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116.
* * *
아마 기사들 중 한 명인 것 같은데….
더 보고 있기도 좀 그렇긴 한데,
안 보자니 그것도 좀 그랬다.
어둡다기엔 은근히 밝아 몸매가 잘 보였는데,
진짜 몸매가 끝내줬다.
매끈하게 빠졌으면서도, 가슴도 상당했다.
물론 거유라기에는 좀 많이 모자랐지만.
그래도 흔히 말하는 나올 곳 나오고 들어갈 곳 들어간 몸매였다.
거유가 약간 밸런스가 안 맞는 느낌이라면,
이 신원미상 엘프의 몸은 그야말로 균형미의 정점이었다.
잠깐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엘프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눈도 좋고 귀도 좋으니 내가 있다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나를 발견한 그녀.
별로 부끄러워하는 것 없이, 긴 머리카락으로 가슴과 음부를 가리고,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다.
나도 마주 고개를 까딱하고, 천천히 다가간다.
그녀는 인사를 마치며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감싸인 새하얀 얼굴은, 충격적으로 아름다웠다.
예쁜 엘프는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차원이 달랐다.
둥글게 굽은 초승달 같은 눈썹.
오똑하니 도도하게 선 코.
갸름하면서도 우아한 속눈썹.
숲처럼 진한 녹색의 크고 영롱한 눈망울.
딱 좋게 도톰한 매끄러운 입술.
매끄럽게 빠진 섹시한 턱선.
엘프들 중에서도 정말 이런 미녀는 없었다.
내가 멍하니 얼굴을 바라보자,
부끄러운지 살짝 고개를 숙인다.
약간 처진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기 이름이…?”
내가 작게 묻자, 엘프 미녀는 수줍게 고개를 돌렸다.
애가 타서, 가까이 다가가는데, 어째서인지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무슨 벽 같은 것이 앞에 있는 것처럼….
나는 눈을 떴다.
“하아…. 꿈인가….”
멍하니 천막 틈새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본다.
아침이었다.
아무 일 없이 아침이 밝아왔다.
“안녕히 주무셨는지요.”
세레니아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가 멍한 내 얼굴을 보고 걱정했다.
“무슨 일 있으셨나요?”
“아니 이상한 꿈을…. 꿈인가…?”
“어떤 꿈을 꾸셨습니까?”
“엄청난 엘프 미녀가 목욕하는 걸 바라보는 꿈이었는데….”
“엄청난 엘프 미녀요?”
“응. 흑발에 진녹색 눈을 가진…. 혹시 기사단에 그런 엘프가 있을까?”
“흑발이면 하이 엘프일 텐데…. 몇 명 있기는 합니다. 찾아볼까요?”
“아니야. 생각해 보니까 기사단은 아닌 것 같아. 진짜 엄청나게 예뻤거든. 이 세상에 사는 엘프가 맞나 할 정도로….”
“어쩌면 여신님을 보셨는지도 모르겠네요.”
“여신님?”
“네. 엘프의 여신이자, 숲의 여신이자, 봄의 여신이신 헤스티아 님이십니다. 똑같이 검은 머리카락에 숲의 눈동자를 지니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럴지도 몰라….”
진짜 꿈에 여신이 나온 것이었을까?
아니면 안개가 일으킨 허상이었을까?
흑발에 진녹색 눈의 아름다운 여성 엘프는,
꿈이나마 깊게 내 기억에 남았다.
나는 꿈에서라도 한 번이나마 그 어마어마한 미녀를 더 보고 싶었지만,
안개 속에서 야영한 그날 밤 이외에 그녀가 다시 꿈에 나오는 일은 없었다.
기사단원들이나 좀 건드려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그녀가 어른거려 삼가게 됐다.
안개가 보여주는 꿈은 장래에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던데….
언젠가 그런 미녀와 만난다면,
난 망설이지 않고 교배 신청을 할 것이다.
사랑의 속삭임도, 열정적인 고백도 필요 없다.
일단 유전자를 섞고 보자.
그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아무튼, 내가 꿈에서 만난 그녀에게 빠져 한동안 잠잠하게 있는 사이,
여정은 별다른 사고 없이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중간에 어디 들르는 것도 없이,
우리는 최속으로 ‘물의 도시’를 향해 달려갔다.
