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92.
* * *
며칠 후, 모처의 안전가옥에 은신하고 있는 나에게 속속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헤일리아 에오론드는아직 우리의 움직임을 감지하진 못한 것 같았다.
나를 납치하려고 조무래기를 몇 명 움직였지만,
이실리아나 세레니아가 나설 것 없이 클라리스 선에서 정리가 되었다는 모양이다.
조무래기들을 처리했다는 소식과 함께, 클라리스는 저택에 대한 정보도 수집해 왔다.
"에오론드 저택은.. 저택이라기보다 요새에 가까워요."
"그래요?"
"네. 높은 외벽에 외관, 내관이 분리되어 있는 구조인데, 외관만 해도 경비원들이 24시간 상주하고 있고.. 가주가 쓰는 내관은 따로 마력 결계까지 쳐져 있다고 하네요."
"진짜 구린 구석이 있는 모양이네요."
"네."
"빈틈 같은 건 없을까요? 클라리스? 잠입할 루트라던지."
"입 가벼운 경비원들 덕분에 외관에 대한 건 조금 알아냈지만, 잠입하는 건 무리로 보여요."
"힘으로 밀고 들어가는 건요?"
"뒷골목 업소도 아니고, 대신관의 자택에 침입하면 문제가 될 거에요. 만약 넬로티아 후작처럼 사도님의 능력으로 '회유' 가 가능하다면 또 모르지만요.."
"흠, 그 여잔 남성을 혐오한다고 했죠?"
"네. 이분은.. 세피아님과는 다른 의미로 '엄청난 처녀' 로 유명하신지라."
"그래요?"
"네. 남자를 위해 아름답게 꾸미는 것조차 거부하고, 항상 짧은 단발로 다닌다는 모양이에요. 몸매 관리 같은 것도 안 한다고 하고요."
"아 그건 좀.."
확실히 몸으로 찍어누르기는 무리인 타입이었다.
에이나 넬로티아 같은 경우도, 남자를 멸시하다 뿐이지, 꾸미기는 엄청 꾸민다.
매력으로 남자를 압도하고 싶은 욕망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포기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맙소사다.
하루에 한 번 머리는 감긴 하려나?
빗질은 할 것 같진 않고.
으으.
차라리 대평원 쪼꼬미를 따먹었으면 따먹었지 그런 타입은 싫다.
"그러면 어쩔까요?"
"아직은 딱히 공략법이 안 보이지만.. 외관을 경비하는 경비원들은 조금 회유가 가능할 것 같기도 하네요."
"하지만 중요한 문서는 내관에 있겠죠?"
"아무래도.."
"흐음. 알겠어요. 생각을 좀 해봐야겠네요."
클라리스가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헤일리아 에오론드는 호락호락하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그녀는 우리가 그녀를 노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비가 이렇게 철저하다고 하니,
더 시간을 끌면 어려워지기만 할 것이다.
'뭔가 수를 써야겠는데.'
내관의 마력결계는 세피아에게 부탁하면 잠시 마력공급을 정지시킬 수 있지 않을까?
세피아가 담당하는게 수도의 마력공급을 제어하는 일이니까.
잠깐 마력공급을 정지시켜 결계를 무력화시키고, 내관에 진입해 문서를 빼돌린다면..?
아니, 어쩌면 비상용 발전기처럼 비상 마력저장장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보안을 위한 것인 만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을 테니,
단순하게 마력공급을 끊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뭐 그것도 자세한 정보를 더 알아봐야겠지만.
'이렇게 외부로부터 방비가 잘 된 경우는 반대로 내부에서 무너트리는게 수월할 터..'
마력이 단단하게 뭉친 자궁일수록 뒷구멍에 박힌 정력자지에 약한 법.
정공법으로 공략이 어렵다면 다른 방법으로 조금씩 갉아먹는 것도 좋다.
'흠, 다른 가족들은 없으려나? 다른 가족도 다 그 여자 같으면 곤란하지만.. 일반적인 엘프 여성이나.. 아니면 남자가 있다면 회유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헤일리아 에오론드는 에오론드 가문의 가주였다.
아마 그 성격으로 봐선 에오론드 가문 소속 남자들을 가혹하게 박해할 것이 뻔하다.
