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전 이세계에서 엘프의 노예가 되었다-89화 (89/140)

〈 89화 〉 89.

* * *

"형님..! 형님만 믿고 있었습니다..! 아흐흑..!"

울먹이며 내 손을 잡는 레오.

보아하니 모진 고초를 많이 겪은 모양이다.

"음, 고생을 많이 했나 보구나, 근데 저기 내가 지금 좀 할 일이 있어서.."

"보고 싶었습니다! 형님!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저는 식사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이실리아가 옆에서 살짝살짝 눈치를 주는데도, 끝까지 달라붙는 레오.

정말이지 지금까지 쌓여온 억울함이 절절한 것 같았다.

"저기, 잠깐.."

"형니이이임.. 흐윽.. 흐으으윽.. 진짜.. 진짜 힘들었어요.. 흑흑"

"야.. 야, 남자 놈이 질질 짜고 그래.. 이거 참."

옷자락을 붙잡고 훌쩍거리는 레오.

생긴 건 또 곱상해서 확 떨쳐버리기도 쉽지 않다.

"야. 하아.. 알겠으니 잠깐만.. 뚝!"

"네.. 흐흡.. 뚝..!"

"이거 아무래도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네. 저기, 아이린? 이었나? 머리 좀 들고, 잠깐 씻고 옷이나 좀 갈아입고 와. 찌린내가 너무 나네. 그러고 이 업소는 사장실이 어디에 있어..?"

* * *

아이린은 사장실에 딸린 작은 샤워룸에서 몸을 씻었다.

문밖에서는 이실리아라는 무시무시한 엘프가 지키고 있어,

허튼짓을 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차가운 물이 몸 위로 흘러내리지만,

정신이 없어 차갑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대체 왜 여길.. 저 여자들은 누구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짚이는 곳이 없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날벼락을 맞아야 한단 말인가.

속이 탄다. 화가 난다.

그러나 지금은 분노할 상황이 아니었다.

'뭘 원하는지 알아내야 해..'

분명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 이렇게 온 것일 터.

뭔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최소한의 교섭이 가능할 수도 있다.

'설마.. 내 몸을 노리는 건 아니겠지..?'

신경이 차갑게 식는다.

샤워하고 오라고 했다.

오물이 묻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정말 그 이유뿐일까?

아이린은 아까 전의 일을 되새김질했다.

'그런 치욕을..'

남자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아이린에게 있어 남자란 저열한 되다 만 열등한 생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남자에게 머리를 쳐박았다.

굴욕감이 차오른다.

어떻게든 되갚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 미리 준비해두었던 새 옷을 입는다.

사장실로 나와 보니, 남자는 책상 위에 발을 얹고 거만한 자세로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애완견처럼 붙어 있는 레오 녀석.

헤실거리는 얼굴이 너무나 얄밉다.

"어, 다 씻었어?"

내가 그렇게 묻자, 아이린은 작게 '예에..' 하고 대답한다.

"이 서류 알아?"

나는 서류 한 장을 아이린에게 휙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허겁지겁 줍는 아이린.

종이 위에는,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성유물들의 목록이 적혀 있었고,

그 옆에는 수상한 숫자가 쓰여 있었다.

'뭐지? 이건..?'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이것 비슷한 문건을 본 기억은 없었다.

"아뇨, 모..모르겠습니다."

"그렇겠지. 내가.. 정확히는 세레니아와 클라리스가 만든 거니까."

"에..?"

"그거, 도난당한 국보를 팔아넘겼다는 가짜 서류거든."

"에에..?"

"이걸 여기서 발견했다고 하며 제출하는 순간. 너는 공화국의 공적 확정이 아닐까?"

"...어.."

이제야 이해가 되는 아이린.

방금 샤워를 했는데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이건 치밀하게 준비된 함정이었다.

저 서류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로 아이린을 옭아맬 준비는 이미 끝났을 것이다.

"왜.. 저에게 이런..?"

울먹울먹거리며 애원하는 아이린.

뒷골목 일이니 언젠간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가차없이 쳐박힐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오늘 아침 오픈할 때만 하더라도 이런 날이 될 줄은..

"다른 건 아니고,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무엇이든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는 거라면.."

이젠 교섭할 생각도 버리고 납작 엎드리는 아이린이었다.

"그.. '영원의 도시' 의 뒷골목을 장악한 누군가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말이야."

"아. 예."

"혹시 좀 알아?"

"뒷세계 뿐만 아니라 노예길드에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지닌 분이 한 분 계시다는 건 압니다."

"걔 이름이 뭐야?"

"그건 저도 잘.."

"안 되겠네. 깜빵이 좋다면야 어쩔 수 없지."

"아아앗! 잠깐만! 잠깐만욧! 진짜..! 저는 진짜 모릅니다! 다만 아실 것 같은 분을 알고는 있어요!"

"누군데?"

"가게 단골이신 넬로티아 후작님이십니다!"

