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96.
* * *
"무슨 수가 있나요?"
"보안상 헛점이라고 해야 할텐데.. 일단 보조 마력 공급원을 과충전시켜 보조 마력 공급 경로를 자동으로 차단시킨 후 주 마력 공급을 차단하면, 일시적으로 결계가 경보 없이 해제될 것 같습니다."
"흠, 에이드린, 내관에 들어갈 수 있나요?"
"들어갈 수는 있지만 집무실에는 직접 출입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집무실 말고 보조마력전원에 마력을 과공급해야한다고 하는데.. 세리엘을 구하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할 수 있겠어요?"
"보조 마력공급기라면 아마 지하실에 있을 거에요. 지하라면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손자를 이런 비참한 상태에 계속 놔둘 건 아니죠? 그러니까 나를 불렀을 테고."
"하.. 하지만, 손녀가 마음을 먹으면 저 따위는.."
"그래도 할머니잖아요?"
"부디.. 저.. 절 지켜준다고 약속해 주세요.."
"에이드린.."
나는 에이드린이 왜 저렇게 겁을 먹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손녀인데?
옆에서 이실리아가, 작게 설명을 속삭인다.
"여신교단 대신관인 헤일리아 에오론드가 마음 먹고 전력을 다해 찾는다면, 사실상 '영원의 도시' 안에서 숨어있을 수 있는 곳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난 아직 괜찮았잖아요?"
"아직 진심이 아니니까요. 지금은 암흑가의 힘으로 견제하는 정도지만, 맘먹고 교단의 힘까지 남용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끝날 겁니다. 그래서 집정관님께서 저를 사도님께 붙여주신 거고요. 최악의 경우에도 집정관 관저까지 호위할 수 있게요."
"아, 그 정도에요?"
"네. 집정관님께서는 그런 경우, 여신교단과 갈라서는 걸 각오하고하도 사도님을 직접 보호하실 생각이셨습니다."
"셀레시아가 거기까지 생각했었군요."
"그만큼 쉬운 상대가 아니니까요. 물론 그렇게 되면 운신의 폭이 협소해질 뿐더러, 전에 들으셨겠지만 심각해질 경우 내전까지 감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영원의 도시 말고 둘을 보호할만한 곳이.. 아. 한 군데 있네요."
"혹시 남성교단 본산을 말씀하시는 거면.. 분명 압력이 들어올 겁니다."
"거기 아니에요. 아주 조용한 곳인데.. 인적도 드물고.. 지내기 딱 좋을 것 같네요."
잠자코 듣고 있던 에이드린이 내게 물었다.
"..그런 곳이 있나요?"
"네, 혹시 시골에서 전원생활 같은 거 할 수 있겠어요?"
* * *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세피아에게 부탁해,
에오론드 저택이 있는 지구 채로 마력 공급을 일시 중단하기로 계획을 짰다.
괜히 어설프게 저택의 마력 공급만 차단해서 의심을 사느니,
사고로 인한 대규모 마력 정전 사태로 위장할 목적이었다.
미리 에이드린을 따라 저택에 잠입한 나와 세레니아, 이실리아는,
에이드린을 내관으로 보낸 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잘 되어야 할텐데.."
주어진 시간은 30분 가량.
그 시간이 지나면, 마력이 복구되고 결계가 재작동한다.
그 전에 내관에 잠입해 약점이 될 만한 문서를 훔친 후,
에이드린과 세리엘을 데리고 저택을 빠져나가야 했다.
탈출로는 이실리아가 준비해, 보안상 약점인 곳으로 빠져나가기로 한다.
모든 게 계획대로만 된다면, 나름대로 그럴 듯한 계획이었다.
"형님 무서워요.."
바들거리며 내게 붙는 세리엘.
"야야.. 무서운 건 알겠는데 좀 떨어져."
"에..?"
"너하고 붙어 있으면 열어서는 안 되는 새로운 문을 열어버릴 것 같으니까.. 좀.. 남자답게 버텨 봐."
"네.. 저도 남자답게 버텨내야겠죠.. 힘낼게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에이드린이 외관으로 돌아왔다.
"시킨 대로 전부 다 했어요."
보조마력공급장치를 계획대로 망가트린 모양이다.
