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끓었다. 은혜는 빨간 고추장 양념이 잘 밴 제육볶음을 나무 주걱으로 한 번 더 뒤섞으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대체 왜 안 오는 거야.”
지하철역에 도착했다고 오빠에게 메시지가 온 게 20분 전이었다. 그의 걷는 속도라면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늦어지는 게 영 이상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때마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녀왔습니다.”
은혜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환히 웃었다.
“어,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
안 그래도 층고가 낮은 천장을 더 낮아 보이게 하는 키 큰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뭐야? 아이스크림?”
은혜가 정우의 손에서 봉투를 받아 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사 오느라고 늦은 거야? 그냥 빨리 오지. 힘들었을 건데.”
“너 단 거 먹고 싶을 때 된 것 같아서.”
“아….”
생리하기 전이면 늘 달콤한 간식을 찾는 여동생을 알아서 챙겨 주는 오빠가 세상에 존재하긴 할까. 귀찮고 번거로운 월경일의 짜증이 확실하게 줄어드는 그야말로 매직이었지만 가끔은 민망할 때도 있었다.
“오빤 당사자인 나도 까먹는 걸 매번 어떻게 기억해? 혹시 어디 써 놓고 날짜 세기라도 해?”
“응. 안 그러면 잊어버리니까.”
농담도 정우가 하면 진담처럼 들린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는 그 어떤 민망함도 없었다. 오히려 얼굴을 붉힌 것은 은혜였다.
“씻고 올게.”
정우가 미소 지으며 등을 돌리자 은혜가 목소리를 높였다.
“먹고 씻지. 밥 딱 다 됐는데.”
“먼지 뒤집어쓰고 와서 안 돼.”
“음식 식으면 맛없는데….”
“너 하루 종일 기침하는 거 보는 것보단 나아.”
정우가 투덜대는 은혜의 말을 가볍게 잘랐다. 그녀가 아픈 것에 정우가 얼마나 예민하게 구는지는 당사자인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은혜는 정우의 설교가 길어지기 전에 빨리 씻고 나오라며 그를 떠밀었다.
수건을 목에 걸치고 욕실로 들어가던 정우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왜?” 하고 짤막하게 물었다. 은혜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냥. 누구 오빤지 하드웨어 한번 끝내준다 했지.”
매일 한집에 살아도 볼 때마다 가슴이 떨리는 외모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가 피식 웃으며 머리를 숙여 문지방을 넘었다. 정우의 등 뒤로 낡은 욕실 문이 부드럽게 닫히더니 곧이어 세찬 샤워기 물줄기 소리가 들렸다.
은혜는 된장찌개의 불을 아주 약하게 줄인 후, 식탁 의자를 빼서 앉았다. 정우는 샤워 시간이 항상 길었고 요즘엔 더했다. 아마, 기관지가 약한 그녀 때문에 몸의 먼지를 조금이라도 용납하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쉰 은혜가 고개를 돌렸다. 벽에 걸린 자그마한 액자의 위치가 혹시 비뚤어졌을까 싶어 세심하게 조정했다. 벌써 작년이 된 그녀의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 꽃다발을 들고 희한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곁에서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쑥스럽게 웃고 있는 정우의 얼굴을 볼 때마다 언제나 웃음이 났다.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하지 않는 정우와 함께 찍은 몇 안 되는 사진 중 하나였다.
“고맙다, 은혜야.”
은혜에게 꽃다발을 내밀며 정우는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얼굴로 말했었다.
“나는 네가 내 동생인 게 너무 자랑스러워.”
정작 그 말을 돌려주고 싶었던 건 은혜였지만 애꿎은 눈물이 또 튀어나와서 할 말도 제대로 못 했다. 두 눈에 눈물을 달고 웃는 바보 같은 사진이 찍힌 것은 그 때문이다. 정우는 이 사진이 그렇게 좋다고 했다. 자신의 휴대폰 배경 화면으로 넣을 정도였다.
“고생은 자기가 다 해 놓고 뭐가 고맙대.”
은혜가 닫힌 욕실 문 너머에 있는 정우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재건축을 기다리는 오래된 아파트. 낡았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방 두 칸짜리 보금자리는 정우가 그들 가족을 위해 일군 첫 전셋집이었다. 지하철역에서도 한참을 걸어오고, 그러고 나서도 가파른 언덕을 올라와야 하는 곳이었지만 은혜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가 이렇게 편하게 씻을 수 있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우와 그녀가 쪽방촌에 살았던 시절. 정우는 이틀에 한 번씩 그녀를 공중목욕탕에 데려갔다. 한 평 남짓한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에는 열 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더러운 화장실 하나밖에 없었다.
삶의 막장까지 몰린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는 곳. 정우는 자신은 그들 틈에 껴 줄을 서면서도 은혜에게는 그러지 못하게 했다.
은혜를 공중목욕탕에 데려다주며 정우는 늘 미안해 견딜 수 없다는 눈빛을 했다. 그의 팔짱을 끼고, 바나나우유까지 빨며 걷던 은혜는 정작 아무렇지도 않았음에도.
그가 자신에게 쥐여 주던 돈이 식대로 나온 그의 밥값이었다는 것, 그가 하루걸러 하루씩 밥을 굶어야 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주민 열 명 중 절반이 10년 넘게 떠나지 못한다는 쪽방촌을 석 달 만에 탈출하기까지, 그가 얼마나 힘들게 일을 해야 했는지도.
