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하루 일찍 벌어진 생일 파티는 학교 앞, 지하에 위치한 저렴한 바에서 조촐하게 이뤄졌다. 은혜는 과에서 친하게 지내는 여자 동기 세 명과 함께 맥주잔을 평소보다 많이 비웠다.
“여기 오백 하나 더 주세요.”
“오오, 이은혜. 오늘 과음하는 거 아냐? 평소에는 친오빠 무서워서 술도 맘껏 못 마시더니 웬일?”
“생일 주인공인데 뭐 어때. 마셔, 마셔. 은혜야. 오늘은 아주 맘껏 마셔. 솔직히 은혜네 오빠 너무 과보호 아니냐? 아니 무슨 얘가 초등학생도 아니고 과외 알바도 못 하게 하고, 통금이 열두 시가 말이나 되냐고오….”
그녀에게 남고생 과외 알바를 소개해 주었다가 거절당한 전적이 있는 정윤이 혀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아 근데 솔직히 은혜 오빠 졸라 잘생겼긴 해. 난 은혜 말만 들었을 땐 진짜 개꼰댄 줄 알았거든?”
“아니야?”
“얼굴은 일단 아냐.”
은혜가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었던 작년 축제 때,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아 있었던 정윤이 목소리를 높였다.
“딱 보고 처음 든 생각이, 이런 사람들이 연예인 하지 않을까 싶었다니까? 모자 썼는데도 이목구비 작살. 키는 또 왜 이렇게 크니? 술집 안에 사람들 대놓고 쳐다보는데…. 이미 눈엔 자기 동생밖에 안 보여. 그냥 직진이야. 와서 ‘정신 차려, 이은혜.’ 딱 한 번 하는데 이은혜 이 알코올 쓰레기가 정신을 차렸겠니? 오라버니께서 그냥 번쩍 공주님 안기 하고 나가는데 와…. 그 자리에 있던 여자 선배들 다 입이 딱 벌어졌잖아. 키 168인 애가 오라버니 품에 있으니까 무슨 초딩 같더라.”
정윤이 지금껏 약 열 번은 들은 이야기를 또 한 번 실감 나게 반복하자 다른 친구가 아쉬움에 탄식했다.
“그때 내가 있었어야 하는 건데…! 은혜야. 오빠 사진 없어?”
“…없어.”
“하긴 친오빠 사진을 왜 들고 다니겠어.”
친오빠랑 원수지간이라는 다른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은혜야. 나 너희 오빠 소개해 주면 좀 그런가?”
“우리 오빠 게이야.”
“헐. 지금까진 말 안 했었잖아.”
“…일주일 전에 커밍아웃했어.”
은혜의 일갈에 친구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이내 화제를 바꾸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선배들 이야기, 성적에 이의를 제기하자 오히려 점수를 낮게 준 교수의 이야기 같은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지만 은혜는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어서 술만 들이켰다.
내일. 그녀의 생일임과 동시에 오빠가 일을 나가는 날이었다. 은혜의 머릿속에 아직도 고시원에서 보았던 충격적인 이미지가 가시지 않았다. 도저히 아침에 웃는 낯으로 그와 헤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기지도 못할 술을 계속 들이붓는 건 그 때문이다. 차라리 술에 완전히 취해서 곯아떨어져 버리는 게 쉬울지도 몰랐다.
“어? 선배님. 네 저희 거기 학교 앞 베어백에 있어요. 네, 은혜 생일 맞아요.”
친구인 정윤이 마침 걸려 온 전화를 받더니 눈을 크게 떴다.
“진짜요?”
정윤이 휴대폰을 손으로 가리고 은혜와 친구들을 보았다.
“신주혁이 술값 내러 온다는데? 바로 코앞이래.”
“누구, 신주혁? 그 물주? 헐. 사장님 저희 메뉴판 좀 주세요!”
왁자지껄 친구들이 떠드는 통에 은혜가 끼어들 새도 없었다. 전화를 끊는 정윤을 보며 은혜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윤아, 너 그 선배랑 친했어?”
“전공 수업 같이 듣잖아. 근데 은혜 넌 그 선배랑 조 모임 같이 했었는데 번호 교환도 안 했었어? 왜 나한테 전화해서 널 찾지?”
“아. 그게….”
“나 차단당했거든. 전화는 수신 거부. 근데 여긴 술집 이름이 왜 이렇게 싸구려야?”
뒤에서 누군가가 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바람에 은혜를 포함한 모든 여자애들이 깜짝 놀랐다.