일주일 후.
우리는 엘프 공화국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도시.
바다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세계수를 둘러싸고 자리 잡은 도시.
‘물의 도시’에 도착했다.
도시가 멀리 보일락말락 할 때쯤부터,
‘물의 도시’의 도시경비기사단이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도시경비기사단장을 필두로 해서 우리를 맞이했는데,
단장은 깔끔한 남색 제복을 차려입은 여성으로,
이실리아와 비슷하게 냉철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약간 불그스름한 갈색 머리에 어두운 갈색 눈을 가진 그녀는,
날렵하다기보다는 단단한 느낌의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미녀라기보다는 뭔가 거칠게 막 박고 싶은 느낌이다.
그런 느낌 있잖은가. 쎄 보이는 여자를 강제로 굴복시키고 싶은 뒤틀린 욕망….
한 주간 꿈속의 여신 같은 그녀에게 홀린 듯 빠져있던 나에게,
이런 색다른 매력은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도시경비기사단장인 엘리나 에델라인입니다. 사도님, 대신관님 우리 도시를 방문하게 된 것을 환영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엘리나 에델라인.
나는 그 이름을 일단 기억해 두었다.
이실리아와 꾸벅 마주 인사를 나눈 그녀는, 우리 일행에 앞장서서 도시로 진입하는 길을 텄다.
우리가 온다는 소문이 이미 퍼졌는지,
길에는 엘프들이 잔뜩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도님! 여기 봐주세요!”
“눈만 마주쳐도 임신한데!”
“저도 임신시켜주세요!”
벌떼같이 모여드는 엘프들.
그중에서도 유난히 임신을 추구하며 험하게 달려드는 눈나들이 있었다.
기사단원들이 애써 떼어내도 두 번 세 번 달려드는, 처절하게 저돌적인 그녀들.
꼭 그런 눈나들은, 어째 나이가 좀 있으신지 하나같이 미드가 우량했다.
아아. 임신 욕구에 뼈가 시린 나이시구나….
마음 같아선 마차에서 내려 하나하나 질내사정을 해드리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바로 대공을 대면해야 한다고 해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대로 마차 밖으로 손이라도 흔들어 주니,
꺄악꺄악 소리를 지르며 좋아한다.
“손 흔들어 주셨어!”
“꺄아! 사도님!”
“임신! 저 임신!”
아르피엘이 다니던 학교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은데,
거긴 그나마 아가씨 학교라 이렇게 막 들이대는 엘프들은 없었다.
아가씨들이 왜 저렇게 난리를 치나 생각도 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건 얌전한 축이었어….
아무튼 마차는 그대로 세계수로 들어갔다.
세계수 안쪽 대공의 거처에서,
나를 맞이하는 ‘물의 대공’
이름은 미리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이리스 라 오세아나.
그녀는 하늘색 물빛 드레스를 입고 바다처럼 파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또각또각 계단을 내려와 나를 맞이했다.
“제 이름은 이리스 라 오세아나. 공화국의 대공작입니다. 사도님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사도님께서 저희의 지아비가 되어주실 분이라 들었습니다. 혹시 제 첫인상은 어땠을까요?”
다짜고짜 용건부터 말하는 그녀.
이런 솔직함은 싫지 않았다.
지금 보니 아닌 척 엄청 공을 들여 꾸몄는지,
신경 안 쓴 듯 신경 많이 쓴 우아한 차림새였다.
물의 마력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일까.
이국적인 긴 파란색 머리카락은 곱게 땋았는데,
원래 머리카락이 상당히 긴지 허리까지 닿았다.
빠져들 듯한 푸른색 눈동자는, 나에 대한 흥미로 반짝거린다.
보드랍고 통통한 뺨 가운데 오똑 솟은 코는,
덮쳐놓고 그 다음에 뭘 생각하고 싶을 정도로 섹시했다.
몸매는…. 뭐 엘프답게 매끈하지만,
키도 있고 해서 쪼꼬미라고 할 만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볼륨도 나름 있었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떡치는거 충분히 가능하다.
“아름다우시네요.”
그렇다고 대공한테 첫 대면에 겁나 떡치고 싶다고 할 수는 없으니 그냥 그렇게 말했다.