이젠 건너서는 안 되는 강을 건너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에이드린.
이실리아가 부들부들 떠는 그녀를 진정시킨다.
"수고하셨습니다. 좀 쉬시죠."
"네.."
"정전이 되면, 세리엘과 함께 바로 알려드린 루트로 바로 탈출하시면 됩니다."
"네.. 알고 있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시면 소리를 질러 주세요. 경비원들도 듣겠지만.. 제가 최대한 빨리 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저희는.. 준비하죠."
"음."
조용히 결계 앞에서, 정전을 기다린다.
세피아가 말한 대로라면 곧 정전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정한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마력공급은 여전했다.
"..."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세레니아나 이실리아 모두 생각하는 건 똑같았지만,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일이 어그러진다는 건, 일이 단단히 틀어졌다는 이야기.
상대가 상대인 만큼, 틀어졌다면 아주 심하게 망했을 확률이 높았다.
최악의 경우 계획이 유출되어 함정을 파놓은 것이라던가..
다들 긴장하는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마력등이 꺼졌다.
우리는 바로 휴대용 마력등을 들고, 미리 들었던대로 루트를 따라 내관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결제는 완전히 해제되어, 아무 문제 없이 집무실의 문이 열린다.
다행스럽게도 마력정전이 조금 늦었을 뿐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닌 듯 했다.
고풍스런 탁자 위에 무지막지하게 쌓여 있는 문서들.
우리는 휴대용 마력등을 켜고, 집무실에 쌓인 문서를 마구 헤집었다.
"어.. 씁..?"
한참 문서들을 뒤지던 나는,
당황해서 세레니아와 이실리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역시 난감해하며 문서를 뒤지는 그녀들.
문제가 있었다.
약점이 될 만한 문서가.. 없었다.
노예길드와 거래한 문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이동형 마력장 발생장치를 공급했다던가 충전했다던가 하는 것 뿐.
우리가 원하던 더러운 뒷거래에 관련된 문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세레니아. 혹시 쓸만한 거 있어? 이실리아, 혹시 쓸만한 거 있어요?"
"아뇨.."
"없습니다.."
"젠장.."
여기까지 왔는데,
저택 침입까지 했는데 빈 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약점 잡을 수단 없이 에이드린과 세리엘을 빼돌려 봐야,
그저 잡힐 때까지 시간을 끄는 정도밖에는 별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쪽에서 한방 먹일 수단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서류는 말끔했다.
이상할 정도로 말끔했다.
나는 이실리아에게 물어보았다.
"미리 정리한 걸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뭔가 서류가 빠진 게 있는 티가 날 텐데, 연관된 서류는 전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마 이곳에는.. 애초에 그런 서류를 가져다 놓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쓰읍.."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 15분 가량.
정전이 늦어져 5분 정도를 손해봤기에, 이제 탈출하기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더 뒤져보면 무언가 쓸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무기로 쓸만한 치명적인 건 없을 것 같다.
하필 이 때, 복도 저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이 에이드린의 비명소리였다.
"어떻게 하죠? 사도님?"
항상 냉정침착하던 이실리아마저도, 당황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아직 쓸만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에이드린과 세리엘을 빼돌려봐야 의미 없는 짓이었다.
나는, 냉철한 두뇌와 뜨거운 자지를 풀가동시켜 상황을 분석했다.
평소에는 따로따로 노는 둘이지만, 지금만큼은 힘을 합칠 때다.
"음.."
내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자, 이실리아는 당황해했다.
"사.. 사도님?"
"섹스."
"네?"
"일단, 이실리아는 에이드린에게 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계획대로 탈출 포인트로 호위해 주세요."
"아, 넵."
대체 그 섹스. 는 뭐였을까 싶지만, 너무나 냉정침착한 내 모습에 이실리아도 냉정을 되찾았다.
이럴 때일수록 리더부터 차분해야 하는 법.
자지와 두뇌가 일체가 된 나는 냉철한 지성과 뜨거운 본능을 결합해 결론을 내렸다.
"이실리아의 말대로라면, 애초에 이 곳은 그런 서류를 두지 않는 곳... 그런데 이렇게 삼엄한 결계가 있다는 것은..? 무언가 숨기고 싶은 게 있는 거겠지..? 세레니아. 서류 그만 보고 마력을 탐지해 봐. 분명 무언가 있을 거야."
