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4)

06

사형 집행일같이 느껴지던 주말은 결국 오고야 말았다. 약속대로 집 앞까지 데리러 온 주혁은 익숙하게 그녀를 리드했다. 그가 예매한 뮤지컬을 가장 좋은 자리에서 보았고, 끝난 후에는 예약제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재료와 요리법을 알 수 없는 코스 요리를 먹었다. 주혁의 주문은 능숙했고 식사 매너는 깔끔했으며 에스코트는 자연스러웠다.

데이트의 끝은 드라이브였다.

“오늘 어땠어?”

차 안에서 그가 물었다. 마천루와 다리의 불빛이 반짝이는 둔치 주차장에서 은혜가 입을 열었다.

“재밌었어요.”

“즐기는 표정이 전혀 아니던데. 공연할 땐 대놓고 딴생각하고 있었고. 식사도 별 감흥 없었잖아.”

주혁의 말에 그제야 은혜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나, 눈치가 좀 예술이야. 특히 여자들 기분은 기가 막히게 알지.”

“그럼 제가 선배를 왜 만나자고 했는지도 짐작하시겠네요?”

“대충은.”

주혁이 아무것도 걸리지 않아 매끈한 그녀의 목에 시선을 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선물로 준 목걸이 돌려주겠다고 만나자고 한 거 아닌가? 네 캐릭터라면 그게 어울리지. 넌 누구처럼 속물이 아니잖아.”

“기다리고 계셨다면 죄송한데요. 저 목걸이 돌려드릴 생각 없어요. 아니, 그러지도 못해요.”

“그게 무슨 뜻이지?”

의문을 담은 주혁의 눈동자를 보며 은혜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후, 입을 뗐다.

“팔았거든요.”

주혁이 잠시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그걸 팔았다고?”

“네. 선배가 고작 생일 선물 가지고 부담 가지지 말라고 해서 부담 없이 팔았어요.”

“그럼 오늘 날 만난 이유는 뭔데.”

주혁이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려 드리는 게 예의 같아서요. 확실히 끝내고도 싶었고요.”

“계속해 봐.”

은혜는 그의 얼굴에 흥분이 들어차는 이유를 알지 못하며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선배님이 사귈 여자가 없어서 저한테 접근한 게 아니란 거 알아요. 그리고, 저를… 딱히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도요.”

“그럼 내가 대체 너한테 왜 접근한 것 같은데? 선물 공세에 비싼 공연은 왜 보러 간 것 같아?”

“사실 별로 알고 싶지 않아요.”

“왜?”

“확인해 봤자 기분만 더러워질 것 같아서요.”

주혁이 마침내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거 알아? 난 오늘 저녁 내내 너랑 같이 있었던 순간 중에 지금이 제일 재밌는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럼 이걸로 다시는 이렇게 마주하는 일 없었으면 해요. 생일 선물은 감사했습니다.”

“다음엔 돈으로 줄게.”

차 문을 열고 나가려던 은혜가 멈칫했다.

“목걸이 팔았다며. 네가 필요한 게 목걸이가 아니라 돈이라면 그걸로 바로 주겠다고.”

“…제 생일은 이미 지났고요, 내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미리 사양할게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내뱉는 그녀를 보며 주혁이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그럼 돈을 줄 만한 다른 이유를 만들면 되겠네.”

주혁이 아랫도리가 불편한 듯 자세를 고쳤다. 번들거리는 그의 눈빛을 마주하며 은혜는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저 선배랑 연애 못 해요. 선배를 정말, 안 좋아하거든요.”

“섹스를 꼭 좋아하는 사람과만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은혜의 눈이 경멸을 띠며 가늘어졌다.

“사실 싫어하는 사람이랑도 할 수 있어.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과도 뜨거운 잠자리는 완전 가능하거든. 그러다 떡 정 붙기도 하고. 섹스란 게 원래 그런 거야.”

심장이 쿵, 쿵, 불쾌한 박동 소리를 내며 뛰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내가 너한테 접근한 이유, 대충 짐작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

“내가 너 따먹고 싶어 하는 거 알고 슬슬 피해 다녔잖아. 순진해 보여도 촉은 좋은 것 같으니까, 우리 과에서 너랑 한번 자 보고 싶어 안달 난 놈들 많은 것도 이미 눈치 깠을 테고.”