"넬로티아 후작? 클라리스, 혹시 들어본 적 있어요?"

"남자 버릇이 나쁜 고위귀족이라고는 들은 적이 있네요."

"호오? 그래요? 근데 가게 단골이라고?"

"넷! 저하고도 아주 친하고요, 그, 접대부로 위장해서 은근슬쩍 물어보시면 알아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냥 제 휘하의 애들을 써서 알아내겠습.."

"됐고, 가자."

"..네?"

"가자고."

* * *

아이린은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대체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

이곳은 어디인가.

바로 넬로티아 후작 저택이었다.

가게에서 끌려 나와 곧바로 향한 것이다.

뭘? 어쩌려고?

설마 다 때려 부술 생각일까?

정말 그럴 생각이라면, 이건 정말이지 법도 정의도 없는 무법천지였다.

'제발 안에 없었으면..'

그러나 넬로티아 후작은 하필 집에 있었다.

현관은 아이린의 얼굴로 통과.

드넓은 정원을 지나 저택 정문을 열고 본관에 들어서자,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에이나 넬로티아 후작이 계단을 걸어 내려온다.

'엘리시움' 의 손님 답게, 작은 가슴에 작은 키인 후작은,

뽀얀 백금발을 트윈테일로 땋은 채였다.

"오! 아이린 사장? 어쩐 일이야? 이 분들은 또 누구시고?"

아무것도 모르고 반갑게 아이린을 맞이하는 후작.

"그게.. 저.."

"혹시 또 남자노예를 먼저 테스팅해 달라고 온 건가? 이 놈이야? 얼굴은 좀 그런데 몸은 괜찮네. 야, 임마. 바지나 좀 벗어봐라. 자지 크기 좀 한 번 보자."

"앗.. 아앗.."

멋도 모르고 마구 들이대는 후작.

겁도 없이 남자의 자지를 바지 위로 더듬는다.

"이야. 묵직하네. 짜식. 좀 기대가 되는 걸? 내가 임마, 이래뵈도 남자를 천 명을 넘게 따먹은 몸이야. 니놈 자지를 정확하게 등급을 매겨 줄 테니, 어서 한 번 내놔 봐."

나는 좀 어이가 없었다.

생긴 건 쪼꼬미인데.. 뭐? 천 명?

솔직히 입맛이 뚝 떨어지는 숫자였다.

"쪼꼬미 주제에 터무니없는 빗치년이네."

"앙..? 뭐라고? 빗치..?"

"뭐, 그래도 가끔은 이런 것도 좋겠지.. 안 그래도 금발 쪼꼬미가 당기던 참이기도 했고.."

"뭐? 아이린 사장? 이거 교육 안 끝났어? 돌았나 본데?"

나는 두말할 필요 없이, 넬로티아 후작의 드레스 앞섶을 그대로 찢어 버렸다.

"아..?"

쪼꼬미에겐 어울리지 않던 진주 목걸이가 뜯어져 땅에 굴러다니며, 그대로 빈약한 몸이 드러난다. 자그만 브라와 쪼꼬만 팬티. 나는 그것마저도 남김없이 찢어버렸다.

"털도 없네 참 나."

"겨.. 경비병! 경비벼엉!"

다급하게 경비병을 부르는 넬로티아 후작.

경비병 몇 명이 달려 오지만, 세레니아와 이실리아의 손에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아.."

졌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허무하게 쓰러져버린 경비병들.

넬로티아 후작의 얼굴에 공포가 떠오른다.

"뭐..! 무슨..! 대체 뭘..!"

"너, 내 자지가 보고 싶다고 했냐?"

나는 바지를 내렸다.

팬티도 내렸다.

묵직한 대물이 고개를 쳐든다.

"히익­! 정령마­! 짐승­!"

"뭐얌마? 이것 참, 빗치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 넌 특별히 교육이 필요할 것 같네."

"이게..! 감히 어설프게 생긴 나..남자 주제에.. 그딴 짐승 같은 걸로..!"

"뭐? 어설프게 생겨? 짐승? 확실히 교육이 필요하겠구나."

"놔! 이거 못 놔?"

아이린은 침실로 끌려가는 넬로티아 후작을 보며 명복을 빌었다.

어떤 일을 당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세레니아, 이실리아, 클라리스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침실 앞 작은 방에 자리를 잡았다.

"차 좀 끓여드릴까요?"

시간이 좀 걸리는 것에,

익숙하다는 듯 찻주전자를 가지고 오는 클라리스.

세레니아와 이실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마력으로 물을 끓인다.

"거기, 아이린이라고 하셨나..? 당신도?"

"아, 넵!"

차마 거절하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닌지라 좋다고 하는 아이린이었다.

느긋하게 차를 끓이는 클라리스.

침실 안에서, 거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죽인다! 이 자식! 감히..! 죽여버린.. 아읏..♡'

'진짜 버릇없는 꼬맹이네. 참교육이 필요하겠어.'

