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88.
* * *
정문 앞 보도를 빡빡 걸레질을 하고, 휴게실로 돌아온 레오.
거울을 보며, 미소짓는 연습을 다시 해 본다.
방긋방긋 웃는 거울 속의 미소년.
"하하. 시발.."
요새는 욕 할 기운마저 없어져 가는 게, 진짜 위험한 거 아닌가 싶었다.
"그때 그 놈한테 걸었어야 했는데.."
그때 그 마지막 정령마 레이스, 아직도 가슴 속 깊이 후회가 남는다.
"젠장.."
'엘리시움' 에 팔려온 후, 레오는 처음에는 좋아했다.
손님들은 대게 마르고 가슴도 작은, 엘프 기준으로 아름다운 여성들.
그런 여성들과 하하호호 놀며,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좀 비위 상하는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예쁘면 어느 정도 용서할 수 있는 레오였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하호호 놀아?
노는 건 동등한 상대와 하는 일이다.
그녀들에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들에게,
레오를 비롯한 엘리시움의 종업원은 그저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첫날, 신은 구두를 바로 벗어 거기에 술을 따라 마시라고 한 건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위를 하라는 것은, 차라리 쉬운 명령이었다.
남자를 멸시하다 못해, 존재 자체를 경멸하는 것 같은 행위들.
자지를 그저 장난감으로 보는 것만 같은 모멸스러운 행위들.
모든 것은 그녀들의 뜻대로.
이곳의 남자들은 정신을 범해지고, 육체도 범해질 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가, 이 생태계에선 평범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진다.
엘리시움은, 여자에겐 천국일지 몰라도 남자에겐 지옥이었다.
'이대로라면 미쳐버릴 거야, 아니, 이미 미쳤는지도 몰라..'
가장 끔찍한 것은, 여기에 서서히 익숙해져 가는 자신이었다.
여성을 마음 속 깊이 혐오하게 되었으면서도,
이제 여자만 보면 반사적으로 미소가 얼굴에 지어진다.
생각을 하고 하는 짓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여성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생겨버린 것.
던져주는 몇 푼의 금화에, 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게 되어버린 것.
여성을 혐오하면서도, 여성의 우월함을 인정하게 되어버리는 것.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익숙해져 간다.
이 모든 것이, 당연하고도 평범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망가져 가는 것도 모르고 망가져 버린다.
레오는,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아까 바운서 눈나가 주물렀던 엉덩이를 탁탁 털었다.
'망할 년.. 내 편 들어 주는 척은.. 따먹고 싶어서 환장했으면서.. 그런 게 더 기분 더러워..!'
'엘리시움' 의 바운서나 가드들은, 남종업원을 따먹지 못해 눈이 돌아간 년들 천지였다.
그저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 그들이라고 해도,
그들은 매우 비싼 장난감이었다.
공짜로 한 번 가지고 놀아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특히 레오처럼, 바닥에서 뒹구는 장난감이라면 더더욱.
수법은 짠 듯 똑같았다.
이 지옥에서 구해주겠다면서, 달콤한 말로 다가온다.
물론 그것은 전부 말 뿐이었다.
두어 번 속고 난 후, 레오는 자기가 멍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여자 따윈 믿지 않는 레오.
지금은 이를 악물고, 몸값을 모으는 중이었다.
'돈을 좀 더 모아서.. 큰 레이스 몇 방만 연속으로 터트리면..! 바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어!'
누군가 그랬던가.
지옥으로 향하는 길은 희망으로 포장되어 있다고.
이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레오였다.
* * *
"여긴가?"
서부물에서 결투를 하러 나타난 황야의 무법자처럼,
우리는 '영원의 도시' 에서 가장 화려한 유흥가에 나타났다.
성스러운 지팡이를 든 세레니아 페이엘 남성교단 대신관.
'공화국의 검' 이실리아.
담 작은 보안국 요원 클라리스.
그리고 나.
장비와 여포에 되다 만 간손미가 끼어있는 느낌이지만,
내가 제갈공명 급이니 문제는 없다.
사실 내가 제갈공명 급이 아니어도 문제가 없다.
그냥 순수한 무력만으로도 다 썰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가자 세레니아. 가죠 이실리아."
"아, 제게도 반말을 쓰셔도 상관 없습니다. 사도님."