대답을 들은 이리스의 얼굴이 활짝 피어난다.
원래도 예쁜 편인데, 웃으니 더 예쁜 것 같다.
“감사합니다. 혹시나 겉모습으로 사도님 실망하게 해드리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전혀요.”
“그러면 잠시….”
이리스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숨을 내쉬며 마력압을 해방했다.
억누르고 있던 마력이 드러나자,
어마어마한 압력이 내 몸을 짓누른다.
평범한 남자라면 왠지 모르게 주눅 들며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을 것이고,
마력을 느낄 수 있는 남자라면 기절할 정도였다.
공화국의 4대공.
셀레시아 라 에티에넬도 그랬지만,
그녀들은 엘프라기보다는 신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마력압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그러나, 대지의 정력을 해방시킨 나는 버틸 수 있었다.
폭풍에 맞서 꿋꿋하게 곧추세운 나는,
마력압을 뿜어내는 이리스의 손을 붙잡아 내 다리 사이로 가져다 댔다,
“아….”
의외로 이런 것에는 순진한지,
이리스의 뺨이 빨개진다.
내 자지는 단단하게 서 있었다.
“선 걸 만져보는 건 처음이에요….”
갑자기 소녀소녀하게 되어서 그렇게 말하는 이리스.
그러나 직접적으로 신체가 닿자, 정력과 마력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백중세지만 내가 살짝 밀려나는 느낌이다.
아직은 조금, 정력이 후달리는 것 같다.
느낌상이지만, 아마 이대로라면 넣을 순 있어도 넣자마자 죽을 것이다.
“이제 그만….”
내가 슬쩍 밀어내자, 이리스는 재빨리 떨어졌다.
“아 네….”
이리스 어쩔 줄 모르며 우물쭈물하는 걸 보니,
처음에 드레스를 차려입고 계단을 걸어 내려오던 대공작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사라지고,
그저 성적인 접촉에 부끄러워하는 순진한 처녀만 남아 있었다.
나는 바싹 다가가, 이리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 나한테 따먹히고 싶어?”
반말로 노골적으로 묻자, 이리스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청할 수는 없지만…. 속으로는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따먹히고 싶냐는 말에 너무도 아름답게 대답하는 이리스.
물어본 내가 다 미안해질 지경이다.
“지금은 좀 정력이 부족할 것 같고…. 물의 정력을 얻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어디 있는지 알아?”
“지…짐작 가는 곳은 있어요.”
“있어?”
“네. 준비도 거의 끝났으니, 내일 바로 찾으러 가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준비를 다 해 놓았구나. 잘했어.”
“네에….”
“그러면 뭐 상이라도 줘야 하나?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분명 고상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였는데,
어느새 주도권을 잡고 휘두르는 나.
상을 준답시고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하자,
이리스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뭐 있나 본데? 말해봐.”
“아…. 그…. 저….”
“뭔데.”
“펴…평범한 데이트가 하고 싶어요.”
“응…? 그런 걸로 되겠어?”
사정을 들어 보니,
공작 가문에서 태어나 대공 후보로 자란 이리스는,
정상적으로 남자를 접해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어쩌다 남자를 접해도 보통 이리스의 마력압에 짓눌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는 모양.
그러니 일반적인 교제는 꿈도 꾸지 못했다는 것 같다.
혹시나 마력압을 버틸 수 있는 남자가 있다고 해도,
번식이 우선이지 데이트 따위를 하고 있을 틈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자와 평범하게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이리스.
깜찍한 소망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쌍하기도 했다.
차라리 어설프게 마력이 많으면 업소광 모 쪼꼬미처럼 신나게 남자를 따먹고 다녔을 텐데,
이 정도로 특출나면 남자가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한다니….
“괜찮을까요? 데이트?”
“뭐 나는 좋은데, 호위들이 괜찮다고 할까 모르겠네….”
그렇다. 지금의 나는 ‘귀하신 몸’.
한 개 중대가 달라붙어 내 호위를 하고 있었다.
이리스는 내가 그렇게 말끝을 흐리자, 안 된다는 말인 줄 지레짐작하고 실망했다.
“아….”
“우리 몰래 나갈까?”
“네?”
“호위들 모르게 몰래 나가서 놀자고.”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안 될 건 또 뭐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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