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4)

02

파양 이후, 말수가 현저히 줄어든 정우와는 반대로 은혜는 점점 더 말이 늘었다. 오빠를 웃게 해 주고 싶어서 늘 그의 앞에 얼쩡거리며 까불었다. 정우가 했던 것처럼 나이가 어린 원생들의 공부를 봐주었고 선생님과 원장 수녀님을 거들어 김장을 도왔다.

정우는 더 이상 시설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은혜원의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도, 그들의 고민을 들어 주거나 문제 해결사로 나서지도 않고 방관했다.

그를 염려한 원장 수녀님이 몇 번이나 조용한 곳에서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는 수녀님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 대꾸를 하지도, 마음을 털어놓지도 않았다.

마치 그의 주위에 넘을 수 없이 높은 벽이 생겨난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세운 벽 안에서 정우는 무섭게 자라났다.

밤새 다리를 잡아 늘이는 귀신이라도 다녀간 것처럼 하루하루가 달랐다. 원래도 큰 키였던 그의 골격은 각이 잡히고 탄탄해졌다. 중학교 입학 때 두 치수나 크게 맞추었던 교복 바짓단이 졸업 때는 어느새 껑충했다.

아이들은 그의 눈빛이 무섭다고 말했다. 어둑한 눈동자로 가만히 바라볼 때면, 뭔가 기분이 이상해지고 정수리가 쭈뼛거린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은혜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까만 하늘에 흐드러진 별을 닮은 정우의 눈을 가만히 바라볼 때면, 침묵 끝에 결국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더욱 바보 같았다.

“오빠, 이거 봐라.”

이제 숨바꼭질의 술래는 바뀌었다. 은혜는 예전의 정우가 자신에게 그러했듯, 혼자 있는 정우를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반년 동안 연습한 물구나무서기를 보여 주었고, 학교 수업에서 칭찬이라도 받은 날에는 꼭꼭 그에게 자랑을 했다.

“새로 온 원어민 쌤이 나 발음 특이하고 좋다고 했어. 꼭 다른 나라 살았던 사람 같대.”

그럴 때마다 정우는 인적 없는 공원 벤치에 가만히 앉아 그녀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오빠, 나 전교 부회장 됐다? 애들 절반 이상이 다 나 찍었어. 원장 수녀님이 나보고 그런 거 뭣 하러 나가냐 그래서 나랑 싸웠었잖아. 근데 총무 쌤이 그러는데… 수녀님이 소식 듣고 원장실에서 울었대. 내가 떨어질 줄 알았었나 봐. 그래서 상처받을 줄 알았나 봐.”

해가 바뀔수록 은혜는 시설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것도 모자라 아이들을 이끌었고, 원장 수녀님은 정우 때문에 학교에 불려 가는 일이 늘어났다.

“근데 오빠. 담배… 피우면 기분이 좋아져?”

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쯤 남은 장초를 눌러 껐다. 말없이 그녀의 책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그의 뒤를 은혜는 늘 따라붙었다. 머리에 껌을 붙이고 울던 때도, 훌쩍 자라 교복을 입기 시작한 때도 변함이 없었다.

중학교 1학년. 은혜가 또래보다 조금 늦은 초경을 겪고 난 후였다. 무거운 걸음으로 학교에서 돌아온 은혜의 앞을 정우가 가로막고 섰다. 열여덟이 된 정우는 이제 키가 너무 컸다. 은혜는 그의 앞에 서면 스스로가 항상 꼬마가 되는 기분이었다.

“…너 울었어?”

“아, 아니야….”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세수를 여러 번 했는데도, 정우는 그녀의 변화를 단박에 감지했다. 늘 말수가 적은 그였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눈가가 시뻘게진 그녀를 보며 정우가 낮게 되물었다.

“무슨 일이야, 이은혜.”

“오… 오빠….”

“말해. 당장.”

은혜에게 고아원 출신이라고 시비를 걸고, 인적 없는 거리에서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추행한 그녀의 중학교 선배는 처참하게 두들겨 맞고 PC방 골목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야구 선수를 준비하던 녀석의 아비는 경찰이었다. 갈빗대가 두 대가 나가고 코뼈가 부러진 아들을 보며 분노한 아비는 정우를 소년 교도소에 집어넣었다. 성인 교도소에 가야 할 정도로 악질적인 범행을 저지른 전국의 미성년자들이 한데 집합하는 곳이었다.

