의 팔에 쓰러지며 매달렸다.
“오빠….”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애원했다.
“가자…. 오빠…. 집에… 우리 집에….”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가 잘못했어요…. 흐윽….”
정우의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다 아래를 향했다. 어금니가 나가고 코뼈가 부러진 상대가 엉덩이로 뒷걸음질하며 연신 알 수 없는 애원을 중얼댔다. 자신을 죽일 듯 달려드는 사람의 기운은 모를 수가 없는 법이었다.
“날 어디에 처넣든 상관없는데.”
정우는 은혜를 안아 들고 오피스텔을 나서기 전, 그에게 분명한 어조로 내뱉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음에는, 너랑 나. 꼭 둘이 보자.”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덜덜 떨고 있는 주혁의 곁에서 정우가 집어 던진 와인병이 산산조각이 난 채 흩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