'누가 누굴 교육한다느으으으은...♡'

'뭐야. 이런 거 좋아하나? 건방지게 굴어봐야 결국 마조 쪼꼬미구만.'

'이런 것은 처으으음..♡'

'야. 천 명이나 남자 따먹었다며. 이런 것도 안 해봤어?'

뭔가 찰싹찰싹거리는, 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잘못해써..흑흑 잘못해써요오..♡'

'쪼꼬미 빗치면 이 정도는 즐길 줄 알아야지?'

'더 이상은 뮤리.. 무리에욧..♡'

차마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는 살벌한 대화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네 엘프였다.

클라리스는, 순서대로 차를 따르고,

조금 텀을 두었다가 아이린에게 한 잔을 따라주었다.

'뭔가 나만 좀 늦게 따라주는 거 아닌가..?'

아이린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클라리스가 말했다.

"한 잔 하시죠."

"음."

"알겠습니다."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세레니아와 이실리아.

침착하면서도 고귀한 기품이 뿜뿜 뿜어져 나온다.

"청량하고 맑은 맛.. 일품이군요."

"그렇네요. 찻잎도 좋지만.. 클라리스님의 솜씨도 상당하신 것 같네요."

담담하게 이어지는 극찬에, 아이린도 슬쩍 자기 앞에 놓인 차를 마셔 본다.

"으윽­!"

마치 잿물에 걸레를 태운 잿가루를 섞은 듯한 극한의 쓴맛.

머리가 쥐어짜일 정도의 쓴맛에, 두통마저 아릿하게 느껴진다.

대체 원재료가 뭔지 짐작도 안 갈 정도였다.

"어떤가요?"

방긋방긋 웃는 클라리스.

"마..마씨써효오..!"

극한의 인내력을 발휘하며,

일그러진 미소(전혀 미소같지 않지만 어쨌든)를 지어보이는 아이린.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혹시나 하고 다른 사람의 차를 보니,

찻물부터가 벌써 색이 다르다.

청량한 청색 vs 십년묵은 수도관에서 나온 것 같은 녹물 색.

이건 한마디로 고의적인 괴롭힘이라는 것이다.

'내.. 내가 뭘 잘못했었나?'

전에 클라리스의 가게에서 행패를 부렸던 것 깨끗하게 잊어버린 아이린.

사실 그 정도 갑질은 아이린에겐 일상이나 다름없었던 터라,

특별히 클라리스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에 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대체 왜..'

"다 드세요. 반드시."

빙긋빙긋 웃으며 살짝 협박하는 클라리스.

안 마시면 뭔가 큰일이 날 법한 분위기였다.

"네..네엣.."

어쩔 수 없이 대답하는 아이린.

정말 마시기 싫었지만, 반항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차라리 한번에 홀라당 마셔 버릴까?

그런 생각도 들지만, 그러면 왠지 한잔 더 따라 줄 것 같았다.

죽을 상으로, 시궁창물 같은 차를 홀짝거리는 아이린.

그런 아이린을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클라리스는 자리에 앉았다.

"후우. 그나저나 그 사건의 범인이 진작에 세레니아 대신관님이신 걸 알았었다면.. 차라리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은폐를 했을 텐데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신께서 명하신 터라."

"분명 저도 신들의 계획하신 것에 일부분이었기에 이런 일을 겪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누가 가지고 있는 지는 알게 되었으니.. 진짜 위험한 성유물도 몇 점 섞여 있었거든요."

"반드시 필요한 곳에 쓰일 겁니다."

"그런 걸 아시기에 집정관님께서 허락을 해 주신 것이겠죠. 저도 처음 들었을 때 엄청 놀랐는데, 집정관님은 얼마나 놀라셨을지 상상이 안 가네요. 그런데 용케 털어놓으실 생각을 하셨군요?"

"더 이상 문제가 커지면 곤란할 것 같았습니다."

"국가적인 프로젝트에 포함되는 것도 몇 점 있는걸로 아는데, 집정관님도 참 사도님을 얼마나 믿으시는 건지, 하긴.. 이실리아 님도 붙여 주셨고요."

듣는 아이린의 손이 부들거린다.

설마 이거 자신에게 씌우려고 했던 범죄 이야기 아닌가?

범죄를 직접 저지를 자가, 국가기관과 공모해서 자신에게 덤태기를 씌우려 했던 것.

저 세레니아라는 여자는 무슨 교단 소속인 것 같고.

이실리아라는 무시무시한 엘프는 높은 직위의 군인처럼 보였다.

관청, 군대, 교단이 합작하면 엘프하나 조지는 건 일도 아니다.

정말이지 소름이 끼쳤다.

'앗! 악! 나쥬것♡ 아악♡ 앙♡ 앗♡ 아읏♡'

비명이 교성으로 바뀌어가는 소리에, 문득 클라리스가 말했다.

"이제 슬슬 끝나가는 걸까요?"

세레니아는 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대답했다.

"아뇨, 이제 시작일 겁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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