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전혀 반갑지 않은 생일날 아침이 밝았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은혜는 시합을 나가는 정우를 배웅하지 않았다. 방 안에 틀어박혀서 빨개진 눈으로 벽지의 무늬를 세기라도 하듯 공허히 바라보았을 뿐이다.
전원을 켠 휴대폰에 뜬 부재중 전화는 38통. 그중 34통이 ‘오빠’에게서 온 전화였다. 친구들 중 누군가가 전화를 너무 많이 해 대는 남자 친구가 무서울 지경이라고 했을 때, 그녀가 뭐라고 했었더라. “걱정돼서 그랬겠지.”라고 했었고, 친구는 “집착도 이 정도면 병이야.”라고 되받았다.
다른 사람의 관념 같은 건 정우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지난밤, 그녀에게 34통의 전화를 하던 정우의 마음이 병적인 집착이 아닌 걱정과 염려라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정우에게 그녀는 아마 영원히 시설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며 엉엉 울고 있는 아홉 살 여자애 수준일 테니까. 물가에서 노는 아이를 보며 전전긍긍하는 마음과 같다는 뜻이다.
은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가 동생이 아닌 한 ‘여자’에게 집착하는 모습이 어떨지. 그리고, 과연 그녀는 그런 정우의 곁에서 그의 행복을 빌어 주며 영원히 철없는 동생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집주인 아주머니
갑자기 울리는 벨 소리에 은혜는 흠칫 놀라다가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어, 나 집주인인데.
“예,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마치 상대가 앞에 있는 것처럼 고개를 꾸벅 숙였지만 집주인은 대뜸 정우를 찾았다.
- 오빠 옆에 있어? 원래 안 그러는 사람이 연락을 다 씹네.
은혜는 집주인 아주머니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아랫집에서 욕실 천장에 물이 새는 것 같다고 연락이 왔을 때였다. 누수는 윗집이 원인일 확률이 거의 백 퍼센트라고 말하는 업자의 말을 믿지 못하고, 집주인은 누수 검사를 하는 걸 직접 와서 봐야겠다며 집까지 찾아왔다.
부동산 아주머니가 넌지시 해 준 말로는 노른자 땅에 아파트를 몇 채나 가지고 있고, 이 집도 재건축 승인이 떨어져 가격이 천정부지로 뛸 상황만 오매불망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은혜의 기억으로는 사납게 찌푸린 그녀의 얼굴만이 남아 있어, 역시 부자라고 해서 다 행복한 건 아니구나 하는 감상만이 남았을 뿐이다.
“아니요. 오빠가… 지금 좀 바쁜가 봐요. 혹시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저한테 말씀하시면 제가 전해 드릴게요.”
- 전세금 말이야. 아무래도 천은 더 받아야 계산이 될 것 같아서.
은혜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녀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입을 뗐다.
“저기… 아주머니, 죄송한데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닌가요…?”
- 뭐? 하하. 계약서 도장 찍을 때까지는 끝난 게 끝난 게 아니지. 아니 오빠는 융통성이 있는 사람인데 대학까지 다닌다는 동생은 왜 이렇게 답답한 소릴 하지?
은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세입자가 을이라지만, 이건 아니었다.
“네? 아니… 전세 상한가는 이미 법으로 정해져 있잖아요. 그래서 맞춰 드리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말씀을 바꾸시면 저희는 당연히….”
- 그래? 싫으면 집 나가면 되겠네. 간단하네.
“…네?”
은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휴대폰 너머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 법대로 내가 들어가 살 테니까, 나가라고. 허허. 참. 나이 어린 사람이 예의가 없구나? 그 가격으로 이 동네에서 지금 구할 수 있는 매물이 있는지 하루 종일 한번 찾아봐. 부모 없이 동생 뒷바라지하면서 사는 게 불쌍해서 봐주려고 했더니…. 사람을 무슨 사기꾼 취급을 하구 있어?
은혜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을이 을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이유를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다. 은혜가 황급히 목소리를 높이며 마치 그녀가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몰랐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 됐고 오빠한테 나한테 연락 달라고 똑바로 전해. 이건 무슨 말도 안 통하는 밥통 같은….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과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
“여보세요, 아주머니…. 여보세요?”