그런 취급을 못 견딘 남자가 있다면,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아마도 자택 안에는 아예 남자가 없을 수도.."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남자만 봐도 구역질을 할 정도라면,
친척이든 뭐든 집 안에 남자를 두고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여자 쪽인데..
혹시 '남성 교단' 을 믿는 여자가 있지 않을까?
에오론드 가문의 친인척이나 가족은 아니더라도,
집에 방문할 수 있을 정도로 친분이 있는 남성교단의 신자가 있을 것도 같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때마침 안전가옥의 문을 열고 남성교단의 대신관 세레니아 페이엘이 들어왔다.
"사도님."
"어, 세레니아 왔어?"
"네."
"혹시, 우리 교단 신자들 중에 에오론드 가문에 관련된 사람이 없을까?"
"안 그래도 저도 그걸 확인해 본 참이었습니다."
"그래? 잘 했어! 근데 신자 명단을 다 뒤져본 거야?"
"네."
"혼자 한 건.. 아니지?"
"카렌과 다른 신관들이 도와주었습니다. 아, 그 보내주신 레오라는 소년도 열심히.. 하려고는 했습니다."
아아. 난데없이 나타나 신자 목록을 전부 뒤지라는 명령에,
눈물을 흘리며 절규했을 카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안 그래도 요새 이것저것 바쁠 텐데 이런 것까지 시키고 말이야.
여긴 뭐 엑셀 같은 것도 없으니,
뭘 찾으려면 그야말로 문서를 다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레오는.. 음,
대충 어조에서 느껴지는 걸로 봐서는,
방해와 도움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딱히 어디 보낼 곳이 없어 남성교단에 보내서 지내게 했는데,
여성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하다고 한다.
여자만 보면 갑자기 히죽히죽 웃는다고.
본인은 웃기 싫은데 웃음이 나온다나..
음, 아무래도 휴식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누구 있어?"
"네. 에이드린 에오론드, 헤일리아 에오론드의 조모입니다."
"조모? 할머니?"
"네."
"몇 살인데?"
"구백.."
"으엨.. 자세한 건 알려주지 마. 별로 알고 싶지 않네. 그냥 900살 이상으로만 알아 둘게."
"어.. 네."
"엘프는 수명이 1000살 정도지?"
"네."
"왜 다 죽어가는 할망구야 씁.. 다른 사람은 없어?"
"네. 조모 외 가족은 여동생이 한 명 있다고 하는데, 집 밖으로 거의 안 나오는 걸로 압니다."
"히키코모리 쿵쾅이겠지.. 보나마나 뻔해."
"히키코.. 그게 뭔가요?"
"아.. 좀 음침하고 계속 실내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거야. 아무튼 그건 상관 없고.. 그럼 그 할망구.. 아니 할머님을 회유해야 하는 거야?"
"아마도.. 말씀을 한번 나눠보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젠장.."
"저 사도님..?"
"왜."
"의심을 품어 죄송합니다만, 나이의 많고 적음이 사도님께서 은총을 내리는 데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인지요?"
"아 당연하지. 다 늙은 쭈그렁 할머니랑 누가 하고 싶어하겠어."
"하지만 사도님께선 가슴 큰 여성을 선호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탱탱한 가슴 말하는 거지.. 바람 빠진 늘어진 가슴이 아니고.. 아니 더 말하면 죄송스러우니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그 분들께서 그렇게 되시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니까.."
"흐음.. 알겠습니다."
"회유할 수는 있을 것 같아? 교회에 자주 오시는 분이야?"
"일주일에 한 번은 교단 본산에 공물을 바치러 오시는 독실하신 신자분 이십니다."
"그 정도야? 조금 이상하긴 하네. 함정일까? 신자가 된 게 언제 부터인지 알아?"
"제가 알아본 바로는, '남성의 신' 께 공물을 바친 후 우연히 임신하게 되어서, 그 이후로 신자가 되셨다고 하더군요."
"그럼 방문 기록이 쭉 있는거야?"
"네. 헤일리아 에오론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신자셨습니다."
"그럼 함정은 아니겠네. 그 조모라고 했지?"
"네. 헤일리아 에오론드의 어머니의 어머님이신 거죠."
"으, 젠장."
"..그렇게 싫으신 건가요?"
