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87.
* * *
"그냥? 그냥 무엇인가? 설마 집정관인 본인을 임신시키고 먹버하는 그런 존재로 본 것은 아닐 것이라 믿노라..?"
순간 움찔한 나.
아니 그렇게 노골적인 표현을 쓰면 좀 그렇지..
"너.. 쪼끄만 게 대체 먹버라는 단어는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아무튼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본인은 최선을 다해 예비 정실자리를 노릴 것이니."
"예비 정실? 흐음.. 별로 가능성 없어 보이는데..?"
"흥! 나중에 본인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헤롱거리지나 말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니라."
물론 우리 둘 다 진지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키득거리며 티키타카를 하는 것이었는데,
의외로 셀레시아와 나는 은근히 죽이 잘 맞았다.
"아무튼, 고마워, 경호원이 한 명 있으면 든든하지."
우리 교단의 대사제님도 있긴 하지만, 어째 영 믿음직스럽지가 않아서..
"음. 정말로 믿을 만한 엘프인 것이다. 지금 소개시켜 주겠느니라."
셀레시아가 손짓을 하자, 주름 하나 없는 푸른 군인 예복 위에 은제 가슴 갑옷까지 풀로 갖춰 입은, 냉철해 보이는 엘프 여기사 한 명이 걸어들어왔다.
"이실리아. 집정관님의 명을 받듭니다."
"이 엘프는 집정관 직속인 '공화국의 검' 중 한 명인 이실리아인 것이다. 그대를 든든히 지켜줄 방패가 될 것이니라."
"검인데 방패..? 뭐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요. 이실리아."
"최고의 방패는 적이 공격하기 전에 베어버리는 검이라 생각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성의 신' 의 사도님."
고개를 꾸벅 숙이는 이실리아.
날카로운 눈매, 깔끔하게 틀어올린 백금발 머리카락.
그 모습에선, 한 자루 검과 같은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엘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난 무력보다는 가슴 사이즈가 더 궁금했지만..
흉갑 때문에 잘은 모르겠는데,
크진 않았다.
하지만 작지도 않은 것 같다.
일반적인 엘프보다는 약간 큰 정도.
키는 일반적인 엘프들보다도 좀 크다.
옆의 셀레시아와 비교하면 엄청 크고.
몸은 날렵하고 단단한 느낌이다.
엄청난 수련을 쌓지 않았을까.
"내 미리 말했던 대로, 이실리아, 이제부터 그대의 임무는 여기 미래의 나의 낭군이 되실 분이 그 사명을 다 완성하실 때까지 지켜주는 것이니라. 내 낭군이 되실 뿐만 아니라, 4대공 모두의 지아비가 되셔야 하는 분이니, 그 옥체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더 강조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믿겠느니라."
"네. 사도님을 전신전령을 다해 지키겠습니다."
"음. 이실리아와 함께 하면 무엇이든 일이 좀 더 쉬워질 거라 생각하느니라. 본인은 부디 그대가 빠른 시간 안에 그대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해소하길 기원하겠노라."
"알겠어. 고마워."
"음. 부디.. 부디 무탈하기를 기도하노라. 그리고 잠깐 귀를 좀.."
무언가 속삭이려고 하는 셀레니아. 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는 줄 알고, 고개를 살짝 숙여 귀를 가져다 댔다.
"뭐야..?"
하지만 이어진 것은 예상 외의 것이었으니.
"쪽..♡"
귓속말 대신 내 뺨에 작은 입술로 뽀뽀를 하는 것이었다.
"에..?"
내가 조금 어이없으면서도 흐뭇하게 셀레시아를 보니, 셀레시아는 엄청 부끄부끄 하면서도 또 내가 화가 났을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이.. 이 정도는 작별하기 전에 작은 애교로 봐 주어야 하는 것이니라.."
"걱정 마. 화 안 났으니까. 너 쫌 귀엽다."
"그.. 그러한가?"
"음. 처음에는 별로였는데. 하는 짓을 보니까 갈수록 마음에 드네. 말도 잘 통하는 것 같고. 갈수록 따먹고 싶어지는 걸."
얼굴이 빨개져서 고마워하는 셀레시아.
"따먹고 싶다고 해주어서 고..고맙느니라."
"그럼 이만, 더 할 말 없지?"
"부디 몸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대가 다치기라도 하면 공화국의 손실이니라..!"
"그건 여기.. 이실리아가 잘 해줄 거라 믿을게."
"음. 이실리아를 믿겠노라."
셀레시아가 이실리아의 팔을 톡톡 치자, 이실리아는 절도있게 고개를 숙였다.
"집정관님의 믿음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부탁하네.."
셀레시아는 이실리아의 손을 붙잡고, 잠시 이마를 대고 기도를 올렸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빛가루가, 이실리아의 몸에 흩뿌려진다.