은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휴대폰을 툭, 힘없이 내려놓으며 숨을 내쉬었다. 5분도 안 되는 짧은 통화에 맥이 풀리고 머리가 멍했다.
말이 쉽지 그 큰돈을 대체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직전에 합의한 전세금도 정우가 간신히 맞췄다는 사실을 아는데.
춥지도 않은데 몸이 떨렸다. 이제껏 없이 살았어도 돈 때문에 불행한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정우가 만들어 준 아늑한 보금자리에 숨어 살던 그녀는 그가 감당해야 했던 냉혹한 현실을 갑자기 마주한 기분이었다.
낡은 책상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새하얀 노트북이 그녀를 비웃는 것 같았다. 너는 정우에게 기생하며 그의 등골만 빨아먹고 있는 존재라고.
지잉.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가늘게 이어졌다. 정적 속에서 입술만 깨물고 있던 은혜는 고개를 들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계속 울리는 가느다란 진동 소리는 방음이 안 되는 옆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은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정우의 방으로 향했다.
달칵.
조심스레 그의 방 문을 열었다. 정우의 방은 잡동사니로 가득한 그녀의 방과는 달리 단출했다. 몇 벌 없는 옷이 걸린 행거 옆에 수건과 속옷을 정리해 놓은 플라스틱 삼단 서랍장. 그 앞에는 그가 덮고 자는 이불이 잘 개켜져 있었다.
그리고 접어서 세워 둘 수 있는 작은 상 위에서 울리고 있는 그의 휴대폰이 보였다.
“…….”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낡은 구형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비밀번호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 휴대폰 배경 화면은 식탁 옆에 걸려 있는 사진과도 같았다. 은혜의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이었다.
다만 그녀의 얼굴만 확대해 놓았다는 점이 달랐다. 그녀는 휴대폰을 든 오빠를 향해 입이 찢어져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잉.
손안에서 갑자기 진동이 울리는 바람에 은혜는 깜짝 놀라 흠칫했다. 메시지를 보낸 상대는 박승준, 정우의 예전 체육관 동기였다. 정우에게 가장 처음 스파링 파트너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준 사람이었으므로 은혜에게는 별로 반가운 이름이 아니었다.
오고 있는 거 맞지? 이번 시합은 돈이 크다 정우야
최대한 막상막하로 가면서 판돈 확실히 끌어 올려야 돼. 무슨 말인지 알지
연달아 들어오는 의미심장한 메시지에 은혜의 눈썹이 미간에 모였다. 손에 갑자기 땀이 나면서 심장이 불편한 속도로 쿵쿵 뛰었다. 그녀는 그와의 대화창을 연 후, 차가워진 손가락으로 대화창을 두드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심장이 두근두근 불안하게 박동했다. 뭔가 아주 나쁜 예감이 그녀의 몸에 스멀스멀 번져 나갔다. 상대에게서 곧바로 답이 도착했다.
이전처럼 일방적으로 처맞아 주기만 하면 안 된다고 인마
내기 권투의 묘미가 뭐냐. 끝까지 알 수 없는 승부. 맞을 때는 확실히 맞아 주면서 반격도 해 주고. 그렇다고 오버해서 다운시키지 말고. 너 목돈 필요하다고 해서 선금까지 미리 당겼는데 실패하면 절대 안 돼. 너만 믿는다
은혜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바로 눌렀다.
- 야, 어디야 다 와 가냐?
승준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승준 오빠. 저 은혠데요.”
- 어, 엇? 네가 왜 정우 전화를 써…? 너 설마 정우랑 같이 오냐?
승준이 눈에 띄게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은혜는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바로 물었다.
“방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휴대폰을 꼭 쥔 그녀의 손이 차게 식어 부들부들 떨렸다. 불안한 예감으로 심장이 쿵쿵 터질 듯이 빨리 뛰었다.
“우리 오빠, 오빠 소개로 체육관에서 선수들 스파링 파트너 해 주는 거 아니었어요? 근데 내기 권투라뇨? 일방적으로 맞아 준다는 건 또 무슨 말인데요!”
울음이 치밀어 올라 결국 휴대폰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승준이 쩔쩔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 아니 그게… 은혜야. 정우는 네가 걱정할까 봐서 말 안 한 거야. 근데 그 자식… 내기 권투 프로야. 진짜 선수라고. 이제까지 수십 번도 넘게 한 일이니까 염려하지 말고.