은혜는 수치심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처음부터 그가 불편했던 이유는 아마 직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매너 있는 척, 쿨한 척 포장하는 것은 모두 위선이었다. 완전히 본색을 드러낸 주혁은 솔직히, 구역질이 났다.

“선배는 그렇게 돈이 많으세요?”

“질문이야, 아니면 비꼬는 거야?”

“…둘 다요…!”

주혁이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은혜는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뒤로 확 물릴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난 침대로 데리고 가는 여자한테는 인색하지 않은 편이야. 쪽팔리잖아. 그렇다고 여자들한테 호구 잡힐 정도로 머저리도 아니고.”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말하자면 윈윈이란 뜻이야. 난 맘에 드는 너랑 섹스하는 거고, 넌 나한테 필요한 돈 챙기고. 원래 학교 여자애들이랑은 엮이지 않는 게 내 철칙인데, 넌 좀 구미가 당겨서.”

은혜의 얼굴에 서서히 핏기가 가셨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잡아 누르며 그를 향해 입을 뗐다.

“얼마까지 가능한데요?”

“이야기가 빨라서 좋네. 얼마 필요한데?”

“1억이요.”

주혁이 푸핫, 하며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진심으로 크게 웃었으므로 은혜는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그를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그가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안에서 수표와 지폐 뭉치를 꺼내 그녀의 무릎 위에 툭 떨어뜨렸다. 지폐 몇 장이 팔랑거리며 차 바닥에 흘렀다.

“이거 한 3백 될 것 같은데, 이거 받고 키스부터 한번 해 볼래?”

은혜의 동그란 이마에 주름이 꽉 잡혔다. 주혁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비릿하게 입술을 핥았다.

“1억? 좋아. 대신 분할로 줄게. 한 번 잘 때마다 내 만족도에 따라 더 줄 수도 있고.”

그의 눈빛에 정수리가 쭈뼛하고 팔뚝에 소름이 끼쳤다.

“…진심으로 지껄이는 말인가요?”

“응. 넌 냄새만 맡아도 처녀니까 투자 가치가 있거든.”

은혜의 눈빛에 경악이 들어찼다. 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너같이 생긴 애들이 잘 개발시키면 침대에서 아주 환상적으로 변하는 거, 내가 겪어 봐서 잘 알아.”

은혜는 그가 이따위 개차반 성격인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에게 숨 쉬듯이 상처를 주지만, 스스로 상처받을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은혜는 뜨끈뜨끈해지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상처받고 싶지 않다. 이따위 더러운 말은,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

“들어가. 다음 주에 보자.”

주혁이 차창을 내리고 산뜻한 얼굴로 웃었다. 은혜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 후, 아파트 정문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300만 원짜리 입맞춤은 오늘 성립되지 못했다. 주혁이 그녀에게 다가온 순간, 은혜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기 때문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견딜 수가 없었다. 역한 향수 냄새도, 비릿하게 바라보던 눈빛도.

“야. 너 혹시 키스도 처음이야? 수녀가 꿈은 아니지?”

믿을 수가 없다며 웃는 주혁은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다음에 호텔에서 몰아서 하자는 그의 목소리는 그녀를 더욱 수치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네 두 개만 걸려 있는 휑한 놀이터를 빠르게 지났다. 아파트 입구, 불 꺼진 공간에 기대 서 있는 정우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누군가 빈 캔으로 만들어 놓은 재떨이에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길이었는데도 죄의식에 온몸이 바늘로 찔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담배 끊는다고 해 놓고 왜 이렇게 많이 피워.”

“밥은.”

은혜는 메는 목을 애써 가다듬으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먹고 왔지. 오빤?”

“나도 먹었어.”

“뭐 먹었는데.”

“그만 들어가자.”

정우가 대답 대신 건물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혜는 그의 널찍한 등이 마치 단단한 벽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라면이라도 끓여 줘?”

계단을 올라가며 그에게 애써 자연스레 묻자 정우가 짧게 대답했다.

“괜찮아.”

“늦을 거라고 메시지 보냈잖아. 근데 왜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밤에 비 온대서.”

그제야 그의 손에 들린 자그마한 우산이 보였다. 주혁이 그녀를 내려 준 아파트 입구 놀이터에서 건물까지는 5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정우는 그녀가 그 짧은 거리를 비 맞고 걸어올까 봐 우산을 들고 기다렸다는 뜻이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그녀를, 바깥에서 우두커니 서서.