"음, 내가 좀 불편해요. 이실리아는 뭔가 분위기가 있어서.."
"그렇다면 편하신 대로.. 그런데 저기, 세레니아 대신관님..?"
"예?"
"그 지팡이는 혹시..?"
"..레플리카, 그러니까 모조품 입니다."
"음. 알겠습니다. 다만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사람들 보는 곳에선 안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뭔가 살짝 등짝이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저게 뭔데요?"
"도난당한 국보.. 와 똑같이 생긴 모조품이라고 하시는군요."
"..국보..?"
"다만 그런 것 치고는 신성력이 따끔거릴 정도로 넘쳐흐릅니다만.. 하지만 제 임무는 사도님을 지키는 것 뿐이니, 그 외의 것은 달리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고마워요."
이실리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니아 이 녀석 국보로 불량배를 패고 다녔던 거냐.
왠지 템빨이 좀 나 보인다 했어..
살짝 세레니아를 째려보니, 조금 민망했는지 작게 중얼거린다.
"저.. 다른 걸로 바꿀까요?"
"딴 것도 국보 아냐?"
"맞습니다."
"그냥 써.. 신의 뜻이라고 생각할게.."
"네. 이해해 주시는군요..!"
이해가 아니라 포기한 것이지만 굳이 설명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튼 뚜벅뚜벅 '엘리시움' 의 입구로 향하는 우리.
오늘의 목적은 뒷골목에서 나름 알아준다는 '아이린' 을 조져,
정보를 쪽쪽 빨아먹는 것이었다.
하도 겪은 게 많아 거의 까먹고 있었지만,
안 그래도 기회가 되면 한 번 참교육을 시켜주고 싶던 참이었다.
클라리스도 쌓인 게 좀 있었고.
입구에 다가서자, 문신에 피어싱을 한 섹시한 쎈 눈나들이 우릴 가로막는다.
"오픈은 아직이야. 조금만 기다려. 그리고 뒤의 가슴 큰 언니. 언니는 못 들어와. 우리 가게는 손님을 좀 가려서 받거든."
클라리스의 이마에 살짝 힘줄이 돋는다.
앞으로 나서서 입을 터는 클라리스.
"손님으로 온 건 아니고.. 저는 사장님이랑 아는 사이인데, 잠시 전해드릴 이야기가 있어서요. 안에 아이린 사장님 계실까요?"
"뭐? 언니야하고 사장님하고 아는 사이야? 흠, 별로 그럴 것 같지 않게 보이는데.. 아무튼 잠깐 기다려. 안에 들어가서 언니를 아는게 맞는지 사장님께 여쭤보고 올 테니까."
"안에 있나 보네요."
"..? 안에 계시지 그럼 밖에 계셔?"
나는 나지막히 물어보았다.
"누가 할래요? 세레니아? 이실리아?"
이실리아가 한 발짜국 앞으로 나섰다.
"신입인 제가 하도록 하죠."
"뭐야, 언냐들, 자꾸 헛소리 하지 말고 볼일 없으면 꺼져."
이실리아는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쎈 언니 둘.
나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진다.
"뭘 한 거에요?"
"기절시킨 겁니다."
"아니 그건 보면 아는데.. 대단하네요. 거의 아무 소리도 안 났는데."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좀 요란하게 갈 수 있나요?"
이실리아는 엷게 미소지었다.
"원하시는 대로."
* * *
아이린은 가게 가장 안쪽에 있는 사장실에서 서류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유흥업소라고 가볍게 볼 지도 모르지만, 경영은 장난이 아니었다.
술은 물론이거니와, 곁들이는 안주 작은 것 하나마저도 특급품으로 관리해야만,
이 업소를 찾는 까탈스러운 손님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5 세계수에서 온 과일은 이제 슬슬 물이 갔지.. 생선은 괜찮았고.. 술은.. 젠장, 이 와이너리는 또 제조중지야? 정말이지 못해먹겠네.."
잡다한 것 하나까지 일일이 챙기는 아이린.
일은 골치 아팠지만, 치솟는 매상을 보면 힘이 솟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숫자에 집중해 계산을 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콰당! 하는 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누가 술통을 떨어트렸나?"
잠깐 주의가 흐트러지긴 했지만, 아이린은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상한 소리는 멈추지 않았으니.
"쾅! 콰광! 콰광쾅과오! 쿠콰광!"
