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전 이세계에서 엘프의 노예가 되었다-140화 (139/140)

〈 140화 〉 140.

* * *

그날 밤은 전설로 남았다.

세계수가 하얗게 빛나며,

수많은 엘프의 영혼을 불러들인 그 날.

엘프의 긴긴 역사에서도,

세계수가 그렇게 감응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도시는 온통 내 이야기뿐이었다.

이천 명이 넘는 여성 엘프가 한날한시에 임신을 했다.

세계수의 축복을 받으려는 엘프들이 몰려, 임시로 번호표에 예약제까지 시행했다고 한다.

남자가 말라 서서히 시들어가던 도시는,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맞이한 것처럼 기쁨이 흘러넘쳤다.

후계자가 없던 수많은 귀족 가문들이 걱정을 덜었고,

평범한 엘프들도 자식을 가지는 기쁨을 맛보았다.

부귀한 자, 빈곤한 자, 귀한 자, 천한 자,

번식의 은총은 가리지 않고 도시에 깃들었다.

엘프들은 고맙다며 내게 선물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귀족가에서는 감당이 안 될 정도의 어마어마한 선물을,

평민들은 내가 머무는 세계수 아래 꽃다발 한 묶음을 남기고 갔다.

뜰이 지저분해지자, 이리스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꽃을 바치는 장소가 만들어졌다.

곱게 꾸민 꽃다발에서부터, 손으로 짠 투박한 화관까지,

소박한 정성들이 향기가 되어 도시 안에 가득했다.

대체 그 많은 처녀들을 어떻게 상대할까 미심쩍어하던 엘프들은,

기적을 보고 나를 신으로 떠받들었다.

원래부터 신의 사도라고는 했지만,

이제는 정말 내게 다이렉트로 기도를 올릴 정도로 위상이 올라갔다던가.

물론 기도의 내용은 대부분 그렇고 그런 것이었다.

“사도님께서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정말 이건…. 이제는 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네요….”

세레니아와 이실리아가 감탄하는 가운데,

나는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전 같았으면 여기서 우쭐해지고 오만해졌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새로운 나.

여신 패치를 받은 나.

나 ver. 3.0

다가올 길을 확실히 아는 나였다.

“세상에는 사랑받아야 할 엘프들이 많이 있어요. 아직도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이 모자라네요.”

“사도님…!”

“아아…!”

겸손하게 대답하는 내 모습을 보고 감명받아 둘.

“이제 이곳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으니, 다른 정력왕의 힘을 찾으러 가죠. 다음은…북쪽이었나요?”

“네. 북쪽에 백색 산맥의 스노우 엘프들을 관리하고 있는 대공이 사도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번에는 북쪽으로.

내가 떠난다는 소식에, 온 도시가 매달려 안타까워했다.

특히 대공인 이리스.

대공이면서 어린애처럼 매달려 눈물을 철철 흘린다.

“오빠아…. 흑흑.”

보내줘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몸에 매인 정이 쉽게 보내주질 못한다.

이것도 어쩌면 내가 힘을 마구 쓴 업보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리스가 맛본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의 쾌락.

존재 자체를 넘어 하나가 되는 궁극의 열락이었다.

그야말로 몸의 반쪽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일 것이다.

‘무조건 섹스섹스한다고 좋은 게 아니구나.’

내가 이리스의 반신이라면 이리스도 나의 반신.

억장이 무너지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자 나도 가슴이 아팠다.

앞으로는 적당히. 기분은 좋지만 지나치지는 않을 정도로만 해야겠다.

사랑을 나눠 주되, 나 없이도 홀로 설 수 있을 정도로만 말이다.

이리스는 떠나기 직전까지 나에게 매달리며 슬퍼했다.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다고 하면서도, 눈물이 계속 나온다고….

울면서 매달리는 이리스를 달래며, 일행은 어렵게 어렵게 출발한다.

이리스는 훌쩍이면서도 결국 나를 보내주었다.

이미 귀족들이 보낸 선물이 한가득이었지만,

받은 선물은 대부분 어려운 엘프들을 위해 기부한 탓에,

이리스가 거기에 따로 이실리아에게 많은 돈을 포함해서 이리저리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잔뜩 챙겨주었다는 모양이다.

“엉엉…. 오빠아….”

“울지 말고, 이리스. 뚝!”

“죄송해요. 보내 드려야 하는데…. 흑흑….”

“이리스, 너무 울지 마. 영영 못 보는 게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나 없는 동안 도시 잘 지키고 있어. 괜히 또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에리카와 메이 말 잘 듣고. 알겠지?”