전과가 남는 것만은 막게 해 달라고, 부디 보호 처분으로 끝내게 해 달라고 10장의 수기 편지를 썼던 원장 수녀님의 노력은 끝끝내 전해지지 않았다.

8개월 뒤,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채 시설로 돌아온 정우의 눈빛은 한층 더 짙고 어두워 보였다. 아이들은 이제 그가 주위에 다가오기만 해도 슬금슬금 피했다. 그의 곁에 딱 달라붙어 쫑알대는 건 여전히 은혜뿐이었다.

“나 이제 학교에서 애들이 아무도 못 건드린다? 일진 동생이라고 소문나서. 바보들 아냐? 진짜 일진은 오빠한테 얻어터진 그 자식인데. 누구한테 머저리 같은 별명을 갖다 붙여.”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손에는 새하얀 두부까지 들려 있었다. 정우는 은혜에게서 두부를 받아 들고 말없이 전부 먹었다. 그걸 먹는다고 해서 앞으로 그의 인생이 희게 빛날 거라는 걸 기대해서가 아니었다. 은혜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 다 먹지 않으면 아무 데도 안 갈 거라는 듯,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선 채로.

정우는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대신, 시내에 있는 허름한 체육관에 나가기 시작했다. 권투로 라이트급 챔피언 경력이 있다는 관장은 그에게 주먹 쓰는 데는 탁월한 소질이 있다고 말했다.

체육관으로 향하는 정우를 쫓아가서 풀 스파링을 하던 정우를 처음으로 보았던 날, 은혜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땀에 젖은 그의 몸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며 상대를 난타했다. 주먹이 빠르게 꽂힐 때마다 상대가 비틀거렸고 정우는 더더욱 강하게 그를 몰아붙였다. 사방이 폭력의 열기로 들끓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오빠!!!”

휙! 상대의 주먹이 날아오자 놀란 은혜가 정우의 이름을 외치며 소리를 쳤다. 공격을 피한 정우가 그녀를 힐끗 바라보는 사이 방어가 흐트러진 그에게 곧바로 다음 주먹이 날아와 복부를 강타했다.

“우리 오빠, 때리지 마. 이 나쁜 새끼야!”

은혜의 눈이 뒤집혔다. 링 위에 뛰어 올라오는 그녀를 보고 모두가 당황했고, 그다음엔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뭐야, 정우 동생이야? 하하. 정우 닮았으면 한 주먹 하겠네!”

“이리 나와.”

정우의 어깨에 짐짝처럼 번쩍 들려 바깥으로 쫓겨나며 은혜 혼자만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엉엉 울었다.

체육관 관장은 정우를 선수로 키우고 싶어 했다. 대회에 나가도 승산이 있을 거라고, 당사자인 정우보다 더욱 흥분해 그를 훈련시켰다. 정우가 권투 선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은혜는 점점 더 두려워졌다.

왜 하필 위험한 스포츠여야 했을까.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면 무서운 정보만 한가득 나왔다. 권투 선수가 폭행으로 잡혀 들어가면 가중 처벌이 된다고 했다. 경기 중 사망한 선수의 뉴스를 기어이 클릭해 보고야 말았을 때는 온몸에 오한이 들어 그날 하루 종일 밥을 먹지 못했다.

오빠가 권투를 그만두게 해 달라고 그녀가 간절히 기도하고 얼마 있지 않아, 관장이 빚보증을 서 준 선수 하나가 잠수를 탔다. 정우와 함께 그가 키우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결국 관장의 유일한 재산이었던 허름한 체육관은 문을 닫아야 했다. 정우는 딱지가 붙여진 체육관 구석에 주저앉아 강소주를 마시는 관장의 곁에서 마지막까지 묵묵히 정리를 도왔다.

“오빠, 미안해.”

“뭐가.”

“내가… 오빠 권투 못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서… 체육관 망한 거 같아. 나 기도발이 예전부터 좀 받았거든.”

권투 글러브가 담긴 박스를 들고 걸으며 정우가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기도를 왜 했는데?”

“오빠가 다치는 거… 싫어서. 근데 부정 탔나 봐.”

정우는 이제 스무 살이었고, 그녀는 열여섯이었다. 은혜는 귀신이 무섭다고 울던 정우의 거짓말을 깨달을 정도로 자랐지만, 혼자 어른이 되어 버린 그에게 닿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작았다. 좁혀지지 않는 건 나이 차뿐만이 아니었다. 마음의 거리는 오히려 더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해가 갈수록 바뀌는 정우가 그녀와는 다른 세계로 완전히 떠날 것만 같았다.