"작은 축복이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 것이니라."
"감사합니다. 집정관님."
"그러면.. 부디 몸 무사히 일이 잘 끝나기를..!"
마지막으로 신신당부하는 셀레시아.
떨어지기 싫어 미적거리는 셀레시아를 겨우 떼어놓고, 우리는 집정관 알현을 마쳤다.
문 밖으로 걸어 나가는 나를, 이실리아가 조용히 따라온다.
'발걸음 소리가 안 나네.'
갑옷을 입고 있는데도, 마치 유령처럼 이실리아는 아무런 기척을 내지 않았다.
이거 엄청 고수 아냐?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이실리아에게 질문했다.
"이실리아, 혹시 엄청 쎈 거 아니에요? 어째 분위기가 남다른데?"
"사도님을 지켜드릴 수 있는 정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겸손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답변이었다.
근데 대체 나 누구랑 싸우게 되는 거냐.
이실리아는 아무리 봐도 특급인데,
이런 애를 호위로 붙여준다는 건..
"아아.. 머리가.."
잠깐 멈칫하는 사이,
회랑 안쪽에서 방금 전에야 정신을 되찾은 것 같은 클라리스가,
머리를 짚고 휘청거리며 골목을 돌아 걸어오고 있었다.
"아, 클라리스. 이제 좀 괜찮은가요?"
내가 가까이 다가온 클라리스에게 천연덕스럽게 말을 건내자, 그녀는 순간 발끈했다.
"사, 사도님! 대체 아까는 집정관님께 무슨 무례를..! 으으.."
아까 '빈약한 몸' 어쩌고 했던 게 생각나는지 다시 휘청거리는 클라리스.
이실리아가 재빨리 옆으로 다가가 클라리스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잠깐 아찔해서.. 후우.. 누구신지 모르지만 감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어우 깜짝이야. 왜 그래요 클라리스?"
"이.. 이 분은.. '공화국의 검' 의 필두이신 이실리아 님 아니신가요?"
"아, 얼핏 듣기로 뭐 그런 것 같았는데, 맞나요? 이실리아?"
"네. 맞습니다. 다만 '공화국의 검' 의 필두라기에는 조금 과하고, 그 중 실력이 좋은 편에는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네요."
"이 분께서 여긴 대체 왜?"
"날 경호하라고 셀레시아가 붙여줬어요."
"아.."
숨이 가쁜지 몇 번 몰아쉬더니, 클라리스는 천천히 침착함을 되찾았다.
"집정관님께 인정을 받으신 모양이군요.."
"인정받고 뭐고, 날 엄청 좋아하던데요."
"다행이네요. 후우.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걱정은 앞으로 해야 될 것 같네요."
"네? 혹시 또 무슨 짓을 저지르신 건가요?"
"아니 날 뭘로 보고.. 그런 게 아니고, 셀레시아가 전에 이야기했던 그 흑막과 결판을 지으라고 하더라고요."
"집정관님께서요?"
"네. 직접 나설 수는 없다고.. 클라리스를 비롯해 다른 엘프의 도움을 받아 흑막을 추적하라고 하던데, 혹시 떠오르는 것 뭐 없나요?"
"글쎄요.. 직접 나서시지 않으시고 그냥 제 도움을 받으라는 건 보안국이 아니라 순수한 제 역량에서만 도움을 드리라는 뜻일 텐데.. 강등된 이후에는 고급 정보가 그렇게 많이 들어오는 편은 아니라.."
"그러면 정보를 아는 누군가를 족쳐야겠군요. 지금은.. 뭐 근접전에서의 무력 만큼은 충분한 것 같으니까요. 어디 만만한 아는 엘프 없나요? 클라리스?"
"정보를 아는 누군가라면 음.. 지금 상황에서 건드려도 될 만한 만만한 인물이라면, 한 명 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누구죠?"
"사도님도 아시는 인물입니다."
"나도 안다고요? 누구지..?"
* * *
'영원의 도시' 의 밤은 화려하다.
남녀역전의 세계, 수컷을 탐하는 암컷들의 욕망이 뒷골목에선 흐트러지게 피어난다.
본능적인 욕망을 채워줄 수많은 업소들.
그 중에서는 손님에게 바가지나 씌우고 등이나 처먹는 '없소' 들도 있었지만,
최상의 남자와 최상의 서비스를, 그에 걸맞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제공하는 '업소' 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다른 업소하고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고급을 지향하는 업소가 있었으니..
간간히 일반인 남성을 고용하기도 하는 다른 업소들과는 다르게,
비싸더라도 100% 남성노예를 구매해 철저하게 훈련시켜 접대부로 씀으로서,
음습한 엘프여성의 뒤틀린 욕망을 한계까지 채워주는 그 곳.