정우가 현관문을 열기를 기다리며 은혜는 옛 생각을 떠올렸다.

쪽방촌에 살던 때, 비를 몽땅 맞고 몸살감기에 걸려 끙끙 앓았던 적이 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정우는 불 꺼진 방 안에서 오한에 덜덜 떠는 그녀를 한숨도 자지 않고 곁에서 간호했었다.

“오빠, 나, 나 추워. 너무 추워.”

“미안해. 오빠가 미안하다, 은혜야.”

우산이 하나뿐인 이유는 당연하다. 정우는 비 맞는 것 따위, 상관하지 않는다.

속상하고 복잡한 기분을 참을 수 없어 은혜가 그의 뒤통수에 대고 반항하듯 툭 내뱉었다.

“비 좀 맞는다고 죽어?”

“…네가 아프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정우의 대답에 은혜는 말문이 막혔다.

“계절 바뀌면 꼭 감기 걸리니까 춥게 다니지 마. 맛없더라도 생강차 한 잔 마시고 자고.”

같은 날. 같은 상황. 그녀를 무게 달아 값을 매기는 고깃덩이 취급한 누군가를 떠올리자 속에서 울음이 치밀었다.

정우는 그녀더러 애처럼 군다고, 그래서 그녀에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게 대체 누군데. 그에게 어리광 부리는 게 그렇게 싫었으면, 이렇게 숨 막히게 잘해 주지나 말지.

은혜는 제 방으로 향하는 정우의 넓은 등에 매달려 소리 내어 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우가 올려놓은 전기 커피포트에서 물이 뜨거운 수증기를 내뿜으며 팔팔 끓었다.

***

은혜는 몸이 빨갛게 변할 정도로 뜨거운 물로 한참 동안 샤워를 했다. 이곳저곳 주혁의 기분 나쁜 향수 냄새가 남아 있는 것 같아 온몸을 비누칠해서 여러 번 씻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거실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정우의 방 안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며, 은혜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낸 후 불 꺼진 식탁에 앉았다.

우산을 들고 나와 그녀를 기다렸던 정우의 염려는 기우가 아니었던 듯, 바깥에서 거센 빗소리가 들렸다. 냉장고 소음만이 감돌던 조용한 공간에 들리는 소리가 오히려 반가웠다. 그녀의 떨리는 숨소리와 이제부터 할 일의 작은 소음을 감출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달칵.

기다리던 이의 방 문이 조용히 열린 것은 약 30분이나 흐른 뒤였다. 어두운 식탁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은혜를 향해 정우가 물었다.

“캄캄한데 왜 이러고 있어.”

“불 켜지 말아 줘, 오빠. 부탁이야.”

벽에 붙은 스위치를 켜려던 정우가 멈칫했다. 공간에 희미하게 감도는 소주 향에 그가 인상을 썼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술 한잔했어.”

은혜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젖어 있는 걸 깨닫자 정우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그의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 조금 열린 그의 방 문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온 불빛에 그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우의 그림자가 그녀의 몸 위에 드리웠다.

“아무 일 없어.”

“그 새끼가 너한테 뭐 어떻게 했어?”

날카롭고 차가운 말투. 흐릿한 조도에도 뚜렷하게 드러나는 잘생긴 이목구비가 서서히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은혜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음… 비싼 공연 보여 주고, 비싼 밥 사 주고, 비싼 차로 드라이브시켜 주고 그랬어.”

정우의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점멸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근데 넌 왜 우는데.”

어차피 감추려고 노력해 봤자 정우에게는 감출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딱 한 가지, 그를 향한 그녀의 비밀스러운 마음만이 예외다.

“데이트… 잘하고 돌아와서는 왜 이러고 있냐고 묻잖아.”

말투는 뾰족했지만 염려와 걱정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우가 그녀를 걱정하는 건 이제껏 이어져 온 관성 같은 습관임을 알고 있음에도, 매번 가슴이 떨렸다.

“문제가 생겼거든.”

“무슨 문제.”

정우의 목소리가 한층 위험하게 낮아졌다.

“빨리 말해. 나 미치는 거 보기 전에.”

은혜는 젖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어둠이 자신의 얼굴색을 부디 가려 주길 바라며 작게 속삭이듯 내뱉었다.

“그 선배랑 키스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게 안 되더라고.”