“미안해.”

은혜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사과했다. 정우는 박스를 나무 아래에 툭, 내려놓고 나직하게 내뱉었다.

“신경 쓸 거 없어. 딱히 좋아서 한 건 아니니까.”

“…그럼 권투 왜 했는데?”

“답답해서.”

상자 안에서 글러브를 꺼낸 후, 정우가 제 가슴을 툭 한 번 두드렸다.

“여기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서 뭐든 치고 싶었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정우의 눈빛은 공허했다. 은혜는 언제부터인지 그의 눈을 보면 울고 싶어졌다. 별빛처럼 반짝이던 정우의 눈은 텅 비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듯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차가운 겨울. 글러브를 박스 안에 도로 던지듯 넣고 미련 없이 돌아서는 그의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으니까.”

은혜는 불안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소리 없이, 하지만 장렬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게 뭔지 아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우야…. 안 그래도 된다. 천천히 나가도 돼. 아무도 너 등 떠미는 사람 없어.”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문 닫힌 원장실 바깥에 숨어 정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은혜의 온몸이 떨렸다. 결국, 정우는 떠날 작정이었던 것이다.

“은혜가… 많이 서운해할 텐데.”

“가끔 오겠습니다.”

거짓말이잖아. 은혜는 더 이상 그의 하얀 거짓말에 속을 정도로 어리지 않았다. 교도소로 떠나며 정우는 괜찮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절대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는 사실은 정우가 출소 후 얼마 되지 않아 확실히 깨달았다.

팔뚝 길이만 한 칼을 들고 시설 뒤편 공원에서 정우에게 달려들었던 이는 그와 교도소에서 한방을 썼던 이라고 했다. 정우는 그 사건으로 병원에 2주일이나 입원을 해야 했다. 돌아온 정우는 은혜가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음에도, 간단한 교통사고였다고 거짓말을 했다.

은혜는 그 길로 방으로 달려가 몰래 짐을 쌌다. 늘 들고 다니는 책가방에 속옷과 옷가지, 양말과 한 달에 2만 원씩 꼬박꼬박 모았던 비상금을 챙겼다.

“버스 출발합니다.”

정우는 은혜가 미리 예상했듯 그녀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훌쩍 떠날 계획이었다. 은혜는 학교에 가지 않고 시설 주위에 몸을 숨겼다. 배낭 하나 든 채 원장 수녀님께 고개를 꾸벅 숙이고 떠나는 그를 몰래 따라붙었다. 그건, 은혜에게 단 하나의 선택지였다.

목도리로 칭칭 감아 얼굴을 가린 채 정우가 올라탄 고속버스에 맨 마지막으로 몸을 실었다. 혹시나 정우에게 들킬까 싶어 휴게소에서도 내리지 않고 자는 척을 했다.

여섯 시간의 여정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후, 제일 빨리 내려 화장실로 달려갔다. 터질 것 같은 오줌보를 부리나케 처리하고 바깥으로 뛰어나와 정우를 찾았다.

1분도 안 되는 사이 혹시라도 사라졌을까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시야에 그가 보였다. 정우는 초조한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터미널 대기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은혜는 곧바로 그에게 달려가 양팔을 벌리고 정우가 달아날 행로를 봉쇄했다. 종이에 쓰면 누군가 보기라도 할까 봐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외워 준비했던 말을 모조리 토해 내듯 뱉었다.

“따라왔다고 놀라지 마. 나 오빠랑 같이 살 준비 다 하고 온 거니까. 왜인 줄 알아? 오빠가 내 머리 싹둑싹둑 다 잘라 냈을 때부터 오빠는 날 책임지기로 결정이 돼 있었어. 오빠 때문에 나 이마에 흉터도 생겼잖아. 이거 봐. 여기 보이지? 그래서 맨날 앞머리 내리고 다니는 거야.”

그의 눈빛이 조금 어둑해지는 걸 보며 은혜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오빠는 나한테 큰 빚 진 거야. 오빠 지금 속으로 나 다시 돌려보낼 생각 하고 있지? 그러기만 해 봐. 나 가출할 거야. 비행 청소년 될 거야.”

일장 연설을 하는 은혜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정우는 화를 내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대신 하등의 쓸모 없는 질문을 했다.

“배 안 고프니?”

“안 고파.”