"네. 사도님."
세레니아는 두말 않고 보던 서류를 집어던지고,
국보라는 지팡이를 들고 바닥에 두들겼다.
아무 말 없이 바로 내 말에 따라주는 게, 지금은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통. 통 하는 소리와 함께, 물에 떨어진 물방울의 파장처럼 신성력이 번져나간다.
"..!"
"뭐 있어?"
"미약하지만.. 이쪽 책장에 마력의 뒤틀림이 있습니다."
"조용히 해제하고 싶지만.. 침입한 흔적을 안 남기는 것 이미 글렀으니, 요란하게 가자."
"네. 사도님."
세레니아는 냅다 신성력을 모아, 마력이 술렁이는 벽에 그대로 쏴 버렸다.
전의 아이린의 가게에서 선보인 바 있는, 신성력을 이용한 포격.
레이져처럼 날아간 빛줄기가, 커다란 폭발을 일으킨다.
"콰광쾅과오!"
잭상 위의 서류가 마구 흩날리며, 엉망진창으로 뒤섞인다.
이걸로
첫 번째, 서류를 더 뒤져 어떡하든 증거를 찾는다.
두 번째, 조용히 빠져나간다.
이 두 가지는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후.. 제발.."
뽀얀 먼지가 가라앉은 곳에,
휴대용 마력등을 조심스럽게 비추어 본다.
마력으로 은폐되어 있던 벽장 뒤에는,
작은 비밀 방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거의 집무실과 비슷한 크기의 비밀 방.
비밀 방에는 세리엘의 그림이 빼곡하게 벽을 채우고 있었다.
"이게 무슨.. 쓸모없는 것들이.."
동생 덕질한 흔적이 나오자 세레니아는 당혹스러워했다.
원한 건 암흑가와 관련된 증거였는데,
대체 세리엘의 초상화를 어디에 써먹는단 말인가.
"아냐, 세레니아. 잠깐 기다려 봐."
나는 비밀방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책상 위에, 꽤 두꺼운 장부가 한 권 있었다.
장부를 펼쳐, 내용을 본다.
사절지만한 커다란 종이에, 깨알같은 글씨가 빼곡하게 쓰여져 있었다.
X월 X일.
세리엘이 밉다. 세리엘이 너무 사랑스럽다. 남자는 싫은데 그 놈은 남자 같지가 않다. 남자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여신님이 남자로 잘못 태어난 건 아닐까? 아. 만약에 그 놈이 여자였다면.. 아니, 그 놈은 내 동생, 그것도 더러운 남자 동생이다. 이런 욕망을 품는 건 잘못된 일이지만..
X월 X일.
오늘도 참지 못하고 밤에 동생의 몸을 더듬었다. 어째서 그 저주받은 놈은 나보다 더 여성스러운 것일까. 멍청하게도 성기를 주무르는데도 깨어나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돌아와서 그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잡았다! 근친충!"
내가 소리치자, 세레니아가 깜짝 놀랐다.
"네..?"
"아냐, 신경쓰지마.. 잠깐만.. 분명 더 있을 것 같은데."
책상서랍을 뒤져보니, 비슷한 일기장이 열 권 가까이 나왔다.
하나같이 상업장부같은 대형 판형인 두꺼운 공책에,
깨알같은 글씨로 동생을 향한 비틀린 애정을 빡빡하게 고백해놓은 것이었다.
이런 거라면, 암흑가와의 거래보다도 더 위력있는 무기다.
나는 재빨리 미리 준비한 더플백에 일기를 먼저 담고,
남은 공간에 잠든 야시야시한 포즈의 세리엘을 그린 초상화도 담았다.
"가자!"
"그게.. 도움이 될까요?"
"충분해. 그보다 빨리 탈출하자. 너무 소란을 피웠어."
"네."
우리는 후다닥 이실리아가 지나갔을 길을 따라 탈출로로 향했다.
아까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이실리아가 알아서 잘 해결했을 거라 믿고 싶었다.
일단 쓸만한 증거는 찾은 상황.
이제 무사히 탈출만 하면 된다.
"제발 에이드린에게 일어난 일이 별 일 아니었어야 할 텐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