달칵.
마침내 문이 열리는 소리가 은혜의 상념을 깨웠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다가오는 정우를 보며 은혜가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더운물로 샤워를 했는지 그의 흰 목덜미가 조금 불그스름했다.
“아, 오빠. 잠시만. 고기만 접시에 담으면 돼.”
“응. 천천히 해.”
그녀의 뒤에서 손을 뻗어 찬장 안의 접시를 꺼내며 정우가 부드럽게 말했다. 189의 장신인 그는 은혜가 고개를 바짝 들고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체육관 관장이 사실은 권투 선수보다 킥복싱에 더 어울릴 몸이라고 했던 그의 체구는 거대하다기보다 날렵해 보였다.
“…이건 불공평해.”
“뭐가.”
“난 오빠 따라잡으려고 진짜 열심히 컸는데 오빤 그것보다 더 컸잖아.”
“이 정도도 훌륭해.”
정우가 피식 웃으며 버릇처럼 그녀의 앞머리를 슥,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 바람에 은혜는 그의 몸에 빼곡하게 들어찬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코앞에서 볼 수 있었다. 매끈한 지점토를 섬세하게 빚고, 조각칼로 움푹움푹 자국을 낸 후 그 경계를 문질러 명암을 뚜렷하게 한 것 같은 상체에서 기분 좋은 비누 냄새가 흘렀다.
“냄새 너무 좋은데?”
“…어?”
생각을 그대로 들킨 건 아니겠지. 흠칫 놀라며 은혜가 눈을 깜빡이자 정우가 미간을 근사하게 모으며 중얼거렸다.
“진짜 맛있는 냄새 나서.”
다행히 밥 이야기였지만 은혜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젖어서 이마를 살짝 가리는 짤막한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따로 스타일링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잘생겼으면 반칙 아닐까.
“무슨 생각 해?”
정우가 티셔츠를 몸에 꿰며 그녀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은혜는 멍한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고개를 재빨리 흔들었다.
“아무 생각도 안 해. 배고프지? 앉아 있어.”
“밥은 내가 담을게.”
“됐네요. 하루 종일 일해 놓고선 집에서도 일이야?”
“넌 하루 종일 공부했잖아.”
“땡땡이도 치거든?”
은혜가 밥통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을 저어 예쁘게 보이도록 수북이 담았다. 식탁 위는 정우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어때?”
“진짜 최고.”
찌개 국물을 맛본 정우는 짤막하고 강력한 감상을 내뱉은 후, 곧장 식사를 시작했다. 소리 없이 빠르게 줄어드는 그의 밥공기를 보며 은혜가 신이 나서 조잘조잘 입을 열었다.
“그치. 대박이지. 와. 오빤 무슨 복이 있어서 나 같은 여동생이 있냐. 공부 잘해. 요리 잘해. 오빠한테 잘해. 안 그래? 내 친구들은 친오빠 보기를 다 철천지원수같이 보던데.”
장난기 어린 눈동자를 반짝이며 내뱉는 은혜를 보며 정우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약하게 웃었다.
“어어, 왜 웃는데? 방금 그 표정 뭐야?”
“아니. 네 말 다 맞아서.”
음식을 깔끔하게 씹어 삼킨 후 짙은 눈썹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그림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았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참 닮은 남매라고 말했다. 옆집 아주머니도, 경비 아저씨도 같은 말을 했지만 은혜는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에 정우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멋진 사람이었으니까.
“나한텐 네가 최고야.”
새삼스러운 감상에 이마가 조금 뜨끈해지는 걸 느끼며 은혜가 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하여튼 진지 열매 먹은 사람한텐 뻘쭘해서 무슨 말을 못 해요.”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그를 보며 은혜 역시 예쁘게 웃음 지었다. 평소와 같은 저녁. 소박하고 행복한 가족 식사였다.
“오빠, 내일모레 우리 뭐 할까?”
정우가 설거지를 마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은혜가 그에게 대뜸 물었다.
“모레? 왜?”
정우가 되묻자 은혜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기대감에 빛나던 눈빛에 실망이 들어차고, 그것을 애써 감추는 표정이 차례로 스쳐 갔다. 정우는 짐짓 웃음을 참으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오빠 요즘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날짜도 다 까먹었지? 오늘 5월 29일이야. 내일모레 말일이고.”
“응, 알지. 벌써 6월이네. 시간 진짜 금방 간다.”
“놀리지 말지. 나 진짜 열받으려 그러니까.”
은혜의 예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자 그제야 정우의 기다란 입술에서 너털웃음이 터졌다.
“방에 가서 옷장 열어 봐.”
“뭔 소리야?”
“얼른.”
그가 잔뜩 성이 난 그녀의 어깨를 짚은 채 마치 행진하듯 앞으로 밀었다. 은혜는 씩씩거리면서도 그에게 떠밀려 제 방으로 들어가 작은 옷장 문을 열었다. 구석에 얌전히 놓인 익숙한 로고의 박스를 보는 은혜의 목소리가 얼떨떨하게 조금 떨렸다.
“…저게 뭐야 오빠?”
“생일 축하해, 은혜야. 이제 완전히 성인이네. 21살.”
이런 건 대체 언제 가져다 놓은 걸까. 정우를 보며 은혜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집에 컴퓨터가 두 대씩 뭐 하러 필요한데.”
“그냥. 사 주고 싶었어. 너 대학생인데 내가 너무 무심했어.”