그녀가 핏발 선 눈동자로 길게 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수십 번이라고요?”
- 헤드기어도 없이 맨몸으로 붙는 시합이야. 너 걱정시킨다고 갈빗대 작살나서 폐를 찌를 뻔했어도, 얼굴은 죽어라 지킨 지독한 놈이다, 은혜야. 가진 거 아무것도 없는 스무 살짜리가 너 학원 보내고, 대학 보내고, 서울 한복판에 전셋집 구하고, 그게 노가다 하나 뛰어 가지고 될 일이 아니에요. 어, 저기 정우 온다. 끊자. 끊는다?
그의 이름을 듣자 은혜의 눈에 빛이 서렸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승준 오빠. 우리 오빠한테 티 내지 말고 제 말 듣기만 하세요.”
- 어? 어어…. 그래. 으응, 정우야. 친구야. 너, 저기 대기실 좀 가 있어. 나 통화 좀 하고.
“우리 오빠한테는 저랑 통화한 거 이야기하지 마시구요.”
- 그래. 당연하지.
은혜가 입술을 꽉 깨물며 말을 이었다.
“다음에는 우리 오빠가 하겠다고 해도 오빠가 거절하세요. 안 그럼 저 오빠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불법 사행성 도박 알선으로요.”
- 에헤이. 알았어, 알았어.
“저 그냥 하는 말 아니에요. 진짜 해요.”
은혜가 붉은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리자 승준이 목소리를 낮추어 빠르게 속삭였다.
- 알았어. 알겠으니까, 너나 정우 자식한테 티 내지 마라. 너 속상한 거 알면 최정우는 차라리 여기서 죽을 때까지 얻어터지고 쓰러지는 걸 택할 놈이니까.
“선수들 스파링 파트너 간단히 해 주는 거야. 나도 오랜만에 체육관에서 몸 풀 수 있어서 좋잖아.”
“그런 얼굴 하지 마, 은혜야. 별거 아니라니까.”
“네가 약 발라 주니까 하나도 안 아파. 너 아무래도 전공 바꿔서 의대 가야겠다.”
바보. 최정우는 그야말로 바보 멍청이였다. 은혜는 숨을 들이쉬며 입술을 아프게 꽉 깨물었다. 아니다. 바보 멍청이는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자신이었다. 눈물이 마구 흘러 손바닥으로 얼굴을 훔쳤다.
내기 권투라고 한다. 흠씬 두들겨 맞아 주고 판돈을 끌어 올리다가 결국엔 지는 경기라고 한다. 인간 샌드백이라는 말과 뭐가 다를까. 오빠가 맞아서 번 돈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바보처럼 웃었던 자신은 얼마나 등신이었나.
알고 보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정우의 희생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지붕이 있는 안락한 보금자리. 더운물이 나오고 따스한 밥을 만들 수 있는 이 모든 환경을 누릴 수 있는 건 정우의 덕이었다.
승준의 말이 맞았다. 아무것도 없는 스무 살짜리가 지금 여기까지 오기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이 뒤따랐을까. 혹처럼 딸린 그녀를 책임져야 했던 그의 나이가 현재의 그녀보다 한 살이 적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씁쓸한 자조와 허탈감에 헛웃음까지 났다.
“…….”
은혜는 정우의 휴대폰에서 대화 기록과 통화 기록을 삭제한 후, 휴대폰을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자신의 휴대폰을 쥐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메신저를 열고 차단 목록의 상대를 차단 해제했다.
선물 고맙습니다
읽음 표시는 한참을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서 두통약과 함께 냉수 한 잔을 마셨다. 30분쯤 지났을 때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누군가 했네 ㅎㅎ 반지는 마음에 들고?
네. 예뻐요.
손에 든 휴대폰이 신주혁의 이름을 띄우며 울렸다. 은혜는 마른침을 삼킨 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선물, 풀어 보지도 않고 고맙다는 인사 하는 건 어디 매너야?
“…무슨 말씀이신지.”
- 내가 너한테 준 거 목걸이거든. 손가락 사이즈도 모르는데 반지를 살 수가 없지.