“네에….”

이리스뿐만이 아니었다.

마지막 떠나기 직전,

도시경비기사단장 엘리나.

절름발이 영애 세나리엘,

세나리엘의 어머니 마리에.

이리스를 보좌하는 두 자매, 메이와 에리카.

몸을 섞었던 엘프들이 모두 몰려나와.

모두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잊지 않을게요.”

마지막으로 키스를 남긴 엘리나의 말이었다.

“사도님, 꼭 다음번에 들르셔야 해요!”

세나리엘과 마리엘은, 다리를 고쳐준 은혜를 갚고 싶다면서 꼭 가문의 영지를 다시 방문해달라고 부탁했다.

“…무사히 갔다 와.”

에리카는 그렇게만 툭 뱉고 끝이었지만, 고개를 돌리더니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에리카 울면 안 돼….”

그렇게 말하며 에리카를 달래던 메이도, 마침내는 훌쩍이고야 만다.

그 외 선별에 참여한, 혹은 참여하지 않은,

은총을 받아 임신한 엘프들이 축복의 하얀 꽃잎을 흩뿌리는 가운데,

도시의 엘프가 모두 몰려나와 내가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올 때보다 갈 때 훨씬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침울한 와중에도 빠짐없이 내 여행의 안전을 빌며,

‘물의 도시’의 엘프들은 나를 보내주었다.

우리 일행은 도시의 북문을 나서 출발했다.

항구를 감싸 안은 언덕 위에 솟아오른 세계수가,

점점 멀어지며 희미해진다.

‘이제 여기도 안녕이구나.’

너무 거대한 힘에 취해 나 자신을 잊었던 실수.

‘물의 도시’에서의 일로, 나는 좀 더 성숙해졌다.

엘프들의 사랑에, 나도 사랑으로 보답하리라.

우리는 이번에는 얼어붙은 북방의 대지로 향했다.

날이 점점 추워져 정령마들이 힘들어한다는 모양이었지만,

마차 안에서 편안하게 가는 나는 별로 느끼지 못했다.

“저기, 기사들에게도 한 명씩 사랑을 나눠주고 싶은데요.”

문득 이실리아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자, 이실리아는 조금 곤란해했다.

“그,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조금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네. 태아가 세계수의 축복을 받아야 무사히 클 수 있는 것도 그렇지만, 일단 임신하게 되면 정상적으로 기사의 업무를 보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많이 어려워지나요?”

“공화국법은 임산부의 추가 근무, 야근, 일정 강도 이상의 육체노동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셋은 호위 업무의 특성상 불가피합니다.”

“그렇군요.”

임신도 좋지만, 그것 때문에 본분을 다할 수 없게 된다면 곤란한 일이었다.

그날 밤, 나는 숙소에서 빠져나와 안개 속으로 향했다.

몰래 나온 건 아니고(이실리아가 경호하고 있어 사실상 불가능했다.)

전처럼 이실리아와 세레니아 둘만 데리고 나온 것이다.

안개가 뒤덮인 숲.

몽롱하니 차갑게 파고드는 시간을 얼리는 안개 속에서,

나의 그녀가 나타났다.

“…여신님.”

“…잘 있었나요?”

조금 멋쩍은 듯이 이쪽을 바라보는 헤스티아.

예의 그 미모는 변함이 없어, 어느 쪽에서 봐도 눈부시다.

“저 열심히 했어요.”

“아…알아요. 세계수에 영혼을 보내주는 건 나니까…. 진짜…. 읏…. 여…열심히 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처녀신이라 그런지 아직 부끄러움을 버리지 못한 듯,

헤스티아는 민망해하며 나에게 고마워했다.

우물쭈물거리는 모습이 귀엽지만,

나는 안다.

하늘에서 자지의 비를 내릴 때,

내가 가진 신성력만으로는 좀 모자랐다.

사용이 무제한이라고 하지만 상한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어서,

출력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좀 부족했던 것이다.

거기서 도와준 것이 세계수.

도시의 중심에 자리한 세계수에서, 포근한 신성력이 나와 내 힘에 더해졌다.

나는 거기서 헤스티아를 느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신성력의 느낌으로 보아 틀림없었다.

“고마워요.”

내가 다 안다는 듯이 말하자, 헤스티아는 고개를 휙 돌려 모른 척했다.

“…됐어요. 그보다…. 빨리 새로운 ‘남성의 신’이 되어줘요.”

“네. 힘을 얻으면서 사랑을 계속 나눠주면 되는 거죠?”

“그렇긴 한데…. 안개를 조절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직은 내가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지만….”