책상 위에 놓인 구형 데스크톱 역시 정우가 3년 전 중고 시장에 발품을 팔아 사 준 것이었다. 은혜는 머리를 스치는 며칠 전 일을 떠올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둘이 같이 시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 집 앞 카페를 지나치며 노트북에 코를 박고 있는 대학생들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의 옆얼굴이 떠올랐다.
“다들, 노트북으로 뭐 하는 거지?”
“응? 과제도 하고 공부도 하고. 할 거 천지지.”
그때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한 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가 고갯짓을 하며 그녀를 재촉했다.
“대학생들한테 인기가 제일 많은 모델이라더라.”
주인이 전세금을 올리지 않으면 자신이 들어와 살겠다고 엄포를 놓은 게 얼마 전이었는데. 생일 선물까지 미리 준비해 놓은 그의 마음도 모르고 괜히 실망이나 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은혜는 마른침을 삼킨 후,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웃으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에이. 근데 나 저렇게 비싼 노트북 필요 없는데.”
정우가 그녀를 응시하며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은혜는 열심히 말을 이었다.
“찾아보면 저렴이들도 진짜 많아. 오빠, 우리 그냥 저거 반품하고 딴 거 사자. 응?”
“반품 안 돼. 현금으로 사고 영수증 버려서.”
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은혜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소비자 법이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 내가 해결할게.”
“은혜야.”
“이거 어디서 샀어? 내가 바로 전화할 테니까 매장 어딘지….”
“이은혜.”
정우가 그녀의 말을 자르자 은혜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성까지 붙여서 이런 식으로 부르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우가 이렇게 나올 때는 화가 났을 때뿐이니까.
“눈 피하지 말고 나 봐.”
익은 벼처럼 숙인 고개가 올라올 줄 모르자 정우가 두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 아래를 슬쩍 들어 올렸다. 흔들리는 그녀의 시선을 가로채는 그의 미간에 날카롭게 주름이 잡혔다.
아. 오빠가 진짜 화났다.
그녀를 응시하는 유려한 남자의 목에 툭 불거진 울대가 일렁인 후, 대칭이 완벽한 입술이 열렸다.
“내가, 너한테 이 정도도 못 해 주는 사람이야?”
차갑다고 느껴질 법한 목소리. 은혜는 말도 하지 못하고 정우의 손에 걸린 고개만 가로저었다. 정우가 그녀를 이렇게 똑바로 바라보며 추궁할 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은혜원에서 생활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정우가 성인이 되고 그와 함께 살았던 지난 5년간, 그는 그녀의 보호자였다. 엄청나게 커다란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입 열어서 대답해.”
그녀를 아직도 애 취급하는 건 못마땅하지만 정우의 눈에는 아직도 그녀가 어리게만 보일 게 틀림없었다. 정우가 누구보다 빨리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은혜의 가슴이 더욱 뜨끈뜨끈하게 일렁였다.
“아니. 오빤 나한테 다 해 주는 사람이야.”
“내가 사 주고 싶었어. 그래서 샀어.”
사람의 귀를 사로잡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끝이 딱딱하게 갈라졌다.
“너한테만은 제일 좋은 거 해 주고 싶어. 그런데 왜 내 앞에서 저렴한 거 찾아. 누가 그러래.”
“여기서 제일 좋은 크림 주세요.”
“그게… 용도에 따라서 다 다른데요, 손님.”
“손요. 여자 손에 바르는 크림 중에 제일 좋은 걸로요.”
열여섯이 되던 해 겨울이었다. 오빠를 따라 무작정 은혜원을 나온 날. 허름한 여관방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빨갛게 터진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무조건 제일 좋은 크림을 달라 요구하던 정우가 그녀의 앞에 있었다.
“…왜 이렇게 속상하게 만드니.”
짙어진 눈동자를 보자 심장이 달음박질하는 것처럼 빨리 뛰었다. 마른침을 삼킨 후 은혜가 그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많이 화났어?”
정우가 그녀를 응시하며 낮게 내뱉었다.
“넌, 내가 화내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 없어, 아직.”
이건 완전 거짓말이었다. 지난 5년 동안 그에게 정말 눈물이 쏙 빠지도록 무섭게 혼난 적이 너무 많은데, 그것보다 더 화를 내면 어떤 지경이라는 말인가.
은혜의 입술이 뭘 말할 듯 말 듯 움찔움찔하다가 결국 작게 열렸다. 두서없는 변명이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타고 흘렀다.
“난 그냥… 오빠가 내 생일 까먹어 버린 줄 알았는데 갑자기 선물이 튀어나오니까 당황을 해서 그랬어.”
“내 생일은 잊어도 네 생일은 안 잊어.”
그러게. 여동생 생리 주기도 기억하는 사람이 생일을 잊을 리가 없는데. 우스우면서도 눈물이 핑 돌았다. 은혜는 울컥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그를 향해 웃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정우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고맙다는 말, 필요 없어. 그 말 들으려고 이러는 거 아니니까.”
“그럼 너무 고마울 땐 어떻게 해야 해?”
“그냥 웃어 주면 돼.”
“사실은… 나 너무 좋다, 오빠. 노트북 진짜 가지고 싶었거든.”
“그럼 미리 말을 했어야지.”
냉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딱딱하던 정우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부드럽게 풀렸다.
“응, 그러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어.”
은혜는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주는 그를 향해 더욱 환하게 웃었다.