은혜는 입술을 지그시 씹었다. 휴대폰 너머의 상대는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주말에 뭐 할래?
그는 마치, 그녀가 전화할 거란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물었다. 그의 곁에서 누구랑 통화하냐고 묻는 애교 섞인 여자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가 사라졌다. 그가 여자와 함께 있으면서 다른 여자에게 전화를 거는 남자라는 사실이 그녀의 선택을 더 쉽게 만들었다.
“선배가 알아서 정해 주세요.”
- 처음부터 호텔은 좀 그런가?
아무 말도 없이 벽지만 노려보고 있자 주혁이 말을 이었다.
- 하하. 농담.
은혜는 휴대폰을 끊은 후, 이불 위로 세게 던져 버렸다. 주혁이 선물한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서 화려해 보이는 플래티넘 목걸이가 나왔다.
신주혁은 이걸 사기 위해 뭘 희생했을까. 아무것도 희생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말했듯 이 정도는 그에게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선물일 테니까.
은혜는 던져 놓았던 휴대폰을 들어 목걸이의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그사이 휴대폰이 다시 울었다. 승준이었다.
“왜요.”
- 은혜야, 나야.
정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도대체 어디서 전화를 거는 건지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 오빠가 휴대폰을 놔두고 와서 승준이 전화로 전화 거는 거야.
“…응.”
- 밥 먹어. 생일날 굶지 말고.
지금 그게 문제냐고 대꾸하고 싶은 것을 죽을힘을 다해 참아 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정우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은혜야.”
휴대폰을 귀에 붙인 은혜의 손이 떨렸다.
“생일 축하한다. 내 동생.”
은혜는 주방으로 나가서 냄비 뚜껑을 열었다. 불린 미역은 더 이상 냄비가 터질 정도로 많지 않았고 국물도 한강 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물이 자꾸만 입술을 비집고 흘러내려 맛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
“회장님이 네 눈빛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 너, 제대로 된 일 한번 안 해 볼래?”
정우는 손에 들린 명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기 권투를 보러 오는 관객들 중 조폭들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제안도 처음은 아니었다.
은혜원에 살 때, 체육관 관장의 고향 후배라는 사람도 그에게 넌지시 전공 살려 보는 게 어떠냐고 제의를 했었다. 사람 칠 때 그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말과도 함께였다. 마치 눈앞에 죽여 없애 버리고 싶은 끔찍한 괴물이라도 마주한 사람처럼.
“K.O.를 시켰으니 돈은 못 받았겠지. 자, 여기. 관람료다.”
처음부터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경기 내내 정우의 머릿속은 엉클어져 엉망진창이었다. 차라리 철저하게 맞아 주는 경기라면 편했겠지만 주최 측이 원하는 건 시시한 승부가 아니었다.
상대는 현역에서 뛰고 있다는 복싱 선수답게 실력이 강했다. 피가 뜨거워질수록, 호흡이 가빠질수록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은혜. 그리고 그녀를 번들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에 상대가 겹쳐지는 순간, 마우스피스를 낀 그의 턱이 빳빳이 경직했다. 그의 주먹이 상대의 젖은 머리를 강타한 건 그다음이었다. 바닥에 쓰러지는 상대를 보며 승준은 링 아래에서 펄펄 뛰었다.
“…돈 받을 이유 없습니다.”
“받아. 이 정도 돈 가지고 어떻게 엮어 보려는 거 아니니까 지레 겁먹지 말고.”
이제 50대 초반. 아니,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되었을까. 회장이란 자는 겉보기엔 그저 번듯한 기업체의 우두머리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눈빛에서는 힘을 가진 자의 위험한 기운이 바로 읽혔다. 오랜 시간을 흐르며 축적된 두꺼운 악(惡)이었다. 정우는 그를 응시하는 회장에게 침묵으로 응수했다.
“자네 경기 보는 게 즐거웠어. 특히 마지막이.”
정우는 상대가 쓰러진 후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심판이 달려와 그를 저지하고 나서야 그는 미친 듯 휘두르던 주먹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달려온 승준이 너 미쳤냐며 그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지만 아프지도 않았다.
“너, 오늘 사람 하나 묻으려고 했었잖아.”
회장이 그의 어깨를 짚으며 정우와 눈을 마주쳤다.