“너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정우의 뒤를 밟는 계획에 머리가 복잡해 아침은 당연히 뜨는 둥 마는 둥이었고, 휴게소에선 숨느라 내리지도 못했다. 마치 눈으로 본 듯 다 맞히는 그를 보며 은혜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빠는 지금 내 밥이 중요해…?”

꼬르륵.

때마침 그녀의 배 속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뱃고동 소리는 그 상황에 절대 어울리지 않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의 배낭을 벗겨 내 한쪽 어깨에 걸치고는 정우가 마침내 피식 웃었다.

“서울 짜장면은 어떤지 먹으러 가 볼까.”

그는 역전에 있는 허름한 2층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 주었다. 그러고는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후, 그녀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자리를 떴다.

짜장면은 금방 나왔지만 은혜는 젓가락을 들지도 않았다. 정우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은혜는 가방을 끌어안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째깍. 째깍. 벽에 커다랗게 붙은 시계의 빨간 초침이 움직이는 것만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크고 둥그렇고 못생긴 벽시계는 하필이면 원장 수녀님의 방에 붙어 있던 것과 똑같았다. 그녀가 처음 버림받은 방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은 현실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정우가 마침내 붉은 주렴을 걷으며 나타났을 때, 은혜의 두 눈에서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이 툭 터지듯 흘러내렸다.

“무슨 일이야.”

정우가 다 터진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오열하는 그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울어. 무슨 일 있었어?”

그가 슥 고개를 들어 빈 가게 안을 훑었다. 전화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나 있었던 잠깐 사이, 설마 누군가 그녀를 해코지라도 했던 걸까 싶었지만 허름한 가게 안에 손님은 그들뿐이었다.

“오빠가… 도망간 줄 알았어.”

눈물이 자그마한 턱을 타고 흘러내려 퉁퉁 붇기 시작한 짜장면 면발을 적셨다.

“기다리라고 말했잖아.”

“은혜원 처음 갔을 때도 그랬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빨리 온다고…. 데리러 올 거라고 그랬는데….”

정우가 냅킨을 뽑아 내밀었지만 은혜는 받을 생각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래서 오빠도 안 올 줄 알았어. 나 같은 거 귀찮아서…. 흐윽…. 이제 다시는 안 보는 줄 알고….”

“원장 수녀님 걱정하실까 봐 전화하고 온 거야.”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보며 정우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잠깐 내가 데리고 있어도 되냐고, 허락받은 거라고.”

원장 수녀님은 염려하는 목소리를 내면서도, 은혜라면 그럴 줄 알았다고 말했다. 은혜가 걱정된다고 오히려 정우와 그녀가 같이 있는 게 더 안심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오지 않겠냐고 설득하는 원장 수녀님께, 다시 연락드리겠다는 말을 하고 끊었다.

“그걸 나한테 물어봐야지 왜 원장 수녀님한테 물어보는데…! 흐윽…. 내가 애야?”

아무것도 모르는 은혜가 엉망이 된 얼굴로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소리를 쳤다.

“네가 애지 그럼 성인이야?”

정우의 눈이 날카롭게 길어졌다. 입술을 아프게 꽉 깨무는 그녀를 향해 그가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눈엔 너 아홉 살 그때랑 똑같이 보여. 머리에 껌이나 붙이고 징징거리는 애 같다고.”

은혜의 서러움이 마침내 폭발했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와서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여기까지 따라온 그녀가 귀찮아서, 정우가 이제 완전히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까 무서운 마음은 알지도 못하는 걸까. 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다그쳤다.

“애 취급 받기 싫으면 지금 당장 눈물 그쳐.”

“오빠 진짜 왜 그래?”

시설에 있던 것과는 달리 갑자기 싸늘하게 구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처음 발을 내딛는 정우도 충분히 불안한 마음이었다는 걸, 그때 은혜는 알지 못했다.

“기다리라고 했지 울고 있으라고 한 적 없으니까.”

새빨개진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정우는 표정을 풀지도 그녀를 달래 주지도 않았다. 그의 표정이 화가 난 것 같아서 더욱 두려웠다.

“내가 그냥 가 버릴 거라고 생각하면 잡았어야지. 그렇게 불안했으면 따라왔어야지 왜 여기서 바보처럼 이러고 있어. 이러다 누가 너 잡아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정우의 눈동자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마치 눈도 깜빡이지 않는 사람 같았다.

“지금 당장 은혜원으로 돌아가.”