“나 공부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아. 이번에도 장학금은 내 거야. 다 죽었어.”
“무리는 하지 마.”
뺨을 어루만지던 정우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손길이 눈물 날 만큼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무리가 뭐예요?”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농담하자 정우의 고른 치열이 조금 더 많이 드러났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가락이 가늘게 덮은 앞 머리카락을 느리게 비집었다. 그리고 이제는 상처를 만지겠지. 죄책감이 가득한 손길로, 지문으로 상처를 없애기라도 할 것처럼 끈질기게.
손가락 끄트머리가 그녀의 동그란 이마에 있는 상처를 부드럽게 건드리자 은혜의 기다란 속눈썹이 자동으로 가늘게 떨렸다.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거.”
정우가 답하며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이번엔 그녀의 가지런한 눈썹을 미간에서부터 바깥으로 천천히 쓸었다.
“오빠가… 되게 잘하는 거네. 한계까지 일하고 와서 또 한계까지 운동하고.”
“그런가?”
나직하게 웃으며 중얼거리듯 내뱉는 정우는 알까.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가끔 목이 간질간질해서 참을 수 없는 기분에 도달하게 한다는 사실을.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눈썹 개수를 다 헤아린 정우가 손을 천천히 뒤집었다. 툭 불거진 손가락 마디가 그녀의 얼굴선을 따라 그리듯 부드럽게 뺨을 타고 내려왔다. 이제는 그의 손이 닿는 모든 부분이 간질거렸다.
“머리, 정말 많이 길었다.”
그와 둘이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은혜는 더 이상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정우의 시선은 늘, 그녀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 자체가 그녀를 책임지기 위한 하루하루였던 까닭이다.
“왜? 짧은 머리가 더 괜찮아?”
그래도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불쑥 물었다. 정우가 중앙이 살짝 갈라진 그녀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툭, 건드리며 낮게 속삭였다.
“넌 뭘 해도 다 예뻐.”
동생 팔불출인 오빠가 내뱉는 흔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심장이 아플 정도로 빠르고 크게 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정우의 머릿속에 그녀는 아마도, 여전히 철없게 훌쩍이던 어린아이로 남아 있는 게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사람 얼굴을 만질 수가 있는 것이다. 심장 마비 걸릴 정도로 잘생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면서. 만져지는 사람의 입장은 생각도 않은 채 말이다.
“…오빠.”
은혜가 입술에서 떨리는 한숨을 작게 토해 내기 직전에 정우가 손을 거두었다.
“그럼 쉬어.”
정우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시선을 돌리는 그의 미간에 약한 주름이 잡히고 목에 핏대가 불끈거렸다. 은혜는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혹시, 티가 난 걸까…?
정우의 손길은 예전에 그녀가 어릴 적 껌 붙은 머리카락을 잘라 주었을 때와 똑같이 다정했다. 그의 태도 역시 변함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의 눈에 그녀의 변화가 보이기라도 한 걸까.
부끄러움도 모르고 멋대로 혼자 나대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리기라도 한 걸까. 냉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방을 나서는 그의 뒤에서 은혜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빠!”
은혜는 정우가 자신을 의심하기 전에 그의 앞으로 다가가 부산스레 입을 열었다.
“모레는 그럼 우리, 문 다 열어 놓고 고기 굽자. 오랜만에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어때?”
정우의 얼굴이 조금 굳는 걸 보며 은혜가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나 성인 된 지 한참 됐거든?”
선배들이 주는 술을 거절하지 못하던 신입생 때 딱 한 번 만취한 게 다였다. 미친 듯이 울리는 그녀의 전화를 누군가 대신 받고, 술집 구석에서 쓰러진 그녀를 업고 집으로 돌아온 이후 정우는 그녀가 술을 마시는 걸 매우 티 나게 싫어했다.
“소주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빠랑 마시는 건데 뭐.”
“…너 생일날 친구들 만나서 파티 한다고 하지 않았어?”
정우의 입에서 나온 건 예상치 못한 소리였다.
“응? 그건 내일 하기로 했는데?”
정우의 표정이 난감해지는 걸 보며 은혜가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생일은 늘 그와 함께였다. 쪽방촌에서 일회용 부탄가스 버너로 정우가 처음 미역국을 끓여 줬을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미역이 엄청나게 불어나 국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던 그의 생애 최초 요리. 정우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지만, 은혜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때만큼 의미 있게 느낀 적이 없었다.
“내 생일은 오빠랑 보내는 거 당연하잖아.”
“모레, 일 잡았어. 넌 약속 있다고 해서.”
당황스러운 마음에 은혜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내일이랑 모레 둘 다 휴일이잖아. 소장님 지방으로 가족 여행 가신다며.”
“그 일이 아니라….”
“그게 아니면 무슨 일인데?”
“스파링 하려고.”
은혜의 눈썹이 미간에 확 모였다.
“하지 마.”
“약속이 된 거야.”
“오빠.”
은혜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당연했다. 스파링 파트너는 정우가 급한 돈이 필요할 때만 나가는 일이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올랐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따뜻하고 몽글거리던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기분이다. 거기에 갑자기 등장한 고가의 노트북이 겹쳐지자 얼굴에 핏기가 가시며 심장이 쿵, 쿵, 빠르게 뛰었다.
“고기는 주말에 실컷 먹자.”
뭐라고 그를 붙잡을 기회도 없었다. 말을 마친 정우가 문까지 닫아 주며 그녀의 방을 떠나 버린 탓이었다.
