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127.
* * *
“하지만, 평범한 처녀라도 내 은총을 받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일말의 여지를 남기자, 구름처럼 모인 처녀들을 침을 꼴딱 삼키며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몸이 순결하고, 영혼이 맑으며, 마음이 진실하고, 몸이 꼴려야 하느니.”
잠자코 듣던 엘프들의 고개가 마지막 말에 갸웃한다.
“몸이 꼴려…?”
“대체 무슨 뜻일까요…?’
“저희는 솔직히 몸매에는 자신이 없어요….”
웅성웅성하는 풍만한 처녀들.
여기서 나는, 지금까지 핍박받았던 엘프 거유들의 한을 담아 소리쳤다.
“가스으으으으음!!!”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흔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삼단 고음.
나 미친거 아니다.
다만 거유가 좋을 뿐.
내가 난데없이 가슴을 소리친 덕에, 엘프들은 다들 이게 뭔가 궁금해하고 있다.
“엘프들이 작은 가슴을 예쁘다고 생각하는 건 알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큰 가슴의 묵직함에 숨어 있나니, 너희, 큰 가슴을 감추지 말고 항상 자랑스럽게 드러낼 지어다.”
전해지는 복음에 다들 머리 위에 물음표가 뜬다.
큰 가슴이 좋다라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
“너희들의 가슴은 내가 보고 만지고 물고 빨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은총을 받기 위해 있는 가슴이, 빈약하고 깡말라서야 되겠는가? 묵직한 가슴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요, 끝없는 사랑의 상징이다. 빈유를 멸시하고 거유를 찬양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대 큰 가슴의 처녀들이여. 망설이지 말고 내 앞에 줄을 서도록 하라.”
“아 물론 처녀만. ‘젊은 여자’ 라는 뜻의 처녀가 아니고, 처녀막이 남아있는 여자라는 의미에서의 처녀다. 그 점은 오해 없도록. 하지만 비처녀라도 유부녀는 괜찮다. 남자를 모르는 여자는 순결하지만, 한 남자만 아는 여자는 순진하나니, 나는 그 영혼의 순수를 사랑하는 바이다.”
“대체…. 저게 무슨 소리인가요….”
“모르겠어요. 너무나 고차원적인 이야기라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성스러운 말씀인 것은 틀림없어요.”
“그래서 우리 임신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죠?”
대체로 내 말을 이해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임신이 된다는 건가 안 된다는 건가.
나는 서둘러 생각을 정리했다.
이 난리가 난 것은 귀족 영애들만 뽑아서 그런 것.
한마디로 평민 엘프들 중에서도 뽑아서 따먹고 임신시키면 불만이 없어질 것이다.
이리스에게 눈을 찡긋하자, 이리스가 찰떡같이 알아듣고 나선다.
“사도님께선 오랫동안 남자를 모르는 몸이었던 저에게 진정한 남자를 알려 주셨습니다! 저를 시작으로 해서, 사도님께서는 은총 받을 자격이 있는 처녀들에게 은총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축제를 열겠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축제! 자지가 넘치는 축제! 임신제를 열 것을 선포합니다!”
아니 임신제는 뭔데…?
수확제같은 느낌으로 말하는 걸 보니 조금 당황스럽다.
한편 ‘저 잘했죠’ 하는 표정으로 눈을 찡긋하는 이리스.
“아니 어쩌려고….”
“임신의 기쁨을 모두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부탁드려요.”
그렇게 임신제가 결정되었다.
기한은 30일 후.
정력을 무제한으로 쓸 수 있는 쿨타임이 그 정도였고,
또한 축제 준비와 처녀 선별에 시간이 필요해서이기도 했다.
일반 처녀들도 선별해서 임신시켜준다는 말에, 모여있던 시위대는 만족해서 해산했다.
대공까지 임신시켰다는 게 사실로 확인되자,
도시 안에서는 온통 내 이야기뿐이었다.
* * *
며칠 후.
“영혼이 맑은 처녀를 고르신데.”
“가슴이 큰 처녀가 좋으시데.”
“너 가슴 크잖아. 한번 나가봐.”
“에이 내가 무슨, 예쁜 애들이 얼마나 많이 올 텐데….”
“이런 기회 아니면 임신할 일이 있겠어? 한번 나가봐.”