“싫어.”

은혜는 그의 시선에서 도망가지도 못하고 파들거리는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

“고작 10분도 안 되는 시간도 날 못 믿어서 불안해할 거면, 가출을 하든지 비행 청소년이 되든지 네 맘대로 하라고.”

“15분이었어!!!”

은혜가 두 눈에서 다시 눈물을 터뜨리며 소리를 높였다.

“…이은혜.”

“세상에서 가장 긴 15분이었어.”

은혜는 말 없는 그의 앞에서 열 오른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빠 안 믿었던 거 아니야. 날 안 믿었던 거지.”

“무슨 뜻이야.”

정우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나 같은 거… 아무도 안 좋아하니까. 그래서… 그래서 아빠한테도 버림받았으니까.”

은혜의 입에서 엄마가 아닌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우의 앞에서 은혜가 뜨끈해진 눈가를 손바닥으로 훔쳐 냈다.

“옛날부터 내가 오빠 많이 귀찮게 했잖아. 오빠는 착하니까 나 다 받아 준 거 알아. 내가 오빠 힘들고 짜증 나게 했던 거, 나도 알아…. 다 아는데….”

구라쟁이 이은혜. 울보 이은혜. 최정우 코딱지처럼 더럽게 딱 달라붙어 다니는 이은혜.

정우가 고개를 저으며 마침내 입을 뗐다.

“귀찮지 않아.”

은혜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정우는 그녀의 눈을 마주치며 다시 한번 또렷하게 내뱉었다.

“나는 네가 귀찮지 않아.”

“…….”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넌 내 가족이니까.”

은혜를 바라보는 정우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네가 나를 믿어 준다면 난 너를 끝까지 책임질게. 약속해.”

“…….”

“널 버린 사람들은 다 가짜야.”

“…오빠.”

“지금 이 순간부터, 진짜는 나뿐이야. 알았니.”

정우의 얼굴에 새끼손가락을 내밀고 환하게 웃던 첫 만남이 흐릿하게 겹쳐졌다. 가슴이 찌르르, 떨린다는 말은 이런 걸 말하는 걸까. 너무 좋아서 가슴이 아프다는 건, 이런 뜻일까. 거짓말이라도 좋았다. 그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대답해.”

“응…. 응!”

가방을 끌어안고서 은혜가 고개를 마구 끄덕이자 정우가 그제야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여전히 짧게 잘린 단발머리가 그의 손가락을 타고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그 다정한 손놀림에 다시 울음이 나오자 정우가 그녀를 낮게 나무랐다.

“속상하게 자꾸 울 거야?”

“미안해…. 오빠…. 히이…. 자꾸, 흐으… 내가 울어서 미안해…. 근데 좋아서 우는 거야…. 너무 좋아서…. 나 오빠랑 있는 거 너무 좋아서….”

“좋으면 웃어야지. 바보야.”

은혜가 바보 같은 얼굴로 입술을 찌익 늘어뜨렸다. 정우의 눈빛은 더 이상 텅 비어 보이지 않았다. 호수에 떨어지는 별빛 같은 정우의 두 눈동자에 은혜가 익히 아는 부드러움이 깃들었다.

“자, 먹어.”

은혜는 그에게서 나무젓가락을 얼른 받아 들었다. 엉망으로 불어 터진 면발을 마구 입에 넣었다. 이걸 잘 먹어야 오빠가 속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사람은 둘인데 음식이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은혜는 또래보다 늦된 열여섯 살이었고, 정우는 또래보다 조숙한 스물이었다.

“둘이… 뭐야? 가출 청소년 뭐 그런 거면 빨리 먹고 나가.”

“저 청소년 아니고 성인입니다. 얜 제 친동생이고요.”

낮은 목소리로 내뱉는 정우를 바라보는 중국집 주인은 그의 눈빛에 뜨끔한 듯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은혜는 아저씨가 그러거나 말거나 불어 터진 짜장면 한 그릇을 싹싹 비워 냈다. 그런 그녀의 입가를 정리해 주며 정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정우는 그녀의 진짜 오빠가 되었다.

눈발이 날리는 겨울, 시장 뒷골목에 위치한 허름한 여관방에서 정우는 그녀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처음으로 해 주었다.

정우는 어린 시절 중산층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랐다고 했다. 사업에 실패한 정우의 아버지가 한겨울 밤,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까지였다. 가족 모두와 함께 세상을 등질 작정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을 함께 데려가는 데는 실패했다.