은혜는 숨을 몰아쉬다가 책상 의자를 빼고 풀썩, 주저앉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먼지 하나 내려앉지 않은 최고 스펙의 노트북을 노려보았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난다.
전세를 연장 계약하며 집주인은 천만 원의 전세금 인상을 요구했다. 정우는 저축한 돈이 있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그걸 위해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옆에서 그녀가 봐서 알았다.
정우가 그녀에게 가져다주는 생활비가 말 그대로 수입의 전부인 걸 빤히 아는데. 말이 돈 천만 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생일 안 챙겨 준다고 징징대는 철부지 여동생의 선물까지 챙겨야 하는 것이다.
이게 뭐라고.
고작 내 생일 따위가, 대체 뭐라고.
전공책을 사납게 펼쳤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은혜는 주먹을 꽉 쥔 채 젖은 숨만 몰아쉬었다. 방음이 전혀 안 되는 옆방에서 정우가 듣고 달려오기라도 할까 봐, 소리 내어 울 수조차 없다.
그녀더러는 자기를 속상하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그녀가 속상한 건 생각도 못 하는지.
은혜는 결국 뜨거운 얼굴을 양손에 파묻어 버렸다. 정우가 야속하고 미운 동시에 가슴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
시장통의 여관방에서 눈을 뜬 바로 다음 날. 정우는 직업소개소에 찾아가 곧바로 일용직을 시작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노가다, 건설 현장의 노동자였다.
시설을 떠나며 정우가 독립 지원금으로 받은 돈의 절반은 쪽방촌에 방을 얻는 데 들어갔고, 나머지는 은혜의 새로운 교복과 참고서 그리고 두 식구가 먹고살 생활비로 모조리 없어졌다.
그의 손을 꼭 잡고 쪽방촌에 들어간 첫날, 정우는 말없이 잡은 손에 힘을 주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마치 죄를 고백하는 사람처럼 토해 내듯 약속했다.
우리는 여름이 오기 전, 반드시 이곳을 떠날 거야. 그러니까 오빠 믿고, 조금만 참아 줘. 은혜야. 미안하다.
그때쯤 은혜는 정우가 약속을 반드시 지키리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겨우 열여섯이었고, 정우는 그녀가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어른이었다. 시설을 나오고 나니 몸으로 체감하게 되는 진실이었다.
석 달 후, 여름이 아직 오기도 전에 정우는 약속을 지켰다. 그들이 책가방 하나씩만을 메고 쪽방촌을 탈출하던 날. 좁은 길을 꽉 막고 세워진 구급차가 보였다. 술만 마시면 소리를 지르는 옆집 사는 아저씨는 한때 회사의 사장님이었다고 했다.
사흘 동안 조용하던 그가 자살했다는 건, 죽음이 일상적인 그곳 사람들에게는 그리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다.
들것에 실린 시체가 방에서 빠져나왔다. 엄마의 장례식조차 가지 못했던 은혜가 사람의 죽음을 실제로 대면한 건 처음이었다. 흰 천이 미처 가리지 못한 시체의 발은 거무죽죽해 마치 통나무처럼 보였다.
“이리 와.”
정우는 가방을 각각 양어깨에 메고, 다리에 힘이 풀려 후들거리는 은혜를 들어 안았다.
“눈 감고 있어.”
은혜는 뜨끈한 눈가를 정우의 목덜미에 푹 묻었다. 굽이굽이 굽은 언덕길을 성큼성큼 내려오는 그의 온몸에선 온통 파스 냄새가 진하게 났다.
정우가 마련한 그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입시 학원이 즐비한 고시촌이었다. 그는 창문이 없는 가장 낮은 가격의 고시원으로 들어갔고, 은혜는 그와 한 골목 떨어진 여성 전용 고시원으로 넣었다.
“저 안 돌아갈 거예요. 오빠랑 같이 살 거예요, 원장 수녀님.”
고시원에 찾아온 원장 수녀님은 목소리를 높이는 그녀와, 곁에서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정우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베드로는 꼭… 어릴 때 보는 것 같구나. 눈이.”
그녀 때문에 고생을 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소년의 모습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정우에게 건넨 원장 수녀님의 말을 은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은혜원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심했을 뿐이다.
고시원 생활은 쪽방촌과 비교할 수 없었다. 일단 밥과 김치가 무제한으로 제공되었기에 정우는 더 이상 굶지 않아도 됐다.
은혜는 원할 때면 언제든지 안전하게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오빠와 함께 살지 못한다는 것만이 유일한 아쉬움이었지만, 정우는 또다시 그녀에게 약속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들겠다는 약속이었다.
은혜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정우는 스물한 살이 되었다. 그가 노가다판에서 알게 된 기술자에게 타일 시공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건설 용역으로 몸을 써서 버는 돈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기술자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지만 전문가 수준에 이를 때까지는 박봉이었다. 정우가 은혜를 위해 해 주고 싶은 것은 열 손가락이 차고 모자랄 정도로 많은데, 손에 쥐는 돈은 너무 작았다.
“…오빠?”
“너 여기 오지 말라고 했지.”
정우가 지내는 고시원은 그 동네에서도 가장 가격이 쌌다. 노인들과 실업자, 병자들이 대부분인 곳에 은혜가 드나드는 것을 정우는 끔찍하게 싫어했다.