"아냐, 이야기 하는 정도야.. 이렇게 됐으면 뭐 접촉 안 할 수는 없겠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도 하고."
"네. 그러면 외출을 준비할까요?"
"음. 그러면 나중에 그 할머니가 오는 시간에 맞춰서 안전가옥에서 나가는 걸로 하자. 본산 상황은 좀 어때?"
"감시가 더 붙긴 했지만, 아직은 직접적으로 건드리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남성의 신' 의 위대함을 여신교단에서도 모르는 건 아닐 테니까요."
"음.. 여신교단이 공화국의 국교라고 했지?"
"아직은 그렇습니다."
"우린.. 20대 교단의 말석이고?"
"지금은 그렇습니다."
그냥 좆도 신경 안 쓰는데, 거슬리니까 감시는 해 두는게 아닐까 싶었지만,
세레니아의 당당한 얼굴을 보니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언젠간 남성교단이 국교가 되고, 여신교단은 20대 교단의 말석이 되리라는 것을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 가득한 표정.
아아. 이 녀석은 진짜..
진짜다..
종교쟁이는 답도 없다고 했는데..
"그러면 마차를 따로 수배해 놓겠습니다."
"음."
최근에는 엘룬드 가문에 있기도 살짝 위험해진 상황.
그러니 엘룬드 가문의 마차를 타고 멋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몇 번 미수로 그친 납치 시도가 있다고도 했고..
그래서 내가 이 안전가옥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었다.
그리고 내 행방이 묘연해진 후,
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불라는 압박이 이리저리 조금씩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명목상은 소피엘을 통해 날 소개받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속셈은 아마 뻔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소피엘과 아르피엘은 잘 견디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엘룬드 가의 모녀를 믿었다.
두 여자가 날 배신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다만.. 나 때문에 고통과 곤란을 겪게 되는 건 피하고 싶다.
결국 이건, 나와 헤일리아 에오론드 중,
누가 더 빨리 상대의 뒤통수를 맛깔나게 후릴 수 있는지,
그 시간싸움이었다.
"반드시 그 할머니를 회유해야 할 텐데.."
내가 엘프눈나들은 안 가린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할머니는 좀 심하잖아?
이쪽 세계에 와서, 900살이 넘어간 할머니는 아마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며칠 후, 매주 '할머니' 가 방문한다는 날이 되었다.
나는 혹시나 정보가 유출되었을까 일부러 시간을 좀 이르게 해서,
오전 예배가 있을 시간에 남성교단의 본산을 방문했다.
접촉할 대상인 '조모님' 께서는 매주 오후 예배를 보러 오신다는 모양이다.
남성교단의 신관이 미리 접촉해서 조금 속을 떠 본 결과,
회유할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다고 한다.
뭔가 남에겐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있는 것 같다고.
뭔지는 모르지만, 손녀가 흉흉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과 관계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왔는데, 엄청 깔끔해졌네.'
그 사이에 교세가 더 확장되었는지, 새로 깔았던 복도를 또 뜯어내고 다시 깐 모양이다.
그냥 하얀 대리석에서, 기하학적인 무늬가 그려진 검고 흰 대리석으로.
그뿐만이 아니었다.
밋밋한 나무창이었던 성당 창문에는 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붙이는 중이었다.
내 안전가옥을 유지하는 비용도 교단에서 나오고 있다.
내 소문이 퍼진 덕분에 신자가 엄청 늘어났다고는 들었는데,
대체 교단은 돈을 얼마나 벌고 있는 걸까?
아무튼 난 망토를 푹 눌러쓰고, 조용히 신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척을 하고 있었다.
좌우에는 세레니아와 이실리아가 날 경호 중이었다.
나는 안 보는 척, 주변의 신자들을 훔쳐보았다.
젊고 탱탱한 여성엘프(물론 대평원..)들도 꽤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슴 많이 나온 쭉빵한 누님들이었다.
나처럼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살짝 엿들으니 역시 임신 관련해서 내용이 많았다.
연애에 관한 것도 좀 있는 듯 하고.
상황이 허락한다면 전의 올리비아처럼 슬쩍 은총을 내려줄 수도 있을 텐데..
며칠 사이 드러내 놓고 행동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조금만 둘러 볼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