“어, 선배님!”
제대하고 이번 학기에 복학한 신주혁은 경영학과에서 단연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정윤의 말에 따르면 그가 걸치고 있는 기본적이고 깔끔한 디자인의 옷들 가격을 다 합치면 한 학기 대학 등록금을 거뜬히 넘길 거라고 했다.
“생일 축하해.”
“아…. 고맙습니다.”
은혜가 그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주혁은 복학하자마자 그녀에게 친근하게 다가온 인물이었는데 그녀에게는 달갑지 않은 관심이었다. 같이 밥이나 한 끼 하자는 그의 연락을 매번 거절하다가 결국 차단을 해 버린 것도 그 때문이다.
“기념으로 차단은 좀 풀어 주고. 너랑 연락이 안 돼서 네 친구한테 전화하면 받는 네 친구는 얼마나 귀찮겠어. 안 그래도 연락 올 데도 없어서 서글플 텐데.”
“선배님. 그럼 서글픈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저희 여기 안주 더 시켜도 될까요.”
정윤이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기회를 잡자 주혁이 빙긋 마주 웃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니. 오늘은 여기서 끝.”
“술값 내러 오신다면서요!”
“지금까지 먹은 거 내 주겠다는 말이었는데? 누굴 호구로 알아?”
정윤과 친구들이 볼멘소리를 내기 전에 은혜가 계산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벌써 자정에 가까웠다. 술도 웬만큼 취했거니와 반갑지 않은 인물의 등장에 더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이걸로 해 주세요.”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카드를 내미는 주혁을 보며 은혜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생일 주인공이 내는 게 어디 있어! 은혜야 우리가 낼게!”
은혜의 친구들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주혁은 됐다는 듯 가게 주인의 손에 그의 카드를 쥐여 주었다.
“발 연기 하지 말고. 어차피 너희들 나 벗겨 먹을 작정이었잖아.”
계산을 마친 그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며 은혜는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술집이 즐비한 골목에서 주혁이 물었다.
“너희 둘은 자취하고, 집에 가는 건 은혜랑 정윤이인가?”
“왜요? 선배가 차 태워 주시게요?”
은혜는 술에 웬만큼 취해 목소리가 커지는 정윤의 팔을 슬쩍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저흰 그럼 먼저 가 볼게요. 정윤아, 가자. 막차 시간 다 돼 가.”
“그래. 태워 줄게. 난 술도 안 마셨으니까.”
가게 앞에 세워진 새까만 외제 세단이 삑, 소리를 내며 라이트를 점멸했다. 정윤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는 듯 부리나케 뛰어가 뒷좌석 문을 열고 앉았다.
“빨리 타 은혜야!”
“어…?”
“물주님께서 집까지 쏘신다잖아.”
“씨발, 누가 물주냐?”
“선배님께선 다섯 살 때 이미 건물주였다면서요. 은혜야, 빨리!”
은혜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차로 다가갔다.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보다 더욱 취한 정윤을 선배와 둘만 태워 보내는 게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 사람은 내 옆에 앉아야 되는 거 아니냐? 이건 뭐… 완전 운전기사 된 느낌인데.”
뒷좌석에 앉으려는 그녀에게 슬쩍 시선을 주며 주혁이 뼈 있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정윤은 남자 친구에게 전화 중이라 방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은혜는 입술을 살짝 깨문 후, 조수석에 앉았다.
앞자리의 분위기는 어색했지만 정윤이 그나마 뒤에서 남자 친구와 실컷 통화를 하며 떠들어 주어 다행이었다. 주혁은 정윤을 그녀의 집에 내려 준 후, 가까운 은혜의 집으로 향했다.
“와, 엄청 올라오네? 이런 데 살면 공기는 좋은가?”
마치 그녀가 첩첩산중에 처박혀 살기라도 하는 것 같은 감상이었다. 은혜는 그에게 대꾸하는 대신 꾸벅 인사를 했다.
“오늘 감사합니다. 그럼, 학교에서 뵐게요.”
탁.
은혜는 그녀를 따라 내린 주혁을 보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왜 그러세요?”
“생일 선물 주는 걸 깜빡해서.”
주혁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민트색 상자 위에 선명히 찍힌 브랜드 로고를 보며 은혜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죄송해요. 근데 마음만 받을게요.”
주혁이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오더니 그녀가 어깨에 걸치고 있는 에코 백에 상자를 툭, 집어넣었다.