침묵이 내리깔린 공간에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정우의 기다란 입술이 소리 없이 비틀렸다. 다리 옆에 위치한 그의 손이 핏줄이 불거진 채 가늘게 떨렸다. 심장이 강하게 쥐어 짜이며 온몸으로 뜨거운 피를 흘려 보냈다. 링 위에서 느꼈던 폭력적인 충동이 그의 온몸을 순식간에 휩쌌다.

“그래서 심란했어. 나, 아무래도 무슨 혐오증 같은 거 있나 봐. 남자가 곁에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몸에 소름이 돋고 징그러운데 연애가 가능이나 하겠어?”

자조하듯 내뱉는 은혜를 향해 정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이 밤에 청승맞게 불 다 꺼진 채로 술 마시고 있다고?”

그의 앞에서 떨리고 불안한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성을 배반한 목소리가 이미 입술을 비집고 있었다. 은혜가 빨간 눈으로 그를 보며 되물었다.

“이 시간에, 내가 오빠 무서워서 불 켜고 술 마실 수나 있어?”

“이은혜.”

평소의 은혜였다면 절대 이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들이켠 소주 한 컵이 그녀의 용기를 극대화시키는 듯했다. 끔찍하고 수치스러웠던 주혁과의 시간 역시 그녀의 마음에 불을 지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게 다 오빠 때문이야. 내가 이렇게 된 거, 전부 다 오빠 때문이라고.”

“…무슨 뜻이야.”

정우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그가 폭발하는 화를 간신히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은혜는 멈추지 않았다.

“오빠가 날 과보호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 고등학교 때도 그랬잖아. 조금만 관심 보이고 따라오는 남자가 눈에 띄기만 해도 오빠가 겁줘서 돌려보냈으니까.”

“다 쓰레기 같은 것들뿐이었어.”

사포에 긁힌 듯한 목소리와 함께 그가 내뿜는 거친 숨결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은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식탁 의자가 거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렸다.

그녀는 뜨거워지는 눈을 부릅떴다. 아무 남자나 만나서 함부로 굴면 머릿속을 꽉 채운 그를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제대로 망가질 수조차 없다.

“다… 네 발끝에도 못 미치는, 더러운 새끼들뿐이었다고.”

주혁이 그녀에게 키스하러 다가왔을 때, 눈을 질끈 감은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정우의 얼굴이었다. 이렇게 중증인데 그를 떠나는 건 가능이나 할까.

“난 결국 오빠 때문에 아무도 못 만나고 평생 이렇게 혼자 외롭게 늙어 죽을 거야.”

“이은혜.”

“오빤 다른 여자랑 결혼하고 잘 먹고 잘 살겠지. 하지만 나는 영원히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던 은혜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한 발자국 반 만에 그녀와의 거리를 좁힌 정우가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더욱 짙은 정우의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뒤덮었다. 뒤는 벽이었다. 오빠와 나란히 서서 활짝 웃고 있는 은혜의 졸업식 사진이 어둠에 가려졌다. 심장 박동이 은혜의 귓가에서 두방망이질을 쳤다.

“나 때문이라고?”

“그래.”

은혜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내뱉었다. 정우가 또다시 그녀를 겁주고 협박한다고 해도,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억지라고 해도 좋았다. 반항하고 싶었다. 떼를 쓰고 싶었다. 오빠 때문에 나는 누구도 만날 수 없으니까 책임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면 정우가 미안하다고 자신을 달래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게 다 오빠 때문이라고…!”

정우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뒤덮은 순간 시간이 멈추었다. 한번 쭉, 빨았다가 떨어지는 입맞춤은 찰나였지만 충격은 강렬했다.

“…오빠.”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 강하게 뛰었다. 떨리는 속눈썹이 서로 마주 닿을 법한 거리에서 정우가 그녀에게 낮게 물었다.

“…소름 끼치니?”

은혜가 떨리는 입술로 마른침을 삼켰다. 정우가 너무 가까워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정우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가 된 것 같았다. 사고조차 불가능해 얼어붙은 그녀를 벽과 자신 사이에 가둔 채, 그가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다시 물었다.

“대답해. 내가 징그러워?”

맞닿은 정우의 몸이 불덩이같이 뜨거웠다. 집어삼킬 듯 노려보는 눈동자 역시 뜨거운 건 마찬가지였다. 은혜는 그를 보며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말을 끝내는 동시에 은혜의 눈동자에서 맺혀 있던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정우가 엉망으로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내뱉었다.