하지만… 노점에서 길거리 음식을 먹고 헤어지는 일이 있어도 매일매일 안 본 적은 없는데 정우는 자꾸만 바쁘다고 했다. 다른 날도 아니고 그녀의 생일인데도 만나 주지 않는 그에게 단단히 삐져 이틀을 참았고, 결국 화가 나서 들이닥친 참이었다.
“이게 뭐야. 오빠. 얼굴이… 왜 이래!”
은혜의 얼굴이 사색이 된 것은 당연했다.
“별일 아냐.”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정우의 얼굴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잘생긴 눈매는 멍들고 찢어져 자취를 아예 감추었고, 입가는 피딱지가 말라붙어 있었다. 감탄이 나오는 각도를 그렸던 콧날은 주변이 완전히 퉁퉁 부어올라 광대뼈와 비슷한 높이로 보였다.
“…오빠. 하아…!”
“괜찮다니까.”
괜찮을 리가 없었다. 은혜는 그녀를 달래는 정우의 앞에서 무너지듯 무릎을 꿇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이랬어? 오빠, 누가 이랬냐고!!!”
내일이 시험이라는 것도 관계없었다. 옆방에서 누군가 쿵, 하고 벽을 두드렸지만 은혜는 개의치 않았다.
“경찰서 가. 지금 당장 나랑 경찰서 가!”
“일하고 온 거야. 우연히 체육관 친구 만났다고, 소개로 간단하게 스파링 파트너 한다고 말했었잖아.”
정우는 그녀를 달랬지만 은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이게… 간단해? 사람 얼굴을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 흐윽….”
서러운 눈물이 뚝뚝, 떨어져 그녀의 교복 블라우스를 적셨다. 정우가 얻어맞을 정도면 얼마나 강한 사람이라는 뜻일까. 어린 그녀가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보았던 무서운 뉴스들이 주르륵, 그녀의 머릿속에 연달아 떠올랐다.
“어려운 일 아니었어. 나한텐 쉬운 일이었어. 그것보다 은혜야. 이거.”
그녀를 달래듯 내뱉으며 정우가 책상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뭐야?”
“생일 선물이야. 늦어서 미안하다.”
은혜의 눈동자가 둥그렇게 젖어 흔들렸다. 굳은살이 박이고 찢어지고 멍든 그의 손에는 명품 로고가 박힌 예쁘장한 지갑이 들려 있었다.
“요즘 애들은 이런 거 다 하나씩 가지고 다닌다며.”
“…….”
은혜의 양 주먹이 치마 옆에서 소리 없이 떨렸다. 시기 반, 질투 반이었다. 그런 애들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지나가듯 내뱉은 말이었다.
바보. 바보 멍청이 같은 이은혜.
은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정우의 앞에서 쓸데없는 말이나 조잘대는 자신의 무신경한 입을 꿰매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명분의 고시원 월세를 내는 정우. 그녀의 참고서를 사 주고, 운동화를 사 주고, 한창 클 때 많이 먹어야 한다며 일주일에 한 번씩 고기를 사 주면서도 자신은 1년째 티셔츠 두 장과 해진 잠바 하나로 생활하는 정우였다.
“기죽지 마. 내 동생.”
정우가 엉망으로 부어터진 얼굴을 찡그렸다. 그제야 그녀는 그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은혜는 자신의 고시원 방보다 훨씬 좁아터진 그의 방에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모든 것이 제 탓인 것만 같았다. 그녀가 정우를 따라 시설을 나온 게 잘못인 것 같았다. 아니, 입양 가는 차에 올라탔던 그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울고불고, 하느님께 제발 오빠를 다시 돌려보내 달라고 기도했던 게 죄인 것만 같았다.
“누가… 누가 이딴 거 사 달라고 했어…?”
정우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은혜는 그를 보며 미안한 마음만큼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오빠한테 이딴 거… 필요하다고 했냐고…!”
옆방에서 누군가 벽을 다시 쿵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여 욕설을 내뱉었다.
“에이 씨팔년놈들이, 떡을 치려면 치든가 왜 여기서 쌈박질을 하고 지랄이야!”
정우의 눈에 시커먼 불꽃이 튀었다.
쾅! 쾅!
그가 벽을 강하게 두드리자 마치 방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진동이 느껴졌다. 옆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우의 온몸에서 뿜어지는 것 같은 차가운 살기에 놀라서 입을 딱 다문 건 은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음에 네가 여기 오면 난 널 들여보낸 사람을 죽일 거야.”
정우가 화가 났다. 그걸 깨달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화를 내면 무섭다는 걸, 은혜는 그때 처음 알았다.
“이은혜.”
“미안해 오빠.”
“필요 없으니까 고개 들어서 나 봐.”
은혜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젖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자 정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낮게 물었다.
“내가 누구야.”
“…오빠.”
떨리는 목소리의 대답이 작게 흘러나왔다.
“그렇지. 넌 내 동생이지. 우리 가족이잖아.”
멍으로 얼룩덜룩한 얼굴을 하고 눈을 한쪽만 뜬 엉망진창인 얼굴로, 정우가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 내가 너한테… 이 정도도 못 해 줘?”
“나 때문에 오빠가 다치는 거 싫어.”
마지막 용기를 끌어모아 작게 반항했지만 실패였다. 정우가 그녀를 일그러진 눈으로 바라보며 내뱉었다.
“너, 도로 은혜원으로 돌아가.”