“너 같은 눈을 하고 사람 배때기 쑤시는 애들이 난 참 좋거든.”
“…제 눈이 어떻습니까?”
“이런 눈빛을 뭐라더라…. 그래, 애수. 사연 있어 보이는 눈깔. 사람을 죽여도 이유 있을 것 같은 눈깔. 우습지. 요즘은 깡패도 로맨틱이 먹히는 시대야.”
“요즘 깡패들은 협박 대신 좆 까는 소리 하면서 사람한테 접근합니까.”
“이 새파랗게 어린 놈의 새끼가 어디서….”
회장의 곁에 버티고 서 있던 젊은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정우의 얼굴을 강하게 쳤다. 정우는 피하지도 않고 묵묵히 맞았다. 회장이 그를 다시 치려는 이를 저지하며 입을 뗐다.
“너같이 고집 있는 새끼들은 협박을 해서는 안 되지. 직접 내 앞에 무릎 꿇게 만들어야 해. 그런 걸 어려운 말로 회유라고 한다.”
“…저같이 고집 있는 새끼를 어떻게 회유하실 겁니까?”
“그건 너무 쉬운데.”
회장이 그에게 명함을 내밀며 웃었다. 툭. 어깨를 짚는 남자의 손은 그 역시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듯 묵직했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지. 가지고 싶은 게 있는데 세상이 좀처럼 네 맘 같지 않지.”
“…….”
“어떻게 알았냐고? 네 눈깔에 그게 쓰여 있으니까.”
“…그래서요.”
“네가 필요한 걸 가질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내가 알아.”
넌 이런 데서 재능을 썩힐 종자가 아니야.
그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정우는 입술을 지그시 씹었다. 조폭 회장은 그가 필요한 것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들먹였다. 즐거웠던 경기에 대한 관람료라며 회장이 건넨 돈 봉투는 빳빳한 지폐들로 가득 차 묵직했다. 그가 걸친 양복은 깔끔했고 타는 차는 화려했다.
이것이 함정이라는 사실은 정우 역시 알았다. 회장의 뒤를 따르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사채 빚을 받아 오는 걸까, 집을 비우지 않는 철거민들을 때려 부수는 걸까. 눈에 거슬리는 이들을 뒤에서 조용히 처리하기를 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필요한 것. 그가 가지고 싶은 것.
마른침을 삼키는 정우의 머릿속에 지난밤 일이 떠올랐다. 번쩍거리던 외제 차. 은혜의 앞에 선 남자의 말끔한 옷차림. 은혜의 가방에서 튀어나왔던, 아마도 그가 상상하는 것만큼 비싸고 좋을 선물.
은혜는 그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허름한 트럭의 조수석에서 김밥을 씹는 것보다 화려한 고급 승용차가 훨씬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에 비참해지는 것은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숨겨야 할 더러운 질투였다.
“오빠.”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입술을 씹고 있던 정우는 본능적으로 손안의 명함을 구겼다. 은혜가 예고도 없이 이렇게 들이닥칠 때마다 손에 진땀이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은혜는 순수했기에 가끔 잔인할 정도로 그를 괴롭히는 것이다.
“약 바르자.”
구급상자를 들고 들어온 은혜의 표정이 조금 어두웠다. 이래서 얼굴에 상처가 나는 것만은 피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피하는 게 불가능했다. 어릴 적 함께 운동을 했던 승준의 손은 여전히 매서웠고, 회장의 곁에 서 있던 똘마니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할 테니까 두고 나가.”
은혜는 그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방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구급상자를 열었다.
“눈 감고 있어 봐, 오빠.”
좁은 방이 그녀의 존재감으로 꽉 차는 느낌이다. 정우가 은혜에게 더 큰 방을 내준 것은 당연했다. 그는 사실, 은혜가 이 집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의 눈길이 닿는 곳에서 공부를 하고 휴식을 취하고… 숨소리까지 다 들리는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편안히 잠이 들기를 바랐다는 뜻이다.
“많이 쓰라려?”
그가 마른침을 삼키자 눈썹 근처에 밴드를 붙이던 그녀가 손을 멈추고 물었다. 정우는 아니라고 낮게 답했다. 방 안은 점점 더워지고 있는데 은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이것보다 더 좁은 쪽방에서 둘이 팔이 스칠 정도로 가깝게 잠을 청한 적도 있으니 당연한 소리여야 했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태연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할게.”