아빠가 준 오렌지주스를 마신 어린 정우의 눈에 창밖에서 하늘하늘 날리는 뭔가가 보였다. 겨울의 첫눈. 눈사람을 만들고 놀고 싶은데, 문이 잠긴 안방에서 아빠와 엄마는 오늘도 부부 싸움 중이었다.

“우리 정우는 어떡하라고! 우리 정우는!!!”

“그래 내 잘못이니 같이 죽자.”

“정우야… 정우야…!”

아빠가 엄마의 목을 조르는 것도 모른 채 바깥으로 나와 눈을 맞다가 너무 졸려서 공원 벤치에 앉았다. 손이 꽁꽁 얼 정도로 추웠지만 맨날 싸움만 하는 부모가 있는 집에 돌아가긴 싫었다.

“어머, 얘! 눈 좀 떠 봐…. 얘!”

잠바에 눈이 내려앉은 채 웅크려 잠든 그를 누군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가족의 비극이 벌어진 후였다. 그를 데려간 작은아버지는 갑자기 떠맡게 된 군식구 때문에 아내와 줄곧 싸우다, 결국 그를 시설에 맡긴 후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오빠. 옛날에 오빠가 말했던 귀신이 부모님이었어…?”

“응.”

잠이 들면 악몽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그의 아버지가 그의 목을 조르는 꿈을 꾸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죽기 직전 애타게 그를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계속 환청처럼 따라다녔다.

“지금도 꿈 꿔?”

“아주 가끔.”

은혜는 모로 누운 채 정우에게 눈을 맞추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오빠 부모님은 더 이상 부모님이 아니야.”

정우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은혜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심장이 또 한 번 찌릿, 했다.

“말하자면 좀비 같은 거야.”

아랫목을 그녀에게 내주고 이불도 없이 누운 정우가 그녀를 보며 흐리게 웃었다.

“좀비?”

“응. 우리 자주 영화 같이 봤잖아. 좀비가 되면 부모가 자식도 몰라보고 공격하잖아. 그거랑 마찬가지라고.”

은혜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정우의 눈을 살포시 가린 후 말을 이었다.

“영화에선 꼭 그러지. 이미 변해 버렸는데도 사랑하니까…. 썩은 시체한테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니까 못 죽이고 망설이다가 물려서 같이 좀비가 되잖아.”

은혜는 자신의 손에서 솔솔 나는 기분 좋은 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여관에 오기 전, 정우가 사 준 핸드크림에서는 정우만큼이나 부드럽고 달콤한 향이 났다.

“오빠는 마음 약해서 도끼 못 휘두르니까, 내가 해 줄게. 도끼 없으면 야구방망이 휘두를게. 그것도 없으면 망치. 벽돌. 있는 대로 다.”

어둠 속에서 정우의 입술이 천천히 위를 향했다.

“너도 겁 많잖아. 근데 어떻게 그래.”

“겁나도 뭐든 다 할 수 있어.”

정우가 그녀의 손을 천천히 잡아 내리고 은혜를 바라보았다.

“…왜?”

은혜가 슬슬 졸린 눈을 깜빡이며 배시시 웃었다.

“사랑하니까.”

최초의 사랑 고백은 그들만큼이나 순결했다.

“오빠는 내 오빠니까. 하나밖에 없는 진짜 가족이니까.”

하품을 이길 수 없어 은혜가 손으로 눈을 비볐다.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던 정우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이불을 제대로 덮어 주었다.

“이제 자. 내일부터 바쁘게 움직일 거야.”

“응, 오빠.”

여관방 주인은 더러운 이불을 들고 내려온 정우에게 자신이 덮던 이불을 던지듯 건네주었다. 그게 이곳에서 그나마 제일 깨끗한 거라고 했다.

하루하루가 고달픈 이들이 들고 나는 허름한 여관방. 긴장이 풀린 은혜가 선잠에 빠지려 할 때 옆방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까무룩 잠들기 직전, 얇은 벽을 타고 욕설과 함께 남녀가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은혜가 뒤척이자 정우가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불편하고 이상한 소리는 이내 사라지고, 느린 박동으로 천천히 뛰는 오빠의 강인한 심장 소리만이 들렸다.

은혜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그의 품에 안겨 편하고 달게 잠을 잤다. 낯설고 시끄러운 곳이지만 정우가 있으면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그저 좋았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때, 정우는 겨우 스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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