정우는 매일 이런 식이었다. 이건, 그녀가 정우 몰래 아르바이트를 한 걸 들켰거나, 그가 피우던 담배꽁초를 호기심에 한 번 입에 대 봤을 때의 상황이 아니었다. 정우는 매번 똑같은 협박으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이럴 거면 돌아가라고. 가출을 하든 뭘 하든 네 멋대로 살되, 앞으로 영원히 그의 눈앞에만 나타나지 말라고 살벌할 정도로 싸늘한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은혜는 그럴 때마다 정우에게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하지만 엉망진창으로 맞은 그의 얼굴을 보는 지금만큼은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만 없으면 정우는 지금보다 훨씬 더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겨우 이딴 걸로 쓸데없이 울고불고하면 나 너랑 같이 못 있어.”
“나도 알아.”
“네가 뭘 알아.”
“오빠한테는 내가… 아주 무거운 짐이라는 거, 나도 안다고.”
그녀가 열 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중얼댔다.
“근데 있잖아. 나는 오빠가 나 때문에 힘들게 고생하는 거 알면서도… 오빠랑 같이 있고 싶어서…. 흑…. 미안해….”
뭘 잘못했는지 정확히 말할 수 없으면서도, 은혜는 그에게 너무 미안했다.
“미안해, 오빠….”
정우가 우는 걸 싫어하는 걸 알아서 매번 꾹꾹 참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입술을 콱 깨물어 봐도 눈물 콧물이 멈추지가 않았다. 더 이상 어린애처럼 떼를 써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은혜는 하아, 하고 젖은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응. 갈게.”
“은혜야.”
“원장 수녀님한테 전화할게. 이제 고집 안 부리고, 오빠 고생시키는 일 없게….”
정우의 손이 그녀의 젖은 뺨을 감싸 올렸다. 은혜는 말을 멈추고 그와 시선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을 보면 결심이 흔들릴지도 모르지만 마음을 꽉 다잡으려 했다.
“누가 고생이래.”
정우가 화를 내는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직하게 내뱉는 순간, 방금 전까지 그를 떠나려고 했던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은혜는 갈대같이 나약한 자신을 붙들며 애써 고개를 저었다.
“누가 봐도 그렇잖아.”
은혜가 딸꾹질을 하자 그가 길게 숨을 내쉬며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난 지금 너 때문에 겨우 사는 거야. 원장 수녀님도 아시는 걸, 당사자인 너는 모르니?”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잔인할 정도로 다정했다. 종전까지의 싸늘함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오빠의 목소리 끝이 조금 떨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너 때문에, 내가 그나마 인간답게 열심히 사는 거라고. 가족이 있으니까. 난 혼자가 아니니까.”
“근데 왜 맨날 나더러 가라 그러는데에….”
서러운 굵은 눈물이 새 지갑에 뚝, 뚝 떨어졌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이리 와.”
“싫어!”
“다시는 그런 소리 안 할게. 네가 아무리 속상하게 해도, 다시는 가라는 소리 안 해. 약속해.”
마침내 안도감이 폭발했다. 은혜는 양팔을 벌리는 그의 품에 안겨 눈물 콧물을 쏟았다.
“그렇게 무서웠니?”
“당연하잖아…!”
“너 겁주려고 그냥 하는 소리인 거 정말 몰랐어?”
“오빠 미워…. 진짜 싫어….”
오빠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다친 그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어 그저 엉엉 울었다. 고시원 옆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 울었어?”
목이 마를 때까지 울고 난 후, 은혜는 그의 가슴에서 얼굴을 뗐다. 정우의 검은 티셔츠가 제가 흘린 눈물에 엉망이 되어 있는 걸 보자 그제야 창피했다. 그녀는 정우가 사 준 예쁘고 앙증맞은 지갑을 손에 꼭 쥐었다. 젖은 호흡을 애써 참으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오빠. 진짜 예쁘다.”
“고맙다는 말은 남한테나 하는 거야.”
“그럼… 뭐라고 해?”
너무 고마운데. 나는 오빠가 너무 고마워서 죽겠는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되묻자 정우가 퉁퉁 부어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그냥 좋다고 오빠한테 웃어 주면 돼.”
은혜는 그 말을 듣고 눈가와 입가를 벌겋게 물들인 채 입을 크게 벌려 웃을 수밖에 없었다. 확신컨대 그때 그녀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얼굴이었을 것이다.
“예쁘다. 우리 은혜.”
정우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정말 너무 예뻐.”
세상 어디에도 그만한 동생 바보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은혜는 바보 같은 얼굴로 웃으며 그에게 내뱉었다.
“사랑해. 오빠.”
여전히, 순결한 고백이었다.
그들은 고시원을 3년여 만에 벗어났다.
“이제부터 우린 여기서 살 거야.”
은혜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마침내 성인이 된 그녀가 대학 합격의 기쁨까지 거머쥔 후였다.
“다음엔… 더 좋은 집일 거야. 약속해.”
그녀의 손을 잡고 그들이 살 보금자리의 문을 처음 열던 날, 정우가 머뭇거리듯 덧붙였다. 물론, 눈이 휘둥그레진 은혜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소리였다.
작지만 햇살이 환하게 들이치는 밝은 집. 정우를 만나기 위해 더 이상 바깥에 나갈 필요가 없는 집. 방 두 칸에 욕실, 주방까지 딸린 집의 낡은 현관에서 은혜는 한참 동안 움직이질 못했다.
“진짜… 여기 우리 집이야 오빠? 우리 둘만 사는 집?”