“오빠.”
은혜가 그를 뚫어져라 보며 예쁜 미간을 모았다. 그녀가 지금 간신히 눌러 참고 있다는 건 정우 역시 알고 있었다. 은혜는 많은 것들에 면역이 없었지만 특히나 폭력에 익숙하지 않았다.
처음 그녀를 체육관에 데려왔을 때,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링 위에 뛰어오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가 다쳤을 때는 더했다. 맨 처음 그가 내기 권투 링에 올랐을 때, 요령이 없어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은혜의 표정은… 정말이지 모든 고통을 녹일 정도로 달콤했다.
“오빠 맨날 나한테 입버릇처럼 그러잖아. 오빠가 동생한테 겨우 이런 것도 못 해 주냐고. 근데 난?”
정우는 간질거리는 그녀의 손가락을 핥고 싶었다. 마음속에서 그의 폭력적인 자아가 짐승처럼 포효하고 있었다. 핥고, 빨고, 씹어 먹어 버리라고. 너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라고.
언제부터였을까. 그녀를 보면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고, 그저 모든 감각이 날 선 듯 예리하게 반응했던 것은.
“나는 오빠한테 약 발라 주는 것도 안 돼?”
오빠, 하고 부를 때 동그랗게 작아지는 입술의 움직임.
“여태까지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서 고생만 시키고 등골 다 빼먹었는데….”
울음을 애써 참는 듯 속살거리는 목소리.
“고작 이 정도도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라고.”
반항하듯 얼굴을 치켜들 때 흔들리는 머리카락에서 나는 달콤한 샴푸 냄새.
그 모든 공감각적인 감상을 억누르며 정우가 건조하게 내뱉었다.
“누가 말을 그딴 식으로 하라고 했어.”
“오빠가 쓸데없는 걸로 고집부리니까 그러잖아.”
“아무리 그래도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있어.”
은혜는 날카로워지는 정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가 풀었다. 정우가 이런 화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녀는 정우와 싸우고 싶어서 이 방에 들어온 게 아니었다. 일단, 오늘은 아니다.
“알았어. 티셔츠나 얼른 벗어 봐.”
“…뭐?”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정우의 미간에 더욱 날카롭게 주름이 팼다. 은혜는 구급함에서 바르는 파스를 꺼내 들고 그를 마주 보았다.
“얼굴만 다친 거 아니잖아. 발라 줄 테니까 얼른.”
정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지그시 씹더니 마침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양팔을 교차시켜 티셔츠를 벗자 역삼각형의 탄탄한 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혜가 그의 몸을 여기저기 살피며 확인하듯 되물었다.
“어디 금 가거나 부러진 거 아닌 거 확실하지?”
“아냐.”
정우가 그녀를 보지도 않고 정면을 응시한 채 낮게 내뱉었다.
“할 거면 빨리 해.”
은혜는 손에 파스를 짜서 떡 벌어진 그의 어깨부터 문지르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치솟은 삼각근에 파스를 펴 바르고, 쑥 들어간 척추뼈 옆에 널찍하게 근육이 발달한 등까지 훑으며 내려왔다. 허리를 세심하게 어루만지듯 바르자, 정우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여기, 아픈 거야?”
은혜는 마치 자기가 아픈 것처럼 인상을 썼다. 파스를 손에 조금 더 덜어 낸 후, 그의 옆구리에서 복부로 이어지는 부분에 조금 더 넓게 펴 발랐다. 파스의 기운이 올라오는지,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손에 닿는 정우의 피부도 뜨거운 건 마찬가지였다.
“이제 됐어. 그만해.”
그가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표시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어지간히 아픈 듯했다.
“화끈거려도 조금만 참아. 바르는 거랑 안 바르는 거랑 천지 차이야.”
그가 공사판에서 처음 일을 했을 때, 정우의 몸은 온통 파스로 뒤덮여 있었다. 물론 그의 등에 파스를 붙여 주는 건 늘 은혜의 몫이었다. 스무 살 때보다 더 단단하고 커진 체격이라 약을 꼼꼼하게 바르는 데만도 시간이 걸렸다.
“너무 아프면 진통제도 하나 먹을래? 물 가져다줄게.”