“생일이니까 그냥 받아. 거절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핑계잖아?”
“이거 저 못 받아요.”
“왜, 부담스러워서?”
친하다고도 할 수 없는 사이인데 고가의 선물은 확실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은혜가 짧게 네,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주혁이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부담이 될 만한 선물이 아니란 거, 한정윤 그 속물이 이야기 안 해 줬나 보네.”
아무리 선배지만 말투에 섞인 노골적인 빈정거림을 참기가 힘이 들었다. 은혜는 입 안을 살짝 깨문 후, 그를 바라보았다.
“…제 친구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솔직히 불편한데요.”
“너에 대해서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까지 과민 반응을 해. 넌 걔랑 다르다는 뜻이잖아. 그럼 기분 좋아야지.”
은혜는 점점 더 기분이 나빠졌다.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주말에 같이 공연 보자.”
그는 여전히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는 눈빛이 기이했다. 처음부터 은혜가 그에게 거리감을 느꼈던 것도 이렇게 샅샅이 훑듯이 바라보는 기분 나쁜 시선 때문이다. 마치 진열장에 전시된 상품이라도 된 것 같은 싫은 느낌.
“아뇨. 괜찮아요.”
“공연 싫으면 영화? 영화도 싫으면 술?”
남자는 마치 오기가 생긴 사람처럼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그녀를 보며 그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저, 저기….”
잊고 싶은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아라고 비웃으며 그녀를 강제로 끌어안았던 징그러운 이를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뭘 그렇게 흠칫거리면서 놀라. 내가 잡아먹냐?”
하얗게 질린 은혜를 마주한 주혁의 표정은 마치 사냥감을 몰기라도 하는 것처럼 즐겁게 보였다. 은혜가 가방을 붙든 손에 힘을 꽉 주었을 때였다. 가로등에 기다란 그림자가 걸리더니 주혁의 어깨가 휙, 잡아채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정우였다. 은혜는 갑작스레 나타난 그를 보며 그제야 숨이 탁 풀렸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온몸에 힘이 갑자기 쫙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냐고.”
“그러는 댁이야말로 왜 길 가다 말고 시빕니까?”
주혁이 그를 뿌리치려 어깨를 돌리다 도로 밀쳐졌다. 정우가 그를 벽으로 몰아붙이고 멱살을 잡아 팔꿈치로 그의 명치를 압박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켁…. 왜 이래…!”
주혁이 소리를 치자 은혜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정우의 팔뚝을 붙들었다.
“오, 오빠.”
고등학교 때, 은혜는 용돈이나 스스로 벌어 보겠다고 정우 몰래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점장이 그녀에게 이상한 메시지를 보낸 걸 정우가 발견한 건 일주일 후였다.
정우는 말 그대로 매장을 뒤집어엎었다. 매니저 룸에 숨어서 벌벌 떨던 유부남 점장에게 주먹을 날려 기절하게 만들었던 걸 떠올리자 가슴이 불안으로 격하게 뛰었다.
“우리 학교 선배야, 오빠.”
주혁의 멱살을 틀어쥐었던 정우의 손에서 힘이 서서히 풀렸다. 정우가 길게 빠진 눈으로 그녀를 보며 되물었다.
“…선배?”
이때다 싶은 주혁이 정우를 탁, 밀치며 잔뜩 구겨진 셔츠를 매만졌다.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잖아.”
주혁의 눈빛이 마치 약점이라도 잡은 사람처럼 이상하게 변했다. 방금 전 정우에게 밀쳐졌을 때의 당황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묘한 시선이 들어찼다.
“와. 이은혜.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네? 하하, 신선해.”
“…무슨 뜻입니까.”
정우가 그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묻자 주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얘 학교에서 이미지는 깡패랑 동거할 거라곤 절대 상상 못 할 이미지거든요. 뭐, 칭찬입니다. 워낙 터프하셔서. 오늘 본 건 비밀로 해 줄게, 은혜야. 이상한 소문 나면 너만 괴롭잖아.”
정우가 내뱉는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눌러쓴 검은 모자 아래로 각도가 훌륭한 턱이 경직되는 것이 보였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정우를 밀치고 앞에 나선 것은 지금까지 긴장에 얼어붙어 있던 은혜였다.
“무슨 소문이 나건 상관없는데요, 이 사람 제 오빠거든요?”