정우가 기다란 입꼬리를 올려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잠시 빌린 집이지만….”
“너무 좋아…!”
강아지처럼 그에게 와락 뛰어드는 은혜를 끌어안고 정우가 작게 웃었다.
“그렇게 좋니.”
“응…! 응!”
낡은 트럭에 실린 그들의 짐은 고작 박스 대여섯 개가 전부였다. 가구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빈집이었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이사하는 날은 짜장면 먹는 거 맞지?”
신문지가 깔린 바닥에 주저앉아 은혜는 짜장 소스를 온 얼굴에 묻힌 채 젖은 눈으로 활짝 웃었다. 고맙다는 말 대신, 그가 원하는 말을 몇 번이나 해 주었다.
“…좋아. 너무너무 좋아. 최고야, 오빠. 오빠는…? 오빠도 좋지? 응? 응?”
그녀의 입술을 닦아 주는 정우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때 정우는, 과연 무슨 생각이었을까.
***
은혜는 이불 위에 누워 소리 없이 눈을 깜빡였다. 벽을 하나 사이에 둔 옆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빠의 숨소리라도 들리면 좋을 것 같은데, 고요한 정적만이 흐를 뿐이었다.
달칵.
옆방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은혜는 얼른 눈을 질끈 감았다. 냉장고 소음이 잠시 끊어지다 이어졌다. 거실에 나온 정우가 물을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인기척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물론 이 시간에 그녀의 방 문이 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1평 반짜리 쪽방촌에서, 정우와 서로 어깨와 발이 겹쳐질 정도로 가까이 잔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오래전 일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우는 그와 둘만 있을 때도, 은혜가 스스로 ‘여자’라는 성을 가진 인간임을 확실히 의식하게 만들었다. 이 사회가 어린 여자아이에게 특히 위험한 사회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정우를 교도소에까지 가게 만들었던 과거의 사건 이후에도 간간이 위험한 일이 벌어질 뻔했기 때문이다. 가격이 비싼 여성 전용 고시원에 그녀를 묵게 한 것도 그녀를 위한 정우의 배려였다는 사실은 진작 깨달았다.
은혜는 언젠가 정우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오빠의 꿈이 뭐냐고.
“…너 결혼할 때 팔짱 끼고 들어가는 거?”
그러니까, 정우에게 그녀는 마치 딸 같은 존재라는 뜻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켜 주는 역할에 제한된다는 뜻이었다.
어둠 속에서 은혜는 조용히 마른침을 삼키며 쓰게 웃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녀의 유일한 보호자의 꿈이 너무나 소박해서. 하지만 그녀는 그 소박한 꿈을 절대 이루어 주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세상에서 제일 잘난 남자의 손을 놓고, 다른 이의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들 여자가 과연 있을까.
은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겨 덮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깨달았을 땐 이미 가슴이 벅찰 정도로 커진 마음이었다.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진심. 오빠가 혹시 눈치라도 챌까 매일 두려운 마음이었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자꾸만 욕심이 커져 가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정우에게 자신은 그에게 끝까지 책임져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아마도 그는 평생 그녀를 친동생처럼 아낄 게 틀림없었다. 아니, 피를 나눈 혈육조차 하지 못한 일을 기꺼이 할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정우에게 ‘책임’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점점 확실히 깨달았다.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아버지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친절했던 양모의 불행을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결국 구할 수 없었던 정우의 상처가 나중에야 보였다.
“네가 나를 믿어 준다면 난 너를 끝까지 책임질게. 약속해.”
그가 내뱉은 말의 무게가 얼마만큼 무거운 것이었는지, 당시 어렸던 그녀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달칵.
정우가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은혜는 어둠 속에서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 3시. 불 꺼진 식탁에 우두커니 앉아 오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달 생활비를 계산하고 자신의 노동이 얼마만큼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를 계산했을까.
돈 잡아먹는 귀신 같은 여동생에게, 또 뭘 해 줘야 할지를 고민했을까.
현실의 무게를 혼자 감당하며 그렇게,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걸까.
이제껏 그가 잠 못 이뤘던 밤이 며칠이나 되었을까. 아니, 잠을 잘 잘 수 있었던 날이 과연 며칠일까.
그럼에도 만일 그녀가 조금 전 눈을 비비며 바깥으로 나갔다면, 정우는 그 모든 걱정을 완전히 감춘 채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말했을 것이다.
‘잠이 안 와? 따듯한 차라도 한잔 줄까.’
은혜는 새우처럼 몸을 구부려 이불을 끌어안았다. 그녀에게 줄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 엉망으로 얻어터져 돌아왔던 정우는 아마 그 뒤로도 몇 번 더, 링 위에 올라 남들의 주먹을 상대하며 돈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의 시험 기간 때. 그녀가 수학여행을 갔을 때. 며칠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후 만나면 늘 그의 얼굴에 남아 있던 상처를, 애써 못 본 체해야 했다.
“하아….”
마치 가슴에 묵직한 돌이 얹힌 것 같았다. 정우는 그녀에게 그 흔한 아르바이트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럴 시간에 학점 따고 자격증 따서 좋은 데 취업하는 게 그를 도와주는 거라고 말했다.
“자기가 진짜… 내 부모인 줄 아는 거야…?”
부모도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숨겨진 여자였던 그녀의 엄마가 죽자마자 딸을 버렸던 그녀의 친아버지를 보면 알았다. 은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우의 무거운 짐을 더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