“알겠어요. 바로 북쪽에 있는 정력왕의 힘을 찾을게요.”

“사랑을 나눠…주는 것도 잊지 말고요.”

“네. 아, 헤스티아. 거기서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뭐…뭔가요? 야한 건 안돼요.”

“야한 건 아니고요, 기사들을 위로해주려고 하는데, 세계수의 축복도 못 받는 데다가, 임신하고서도 야간근무 같은 걸 해야 한다고 해서요.”

“아…. 봤어요.”

“봤어요? 어떻게요?”

“아…. 그…. 아무튼 알겠으니까 가봐요. 알아서 해 놓을게요.”

“아, 네.”

“열심히 해줘요. 아직은 버틸 수 있지만…. 신이 없는 세계는 오래 남아있을 수 없어요.”

“네…! 열심히 할게요.”

“그럼…. 다음에 봐요.”

“잘 있어요.”

헤스티아는 뭔가 아쉬운지 움찔거리다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이번에도 역시 뒤돌아 몇 걸음 걸으니, 이실리아와 세레니아가 기다리던 숲 입구였다.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두 번째라 그런지 두 엘프는 그렇게 걱정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안개에 뒤덮인 숲으로 혼자 들어가겠다는데 걱정이 안 될 수는 없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둘을 안심시키고, 숙소로 돌아갔다.

“이제부터 야간 경비나 전투를 할 일은 없을 테니, 기사들 중에서 내 사랑을 받고 싶은 지원자를 뽑아줘요.”

“…하지만….”

“이실리아. 날 믿죠?”

“네.”

“그럼 해줘요. 괜찮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안 되는 이유를 설명했는데 그래도 하라는 말에,

이실리아는 두말없이 내 명령을 실행했다.

이실리아의 마음속에서, 나는 거의 신에 가까워져 있었다.

안개 속으로 혼자 걸어 들어가는 것도 그렇거니와,

지금까지 행한 일들을 보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사단원들 사이에서 지원자를 뽑은 결과….

“그런데…. 전원이요?”

“네. 저하고 세레니아만 빼고, 전원입니다.”

“아니….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있지 않아요?”

“사도님도 아시겠지만, 은총을 받는 건 부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들 있습니다.”

“뭐…. 본인들이 괜찮다면야, 나야 사랑을 나눠줄 상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긴 하죠. 근데, 둘은 지원 안 했네요?”

“저희는 마지막에 예약이 되어있으니까요.”

“후후. 알겠어요. 그러면 하루에 서너 명씩 상대하면 충분할까요?”

“네. 추첨으로 순번을 정했는데, 그 정도만 하셔도 도착하기 전까지 전원을 상대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사랑 나눠주기가 시작되었다.

헤스티아가 시간이 촉박하다고 해서 여정을 더 서두른 탓에,

조금씩 지쳐가던 기사들에게 내 위로는 가뭄의 단비 같은 것이었다.

* * *

하루의 여정을 마친 후, 내 숙소.

처음으로 뽑힌 운 좋은 기사가, 두근두근하며 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드…들어가도 되나?’

무장만 풀었을 뿐 여전히 갑주 차림의 그녀.

근무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달려온 티가 역력하다.

그녀가 알기로 오늘 밤 사도님이 은총을 내려주는 상대는 네 명.

그 중 첫 번째로 뽑힌 그녀는, 여유를 부리고 있을 틈이 없었다.

혹시 자신 때문에 뒷사람의 시간이 늦춰지기라도 한다면,

그 원성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오늘 처음으로 은총을 받아보는 그녀.

그녀의 마음속에선 기대와 공포가 동시에 자리 잡고 있었다.

‘듣기로는 엄청나다던데….’

수도에서 친척이 경험했다는 바에 의하면,

사도님이 은총은 내려준 여성은 오줌을 지리고 혀를 빼물고 눈이 뒤집히고 난리도 생난리가 아니라고 했다.

같은 소대의 기사들도 그런 사실을 잘 알았기에, 걸어서 돌아올 수는 있겠냐고 놀림을 들으며 온 참이었다.

대체 얼마나 좋기에?

엘프 여기사는 두근두근하며 문 앞에서 고민하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은총을 받으러 왔습니다!”

군기 빡 들어간 청명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여기사.

그러나 방 안에서는 어떤 대답도 없었다.

“모…못 들으셨나?”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못 들었을 리는 없지만,

긴장한 여기사는 일단 다시 문을 두들기며 소리를 쳤다.

“은총을 받으러 왔습니다! 문 좀 열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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