인상을 찌푸리는 주혁을 노려보며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제 가족이라고요.”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주혁이 손으로 턱을 긁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 그를 밀어붙이던 정우에게서 느껴진 강렬한 감정은 같은 남자라면 백이면 백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제 것을 빼앗긴 수컷의 분노를 확실히 느낀 주혁이 정우를 친오빠라 생각할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저희 오빠 깡패 취급한 거 지금 당장 사과하세요.”
은혜가 그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주먹을 꽉 쥐고 선 그녀의 심장은 제 속도를 찾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화가 났다. 이제껏 주혁이 했던 모든 재수 없는 일 중에 방금 정우를 향해 지껄인 말이 그녀를 가장 화나게 만들었다.
“됐어. 먼저 들어갈게.”
정우가 낮게 내뱉었지만 은혜는 그의 옷깃을 더욱 꽉 붙들었다.
“가지 마. 가만있어, 오빠.”
씩씩대는 그녀와 정우를 번갈아 바라보던 주혁이 눈을 가늘게 뜨다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아아. 이제 생각났다. 그 여동생 과보호한다는 친오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과에서 유명하시더라고요. 근데 솔직히 사과는 나도 받아야 하지 않나? 하마터면 주먹 날아오는 줄 알았는데.”
그는 뻣뻣한 석상처럼 우뚝 선 정우를 향해 미끈한 손을 내밀었다.
“서로 실수한 거니까, 그냥 해프닝으로 넘어가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은혜 학교 선배, 신주혁입니다.”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빤히 바라보던 정우가 마침내 거친 손으로 그를 맞잡았다.
“…실례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둘이 분위기가 완전 닮았네요. 남매를 애인 취급 했으니 열받으신 것도 이해합니다. 저도 여동생 하나 있는데, 아… 진짜 가끔 패 죽여 버리고 싶거든요. 하하.”
은혜는 낡은 반팔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정우의 팔뚝에 핏줄이 불거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가 주혁의 손을 으스러뜨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도, 그녀는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
주혁의 차가 언덕 아래로 사라졌다. 은혜는 정우와 함께 아파트 정문을 통과해 나란히 집을 향해 걸었다. 정우는 그녀의 어깨에서 가방을 벗겨 내 들었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관리를 하지 않아 무성한 장미 덤불이 우거진 오래된 단지를 걷는 동안 불편한 침묵이 내내 이어졌다. 은혜는 뭐라도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생일 파티는 재미있었어?”
마침내 입을 연 쪽은 정우였다. 은혜는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그랬어.”
또다시 이어진 침묵. 조용한 달빛 속에 두 그림자만이 천천히 움직였다.
“근데 오빠는 이 시간에 바깥에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정우는 말이 없었다. 은혜는 마른침을 삼키고 그에게 물었다.
“…혹시 지하철역에서 나 기다렸어?”
그의 표정만으로도 답을 알 수 있었다. 정우는 은혜의 귀가가 늦어질 때면 항상 그녀를 지하철역까지 데리러 나갔다. 오늘도 막차 시간까지 그녀가 돌아오지 않자 바깥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늘 그랬듯 마을버스가 끊긴 정류장 기둥에 등을 기댄 채 그녀를 기다렸을 것이다.
“휴대폰 꺼져 있어서 걱정했어.”
정우가 마침내 낮게 입을 뗐다. 은혜는 자신이 신주혁의 연락을 피하려 휴대폰의 전원을 아예 꺼 놓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미안해, 오빠. 사실은 오늘….”
“집에 왔으니 됐어.”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건조하게 들리는 것은 그녀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자신과 연락이 안 되면 오빠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아는 은혜가 죄책감을 느끼며 서둘러 변명을 했다.
“원래 지하철 막차 타려고 했거든. 막차 타고 오빠한테 이제 들어간다고 연락하려고 했어. 아까 그 선배 차는 정윤이가 탄다고 해서….”
“들어가자.”
정우가 길어지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어느새 집 앞이었다. 어두컴컴한 계단 앞에 서서 은혜는 주먹을 꽉 쥐다가 결국 위로 향했다. 뒤에서 정우가 그녀를 따라 느리게 올라왔다.
5층 계단을 쉬지도 않고 오르며 은혜는 입술을 꽉 물었다. 마침내 계단 끝까지 다 올라온 후,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온 후에도 숨 막히는 침묵은 계속되었다.
“씻고 쉬어.”
“오빠.”
은혜가 그녀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려는 오빠를 불러 세웠다. 가파른 계단을 쉬지 않고 올라오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닌데, 오늘따라 이마에 식은땀이 차고 심장은 더욱 쿵쿵거리며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빠 화났지.”