뭐 폭발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이제는 숫제 비명소리 비슷한 것까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아이 씨,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짜증을 내며 팬대에 팬을 꽂은 아이린,
의자에서 일어나, 사장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
"으아아아악!"
귀청을 찢는 비명소리와 함께, 뭐가 처박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야! 무슨 일이야?"
소리를 치며 홀로 달려나가는 아이린.
대체 무슨 난리인가 싶다.
"사장님..! 엨"
접대용 테이블이 늘어서 있는 홀.
커다란 홀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린 옆 바닥에 바운서 하나가 날아와 쳐박힌다.
깜짝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서니,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네."
잊을 수 없는 그 얼굴.
그 남자였다.
군인과 성직자로 보이는 여자를 옆에 끼고,
엉망이 된 홀에 당당하게 서 있는 그 남자.
"너..! 이게 다 네가 저지른 짓이냐?"
"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돼?"
내가 이실리아에게 눈짓을 하자, 이실리아는 맨 손에 마력을 담아 12인용 파티테이블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저쪽에 창문이 하나 있으면 시원할 것 같네요."
내가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키자, 족히 1톤은 되어보이는 묵직한 원목 파티테이블이 그쪽으로 날아간다.
"펑!"
그야말로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아작이 난 테이블.
벽에는 조잡하지만 작은 창문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창문이 좀 작은 것 같은데, 세레니아?"
"넵."
지팡이를 들고, 집중하는 세레니아.
벽을 향해, 성스러운 금빛 찬란한 광선이 뿜어져 나간다.
바사삭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벽에 그대로 커다란 구멍이 난다.
"이제 바람이 좀 통하는 것 같네. 그, 아이린? 이라고 했던가? 혹시 더 설명이 필요해?"
아무리 뒷골목의 폭력과 잔혹함에 익숙해져 있는 아이린이었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어디서 저런 생체전략병기급 괴수들을 데려온 것일까.
정신이 아득해졌다.
"저.. 제가 혹시 뭘 잘못했을까요..?"
"음. 아주 좋아. 상황 파악이 되는 것 같네."
"무, 무엇을 원하시는지 말씀만 하시면.."
"일단.. 꿇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는 나.
아이린의 얼굴에 굴욕감이 차오른다.
남자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다니.
아이린에게 남자는 돈 벌어다 주는 저열한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잘 안 들리나?"
내가 이실리아에게 손가락을 까닥하자, 이실리아는 아이린에게 살기를 뿜어냈다.
옆에 선 나도 소름이 찌릿찌릿 돋을 정도인데, 직접 받는 아이린은 어떨까.
"아..아앗..!"
거의 사색이 다 되어버리는 아이린.
다리가 부들거리는게, 쓰러질 것만 같다.
하지만 쓰러지지는 않았고..
"아이고 이런.. 쯧."
나는 혀를 찼다.
고급진 검은색 대리석 바닥에,
아이린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린 노란 물이 흐른다.
쿱쿱한 냄새가 올라오는 걸로 봐서 다른 거라고 변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제는 아마 자존심이고 뭐고 문제가 되는 상황이 아닐 것이다.
오줌에 젖은 바닥에 바로 바싹 업드리는 아이린.
오너의 처참한 보습에, 업소의 언니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러면,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내가 조아린 아이린의 머리 앞에 서서 천천히 질문을 하려는데..
"형님! 형니이이이임!"
갑자기 소리를 치며 난리를 피우는 놈이 있었으니.
예전에 잡혔을 때 만났던 그 조금 모자란, 곱상하게 생긴 남자애였다.
미안한데 남자는 진짜 관심이 없어서.. 아이린은 그나마 이름은 기억이 나는데,
이 녀석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튀김 지 혼자 다 먹어치운 건 기억이 난다.
'쟤가.. 이름이 뭐였더라? 뭔가 사자같은 이름이었는데.'
감격해서 마구 이쪽으로 달려오는 녀석,
이실리아가 경고의 의미로 살짝 살기를 뿜어내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린다.
"형님..! 저를 구하러 오신 거죠..? 그렇죠?"
마치 맹수굴에서 구원자를 발견한 듯한 얼굴.
지금 보기 전까진 존재조차도 거의 잊고 있었지만,
그 간절하고도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니, 도저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어, 음. 뭐 겸사겸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