은혜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그를 마주하고 앉아 정우의 복부에 흐릿하게 멍이 올라오는 부분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윤곽을 드러내는 흉근과 도대체 몇 개인지 모르게 갈라진 복근이 엉망으로 부피를 부풀렸다 줄이기를 반복했다. 정우가 잇새로 신음하듯 내뱉었다.
“…그만. 은혜야.”
“아…. 여기는 살갗 벌어졌잖아.”
은혜가 그의 가슴 바로 앞에서 혀를 찼다. 이번에는 파스가 아니라 연고가 발렸다. 손가락을 구부려 마디로 상처에 약을 바르면서 후우, 후우, 하고 바람을 불고 있는데 갑자기 정우가 그녀의 팔목을 휙 잡아 내렸다.
“오빠…?”
은혜는 놀라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팔목은 곧 자유로워졌지만 평소에 그녀의 손을 잡을 때와는 다른 거친 손놀림에 당황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만하라고 했지.”
마치 독감에 걸린 사람같이 쉰 목소리가 그의 성대를 비집었다. 정우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벗어 던진 티셔츠를 낚아채서 자신의 복부를 가렸다. 그녀가 발라 놓은 파스가 온통 번들거리는 상박과 목덜미까지 시뻘겠다.
“…그렇게 아팠어? 미안. 너무 따가웠지.”
“나가.”
그가 이를 갈며 그녀에게 명령했다. 잘빠진 눈썹이 날카롭게 위로 치켜 들렸다. 어젯밤, 주혁의 일로 그녀를 다그치며 보여 줬던 낯선 눈동자보다 훨씬 더, 무서운 표정이었다.
“어?”
“빨리 나가라고 당장.”
정우는 마치 기분 나쁜 것이라도 보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문 쪽을 턱짓했다. 순식간에 전염병 환자 취급을 당한 기분에 은혜의 심장이 쿵쿵 격하게 뛰었다.
“그리고 너 앞으로 내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마.”
은혜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다 마침내 열렸다.
“…왜?”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라 그를 보며 반항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까지 맨날 내가 오빠 방 다 쓸고 닦았는데 갑자기 왜 안 되는데? 오빠 뭐 나한테 숨기고 있는 일이라도 있어? 그래서 그래?”
쉽사리 나가지 않는 그녀를 마주한 정우의 목덜미에 푸른 핏대가 섰다. 몸을 가린 티셔츠를 꽉 움켜쥐는 커다란 손등이 부들부들 떨렸다. 거친 호흡을 반복해서 내뱉으며 그가 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가, 너한테 이제껏 모든 걸 다 말했다고 생각하니?”
“…뭐라고?”
“숨기는 거 아주 많지.”
“왜 숨기는데…? 나는 오빠한테 시시콜콜 다 이야기하는데, 오빠는 왜 말 안 하는데?”
억울해서 따지듯 묻는 그녀를 향해 정우가 일그러진 눈으로 낮게 내뱉었다.
“아홉 살 어린애처럼 구는 너한테…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말 못 하는 게 훨씬 많은 게 당연하니까.”
주먹을 꽉 쥐고 바들바들 떨고 있던 은혜는 마침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우는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내뱉었다.
“문 닫고 나가.”
은혜는 그의 방 문을 쾅 소리가 나게 거칠게 닫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분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아프게 뛰었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새빨간 눈으로 방문을 노려보았다.
1분 만에 나타나면 용서해 줄 생각이었다.
5분 만에 나타나면, 못 이긴 척 화 한 번 내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우는 그 밤 내내 그녀의 방에 오지도, 그녀를 불러내지도 않았다. 서럽고 서운한 마음은 점점 자책으로 바뀌었다.
며칠 전 그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무리하는 게 뭐냐고 장난스레 묻는 그녀에게 그는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거라고 답했었다. 정우는 늘, 그녀를 위해 무리하며 살았다. 매일 매일이 싸움터 같았을 것이다. 한계점에 치달은 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은혜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까끌까끌한 목으로 입을 열었다.
“나… 그 선배랑 이번 주말에 한번 만나 보려고.”
정우는 잠시 먹던 숟가락을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맘대로 해. 네가 누굴 만나든 이제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어.”
짤막하게 내뱉는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