“…내가 왜.”
문고리에 손을 올리다 말고 멈춘 정우의 목소리는 건조하게 들릴 만큼 차분했다. 은혜는 숨조차 가빠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근데…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정우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물어봐야 할 일이 따로 없을 것 같아서.”
무표정한 조각상 같은 그의 얼굴에서 갑자기 거리감이 확 느껴졌다. 은혜는 왠지 모를 서운함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까 그 선배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아? 오빠는 내가… 동생이 누구 만나고 다니는지 하나도 안 궁금해? 예전엔 하나하나 다 물어봤잖아. 내가 다니는 분식집이 어딘지까지 궁금해했잖아.”
사실 은혜는 정우가 물어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해 줄 수 있었다. 제멋대로인 아까 그 선배, 말투고 행동이고 눈빛이고 정말이지 기분 나쁘고 재수 없어 죽겠다고, 자기가 뭔데 오빠한테 깡패 운운이냐고, 앞으로 학교에서는 선후배 관계 같은 거 필요 없이 확실하게 무시할 거라고 말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는 정우 때문에 오히려 더 화가 치밀었다.
“…예전엔 내가 숨 막힐 정도로 다 꼬치꼬치 물어봐 놓고서 왜 지금은 아무것도 안 물어보냐고.”
혼잣말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을 비집었을 때였다.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정우가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다가오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물어봐 줄까. 일부터 백까지.”
불도 켜지 않은 공간으로 스며드는 달빛에 정우의 그림자가 그녀를 길게 덮었다.
“…어?”
“숨 막히는 기분, 느낄 때까지 물어봐 줄까.”
은혜는 그에게서 갑자기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작게 말을 더듬었다.
“…오빠.”
아닌가. 이건 서늘한 기운이 아니라 뜨거운 기운인가. 정우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다. 새까만 눈에서 무언가가 위험하게 일렁거리는 것 같은, 생소하고 낯선 느낌.
“아까 그 새끼 대체 뭐 하는 새끼냐고. 네 입에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을 가진 놈이 뭔데 널 차에 태웠냐고. 어디 사는지 집 주소까지 알려 줄 정도면 가까운 사이일 텐데 그 정도로 믿을 만한 놈이냐고. 차에서는 옆자리에 앉았는지 뒷자리에 앉았는지, 술 먹고 운전대 잡을 정도로 미친 놈 차에 네가 탔을 리 없으니 술은 너만 마셨을 텐데, 이렇게 술이 오를 정도로 여자를 취하게 만드는 놈이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이 맞기나 한지. 아까 내가 나타나기 전엔 도대체 그 새끼가 너한테 뭘 어쩌고 있었길래, 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던 건지.”
어느새 정우는 은혜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가 들이마시는 거친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아님, 그 자식한테 직접 물어볼까. 너한테 무슨 더러운 짓거리라도 하려고 했냐고, 일단 두어 대 얼굴 갈기고 시작할까.”
은혜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떨렸다.
“…그걸 원하니?”
“오빠가 걱정할 만큼 그렇게 위험한 사람은 아니야.”
은혜가 저도 모르게 내뱉은 것은 정우의 눈빛 때문이다. 그녀의 안전에 관한 일이라면 과할 정도로 염려를 하는 그가 정말로 위험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치밀었던 것이다.
“그래?”
정우가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되물었다. 수면 아래로 침잠한 듯 완전히 가라앉은 목소리. 저도 모르게 주혁을 옹호해 버린 상황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은혜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오빠, 아니 그게 아니라….”
“쓸데없는 데 신경을 썼네. 내가.”
정우가 그녀의 에코 백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힘없는 가방이 옆으로 넘어지더니 주혁이 함부로 찔러 넣은 부담스러운 선물이 하필이면 지금 툭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정우의 시선이 정확히 머무르는 곳을 보며, 은혜가 황급히 변명했다.
“아, 그거 생일 선물이라고 갑자기 준 건데… 부담스러워서 내일 바로 돌려줄 거야. 아깐 경황이 없어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정우가 그녀의 말을 차갑게 잘랐다. 툭 불거진 목울대가 천천히 일렁였다. 은혜의 얼굴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몸을 휙 돌려 현관을 향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그녀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 시간에 어디 가는데, 오빠.”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갈게. 먼저 자라.”
찰칵.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정우의 발걸음을 들으며 은혜는 누군가 제 숨통을 틀어쥐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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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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