“그럼 가만있어.”

시간이 다시 멈추었다. 본격적인 키스는, 그때부터였다.

“벌려. 입.”

은혜는 자신의 입 안을 뜨겁게 비집는 정우의 혀를 느끼고 온몸에 힘이 풀려 벽에 기대섰다. 그러자 그의 몸이 더욱 가깝게 밀착해 붙었다. 내려 깔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은혜의 가슴을 쳤다.

정우의 입술은 마르고 버석했지만 그 안에 있는 혀는 아니었다. 헤집고 핥는 입맞춤은 종전과는 달리 노골적이었다. 날것이었다. 정우가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손을 집어넣고 고개를 고정시키는 바람에 마치 자석처럼 그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흣… 아…. 하아….”

은혜의 젖은 입술이 벌어져 헐떡였다.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이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취한 자신이 꾸는 꿈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녀의 혀를 휘감고 타액을 빠는 정우의 육체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거웠다. 그 언젠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을 때는 따스할 뿐이었던 체온은 이제 펄펄 끓어 넘치는 듯했다.

정우의 혀가 그녀의 치열을 모조리 건드리며 훑었다. 혀의 돌기와 돌기가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질척한 소리가 났다. 정우와 함께 보던 영화에서 갑자기 남녀의 키스 신이 등장했을 때처럼, 다리 사이가 간질거리며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아…. 흐….”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짚은 그의 가슴이 바위처럼 딱딱했다. 정우가 그녀의 손을 제 손에 깍지 껴서 잡으며 거리를 더욱 좁혔다.

이제 은혜는 젖가슴이 그에게 눌릴 정도로 완전히 정우의 몸과 밀착된 채였다. 정우가 숨을 몰아쉬며 각도를 반대로 달리했다. 춥. 춥. 고개를 잔뜩 숙여 그녀와 눈을 맞춘 정우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가슴이 너무 울렁거려 어지러웠다. 숨이 턱까지 차고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올 정도로 묘한 기분이었지만 나쁜 기분은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두려운 느낌이다.

깍지 낀 손등이 위로 올라가 벽에 붙었다. 정우는 땀에 젖은 그녀의 손바닥을 결박하듯 짓누르며 제 손금을 그녀의 것에 비볐다.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뺨과 귓가를 끊임없이 쓸었다. 막무가내로 들이켠 소주보다 오빠의 키스가 더욱 그녀를 취하게 만들었다.

“오빠… 흣….”

저도 모르게 애원하듯 그를 부르자 정우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당기듯 물었다가 놓았다.

“가만있으라고 했지.”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이며 은혜의 허벅지 사이를 제 무릎으로 벌렸다. 허리를 한번 밀치듯 뭉근히 누르며 쓸어 올리자, 그녀가 잠옷으로 입은 얇은 바지 사이로 딱딱한 이물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게 뭔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눈을 질끈 감은 은혜의 얼굴과 온몸이 발갛게 물들었다.

“아응…!”

코를 막은 것도 아닌데 숨을 쉬기가 수월하지 않아 입을 더 크게 벌리며 아기 새처럼 할딱이자 정우가 그녀의 혀에 제 것을 마치 벌주듯 적나라하게 비벼 댔다.

혀가 엉키고 타액이 교환되는 소리가 생생했다. 오빠의 숨결이 닿는 얼굴이 온통 뜨거웠다. 머릿속이 아찔하게 젖어 든다. 첫 키스. 일기장에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비밀스러운 상상이 현실화되는 순간은, 은혜의 예상보다 더욱 뜨겁고 강렬해서 울고 싶을 정도였다.

“흐으응, 오빠아….”

은혜가 말을 길게 늘이며 흐느끼듯 애원했다.

“씨발….”

그러자 정우가 그녀의 탄력 있는 엉덩이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작게 욕설했다. 그의 몸이 파고들어 완전히 벌어진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정우의 성기가 짓누르며 치댔다. 오빠의 힘에 저절로 까치발이 들렸다.

정우가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키며 그녀의 몸을 제게 붙여 섹스하듯 위아래로 흔들었다. 예민해진 다리 사이에 트레이닝복을 뚫을 듯 융기한 정우의 딱딱한 성기가 자꾸만 비벼졌다. 잔뜩 부푼 음핵이 눌리자 은혜에게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응…. 응….”