그 곳의 이름은, 바로'엘리시움'이었다.
축복받은 그녀들만이 입장할 수 있다는 망각의 이상향.
세속의 번잡한 도덕을 벗어던지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낙원.
업소의 정점이자 완성.
모든 여성이 꿈꾸는 천국.
그것이 '엘리시움' 이 지향하는 바였다.
그리고 그 곳의 경영자, 아이린은 흐뭇한 마음으로 '엘리시움' 의 간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흠."
시골에서 상경한지 어언 삼백 년,
자신만의 가게를 가지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더러운 뒷골목에서 구르며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
엎어지고 넘어지며 마침내 빚어내고야 만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 아이린의 눈앞에 있었다.
"내 가게지만 정말.. 끝내준다니까. 좋아. 그러면 오늘도 엄청 벌어 볼까."
기분 좋게 입구로 걸어 들어가는 아이린,
그런데 그 입구에서, 끼익 문을 열고, 바지 위에 헐렁한 셔츠 한 장만 걸친 조그마한 남성 엘프가 양동이와 걸레를 들고 나타났다.
"하아음.."
피곤한 것인지, 하품을 하며 눈물을 찔끔 흘리는 남성 엘프.
그렇다.
그 소년은, 현재 엘리시움의 잡무 담당 겸 테이블 헬퍼인 레오였다.
"야."
"에헷? 앗! 사, 사장님!"
"어디서 재수 없게 가게 대문에서 대놓고 하품을 찍찍 하고 난리야?"
"아.. 죄.. 죄송합니다."
"쯧! 몸값도 못 하는 게..! 누가 보기 전에 가게 앞 빡빡 닦고 빨리 들어가! 알겠어?"
"네, 넷!"
"헬퍼여도 가게 격이라는게 있는데 꼬라지하고는 진짜.. 다음에 또 그딴 꼴로 다니는 게 보이면 광산에 팔아버릴 줄 알아!"
"죄, 죄송합니닷! 어제 손님들께서 술을 너무 주셔서.."
"니 직업이 술을 마시는 거 아냣! 고작 세 잔 마시고 뻗어버린 주제에 어디서 그딴 변명을 늘어놓고 앉아있어! 쓸모없는 자식 같으니! 저딴 걸 내가 6만 골드 넘게 주고 샀다는게 믿기지가 않는다니까..! 으드득..! 셀렌디네 그 년은 어디로 튀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젠장!"
"죄, 죄송합니다 사장님! 부디 용서를..! 다 제 잘못이에요..!"
"알면 잘 해! 퉷!"
아이린의 끈적한 침이, 레오의 발치에 툭 떨어진다.
"바닥이나 빡빡 닦고 들어와! 씁, 오픈부터 재수가 없으려니까.."
가게 문을 뻥 차고 들어가버리는 아이린.
레오는 이를 앙다물고 대걸레로 아이린이 뱉은 침을 벅벅 닦아냈다.
"으득..!"
이를 하도 악물어 눈가에 눈물이 아른거렸지만, 꾹 참았다.
울면 더 괴롭힐 것이다.
"어이. 괜찮냐?"
슬쩍 나와서 그렇게 물어보는 것은, 바운서인 여성 엘프였다.
몸에는 문신, 귀에는 피어싱을 한, 좀 많이 쎄 보이는 그녀는, 레오의 어깨를 질척하게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또 사장님한테 까였구나? 쯧쯧. 사장님께서 왜 너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신지 모르겠네.."
이상한 정도로 친절하게 구는 바운서. 레오는 눈물을 재빨리 훔치고 방긋 억지로 웃었다.
"다 제가 몸값을 못 하기 때문이에요. 사장님께서 화가 나실 만도 하죠."
"음. 뭐.. 그, 전에도 내가 말했었지만, 내가 사장님과 너 사이에 갈등을 좀 풀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는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바운서 눈나는 레오의 엉덩이를 주물거렸다.
"읏..!"
"응? 너도 알지? 내가 사장님하고 친한 거. 다 너 하기에 달린 거라고? 조금만 나를 즐겁게 해 주면, 다 잘 풀릴 수 있어.. 어때, 응? 어떻게 생각해?"
"으읏.. 아.. 아니에요. 제가 열심히 노력해서 오해를 풀게요. 제안은 감사합니다."
바운서는 쪼물락거리던 손으로 엉덩이를 찰싹 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뭐 그래 보던지.. 다만 언제 내가 주는 기회가 사라질 지 모르니까. 빨리 결단을 내리는 게 좋을 거라고?"
"네, 네엣..!"
"알았으면 됐어. 빨리 청소하고 들어가 봐. 꾸미고 가게에 나와야지."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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