“부끄럽잖아. 너부터 한번 나가봐 그럼.”
“나도 구경은 갈 거긴 한데….”
나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뒷자리에서 소근거리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온 도시가 그렇듯이 그녀들도 내일 시작될 ‘선별’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
임신제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임신제에 참가할 처녀를 고르는 선별식은 당장 내일부터였다.
물론 선별식의 심사위원장은 나.
내가 따먹고 싶은 애들은 내가 직접 골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며칠 사이에 나를 알아보는 엘프가 부쩍 많아져서,
요새 나갈 때는 무슨 연예인처럼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할 지경이다.
“이거 좀 귀찮네….”
내가 투덜거리자, 이실리아가 조각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슬쩍 내게 들이민다.
“많이 힘드시죠.”
“나보다 호위하는 엘프들이 더 힘들지…. 나야 얼굴만 가리고 다니면 되는걸.”
“요새 어디를 가도 사도님 이야기뿐이더라고요.”
“임신하고 싶어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야?”
“대공님을 임신시켰다니까, 아무래도 기대가 되겠죠. 대공급은 보통 생식을 못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걸 임신시킬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정력이 센 건가 하고요.”
“그렇구나.”
“…사도님, 뒤쪽에서 처녀들이 다가오려고 합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또야? 이거 한자리에 오래 있을 수가 없구만….”
속닥거리자마자, 등 뒤에서 고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기 혹시….”
“아니에요.”
나는 짧게 대답하고 이실리아와 후다닥 카페를 떠났다.
저렇게 말 걸어서 어디 조용한 데 가서 따먹으면 모르겠는데,
그런 게 아니고 막 소리 지르면서 난리를 피우고 엘프들을 불러 모으니까 문제다.
그러면 상황이 수습할 수 없어지고….
결국 이실리아가 나를 끌고 군중들 사이를 뚫고 도망쳐야 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임신제’를 개최하겠다고 한 이후로, 따먹은 여자가 없었다.
열반섹스를 하고 나서 이틀 정도는 현자타임이 왔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이제 다시 슬슬 아랫도리가 근질근질한데….
뒤탈 없이 마음 놓고 따먹을 수 있는 암컷이 어디 없을까.
내일이면 심사가 시작되는 터라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흐음….”
솔직히 순결 어쩌고 했지만,
길 가다 보면 따먹고 싶은 엘프들 천지다.
가슴 성분이 대체로 부족하긴 하지만,
저런 애들이 선별에 나와준다면 그저 땡큐지….
어떻게 소란 일어나지 않게 엘프를 꼬실까 잠깐 고민하는데,
몰래 나를 호위하던 엘프들 중 한 명이 다가왔다.
“사도님, 긴급한 용건입니다. 대공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이리스가?”
나는 무슨 일인가 재빨리 세계수로 돌아가 보았다.
대공 관저의 집무실에 가까이 다가가자, 방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이리스! 정신이 나갔나요? 임신제? 임신제라니…! 대체 이게 뭐죠!”
곱지만 날카로운 그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괴롭혀주고 싶은 느낌이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보니, 태연한 이리스 앞에 아름다운 엘프 두 명이 서 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화사한 백금발의 트윈테일.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 같은 츤데레인 드센 인상의 쪼그마한 아가씨였다.
‘임신제’ 관련 서류를 손에 움켜쥐고 부들거리는 것이,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그걸 옆에서 달래주는, 안경을 쓴 검은 생머리의 거유 아가씨.
순하게 생긴 게, 왠지 하고 싶다고 애절하게 조르면 다리 벌려줄 것 같은 느낌이다.
“에리카, 일단 이야기를 좀 들어 보자….”
“며칠 지방에 다녀온 사이에 이게 대체…! 대체 뭔가요! 처녀를 ‘선별’ 한다고요? 이게 무슨 미친 짓이죠?”
참으로 상식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금발 엘프 아가씨.
일단 따먹으면 다들 고분고분해져 재미가 없어지는 와중에, 이런 톡 쏘는 자원은 희귀하다.
“오빠가 원하는 처녀들을 따먹기 위한 일이에요.”
뒷목 잡는 금발 앞에서 태연하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렇게 대답하는 이리스.
저 말 대신 ‘언니, 저 맘에 안들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아니…! 이리스…! 진짜 왜 이러는 거죠? 며칠 사이에 이게 무슨…!”