정우는 그녀의 엉덩이를 터뜨릴 것처럼 더욱 강하게 움켜쥐며 자극했다. 목욕 후 새로 갈아입은 팬티는 이미 엉망으로 젖은 지 오래였다. 생소하고 낯선 쾌감이 파도처럼 그녀를 뒤덮었다. 타인의 키스 장면을 화면에서 보며 상상했던 것과는 무언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정우가 아침에 조깅하며 자리를 비울 때면, 따스한 물줄기 아래에서 비밀스럽게 그를 상상하며 자신의 몸을 어루만졌던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상상이 아닌 실재의 정우가 주는 쾌감은 너무나 강렬해 두려울 지경이었다.

은혜가 그에게 혀를 빨리는 동시에 드라이 험핑을 당하고 있었다. 닥쳐올 오르가슴을 본능적으로 예감한 그녀가 새되게 신음한 건 필연적이었다.

“하, 아…. 오, 오빠…. 흐…. 오빠…!”

은혜가 가늘게 눈을 뜨고 마치 끙끙 앓는 사람처럼 그를 부르는 순간, 정우의 움직임이 멈추며 몸이 굳었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멋대로 헤집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물렸다. 가느다랗게 이어진 타액이 그와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늘어지다 마침내 끊어졌다.

“…정우 오빠….”

은혜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숨을 몰아쉬는 정우의 어깨가 서서히 잠잠해졌다. 정우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던 무언가가 연기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은혜의 몸을 꽉 채운 흥분은 여전했지만 그 틈을 비집고 불안이 들어차는 건 당연했다.

“되잖아.”

정우가 마침내 차갑게 식은 목소리를 배 속에서 끄집어내듯 내뱉었을 때, 그녀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은혜의 젖은 눈동자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잘만 되잖아.”

“…오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남자가 소름 끼치고 싫은 게 아니라 그 상대가 소름 끼치고 싫은 거겠지.”

은혜의 가슴 속에서 심장이 아프게 쿵쿵 뛰었다. 정우는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을 이을 뿐이었다.

“네가 연애하는 거, 오빠로서 충분히 환영해. 하지만 남자 사귀겠다고 당당히 선전 포고하기 전에 남자를 보는 눈부터 먼저 갖춰. 알았니?”

방금 전의 뜨거웠던 키스는 꿈이었다는 듯, 힐난하듯 내뱉는 그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찬물로 몸을 얻어맞은 것 같다.

“그럼… 방금 전은 뭐였어?”

“가르쳐 준 거야.”

은혜의 눈썹이 팔자를 그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젓자 정우가 또렷하게 되짚었다.

“네 몸은 남자랑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알려 준 거라고.”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무리 그가 그녀를 아낀다고 해도, 동생에게 그런 식으로 키스하는 오빠는 없다. 그녀의 눈동자가 얼어붙었지만 정우는 멈추지 않았다.

“연애를 한다고? 그럼 적어도 제대로 된 놈이랑 해. 내가 널 과보호한다고 했지. 그래, 맞아. 인정해.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었겠어. 네가 이따위로 철없이 구는데.”

그녀를 힐난하는 정우의 낮은 목소리는 방금 전의 입맞춤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쓰레기 같은 새끼랑 뭘 어쩐다고?”

그의 표정은 중학교 때 그녀를 괴롭히던 놈을 찾아가기 직전을 떠올릴 정도로 무서웠다. 정우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은혜를 노려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널 두고 다른 여자와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니? 근데 어쩌지? 난 네가 같이 있으면 소름 끼친다는 새끼 따위에게 네 인생을 망칠까 봐, 그게 걱정이 돼서 평생 아무도 못 만날 것 같은데, 은혜야.”

“…….”

“그러니까, 숨 막혀도 참아. 평생 참아.”

그가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은혜는 그 이유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위해 그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건 그녀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하지만 방금 전의 입맞춤은… 아니었다. 오빠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무나 붙들고 사귈 멍청한 생각 하지 말란 말이야. 남자랑 키스 따위가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 가지고 밤중에 소주병 따는 소리 다시 한번 들리게 만들면, 넌 앞으로 집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갈 거야. 알아들어?”

아직도 흥분의 잔여가 남아 있는 입술이, 한 발짝 떨어져 있어도 느껴지는,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오빠의 체온이 그녀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대답해.”

대체 뭘 대답하라는 소리일까. 아까 같은 키스를 해 놓고서 그녀에게 다른 생각을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있잖아. 나 지금 오빠가 무슨 소리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근데 이거 하나만 딱 알겠어.”

은혜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내뱉자 정우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은혜는 지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동요하지 않을 거라고 항거하듯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빠. 방금 나한테 키스했어.”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

정우가 몽땅 태워 버릴 듯한 눈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자신의 머리칼을 천천히 만지다 마침내 손에 움켜쥐어 버리는 그의 앞에서 은혜가 입 안의 살을 꽉 씹었다.

“내가 이제까지 널 위해 하지 못했던 건 없어. 네 발가락을 핥는 것도, 구정물에 머리를 처박는 것도 할 수 있어.”

정우가 마치 그 자신에게 말하듯 한 글자, 한 글자를 강조해 내뱉었다.

“네가 제대로 된 남자 만날 때까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

은혜가 뜨거워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지금 이 순간만은 어린애처럼 울고 싶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아홉 살 난 어린아이 취급하는 듯한 그에게 질릴 만큼 질린 탓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 거야.”

숨을 크게 몰아쉰 후, 인상을 찌푸린 정우의 눈을 마주했다. 둥그렇게 젖은 다갈색 눈동자가 그의 마음을 핥듯이 응시했다.

은혜가 손을 들어 그가 뜨겁게 빨며 핥았던 제 입술을 매만졌다. 통통한 아랫입술이 붉게 부어오른 것을 보며 정우가 마른침을 삼키자, 그의 목울대가 거칠게 일렁였다.

“오빠한테는 이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 구정물에… 입 댄 거랑 같은 거야…?”

정우는 눈물에 젖어 볼록 렌즈처럼 둥그렇게 변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면의 들끓는 열을 간신히 잡아 내리며 마지막 인내심을 더듬어 찾았다.

“대답해 줘, 오빠. 오빠한텐… 그래?”

방금 전 그는 인간이 아니라 한 마리 발정 난 수컷이었다. 은혜의 보드라운 입술을 느끼는 순간, 그의 이성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녀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면 정우는 아마 그녀의 팬티를 벗겼을 것이다. 아니, 찢었을까.

“의미가 있을 리 없잖아.”

경직된 턱으로 억눌러 내뱉었다. 그는 지금까지 잘 참아 왔다. 도미노 하나가 쓰러지는 순간 그녀의 행복을 위해 그가 공들인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게 할 수는 없다.

은혜는 적어도 자신보다는 나은 사람의 곁에 있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늘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그녀의 아픔이 햇살 아래 살균되듯 싹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남자. 그게 교도소까지 다녀온 전과자에, 공사판 일꾼인 자신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아무 의미도 없었어.”

은혜의 눈동자에 실망과 슬픔이 번져 나가는 것을 목도하며 정우가 덧붙였다. 번개가 번쩍, 하며 일그러진 그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창문을 때리며 흘러내렸다.

“…내가, 아무리 가진 게 없고 못 배웠어도… 여동생한테 키스하면서 발정하는 개새끼는 아니니까.”

은혜가 열기 오른 눈을 감았다 떴다. 파르르 떨리는 길게 뻗은 속눈썹을 적시며 눈물이 흘렀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차분하게 바뀌고 그녀가 마침내 모든 것을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집 나갈게. 오빠.”

정우의 귀에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천둥소리에 은혜가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천둥이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던 꼬마 아이는 이제 눈을 한 번 질끈 깜빡이며 두려움을 이겨 낸다.

나는, 너를 아직 보낼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는데.

“…은혜야.”

정우의 목소리가 마침내 떨렸다. 간신히 숨을 참는 정우의 옆얼굴이 얼어붙었다.

“진작 그랬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다. 그렇지?”

“이은혜.”

인상을 구기며 겁을 주었지만 그녀는 이전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은혜가,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이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어린 양이 빨간 눈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제까지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우는 아마 최초로 당황이라는 걸 했을 것이다. 늘 그에 대한 동경, 혹은 원망이 가득했던 눈에 버석한 체념을 담고서 은혜가 또렷하게 말했다.

“나, 더 이상 오빠랑 못 살 것 같아.”

그의 귀에 다시 한번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천둥소리가 아니었다. 정우의 심장이 절벽 아래로 추락해 산산조각 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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