“아, 저기 오빠가 왔네요. 오빠. 이쪽은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숙모님들….”
“당신! 당신이군요! 우리 이리스를 이렇게 맛탱이 가게 만든 놈이! 대체 무슨 짓을 한…!”
냅다 나를 향해 들이대는 금발 츤데레 엘프. 그러나 가까이 오기도 전에, 이리스가 숙모를 붙잡아 냅다 뺨따구를 돌린다.
“짝!”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붉게 달아오르는 뺨.
금발 엘프는 맞은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이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숙모님이시더라도, 오빠에게 함부로 하시면 대공으로서 용서하지 않겠어요.”
냉기가 풀풀 풍기는 목소리에는, 대공으로서의 위엄과 권위가 칼날처럼 서려 있었다.
“이…이리스?”
‘아니 때리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숙모라면서.’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한테 달려들기는 했지만 저런 준쪼꼬미가 뭔 짓을 했을라고….
오히려 상식적인 주장을 하다 조카한테 뺨따구 돌려맞은 저 금발 엘프가 불쌍했다.
“이…이리스가 삐뚤어졌어어어엉…!”
훌쩍훌쩍 울면서 뛰쳐나가는 금발 엘프, 아무래도 충격이 컷던 것 같다.
“오빠. 죄송해요. 숙모님들과 의견충돌이 좀 있어서 도움을 받을까 했는데…. 위험하게 해 드렸네요.”
“아니, 요것아. 손윗사람을 때리면 안 되지!”
나는 이리스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조금 쎄게 먹인 터라 꽤 아팠는지, 이리스가 우잇 소리를 낸다.
“하…하지만 전 오빠를 위해서…. 에리카 숙모가 마력을 끌어올렸는걸요.”
“마력이야 흥분하면 움직일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공격했어도 충분히 막을 수 있어. 이 오빠 못 믿니?”
날 못 믿느냐는 말에, 이리스는 사과했다.
“읏…. 죄송해요.”
“하아…. 그래서 이게 다 뭐야? 어떻게 된 일이야?”
“내정 쪽에서 제가 숙모님들의 도움을 좀 받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오빠가 오실 때쯤에 마침 일이 있어서 한 달 정도 다른 세계수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딱 지금 오셔서.”
“…다녀와서 이 상황을 보고 정신이 나갈 것 같았겠구나.”
솔직히 이리스보다도 그 숙모 쪽에 더 감정이입이 되는 게, ‘임신제’, ‘처녀 선별’ 이라니,
건전한 상식인이라면 대체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짓거리냐고 할 법한 일이다.
“방금 나간 분이 에리카 숙모, 여기 계신 분은 메이 숙모에요.”
“아…. 그렇구나.”
뛰쳐나간 츤데레 금발은 에리카, 남은 안경흑발거유는 메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메이는 나를 보곤 주춤거리며 인사를 했다.
“아이소브 공작, 메이 아이소브입니다. 사도님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기쁘다고는 하는데 얼굴을 보면 난감해하는 표정이다.
“저 때문에 많이 당황스러우시죠?”
“아, 예. 조금은….”
예절 바르게 조금은…. 이라고 하지만, 메이도 속마음은 에리카와 크게 다르지 않은지, 나와 거리를 좀 두는 눈치다.
“저도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나는 최대한 상식인답게, 예절바르게 그렇게 말했다.
헉헉 안경거유 숙모 따먹고싶다 헉헉.
참아 내안의 본능. 지금은 네가 나설 때가 아냐.
“그…그렇군요.”
약간 미심쩍어하면서도, 경계를 조심스럽게 거두는 메이.
겉모습처럼 조금 순진한 편인 것 같다.
“아무튼 저도 그, 에리카 양에게 나쁜 감정은 없으니까…. 가서 잘 이야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한마디로 달래주러 가보라는 이야기였다.
메이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후다닥 방을 나선다.
남은 집무실에는, 집어던진 구겨진 종이뭉치들만이 남았다.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지….”
나를 위해 처녀를 선별하고, 그걸 따먹는 걸 축제로 한다니.
정신 나간 소리였다.
야설에나 나올 것 같은 이야기긴 하지만, 이건 냉혹한 현실.
에리카도 결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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